藝河 옆지기 淸雲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했고 영천군과 자동선의 사랑 얘기도 송도를 넘어 한양에까지 봄바람에 꽃향기 날아들 듯 장악원에도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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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 유람 때 등산객들 눈에 띄어 퍼져나갔을 가능성이 크고 송도(개성)는 중국으로 사신들이 오고가는 길목이어서 항상 왕래하는 사람들이 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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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없는 말이 어느새 영천군의 본가에 영천군과 자동선의 연리지(連理枝) 얘기가 소문이 아닌 사실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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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방(안국동) 영천군댁에선 자동선이 올 것을 대비하여 사랑채 옆에 방을 더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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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의 이름은 이곳 한양에서도 익히 알려진 이름이고 그 자동선이 영천군의 부실(副室)이 되어 온다는 소식이 퍼지자 묘한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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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장악원 분위기에 새로운 바람이 일어날 조짐이며 한양에서 가장 확실하고 큰 손님을 잃지는 않을까 조심스런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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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왕실 후손들은 할 일이 없으며 신분이 높아 그들이 할 일이 사회에는 없기 때문이고 요즘말로 백수며 그러다보니 자칫 주색(酒色)에 빠지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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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뻗은 뿔 때문에 가시덤불에 걸려 사자먹이가 된 사슴 우화처럼 때로는 빼어난 재능 때문에 불행해 지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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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례는 왕족과 서열일 것이며 전자는 너무 높은 신분 때문이고 후자는 어머니의 낮은 신분으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 못하는 사례며 조선시대 사회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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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셋째 안평대군이 양가집 재모(才貌)가 뛰어난 소녀 10명을 뽑아 시문(詩文)을 5~6년 가르치며 세월을 보낸 것도 그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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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먹고 살기 어려워 동분서주 하는데 할 일이 없어 멀뚱히 있는 것도 쉽지 않은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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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들은 예술이나 종교 등에 심취하지 않으면 자칫 주색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영천군도 그 부류에 속하는 조선 최고의 신분인 왕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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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재주가 뛰어났으나 신분의 제약으로 행동에 자유롭지 못했음을 여자에 관심이 갔으며 젊음의 격정을 시(詩)와 미(美)로 카타르시스 시켰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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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은 시, 서, 화에 능하여 3절(三絶)로 불리었고 그의 글씨는 중국에까지 명성이 높아 황제들이 사신을 통해 얻어가려고 청까지 넣었다는 얘기까지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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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글씨는 '몽유도원도 발문'이 대표적 작품이고 그는 또한 예술에 뛰어나 제자격인 10인의 궁희(宮姬)들에게 열정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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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비단으로 달을 덮은 듯/

푸른 띠로 길게 산을 두르듯/

미풍에 점점 흩어지더니/

오히려 작은 연못을 적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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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인 궁녀 중 옥녀(玉女)의 '무제'이고 어느 특정인을 연모하는 듯한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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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색을 갖춘 젊은 여인 10명이 한 곳에 모여 시를 쓰고 뛰어난 예술 감수성이 탁월한 왕족 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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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공간에서 생활을 했다면 그것은 예삿일이 아니고 상사별곡(相思別曲)의 천일야화도 탄생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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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양가집 딸들이 옥골선풍 헌헌장부인 안평대군과 시문학을 공부했다면 문학사에 경천동지 할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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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남녀칠세부동석 엄격한 신분사회에 그런 일이 있었고 그것이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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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영천군과 사가정이 송도에 내려올 때는 두 사람이었는데 한양으로 올라갈 때는 세필의 나귀에 이삿짐을 실은 부담마(負擔馬) 두 필까지 나귀만도 다섯 필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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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이 천수원을 통과하게 되자 사가정이 “영천군 나으리, 여기가 천수원이예요! 돌아오는 길에 청교월(靑郊月)에 들린다는 약속은 어쩌시렵니까?” 라고 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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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은 고개를 휙 돌리며 “에이 사람도 짓궂기도 하네...”라며 나귀엉덩이에 채찍질을 하였고 사가정은 크게 웃으며 다음과 같은 즉흥시를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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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의 버들은 가슴 아프게 푸른데/ 자하동의 안개는 마냥 흡족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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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은 아무 말도 없이 행복에 겨운 미소만 짓고 있으며 한때는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명기였으나 이젠 한 사내의 여자로 충실할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듯 하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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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은 영천군의 부실이 되어 현모양처로 변신하여 아들딸 낳고 행복한 삶을 영위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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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중국사신 장녕과 김식을 통해 자동선에 대한 명성을 들은 사신들은 조선의 송도에 왔다가 그녀를 품으려는 꿈에 부풀었다 허탕을 쳤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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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동선을 중국의 4대 미녀인 양귀비, 서시, 초선, 왕소군의 장점만 닮은 세기의 미녀 팬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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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예의지국의 빼어난 명기에 그들은 넋을 잃었으나 자동선은 왕실의 여자가 되었으니 옛명성을 되새김질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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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동갑내기 사가정은 심심하면 불러서 갔던 영천군이 이젠 오매불망 했었던 자동선을 품에 넣었으니 불려가지 않고 사가독서에 열중할 것을 다짐하며 시 한 수를 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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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난 명승지는 말을 자주 멈추던 곳/ 담 무너진 나무숲엔 두견새만 우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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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이들 마주치면 저마다 묻기를/ 조선은 어느 해에 한양으로 옮겨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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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다운 세월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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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는 고려의 도읍지이나 지금은 조선시대며 권력이 휩쓸고 간 옛도읍지의 산천은 옛날 그대로이나 민심은 옛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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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정은 한양에 왔어도 빼어난 송도의 풍광이 눈앞에 펼쳐져 끝없는 시상(詩想)에 빠져 들었고 그는 문득 안평대군의 10인 궁희 중 금연(金蓮)이 쓴 '무제' 시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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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아래 차가운 안개 쌓여/

궁궐나무가로 비껴 날아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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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니 저절로 움직여/

기우는 달 푸른 하늘에 가득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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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갑자기 이 시를 떠올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본인의 심정이 허허로웠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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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은 자동선을 데리고 왔는데 자신은 사랑하는 제일청을 송도에 두고 올 수밖에 없는 신세를 잠시나마 떠올렸을 것이 아닐까? 역시 신분의 차이를 생각했을 것이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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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애독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풍류야화 자동선(제24화)

예성강 저녁노을에 사가정은 넋을 잃었고 조선팔도에 그의 발길이 안 닿은 곳이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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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요며칠 사이에 송도 매력에 빠졌고 백악(白岳)에 걸려있는 구름과 북산에 서리는 연기와 비는 한 폭의 산수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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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장단의 절벽과 박연폭포는 웅장함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 바로 그 자체며 사가정은 제일청의 곁에 그냥 이곳에 주저앉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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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내 깊숙한데 버들가지 날리고/ 가랑비 맑게 개니 풀은 연기처럼 피어오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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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가든 머무르든 상관하지 않고/ 술동이 하나 놓고 아름다운 대자연과 마주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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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의 '청교 靑郊의 손님배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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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가정이 팔도유람을 할 때는 빛과 그림자 같이 술이 따랐고 높은 벼슬을 했음에도 형식과 명분에 얽매이지 않는 영혼의 소유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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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해학집 '태평한화골계집'엔 아래와 같은 익살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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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이라도 삼해주(三亥酒)가 없다면 가지 않겠다.’라고 쓰여 있으며 그가 얼마나 술을 사랑하나를 적나라하게 포효하는지 딱 맞는 시(詩)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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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정은 허탈하고 영천군과 자동선의 연리지 작전이 마무리 되어서며 사가정은 제일청의 집에서 밤낮없이 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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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습을 보다 못한 제일청이 “사가정 나으리, 자동선의 반살미 상을 차릴 준비를 해야겠어요. 장인이 되가지고 술만 퍼마시면 어떻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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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 소리에 사가정이 손에 들렸던 술잔을 탕하고 술상에 놓으며 “장인이란 소리가 무슨 소리요?”라고 따져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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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으리와 제가 만리장성을 쌓았으니 부부요! 내가 자동선의 어머니이니 사가정 나으리가 영천군 나으리의 장인이지 뭐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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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청의 표정은 웃음기도 없는 단호한 말투였고 사가정이 처음보는 그녀의 단호한 말투와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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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정도 제일청이 영천군과 자동선이 오후에 받을 반살미 상차리는데 오며가며 심부름으로 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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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의 가을 날씨는 한양과 다르고 한낮엔 따가운 햇살이 아침저녁으론 제법 싸늘하며 오후가 조금 지나자 영천군과 자동선이 손을 맞잡고 제일청의 집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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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시게. 영천군 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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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은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하고 며칠 전까지도 퇴기로 아랫것 취급을 했는데 자동선과 약식결혼식을 치르고 놀러가는 기분으로 왔는데 사위소리를 들으니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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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청과 자동선은 수양모녀 관계라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며 반살미 상은 산해진미로 눈을 의심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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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런 영광스런 날이 언제고 오리라 믿고 산해진미를 항상 준비해놓고 있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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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딸 자동선이 어디 보통 여자인가 중국 사신들까지 목을 매고 수청을 간청했으나 번번이 뛰어난 기지와 지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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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체면을 지켜주면서 정조를 지켜 오늘날 영천군 나으리를 지아비로 섬기게 되었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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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앉아서 맛있는 술과 안주가 준비됐으니 마음껏 드시게. 화촉동방은 잘 치렀겠지 자동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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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 옆에 앉아있던 자동선이 부끄러워 농익은 가을 석류알 같이 얼굴이 붉어져 몸둘 바를 몰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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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워 말거라. 여자라면 한 번은 겪는 즐거움이니라.” 제일청이 한술 더 떠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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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영천군 나으리께선 천하재색 자동선 신부의 옷을 잘 벗기셨지요? 옷 벗기는 차례야 여러 번 해 보셨을 터이니 거칠 것이 없으셨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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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정이 너스레를 떨어도 영천군은 묵묵부답이고만족했다는 표정으로 사가정은 읽고 있으며 자동선 만이 귓불까지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들지 못하고 몸 둘 바를 몰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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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들 앞에서 언제 어디서고 당당했던 자동선인데 지금은 영천군과 화촉동방을 치르고는 부끄러워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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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동안 고이 간직했던 정조를 아낌없이 받치고 아쉬움과 해방감에 영혼의 자유를 찾아 새로운 안식처를 찾았다는 의미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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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시던 길 하염없이 보느라고/

사립도 닫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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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깊도록 기다리고 있다가/

찬 이슬에 옷 다 젖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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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계신 양산관에는/

고운 꽃이 얼마나 피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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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보느라고/

돌아오실 줄 모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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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사기 풍천부사 애첩의 '님 기다리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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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의 여자들은 시집가면 00댁 또는 애기씨로 불렀고 시의 주인공은 양사기의 첩이므로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아 ‘첩’으로 표기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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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회는 철저한 남존여비 시대이고 남녀칠세부동석의 사회로 시집가면 친정에서 떨어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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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도 재색과 학문이 높은 기녀신분에선 뭇사내들이 잠자리를 갈망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흠모의 대상이었으나 영천군의 여자가 된 이상 철저한 한 남자의 여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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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한양엔 송도보다 재색을 겸한 여자들이 많으며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으나 이젠 규율이 엄격한 왕실의 여자가 된 이상 과거는 깡그리 잊고 영천군의 여자로 살아가야 할 운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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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촉동방을 치룬 하룻밤이 그녀의 운명을 갈라놓았고 제일청의 집에서 반살미 상을 후하게 받은 새신랑 부부는 집으로 다시 돌아와 내일 한양으로 떠날 채비에 부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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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휘영청 뜬 달이 대낮같이 밝고 자동선은 만감이 교차되었으며 왕손의 첩이 됐으니 더욱 마음이 편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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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내의 여자가 됐으면 지아비만 잘 섬기면 되나 왕손의 여자가 됐으니 가릴 것도 지켜야 할 예의범절도 많을 것이 뻔해 송도에서 마지막 밤은 뜬눈으로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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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도 화촉동방을 치를 때와는 다르게 술기운에 한번 즐기고는 밤새 몸을 뒤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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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에 가서 종친들과 일어날 일들에 대해 미리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 하고 아마도 이 밤이 영원히 밝지 않기를 바랐을지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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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화에서 계속 -

[출처] 풍류야화 자동선(제23화)|작성자 청솔

풍류야화 자동선(제22화)

얼떨결에 내실로 떠밀려 들어온 영천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며 사내를 먼저 들여보내고 뒷물을 하고 여자는 들어오리라 생각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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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은 피곤하였고 요며칠 사이에 송악산을 두 번이나 오르내렸으며 자동선을 품으려고 온갖 묘수를 다 써 봤으나 번번이 헛수고만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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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 자동선의 내실에 들어왔고 여자의 방에 남자 혼자 있게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남자는 온갖 상념에 빠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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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영천군은 그러하지 않았고 자동선의 내실은 의외로 단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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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벽이 모두 하얀 백합처럼 흰종이로 되었고 남향의 벽에는 성명미상의 그림 '원앙'이 걸려있을 뿐이며 머리맡엔 자리끼까지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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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은 옷도 벗지 않은 채 벌러덩 누웠고 화촉동방을 상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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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천군은 자리에 눕자 금방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졌고 영천군이 잠에서 깨어났을 땐 동창이 밝아오고 있을 때며 옷도 입은 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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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들짝 놀라 일어났을 때는 자동선이 옆에서 “너무 피곤하게 주무셔서 소녀 그냥 이렇게 옆에서 밤새 지켜드렸나이다! 목이 타실 거예요. 어서 자리끼를 드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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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은 영천군이 일찍 잠에 빠져 오히려 아쉬운 밤을 보냈다는 말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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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그랬느냐? 내가 너무 피곤해서 자동선 네가 들어오는 것도 몰랐느니라.” 남자체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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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두런두런 사가정과 제일청의 대화소리가 들렸고 잠시 뒤 “영천군 나으리, 일어나셨는지요? 사가정이 옵니다.”라고 문안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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툇돌엔 영천군 신발과 자동선의 신발이 나란히 놓여있고  사가정과 제일청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으며 이젠 됐다는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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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누가 오셨어요?” 자동선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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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아! 영천군 나으리 잘 모시고 잤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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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소녀를 어떻게 보시고 그런 망측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자동선이 뿌루퉁한 표정으로 방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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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대궐 뒤의 막바지 골목/ 내 남편은 광명문의 젊은 파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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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마음은 일월같이 밝아서/ 생사를 걸고 섬겨 오는 내 낭군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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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물을 돌리자니 눈물이 거침없어/ 시집 전에 못 만난 것 한스럽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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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장적(張籍)시인의 '절부음'(節婦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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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도 마음이 타긴 영천군과 다를 바 없으며 영천군이 조바심을 내면서 자기를 원하는 표정은 역력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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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부러지는 언행이 없어 몸을 열 수가 없는 것이며 낭랑18세의 보배같은 몸을 선뜻 내어놓기가 무섭고 두려울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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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들은 여자가 한번 몸을 주면 자기 전유물처럼 행동하고 염치라는 것은 생각지도 않는 속성이 있으며 그런 사내들을 자동선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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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사신 김식이 껄떡거리며 안절부절 못하는 자리에서 위기일발로 벗어나 영천군에게 왔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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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여자가 되어달라는 아무런 징표를 내어놓고 있지 않아 자동선도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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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들은 다 같은 족속들이야’하는 마음이 차츰 굳어가는 즈음 사가정과 제일청이 다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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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정과 제일청은 싱글벙글이고 엊저녁에 뜨거운 살을 마음껏 섞은 흡족한 표정이 역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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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정 나으리, 사가정 나으리는 항상 즐거운 표정이세요?” 자동선이 샘이 나고 부럽다는 말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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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하느냐? 나야 어디를 가나 술과 여자가 있어 얼굴 짱그리고 속을 태울 여유가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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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너는 어찌 표정이 밝지 않은 것을 보니 영천군 나으리와 화촉동방을 못치룬 눈치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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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정 나으리, 그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니까? 소녀를 어찌 보시고 청교방 창기와 같이 보시는지요? 소녀 매우 섭섭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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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내가 사과하느니라.” 그랬다. 자동선의 마음은 영천군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초야를 치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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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천군은 자동선의 마음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이며 사가정은 자동선이 방문을 열어놓고 나간 열린 문으로 내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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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 나으리 아직도 호박관자를 자동선에게 주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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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그게...” 영천군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으며 당황하는 표정이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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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을 청교월 창녀 정도로 생각하시면 아니 되옵고 자동선은 조선팔도 한양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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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신들까지 품지 못해 속을 태우는 명기라기보다 여자사대부라고 해야 적절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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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기회를 봐서 호박관자를 주시면서 평생을 책임진다는 약속을 하셔야 몸을 내어 놓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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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서야 영천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고 두 사내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자동선과 제일청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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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의 손엔 술병이 들렸고 제일청의 손엔 거문고가 들렸으며 사내들에겐 술이 최고이며 자신들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데에는 술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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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이 무슨 얘기를 그토록 달콤하게 하시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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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가 돋친 제일청의 말투이고 이틀 사이에 '송악도'(松岳圖) 두 폭을 그리는 사이 자동선의 마음을 충분히 알았을 터인데 아직도 호박관자를 주지 않았느냐는 질책이 섞인 어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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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거문고를 보자 두 사내 표정이 밝아졌고 영천군의 표정이 더욱 환하게 피어났으며 자동선을 보자 영천군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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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고 원망스런 표정 같기도 하고 자신은 고단한데다 술에 취해 금방 잠에 들어 깼을 때는 옆에 자동선이 마치 등신불(等身佛)처럼 앉아 있는 것을 보았으며 밤새 지켜만 보았냐는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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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어지고/ 땅에선 한 나무 가지가 되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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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사 하늘과 땅이 다할 때가 있어도/ 알뜰한 우리사랑 끊길 줄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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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청의 신기에 가까운 거문고 음률과 사가정의 시낭송에 영천군과 자동선의 뜨악했던 정서가 봄눈 녹듯 녹고 진달래 피듯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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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이 호박관자를 자동선의 가슴에 달자 자동선은 감격에 못이겨 사내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으며 이제 몸을 맡겨도 된다는 안도의 울음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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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자동선(제21화)

세상의 아름다움은 미녀로 귀결되고 여인의 아름다움에서 세상은 시작되어 여인의 아름다움으로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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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아름다움은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으며 아름다움을 표시하는 방식이 다를 뿐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아름다움을 대중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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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자동선의 의식주는 당시 조선사회가 최고로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가졌으며 그것은 신윤복(申潤福)의 '미인도'가 잘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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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그득 서린 일만 가지 봄 운을 담아/ 붓 끝으로 능히 인물의 참 모습을 나타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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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감탄스런 표현인가? 봄기운이란 겨우내 동토(凍土)에서 웅크리고 있던 삼라만상들이 서로 다투어 세상으로 나옴을 뜻하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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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붓끝으로 여인의 극치의 아름다움을 구현함을 말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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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영천군의 손을 잡고 있는 자동선이 신윤복의 '미인도'에 나오는 미인이 살아나온 주인공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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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정과 제일청은 영천군과 자동선이 한시라도 빨리 화촉동방에서 만리장성을 쌓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을 것이 자명하며 열쇠는 자동선이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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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 나으리! 아직도 소첩이 명나라 사신 김식한테 갔다 너무 늦게 와서 화가 나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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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이 자동선의 활짝핀 함박꽃 빛의 얼굴로 예쁜 짓을 해 보여도 어딘가 그늘이 있어 보여 속이 타는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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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내 너를 보니 너무 기뻐 어떻게 기쁨을 표시할까 궁리중이란다. 잠시만 기다리려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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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 특유의 여인 포로작전이고 서둘러 오느라 자동선은 숨이 찬 목소리며 두 볼은 발그레하게 상기된 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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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 나으리, 사실은 소첩이 오지 못할 뻔 했었나이다. 그 영감택이 비취노리개를 가슴에 달아주며 수작을 걸어와서 위기를 겨우 넘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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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비취기생이 있어 비취주인은 따로 있다고 하여 그 기생에게 비취를 넘겨주고 어렵게 빠져나왔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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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은 위기일발로 중국사신의 품에서 힘겹게 빠져나와준 것도 몰라준다는 섭섭함이 묻어있는 말투며 바로 그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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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자.. 사랑하는 남녀사이에는 체면같은 것은 없어야 진정한 사랑의 관계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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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영천군 나으리와 자동선 미인도 자존심 버리고 백년가약을 맺을 준비나 하소서!” 언제나 분위기는 사가정이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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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산매화가 한 송이 피어났건만/ 산속의 늙은 중은 꺾을 줄을 모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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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이도 젊고 다정한 그대가/ 덩굴 옆으로 달려와 사랑을 묻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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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늙은 중은 명나라 사신 김식을 알레고리 했을 것이며 사가정의 시는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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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럽다. 신선이 옥퉁소를 불어서/ 인간의 이별수를 깨뜨려 주지 못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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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온지 사흘에 아직도 못 올랐으니/ 봄바람이 어찌 그다지도 무정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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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말을 타고 흥진 속에 파묻히면/ 발에 비쳐있던 그 달은 누가 알아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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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비싸게 굴지 말고 어서 영천군을 모시라는 일침이고 시낭송을 마친 사가정은 “자 이제 우리 소임은 끝이 났으니 자리를 뜹시다.”라고 제일청을 감싸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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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둘이 남자 영천군이 입을 열었다. “왜 대답이 없느냐?” 이젠 사내가 속이 타는 목소리고 자동선은 묵묵부답이며 대답이 없으면 묵시적 동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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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 한동안 흐른 뒤 “미천한 소녀가 어찌 영천군 나으리의 말씀에 대꾸를 하겠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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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분만을 기다릴 뿐이옵니다!”라고 영천군 무릎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감격의 울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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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영천군은 채용신(蔡龍臣)의 '팔도미인'의 예쁜 부분만을 선택하여 탄생한 자동선을 품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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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자동선은 채용신이 그린 '팔도미인' 뿐만이 아니라 중국의 4대 미인들의 장점만을 골라 삼신할머니가 점지 한 빼어난 재색(才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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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 영천군은 인내와 끈기로 자동선을 품었그 사가정의 충실한 월하빙인의 역할에 제일청의 수고로움이 만들어 낸 세기의 연리지 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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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의 울음이 좀처럼 멈추지 않았고 영천군은 두 어깨를 들썩이며 섧게 통곡하는 자동선의 상체를 어루만지고 있을 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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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분위기에서도 뛰어난 해학과 기지로 웃음과 부드러운 분위기로 바꾸어 놓는 사가정도 없어 펑펑 눈물을 쏟으며 울음을 끊이지 않는 자동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묘수를 못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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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깊어만 갔고 자정이 훌쩍 지났으며 이게 웬일일까? 자동선이 섧게 울다가 그만 지쳐서 영천군의 품에 안겨 잠이 들어버렸고 가늘게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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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은 오늘저녁이야 말로 오매불망 했던 자동선과 화촉동방을 치룰 수 있을 것을 기대했으나 그 꿈이 문턱까지 갔다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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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노류장화라 해도 명나라 사신의 수청까지 거부하고 온 자동선을 잠들어 있는 것을 겁간(劫姦)을 할 처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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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사가정과 제일청의 월하빙인한 것도 있으며 더욱이 두 폭의 그림까지 그려줘 환심을 얻어놨는데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겁간을 한다면 왕손으로 체면이 서지 않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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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일까? 어미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자듯 잠을 잔 자동선이 잠시 후 눈을 번쩍 뜨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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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 나으리, 아직 가시지 않고 계셨나이까?”라고 방긋 웃음까지 웃으며 양 볼에 흘린 침을 손으로 쓰윽 닦으며 일어났고 그 웃음이 영천군의 마음을 또 흔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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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으셨어요. 내실로 들어가셔서 주무세요. 소첩은 동기(童妓) 자화(紫霞)와 자고 아침에 다시 오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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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은 영천군을 자신의 내실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아버렸으며 영천군의 코에는 자동선에게서 풍겼던 싫지 않은 야릇한 암내가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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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자동선(제20화)

그들은 말 대신에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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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공기가 차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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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가 병아리를 채가듯 제일청이 사가정을 품고 내실로 들어갔으며 사가정은 제 내실인 냥 들어가자마자 벌러덩 자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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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정 나으리, 잠이 드시면 아니 되옵니다. 소첩이 준비한 해장국을 드시고 자동선 집으로 가셔야 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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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소리냐? 이제 한숨 자야지. 너도 이리 오너라! 또 자동선 집으로 간다는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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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사가정이 술을 더 마시지 않고 잠을 자겠다고 했으며 지금쯤 영천군과 자동선은 화촉동방을 치르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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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청아! 너나 가려무나. 나는 여기서 한숨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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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청이 끓인 해장국과 술병이 있는데도 사가정이 본 척도 않으며 영천군 월하빙인 노릇하느라 너무 지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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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일청의 등살을 이겨낼 사가정이 못되며 해장국과 술병을 비운 사가정은 제일청을 앞세워 자동선 집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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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도 마침 해장국을 먹고 차를 즐기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영천군의 표정에 먹구름이 끼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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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정이 상상했던 엊저녁에 뜨겁고 아름다운 화촉동방을 치르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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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 나으리, 어젯밤에 잘 주무셨는지요?” 사가정의 깍듯한 아침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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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허, 그러했소이다!” 기분이 착 가라 앉은 목소리고 사가정이 그동안 영천군한테 기분이 나쁠 때 듣던 그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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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정 나으리 오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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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의 목소리는 영천군과는 정반대로 경쾌하고 기분좋은 목소리며 그녀의 표정은 흡사 무지개 빛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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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첩 영천군 나으리의 기분을 푸시게 '자하동'(紫霞洞)곡을 불러드리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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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송산(송악산) 자하동에 있고/ 은구름 중화당에 서로 접해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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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영회 소식 즐겨 듣고/ 한 잔 불로주 드리려 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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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 마시면 천년 더 사시리니/ 한 잔 들고 또 한 잔 드시라. 여러 손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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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문인 채홍철(蔡洪哲)의 무제(無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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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청의 거문고 음률은 송도에선 적수가 없으며 퇴기로 물러나 있으나 중요 연회석엔 제일청이 초청되어 거문고 솜씨를 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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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는 미색과 노래와 춤으로 명기로 떨치더니 이제 나이 들어 청교방 뒷골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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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죽에 엽초나 태우고 있을 신세이나 뛰어난 거문고 음률로 오히려 격조 높은 노년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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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정과 관계를 맺은 것도 거문고가 매개체가 되었고 사가정의 시에 제일청의 거문고가 만나면 꾀꼬리가 춤을 춘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청교방 거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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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제는 사가정이 송도에 발길이 뜸해지자 그 우스갯소리가 사라지고 제일청의 거문고 인기마저 시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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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 그 절정의 음률이 되살아났으며 자동선이 춤을 추고 사가정의 시낭송과 제일청의 거문고에 영천군은 천국에 온 듯 넋을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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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과 아름다운 화촉동방을 못치뤄 침울해 하는 영천군을 위한 단독 연회고 단독 연회가 끝이 났어도 영천군 특유의 환한 얼굴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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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정은 언제나 영천군 앞에서는 기쁨과 행복감을 만들어주는 어릿광대를 자임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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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주어야 자신도 즐겁고 죽마고우로서 소임을 다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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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청의 거문고 솜씨는 젊어서 한창 절정일 때 보다 음률이 더 아름답소이다. 그동안 기명(妓名)만 알았지 성씨조차 몰랐네요. 성씨가 무엇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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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나으리. 소첩의 성씨는 여(呂)씨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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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라... 입구자 두 개를 포개 놓은 여씨 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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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사가정 나으리. 그러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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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거참 제일청은 윗입보다는 아랫입이 크구만. 그렇지 제일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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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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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보면 알지 그런 것도 모르는 풍류객이 어디 있소이까? 여자가 윗 입구보다 아래 입구가 더 크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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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정 나으리는 못 당해! 소첩이 당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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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은 이때서야 박장대소를 하면서 다시 자동선의 손을 꼭 잡았으며 자동선은 춤을 추어 숨소리가 아직도 높고 사가정의 입담은 계속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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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소금장수와 고추장사가 있었는데 두 남자가 배 한척씩 판돈을 평양 명기한테 몽땅 털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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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입이 자네와는 비교가 안 되게 커서 배 한척씩 거뜬히 들어갔다는 얘기야.” 폭소가 연거푸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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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사가정 나으리는 못 당해요. 소첩은 두 손을 다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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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아, 손만 들어 다행이네. 발까지 번쩍 들고 달려들면 어쩌자는 거야? 그 무서운 꼴을 안보니 다행이야. 내가 내친김에 얘기하나 더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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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마을에 꽃같은 처녀가 있는데 두 청년으로부터 청혼을 받아 부모가 딸에게 의사를 물었더니 두 청년을 모두 남편으로 삼겠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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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깜짝 놀라 물었더니 밥은 동쪽에서 먹고 잠은 서쪽에서 자면 되지 않겠느냐?”는 얘기며 소위 동가식(東家食) 서가숙(西家宿)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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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정은 중국고전 '소림광기'(笑林廣記)에 나온다는 얘기로 끝을 맺었고 그때서야 영천군은 오매불망 자동선의 꿈속에서 벗어나 잠시 파안대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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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의 파안대소엔 자조의 표정이 섞여있고 자동선은 잡혀있던 손을 빼서 스스로 영천군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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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허락할 몸, 너무 속을 썩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이르러서고 영천군의 손은 체구에 비해 작고 비단결 같았으며 자동선의 손이 오히려 더 억세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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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서야 비로소 영천군의 얼굴에 그늘이 걷혔고 사가정도 얼굴에 웃음기가 생겼으며 영천군의 표정이 어두우면 사가정은 이심전심으로 그늘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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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을 보기 위해 한양에서 송도까지 왔으나 꼬박 이틀이 지난 뒤 이제 겨우 손을 잡고 따뜻한 정을 나눌 분위기가 되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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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과 영천군이 잘 되어야 자신도 제일청과 오랜만에 재회의 회포를 풀 수 있기 때문이며 사가정은 언제고 손을 내밀면 품에 안길 제일청이 있어 밤이 기다려지는 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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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천군과 자동선은 그런 사이가 아니고 영천군은 영천군대로 왕손의 체면을 중시하고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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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은 그녀대로 명기(名妓)의 위신을 지키려 하기 때문이고 이제 그들은 체면과 위신을 조금씩 내려 놓으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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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화에서 계속 -

[출처] 풍류야화 자동선(제19화)|작성자 청솔

풍류야화 자동선(제18화)

문밖에서 갑자기 나귀의 울음소리가 들렸으며 자동선이 끌고 온 나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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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은 벌써 송악산 유람을 위해 나귀를 끌고 객사로 영천군과 사가정을 모시러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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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어둠이 덜 걷힌 상태고 술국을 끓여 두 사내에게 대접하려는 속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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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으리들 일어나셨는지요?” 제일청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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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누구요? 이렇게 새벽 일찍이?” 사가정은 제일청의 목소리를 알아들었지만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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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나으리 청교월에 제일청입니다. 자동선이 술국을 끓여서 나으리들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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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이란 말에 영천군은 천둥에 놀란 아기 노루 모양 발딱 일어났고 두 사내는 자동선의 내실로 안내되었고 내실 안에는 처음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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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도 내실에 사내를 안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더욱이 두 사내를 동시에 스스로 안내한 것은 자신도 놀라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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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기생이 되어서 사내를 접대하게 되었을 때도 술좌석에서 헤어졌고 잠자리를 같이 하기 위해 집으로 데려온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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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 영천군과 사가정이 자동선의 내실에서 술국을 먹고 있으며 그것도 자동선이 직접 끓여 해장술과 함께 먹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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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동지 할 사건이며 생애 최초 자동선의 마음을 휘어잡은 두 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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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는 옥골선풍 헌헌장부의 품위로 자동선의 마음을 샀으며 한 사내는 웃음과 해학으로 자칫 위축될 수도 있는 분위기에서 자존심을 부추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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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의 사내들은 자동선을 욕정을 채워주는 고깃덩어리로만 보아주었던 것이며 자동선은 그런 눈초리가 죽기보다도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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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의 두 사내는 자동선을 하나의 인격체를 넘어 재기 넘치는 재녀(才女)로 대하여 더 없이 신나는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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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해장 술국이 끝나면 제2차 송악산 유람길에 오르려 하고 오늘도 두 남자와 두 여자가 산행에 나섰으며 송악산은 언제 봐도 변함없는 명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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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내들은 각각 마음이 딴 곳에 가 있으며 특히 영천군은 자동선의 자태에 넋을 빼앗긴 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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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정은 자동선의 비위를 맞춰가며 영천군과 가까워지길 온 신경을 쏟으며 월하빙인(月下氷人·중매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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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 중턱 즈음 오르자 옥수같은 물이 흐르고 그늘도 넉넉한 바위가 나타났고 제일청은 재빨리 돗자리를 펴고 술상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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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도 더운데 더 올라가시지 말고 이곳에서 청풍명월(淸風明月)을 즐기세요!”라며 제일청이 퇴기다운 너스레를 떨었지만 사가정이 그냥 넘길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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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청풍은 있으나 명월은 없지 않느냐?” 하자 자동선이 거들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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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나으리도 딱하시네요! 명월은 밤에만 뜨나요? 여기 낮 명월이 두 개나 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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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보지 못하신 모양인데 등하불명이 분명하시군요. 바로 옆에 두둥실 떠 있는데 못 보시고 있으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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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내 이제 막 불혹(不惑:40)인데 봉사가 되었구나. 이를 어찌하면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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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사가정이 자동선의 말을 못 알아들을리 없겠으나 능청을 떨었고 이틀사이에 자동선이 농까지 할 정도로 여유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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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백년은 됐을 소나무 그늘 아래 두 사내와 두 여자는 술판을 벌였으며 무릉도원이요 동천(洞天:신선이 산다는 이상적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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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들은 자동선주 몇 잔에 금방 취하였고 특히 사가정이 일부러 일찍 취한 척 혀꼬부라진 소리를 하며 오늘은 월하빙인 역할을 제대로 하려는 속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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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아. 네 스스로 낮달이라 했으니 달을 보고 즐거워 할 사람들의 흥을 돋워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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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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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영리함으로 내 말을 모를리 없을 텐데... 술이 있으면 가무가 있어야 하고 계집이 있어야 하는데 낮달이 떴으니 계집은 됐고 가무가 없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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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거문고를 말할 것이고 거문고는 내 입속에 있느니라.” 술판은 점점 무르익어 갔으며 자동선의 춤은 가히 명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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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결(百結:백번을 기웠다는 뜻) 선생의 떡방아소리 못지않은 사가정의 입거문고 음률에 맞춘 자동선의 춤사위는 명품 중 명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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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정은 신라 자비왕의 사람 백결의 떡방아 소리는 ‘금’ 악기로 켰으나 사가정은 입으로 거문고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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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 소리에 선녀의 춤을 뺨치는 자동선의 춤사위에 영천군은 넋을 잃었고 이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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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이 춤을 멈추며 “영천군 나으리, 오늘도 그림 하나 더 그려 주시지요?”라며 영천군 귀에 대고 속삭였고 춤을 추다 갑자기 멈추어 숨이 찬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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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바람에 옷이 헝클어져 겨드랑이 사이로 자동선의 풍만한 한 쌍의 유방이 영천군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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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 나으리 그리 하시지요! 자동선이 저토록 간청을 하니 소원을 풀어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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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정은 이때다 하고 자동선을 거들었고 자동선도 제일청에 눈짓을 하여 준비했던 비단을 술상 보에서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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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도 기다렸다는 듯이 비단에 송악산과 송도 고을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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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을 둘러싼 진봉산·봉명산·천마산·오공산 등을 일필휘지로 그려나갔고 영천군의 호탕한 운필에 자동선은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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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득 생각이 난 듯이 “사가정 나리, 이 그림에 찬시 한 수 넣어주시지요.”라며 왼쪽 눈을 찡긋 눈웃음을 보냈고 사가정이 누구인가! 샘물처럼 즉각 시 한 수를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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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끝났어도 가락은 끝이 없네/ 지난 일 뜬구름 같아 머리가 비어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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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궁의 낙타가 울어 슬픔이 그윽한데/ 두견새 울어 예여 눈물조차 붉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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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은 그림과 시를 번갈아 감상하며 쏟아지는 감격의 눈물을 억제하였고 그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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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이 어디 있느냐? 송도 유수께서 급히 너를 찾느니라. 내 말이 들리면 어서 대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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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의 이방(吏房)의 숨이 찬 목소리며 사가정이 나서 이방의 말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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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연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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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는 모르나 명나라 사신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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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사신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자동선아, 어서 가서 명나라 사신을 맞아라! 우리는 너의 집에 가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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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답게 국익을 먼저 생각하며 분위기를 추슬렀고 제일청은 재빨리 술판을 정리하고 자동선과 함께 명나라 사신의 연회장인 옥촉정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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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쫓던 개꼴이 된 영천군과 사가정 두 사내는 자하동 자동선의 집으로 힘없는 발길을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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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화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