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야화 자동선(제19화)

 
 

삼현육각(三絃六角)의 풍악소리와 휘황찬란하게 켜진 등불에 자동선은 잠시 눈이 휘둥그레졌다.

푸른 녹음에 젖었던 싱그러움이 삽시간에 적응이 쉽지 않았으며 영천군과 사가정의 넉넉한 풍류 분위기가 아직도 몸에서 떠나지 않은 상태다.

“자동선이 납시었습니다.” 이방의 보고에 흥청대던 분위기가 갑자기 멈추는 듯하였고 명나라 사신 김식(金湜)이 성큼성큼 걸어 나와 자동선을 맞았다.

“네가 자동선이냐?”

명나라 사신은 대국의 체면도 잊은 듯 자동선의 손을 덥석 잡으며 기쁨에 넘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네 소녀 조선국 기녀 자동선이라 하옵니다.” 추호도 떨림이 없는 대답에 김식이 오히려 주춤하였다.

고개를 조아리며 다소곳한 음성으로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조선국 기녀란 또렷한 응답에 상국의 사신이 되려 움찔 했던 것이다.

‘요것 봐라. 기생주제에 조선국이란 나라이름까지 들먹이는 맹랑한 계집...’ 이란 입속말을 하며 손에 힘을 주어 잡고 자리에 앉았다.

“그래 네가 중국에까지 이름이 알려져 있는 자동선이냐?”

“예 사신 나으리, 명나라에까지 소녀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는 말씀은 소녀가 확인할 수 없으나 조선국엔 자동선은 소녀 하나뿐이옵니다.”

너무도 당당한 대답이다.

“중국 사신 장녕이란 한림학사를 알고 있느냐?”

“소녀 중국 분을 여러분을 모셨음으로 어느 분이 장녕이었는지 송구스러우나 장담할 수는 없사옵니다.”

김식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으며 내일 저녁엔 귀국해야 하는데 밤은 오늘 뿐이다.

그런데 맹랑한 자동선과 잠자리를 하려면 오늘밤만으론 불가능해 보여서고 비록 기생이지만 반듯한 언행이 어느 정경부인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소녀 손을 놓으셔야 사신 어른께 술을 권해드리지요.” 김식은 자리에 앉아서도 자동선의 손을 놓지 않았다.

자동선의 손은 따뜻하고 포근하며 중국여자와 이웃 속방국가 여자들과 다르게 김식은 평온함을 느꼈고 자동선이야 말로 진정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이 처음이 아니며 올 때 마다 조선여자들과 잠자리를 했으나 자동선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그 여자들과 전혀 다른 느낌이다.

꼭 잠자리를 같이하고 싶은 여자이고 밤은 속절없이 깊어갔으며 김식의 언행은 점점 노골적으로 나왔다.

삼월이라 조선 땅엔 꽃이 활짝 피어나/ 꽃 속에서 그대 만나 거나하게 취했네./

멀다한들 그다지 먼 나라가 아니니/ 오늘 갔다 내일 또 올 수도 있다네.

김식은 행여 외국인이라 깊은 정이 들어 헤어지면 걱정이 될까 미리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다는 것까지 예고했지만 구렁이 같은 늙은 떼 놈의 속셈을 모를 자동선이 아니다.

산 속에 사는 중이 달빛이 탐이 나/ 물과 함께 달빛도 병에 담아 왔소./

절에 돌아와 병을 기울려 보니/ 달은 간데없고 병에는 물 뿐이어라.

이규보의 시 '무제'(無題)이고 자동선은 늙은 네가 나를 아무리 탐내도 나는 달빛과 같은 여자이니 헛물켜지 말라는 일침이다.

그러나 노련하고 끈질긴 김식이 쉽게 물러설 리가 없으며 손은 어느새 뱀이 혀를 날름대듯 자동선의 속곳 밑을 이곳저곳 오고가고 있었다.

사내의 손은 불같이 뜨겁고 징그러우며 자동선은 계속 옆에 앉아 있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려하였다.

“허허! 너는 내 옆에 그냥 앉아 있거라. 춤이야 딴 아이한테 추라고 하렴.”

김식이 육십은 넘어 보이고 머리까지 백발이나 사신으로 다니면서 주지육림의 대접을 받아 주름 하나 없는 팽팽한 피부다.

김식의 행동은 대담하였지만 상국(上國)의 사신이라 누구하나 감히 충고나 예의를 지키라고 말 한마디 못하는 분위기다.

“내 너에게 선물 하나를 해야겠다.”라고 말한 김식은 호주머니에서 비취(翡翠) 노리개 한 쌍을 꺼내 자동선의 가슴에 달아주었다.

“아니옵니다!”라고 매몰차게 말을 한 자동선은 당나라 시인 장적(張籍)의 '절부음'(節婦吟)을 읊었다.

그대 아시 듯 소첩은 남편 있는 몸/ 어쩌자고 쌍명주를 정표로 주오./

따뜻한 그 애정 사무치게 고마워/ 붉은 비단 저고리에 살짝 차보오.라고 읊고는 말을 이었다.

“이 비취는 주인이 따로 있사옵니다. 여기있는 기녀 중 소첩보다 더 예쁜 비취가 있사옵니다. 그 여인을 불러 따뜻한 가슴에 달아주시옵소서!”

말을 마친 자동선은 가슴에 달린 비취를 빼 김식에게 건넸고 자동선은 김식에게 큰 절을 하고 자리에서 떠났다.

“저런 버릇없는 계집을 봤나! 어디 명나라 사신 앞이 어떤 자리라고...” 송도 유수는 안절부절못하였다.

“아니요. 괜찮소이다. 자동선을 돌아가게 그냥 놔두시오. 동방예의지국다운 절부요. 내 부끄럽소. 남편이 있는 여자를...”

김식도 자동선의 똑 부러진 언행이 기분 나쁘지 않고 보호해 주고 싶은 여자로 보였던 것이며 이때 비취가 나타났다.

“소첩이 비취옵니다.” 자동선에게 성정이 흐려진 김식은 비취도 예뻐 보였다.

“오! 네가 비취냐? 이제 이 비취 주인이 나타났구나.” 김식은 앞뒤 안 가리고 비취를 품었다.

자동선은 집으로 뛰 듯 걸어갔으며 영천군과 사가정은 여전히 술판이다.

“나으리들! 소녀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국익을 위해 잠시 자리를 떴을 뿐 되레 너의 절도 있는 언행에 박수를 보내주어야겠구나.”

사가정의 분위기 통솔 능력은 누구도 당해내지 못할 것이며 영천군은 졸다 마시다 하고 있었다.

“영천군 나으리! 소녀 자동선이 다녀왔습니다.”

자동선이란 말에 영천군은 놀란 토끼모양 반짝 눈을 떴으며 어느새 닭이 홰를 치며 새벽을 알린다.

“자동선은 영천군을 모셔라! 나는 객사로 가련다.”

사가정은 반쯤 남은 술잔에 술을 마저 마시고 일어나 나왔으며 달은 샛별에 가려 아름다움을 잃었고 저만치 희미하게 여인이 보였으며 제일청이다.

- 20화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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