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야화 자동선(제24화)

 
 

예성강 저녁노을에 사가정은 넋을 잃었고 조선팔도에 그의 발길이 안 닿은 곳이 별로 없다.

그런데 요며칠 사이에 송도 매력에 빠졌고 백악(白岳)에 걸려있는 구름과 북산에 서리는 연기와 비는 한 폭의 산수화다.

또한 장단의 절벽과 박연폭포는 웅장함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 바로 그 자체며 사가정은 제일청의 곁에 그냥 이곳에 주저앉고 싶다.

작은 내 깊숙한데 버들가지 날리고/ 가랑비 맑게 개니 풀은 연기처럼 피어오르네

손님이 가든 머무르든 상관하지 않고/ 술동이 하나 놓고 아름다운 대자연과 마주하네

이제현의 '청교 靑郊의 손님배웅'이다.

사실 사가정이 팔도유람을 할 때는 빛과 그림자 같이 술이 따랐고 높은 벼슬을 했음에도 형식과 명분에 얽매이지 않는 영혼의 소유자다.

그의 해학집 '태평한화골계집'엔 아래와 같은 익살이 실렸다.

‘극락이라도 삼해주(三亥酒)가 없다면 가지 않겠다.’라고 쓰여 있으며 그가 얼마나 술을 사랑하나를 적나라하게 포효하는지 딱 맞는 시(詩)라 하겠다.

사가정은 허탈하고 영천군과 자동선의 연리지 작전이 마무리 되어서며 사가정은 제일청의 집에서 밤낮없이 술이다.

이 모습을 보다 못한 제일청이 “사가정 나으리, 자동선의 반살미 상을 차릴 준비를 해야겠어요. 장인이 되가지고 술만 퍼마시면 어떻게 해요?”

장인 소리에 사가정이 손에 들렸던 술잔을 탕하고 술상에 놓으며 “장인이란 소리가 무슨 소리요?”라고 따져 물었다.

“나으리와 제가 만리장성을 쌓았으니 부부요! 내가 자동선의 어머니이니 사가정 나으리가 영천군 나으리의 장인이지 뭐겠어요?”

제일청의 표정은 웃음기도 없는 단호한 말투였고 사가정이 처음보는 그녀의 단호한 말투와 표정이다.

사가정도 제일청이 영천군과 자동선이 오후에 받을 반살미 상차리는데 오며가며 심부름으로 거들었다.

송도의 가을 날씨는 한양과 다르고 한낮엔 따가운 햇살이 아침저녁으론 제법 싸늘하며 오후가 조금 지나자 영천군과 자동선이 손을 맞잡고 제일청의 집에 도착하였다.

“어서 오시게. 영천군 사위...”

영천군은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하고 며칠 전까지도 퇴기로 아랫것 취급을 했는데 자동선과 약식결혼식을 치르고 놀러가는 기분으로 왔는데 사위소리를 들으니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제일청과 자동선은 수양모녀 관계라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며 반살미 상은 산해진미로 눈을 의심할 정도다.

“내 이런 영광스런 날이 언제고 오리라 믿고 산해진미를 항상 준비해놓고 있었다네!

내딸 자동선이 어디 보통 여자인가 중국 사신들까지 목을 매고 수청을 간청했으나 번번이 뛰어난 기지와 지혜로

그들의 체면을 지켜주면서 정조를 지켜 오늘날 영천군 나으리를 지아비로 섬기게 되었소이다.

어서 앉아서 맛있는 술과 안주가 준비됐으니 마음껏 드시게. 화촉동방은 잘 치렀겠지 자동선아?”

영천군 옆에 앉아있던 자동선이 부끄러워 농익은 가을 석류알 같이 얼굴이 붉어져 몸둘 바를 몰라한다.

“부끄러워 말거라. 여자라면 한 번은 겪는 즐거움이니라.” 제일청이 한술 더 떠 준다.

“하하하, 영천군 나으리께선 천하재색 자동선 신부의 옷을 잘 벗기셨지요? 옷 벗기는 차례야 여러 번 해 보셨을 터이니 거칠 것이 없으셨겠지요?”

사가정이 너스레를 떨어도 영천군은 묵묵부답이고만족했다는 표정으로 사가정은 읽고 있으며 자동선 만이 귓불까지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들지 못하고 몸 둘 바를 몰라 한다.

사내들 앞에서 언제 어디서고 당당했던 자동선인데 지금은 영천군과 화촉동방을 치르고는 부끄러워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8년 동안 고이 간직했던 정조를 아낌없이 받치고 아쉬움과 해방감에 영혼의 자유를 찾아 새로운 안식처를 찾았다는 의미일 터다.

떠나시던 길 하염없이 보느라고/

사립도 닫지 않고

밤 깊도록 기다리고 있다가/

찬 이슬에 옷 다 젖었다오.

임 계신 양산관에는/

고운 꽃이 얼마나 피였기에/

날마다 보느라고/

돌아오실 줄 모르시나요.

양사기 풍천부사 애첩의 '님 기다리며'다.

당시 조선의 여자들은 시집가면 00댁 또는 애기씨로 불렀고 시의 주인공은 양사기의 첩이므로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아 ‘첩’으로 표기 되었다.

조선 사회는 철저한 남존여비 시대이고 남녀칠세부동석의 사회로 시집가면 친정에서 떨어져 나온다.

자동선도 재색과 학문이 높은 기녀신분에선 뭇사내들이 잠자리를 갈망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흠모의 대상이었으나 영천군의 여자가 된 이상 철저한 한 남자의 여자가 되었다.

사실 한양엔 송도보다 재색을 겸한 여자들이 많으며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으나 이젠 규율이 엄격한 왕실의 여자가 된 이상 과거는 깡그리 잊고 영천군의 여자로 살아가야 할 운명이 되었다.

화촉동방을 치룬 하룻밤이 그녀의 운명을 갈라놓았고 제일청의 집에서 반살미 상을 후하게 받은 새신랑 부부는 집으로 다시 돌아와 내일 한양으로 떠날 채비에 부산하다.

오늘따라 휘영청 뜬 달이 대낮같이 밝고 자동선은 만감이 교차되었으며 왕손의 첩이 됐으니 더욱 마음이 편치 않았다.

평범한 사내의 여자가 됐으면 지아비만 잘 섬기면 되나 왕손의 여자가 됐으니 가릴 것도 지켜야 할 예의범절도 많을 것이 뻔해 송도에서 마지막 밤은 뜬눈으로 지새웠다.

영천군도 화촉동방을 치를 때와는 다르게 술기운에 한번 즐기고는 밤새 몸을 뒤척이었다.

한양에 가서 종친들과 일어날 일들에 대해 미리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 하고 아마도 이 밤이 영원히 밝지 않기를 바랐을지도 모를 것이다.

- 최종화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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