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야화 황진이(제29화) - 남평문씨세거지

풍류야화 황진이(제29화)

 

 

마음이 답답하거나 세상의 갈피가 보이지 않을 때면 진이는 박연폭포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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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수 앞에서 노래가 아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 가슴이 조금은 열려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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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살이 3년 동안 생기가 넘치는 세상을 보고 송도에 들어서자 가슴이 터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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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몽인(柳夢寅)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진이는 여자들 중에서 뜻이 높고 협기가 있는 자로 평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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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許筠)은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에서 성품이 활달하여 남자와 같으며 거문고를 잘 타고 노래를 잘 불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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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예쁜 여자로 태어났으나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한혈마를 타고 만주벌판을 질풍노도처럼 달리고 싶어하는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의 기개를 닮은 여장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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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녀는 고려의 수도가 아닌 조선시대의 송도에서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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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집 딸로 출생한 것으로 15년 동안 금지옥엽 호의호식하며 성장하여 신동소리를 들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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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서녀 신분으로 바뀌어 기생(妓生)의 길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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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사내들의 품을 통하여 세상살이를 살펴봤으나 진이는 성에 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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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들은 진이를 정복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녀는 그들을 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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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특유의 정복 심리이고 사내는 여자에게 들어오면 죽으며 정복이 아닌 포로가 되는 신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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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숱한 사내들을 품어 봤으나 마음에 들고 존경할 만한 상대를 찾지 못하여 방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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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문득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을 번개처럼 떠올렸고 화담이라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존경의 대상이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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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어느 때 보다도 곱고 단아하게 차려입었고 하늘에서 하강한 선녀(仙女)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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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엔 자신의 키 만한 거문고가 메어져있고 손에는 송도 명주인 태상주와 간단한 안주가 들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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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담을 공략하러 가는 길이고 때마침 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으며 진이는 비를 맞으면서도 '대학'(大學)은 젖지 않도록 가슴에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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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되게 해달라고 호소하러 가는 길이며 술과 거문고는 자신의 재능을 보여주려는 속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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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체 높은 사대부집에서 천하의 소리꾼과 바람둥이들에게서 세상살이를 체득한 당돌한 계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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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의 명성은 송도를 넘어 한양은 물론이고 중국의 사신들은 조선에 오면 그녀를 찾아 자고 가는 것을 최고의 예우를 받는 것으로 생각하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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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사신뿐만이 아니며 그들을 보내고 영접하는 조선의 관리들도 명월관에 들려 진이를 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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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담도 제자들의 얘기를 통하여 진이의 신상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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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가 화담을 뵈러 가겠다고 연통을 넣고 갔으나 집에 있지 않았으며 진이가 화담의 제자가 된다면 홍일점(紅一點)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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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담의 문하엔 기라성 같은 문인들이 많으며 행촌 민순, 사암 박순, 초당 허엽, 술한 박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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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 이지함, 지채 홍인우, 수암 박지화, 연방 이구, 동강 남언경, 죽계 마희경, 이재 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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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봉 정지연, 이소재 이중호, 척암 김근공, 사재 장가순 등 그밖에도 많은 인물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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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문하에 진이가 군침을 흘렸고 그녀가 존경하며 사랑하고 싶어질 사내가 행여 생길까 기대를 하는 속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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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화담의 문하생이 되는 길이 그렇게 쉽게 열리지 않았고 당나귀 등에 화담이 즐긴다는 음식과 태상주를 싣고 화담에 도착했을 때는 집안이 텅 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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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집이었고 진이는 마음속으로 화담선생의 거처가 선인(仙人)들이 산다는 동리(東籬)인가 싶어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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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 동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오관산 화곡이 그곳이고 오관산은 산봉우리가 다섯 개 나란히 서 있어 멀리서 보면 왕관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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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괴석이 둘러선 화곡에는 봄엔 진달래와 산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 산기슭을 불꽃처럼 물들이고 가을엔 붉은 단풍이 타올라 절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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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곡을 한참 오르면 거대한 바위가 움푹 패어 이루어진 연못 화담(花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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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덕은 화담 곁에 초당을 짓고 세속과는 거리를 둔 채 ‘주기론’(主氣論)을 주창하며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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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진이가 오늘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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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나무 병풍처럼 둘러친 산에 어른거리고/ 푸른 시냇물 거울 같은 웅덩이로 쏟아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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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세계 가운데 거닐며 시 읊으니/ 갑자기 마음이 맑고 깨끗해짐 느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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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덕의 '대흥동'을 떠올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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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말끔히 개고 반짝 해까지 났다으며 비온 뒤의 날로 청자 빛의 상쾌한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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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주위엔 여름 꽃들이 만발하였고 비까지 내려줘 활짝 핀 꽃들이 생기발랄함으로써 화담은 더욱 아름다운 신선들이 산다는 동리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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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피곤함도 잊은 채 화담 주위와 초당 곁을 살폈고 연못엔 이름 모를 고기들이 춤을 추며 노래라도 하는 듯이 즐거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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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 주위엔 나팔꽃과 해란초, 그리고 금낭화와 패랭이꽃까지 다투어 피어 또 다른 꽃의 세상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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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뉘엿뉘엿 지며 꽃 그림자들이 화담을 감쌀 때 두런두런 인기척이 났으며 화담 일행이 연못 앞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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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가슴이 뛰기 시작하였고 허엽이 다가와 당나귀에 실린 짐을 받아 광에 들여놓고 진이를 화담에게 소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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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의 얼굴이 활짝 핀 나팔꽃 빛깔로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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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아래서 동자에게 물었더니/ 스승님은 약초 캐러 가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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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중에 계시긴 하지만/ 구름이 자욱하여 계신 곳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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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시인 가도(賈島)의 '은자를 찾아 갔으나 만나지 못하다'를 회상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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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이는 화담을 극적으로 만났으며 진이는 화담을 만난 것만으로도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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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팔도를 누비고 다니며 숱한 남자와 뜨거운 살을 섞으며 사랑을 찾아 봤으나 아직까지 찾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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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그녀가 찾아 헤매는 사랑하는 사내는 22살이나 위인 화담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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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어렵사리 황홀한 기분으로 꿈속에서도 마음대로 못 뵈었던 화담을 극적으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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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화에서 계속 -

[출처] 풍류야화 황진이(제29화)|작성자 청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