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야화 자동선(제18화)

 
 

문밖에서 갑자기 나귀의 울음소리가 들렸으며 자동선이 끌고 온 나귀다.

자동선은 벌써 송악산 유람을 위해 나귀를 끌고 객사로 영천군과 사가정을 모시러 온 것이다.

아직 어둠이 덜 걷힌 상태고 술국을 끓여 두 사내에게 대접하려는 속내다.

“나으리들 일어나셨는지요?” 제일청 목소리다.

“게 누구요? 이렇게 새벽 일찍이?” 사가정은 제일청의 목소리를 알아들었지만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것이다.

“예. 나으리 청교월에 제일청입니다. 자동선이 술국을 끓여서 나으리들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자동선이란 말에 영천군은 천둥에 놀란 아기 노루 모양 발딱 일어났고 두 사내는 자동선의 내실로 안내되었고 내실 안에는 처음 들어갔다.

자동선도 내실에 사내를 안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더욱이 두 사내를 동시에 스스로 안내한 것은 자신도 놀라워하고 있다.

어쩌다 기생이 되어서 사내를 접대하게 되었을 때도 술좌석에서 헤어졌고 잠자리를 같이 하기 위해 집으로 데려온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영천군과 사가정이 자동선의 내실에서 술국을 먹고 있으며 그것도 자동선이 직접 끓여 해장술과 함께 먹이고 있는 것이다.

경천동지 할 사건이며 생애 최초 자동선의 마음을 휘어잡은 두 사내다.

한 사내는 옥골선풍 헌헌장부의 품위로 자동선의 마음을 샀으며 한 사내는 웃음과 해학으로 자칫 위축될 수도 있는 분위기에서 자존심을 부추겨 주었다.

그동안의 사내들은 자동선을 욕정을 채워주는 고깃덩어리로만 보아주었던 것이며 자동선은 그런 눈초리가 죽기보다도 싫었다.

그런데 지금의 두 사내는 자동선을 하나의 인격체를 넘어 재기 넘치는 재녀(才女)로 대하여 더 없이 신나는 표정이다.

이제 해장 술국이 끝나면 제2차 송악산 유람길에 오르려 하고 오늘도 두 남자와 두 여자가 산행에 나섰으며 송악산은 언제 봐도 변함없는 명산이다.

그런데 사내들은 각각 마음이 딴 곳에 가 있으며 특히 영천군은 자동선의 자태에 넋을 빼앗긴 눈치다.

사가정은 자동선의 비위를 맞춰가며 영천군과 가까워지길 온 신경을 쏟으며 월하빙인(月下氷人·중매인)이 되었다.

송악산 중턱 즈음 오르자 옥수같은 물이 흐르고 그늘도 넉넉한 바위가 나타났고 제일청은 재빨리 돗자리를 펴고 술상을 차렸다.

“날도 더운데 더 올라가시지 말고 이곳에서 청풍명월(淸風明月)을 즐기세요!”라며 제일청이 퇴기다운 너스레를 떨었지만 사가정이 그냥 넘길 리가 없다.

“허허 청풍은 있으나 명월은 없지 않느냐?” 하자 자동선이 거들고 나섰다.

“참 나으리도 딱하시네요! 명월은 밤에만 뜨나요? 여기 낮 명월이 두 개나 떴네요?

아직 보지 못하신 모양인데 등하불명이 분명하시군요. 바로 옆에 두둥실 떠 있는데 못 보시고 있으시다니...”

“하하하! 내 이제 막 불혹(不惑:40)인데 봉사가 되었구나. 이를 어찌하면 좋지?”

천하의 사가정이 자동선의 말을 못 알아들을리 없겠으나 능청을 떨었고 이틀사이에 자동선이 농까지 할 정도로 여유로워졌다.

몇 백년은 됐을 소나무 그늘 아래 두 사내와 두 여자는 술판을 벌였으며 무릉도원이요 동천(洞天:신선이 산다는 이상적인 곳)이다.

사내들은 자동선주 몇 잔에 금방 취하였고 특히 사가정이 일부러 일찍 취한 척 혀꼬부라진 소리를 하며 오늘은 월하빙인 역할을 제대로 하려는 속내다.

“자동선아. 네 스스로 낮달이라 했으니 달을 보고 즐거워 할 사람들의 흥을 돋워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네 영리함으로 내 말을 모를리 없을 텐데... 술이 있으면 가무가 있어야 하고 계집이 있어야 하는데 낮달이 떴으니 계집은 됐고 가무가 없지 않느냐?

내가 거문고를 말할 것이고 거문고는 내 입속에 있느니라.” 술판은 점점 무르익어 갔으며 자동선의 춤은 가히 명품이다.

백결(百結:백번을 기웠다는 뜻) 선생의 떡방아소리 못지않은 사가정의 입거문고 음률에 맞춘 자동선의 춤사위는 명품 중 명품이다.

사가정은 신라 자비왕의 사람 백결의 떡방아 소리는 ‘금’ 악기로 켰으나 사가정은 입으로 거문고 소리를 냈다.

거문고 소리에 선녀의 춤을 뺨치는 자동선의 춤사위에 영천군은 넋을 잃었고 이때다.

자동선이 춤을 멈추며 “영천군 나으리, 오늘도 그림 하나 더 그려 주시지요?”라며 영천군 귀에 대고 속삭였고 춤을 추다 갑자기 멈추어 숨이 찬 목소리다.

춤추는 바람에 옷이 헝클어져 겨드랑이 사이로 자동선의 풍만한 한 쌍의 유방이 영천군 눈에 들어왔다.

“영천군 나으리 그리 하시지요! 자동선이 저토록 간청을 하니 소원을 풀어주시지요!”

사가정은 이때다 하고 자동선을 거들었고 자동선도 제일청에 눈짓을 하여 준비했던 비단을 술상 보에서 꺼냈다.

영천군도 기다렸다는 듯이 비단에 송악산과 송도 고을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송악산을 둘러싼 진봉산·봉명산·천마산·오공산 등을 일필휘지로 그려나갔고 영천군의 호탕한 운필에 자동선은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문득 생각이 난 듯이 “사가정 나리, 이 그림에 찬시 한 수 넣어주시지요.”라며 왼쪽 눈을 찡긋 눈웃음을 보냈고 사가정이 누구인가! 샘물처럼 즉각 시 한 수를 토해냈다.

노래는 끝났어도 가락은 끝이 없네/ 지난 일 뜬구름 같아 머리가 비어 있소/

옛 궁의 낙타가 울어 슬픔이 그윽한데/ 두견새 울어 예여 눈물조차 붉도다.

자동선은 그림과 시를 번갈아 감상하며 쏟아지는 감격의 눈물을 억제하였고 그때다.

“자동선이 어디 있느냐? 송도 유수께서 급히 너를 찾느니라. 내 말이 들리면 어서 대답하라!”

유수의 이방(吏房)의 숨이 찬 목소리며 사가정이 나서 이방의 말을 듣는다.

“무슨 연유냐?”

“자세히는 모르나 명나라 사신이 왔습니다.”

명나라 사신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자동선아, 어서 가서 명나라 사신을 맞아라! 우리는 너의 집에 가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라.”

영천군답게 국익을 먼저 생각하며 분위기를 추슬렀고 제일청은 재빨리 술판을 정리하고 자동선과 함께 명나라 사신의 연회장인 옥촉정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닭 쫓던 개꼴이 된 영천군과 사가정 두 사내는 자하동 자동선의 집으로 힘없는 발길을 향하였다.

- 19화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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