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야화 자동선(제13화)-동촌 풍경

풍류야화 자동선(제13화)

 

 

영천군과 사가정의 걸음이 빨라졌고 사가정이 앞장을 섰으며 조선팔도를 제집 정원처럼 드나들었던 사가정의 발길에 영천군은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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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아, 좀 천천히 가시게나! 내가 숨이 차서 따라갈 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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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을 한시라도 빨리 보시려면 더 빨리 걸어가셔야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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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 우리가 타고 왔던 말은 어찌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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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나으리, 목단춘에게 맡기어 며칠 잘 먹이라 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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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참 잘했소이다. 그런데 제일청한테 안내하라 했으면 좋을 뻔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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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아니 될 말씀입니다. 사내 둘이 가서 아무렴 조선제일의 미녀라 해도 설득을 못하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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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내가 얘기를 주고받으며 오는 사이에 어느새 멀리서나마 자동선의 집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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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은 자동선의 집만 보아도 자동선을 본 듯 가슴이 뛰었고 이젠 영천군이 앞에 서서 뛰다시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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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차서 천천히 가자던 영천군이 자동선의 집을 보니 힘이 저절로 솟는지 사가정(四佳亭·서거정)을 제치고 앞에서 총총 걸음으로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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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가시죠. 영천군 나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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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천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동선의 집을 향해 젖먹이가 어미를 보고 본능적으로 달려가듯 줄달음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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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천군은 사가정보다 힘이 좋고 허우대도 좋을 뿐만이 아니라 왕손의 후예답게 옥골선풍에 헌헌장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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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정도 어디에 나가도 빠지지 않으며 풍부한 학식에 넘치는 해학과 풍류에 여자들이 한번 보면 그의 품에 안기고 싶어 안달하는 호남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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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들이 자동선을 보려고 서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투어 뛰듯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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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누구 없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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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이 우렁찬 목소리로 주인을 찾았고 몇 번을 소리 높여 주인을 찾았으나 안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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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아무도 없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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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사가정이 대나무로 촘촘히 만든 대문을 발길로 차면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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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서야 “게 누구기에 남의 집 대문을 발길로 차며 법석을 떠시오?”라며 열 서넛 되어 보이는 계집아이가 얼굴을 삐죽이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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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자동선의 집이더냐?” 영천군이 숨이 가쁘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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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소만 댁은 누구신지요?” 소녀가 당돌하게 대꾸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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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양에서 온 영천군과 사가정인데 자동선을 보러 왔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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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그런데 자동선 아씨께선 지금 집에 안계십니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셨다 다시 오셔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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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씨께선 예약을 하지 않으시면 만나지 않으십니다. 더욱이 지금 아씨께선 산책중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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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들어가서 기다리면 아니 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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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아니 될 말씀입니다. 아씨가 안 계실 땐 절대로 남자를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시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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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돌아가셔서 내일 오시면 소녀가 아씨한테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말을 마친 소녀는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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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내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 별수 없이 다시 제일청 집으로 갔으며 다시 술판이 대낮부터 벌어졌고 대취했던 두 사내는 새벽녘에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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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집 뒤 실개천으로 가 세수를 하고 목이 타서 실컷 물을 마시고 방으로 들어와 떠날 채비를 하였으며 그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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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떠나시려고요? 그렇게는 아니 되옵니다. 이 제일청에 와서 술국을 안 드시고 가시는 손님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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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첩이 일찌감치 술국을 끓여 놨으니 시원하게 드시고 가세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술국과 기장이 섞인 밥도 함께 차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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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골이 망망한 채 산과 바다가 가려/ 올라가기 어려운 곳이라고 들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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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사 와 보니 뜬소문은 잘못이라/ 티끌세상과 몇 걸음 사이 밖에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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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인 최집균(崔執均)의 무제(無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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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내는 다시 자동선 집에 닿았으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내가 동시에 ‘게 누구 없느냐?“라고 집주인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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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내가 네댓 번을 부르자 선녀로 보이는 여자가 나타났고 바로 자동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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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들어오시죠. 어제 오셨던 한양에서 오신 손님이 아니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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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소첩이 뒷산으로 산보를 하면서 시(詩) 공부하느라 결례를 했사오니 널리 양해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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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 떨어지는 말투였으며 자동선은 두 사내를 아랫목에 앉히고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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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자동선이라 하옵니다. 먼 한양에서 미천한 소녀를 보러 이곳까지 오신데 대해 깊은 감사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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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네가 진정 자동선이냐? 이 분은 효령대군 다섯 번째 아드님인 영천군이시고 나는 사가정이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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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소첩이 평소 존경했던 두 분을 제 집에서 뵙다니 꿈만 같사옵니다. 앵두(동기 가명)야! 술상을 어서 봐 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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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는 준비했던 술상을 자동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들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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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술은 소첩이 담은 자동선주(紫洞仙酒)이며 담근 지 3년차로 독하오니 천천히 조금씩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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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내를 술상 맞은편에 앉히고 자동선은 술을 연거푸 따랐고 사가정은 술에 취하고 영천군은 자동선의 아름다움에 포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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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아, 이 자하동에 숨은 얘기가 있을 듯한데 네 이름도 거기에 연유가 있는 것이 아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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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풍류객 사가정 어른이셔? 그러하옵니다. 고려 때 대학자 채홍철(蔡洪哲) 어른께서 자하동에 정자 중화당(中和堂)을 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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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원로들을 모셔 기영회(耆英會)를 열었는데 어느 날 자하선인이 나타나 원로들에게 헌수 술잔을 올리며 '자하동곡'을 부르셨다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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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자동선 너는 역사에도 높은 지식을 갖고 있구나! 그 선인이 불렀다는 '자하동곡'을 불러 줄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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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하옵니다.'자하동곡'은 현재 악부(樂府)에 가사가 전해오는 것을 소녀가 잘은 못 부르나 불러 보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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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선의 낭랑한 목소리에 영천군은 아랫도리가 팽창되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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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송악산 자하동에 있어서/ 안개구름이 중화당에 잇달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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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기영회 기쁜 모임 있다기에/ 몸소 찾아와 연수배를 올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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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보다 술에 더 마음을 두는 사가정도 자동선의 노래에 가슴이 흔들렸고 두 사내는 동시에 탄복했으며 그러하면서도 서로 다른 여인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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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군은 '자하동곡'을 부른 자동선과 열락의 장면을 생각했으며 사가정은 제일청과 주지육림의 꿈같은 과거를 회상했고 어느새 밤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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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나으리께선 밤이 깊었는데 술만 드시면 어떡하죠? 객사로 가실 채비를 하셔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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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은 가슴이 철렁 떨어졌다. 객사로 가라니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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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내는 자동선의 집에서 나와 객사로 발길을 옮겼으며 통음한 술이 번쩍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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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화에서 계속 -

[출처] 풍류야화 자동선(제13화)|작성자 청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