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야화 자동선(제20화)

 
 

그들은 말 대신에 손을 잡았다.

“밤공기가 차옵니다.”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가듯 제일청이 사가정을 품고 내실로 들어갔으며 사가정은 제 내실인 냥 들어가자마자 벌러덩 자빠진다.

“사가정 나으리, 잠이 드시면 아니 되옵니다. 소첩이 준비한 해장국을 드시고 자동선 집으로 가셔야 되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이제 한숨 자야지. 너도 이리 오너라! 또 자동선 집으로 간다는 말이냐?”

천하의 사가정이 술을 더 마시지 않고 잠을 자겠다고 했으며 지금쯤 영천군과 자동선은 화촉동방을 치르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제일청아! 너나 가려무나. 나는 여기서 한숨 자야겠다.”

제일청이 끓인 해장국과 술병이 있는데도 사가정이 본 척도 않으며 영천군 월하빙인 노릇하느라 너무 지친 듯하다.

하지만 제일청의 등살을 이겨낼 사가정이 못되며 해장국과 술병을 비운 사가정은 제일청을 앞세워 자동선 집으로 향하였다.

영천군도 마침 해장국을 먹고 차를 즐기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영천군의 표정에 먹구름이 끼여 있다.

사가정이 상상했던 엊저녁에 뜨겁고 아름다운 화촉동방을 치르지 못했던 것이다.

“영천군 나으리, 어젯밤에 잘 주무셨는지요?” 사가정의 깍듯한 아침인사다.

“허허허, 그러했소이다!” 기분이 착 가라 앉은 목소리고 사가정이 그동안 영천군한테 기분이 나쁠 때 듣던 그 목소리다.

“사가정 나으리 오셨어요?”

자동선의 목소리는 영천군과는 정반대로 경쾌하고 기분좋은 목소리며 그녀의 표정은 흡사 무지개 빛깔 같다.

“소첩 영천군 나으리의 기분을 푸시게 '자하동'(紫霞洞)곡을 불러드리겠나이다.”

집은 송산(송악산) 자하동에 있고/ 은구름 중화당에 서로 접해있네./

오늘의 기영회 소식 즐겨 듣고/ 한 잔 불로주 드리려 왔소./

한 잔 마시면 천년 더 사시리니/ 한 잔 들고 또 한 잔 드시라. 여러 손님들...

고려문인 채홍철(蔡洪哲)의 무제(無題)다.

제일청의 거문고 음률은 송도에선 적수가 없으며 퇴기로 물러나 있으나 중요 연회석엔 제일청이 초청되어 거문고 솜씨를 뽐낸다.

젊었을 때는 미색과 노래와 춤으로 명기로 떨치더니 이제 나이 들어 청교방 뒷골목에서

장죽에 엽초나 태우고 있을 신세이나 뛰어난 거문고 음률로 오히려 격조 높은 노년을 즐기고 있다.

사가정과 관계를 맺은 것도 거문고가 매개체가 되었고 사가정의 시에 제일청의 거문고가 만나면 꾀꼬리가 춤을 춘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청교방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가정이 송도에 발길이 뜸해지자 그 우스갯소리가 사라지고 제일청의 거문고 인기마저 시들해졌다.

그런데 지금 그 절정의 음률이 되살아났으며 자동선이 춤을 추고 사가정의 시낭송과 제일청의 거문고에 영천군은 천국에 온 듯 넋을 빼앗겼다.

자동선과 아름다운 화촉동방을 못치뤄 침울해 하는 영천군을 위한 단독 연회고 단독 연회가 끝이 났어도 영천군 특유의 환한 얼굴이 아니다.

사가정은 언제나 영천군 앞에서는 기쁨과 행복감을 만들어주는 어릿광대를 자임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게 해주어야 자신도 즐겁고 죽마고우로서 소임을 다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제일청의 거문고 솜씨는 젊어서 한창 절정일 때 보다 음률이 더 아름답소이다. 그동안 기명(妓名)만 알았지 성씨조차 몰랐네요. 성씨가 무엇이요?”

“예 나으리. 소첩의 성씨는 여(呂)씨 옵니다.”

“여시라... 입구자 두 개를 포개 놓은 여씨 말이요?”

“예 사가정 나으리. 그러하옵니다.”

“허허! 거참 제일청은 윗입보다는 아랫입이 크구만. 그렇지 제일청?”

“그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척 보면 알지 그런 것도 모르는 풍류객이 어디 있소이까? 여자가 윗 입구보다 아래 입구가 더 크지 않소.”

“사가정 나으리는 못 당해! 소첩이 당했네요.”

영천군은 이때서야 박장대소를 하면서 다시 자동선의 손을 꼭 잡았으며 자동선은 춤을 추어 숨소리가 아직도 높고 사가정의 입담은 계속 되었다.

“옛날에 소금장수와 고추장사가 있었는데 두 남자가 배 한척씩 판돈을 평양 명기한테 몽땅 털렸대.

그 입이 자네와는 비교가 안 되게 커서 배 한척씩 거뜬히 들어갔다는 얘기야.” 폭소가 연거푸 터져 나왔다.

“아무튼 사가정 나으리는 못 당해요. 소첩은 두 손을 다 들었어요.”

“이 사람아, 손만 들어 다행이네. 발까지 번쩍 들고 달려들면 어쩌자는 거야? 그 무서운 꼴을 안보니 다행이야. 내가 내친김에 얘기하나 더 하지.

옛날 어느 마을에 꽃같은 처녀가 있는데 두 청년으로부터 청혼을 받아 부모가 딸에게 의사를 물었더니 두 청년을 모두 남편으로 삼겠다는 거야.

부모가 깜짝 놀라 물었더니 밥은 동쪽에서 먹고 잠은 서쪽에서 자면 되지 않겠느냐?”는 얘기며 소위 동가식(東家食) 서가숙(西家宿) 이야기다.

사가정은 중국고전 '소림광기'(笑林廣記)에 나온다는 얘기로 끝을 맺었고 그때서야 영천군은 오매불망 자동선의 꿈속에서 벗어나 잠시 파안대소 하였다.

영천군의 파안대소엔 자조의 표정이 섞여있고 자동선은 잡혀있던 손을 빼서 스스로 영천군의 손을 잡았다.

어차피 허락할 몸, 너무 속을 썩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이르러서고 영천군의 손은 체구에 비해 작고 비단결 같았으며 자동선의 손이 오히려 더 억세 보였다.

이때서야 비로소 영천군의 얼굴에 그늘이 걷혔고 사가정도 얼굴에 웃음기가 생겼으며 영천군의 표정이 어두우면 사가정은 이심전심으로 그늘이 생긴다.

자동선을 보기 위해 한양에서 송도까지 왔으나 꼬박 이틀이 지난 뒤 이제 겨우 손을 잡고 따뜻한 정을 나눌 분위기가 되어서다.

자동선과 영천군이 잘 되어야 자신도 제일청과 오랜만에 재회의 회포를 풀 수 있기 때문이며 사가정은 언제고 손을 내밀면 품에 안길 제일청이 있어 밤이 기다려지는 사내다.

하지만 영천군과 자동선은 그런 사이가 아니고 영천군은 영천군대로 왕손의 체면을 중시하고 있으며

자동선은 그녀대로 명기(名妓)의 위신을 지키려 하기 때문이고 이제 그들은 체면과 위신을 조금씩 내려 놓으려하고 있다.

- 21화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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