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야화 황진이(제12화)

 
 

이별의 날을 세어 나가는 이사종의 마음은 촌각이 아까웠고 그는 아침저녁 잠시 진이를 볼때도 표정을 유심히 살폈으며 열흘에 한번은 나들이를 꼭 나섰다.

송도도 아름답지만 한양의 활기차고 역동적인 육조거리와 사대문 안팎의 풍광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봄에는 성밖 북둔(성북동)으로 함께 말을 타고 복사꽃 장관 속을 거닐었고 홍인문밖 낙산아래 휘늘어진 봄버들 길도 구경시켜주었다.

“어떻소? 한양 풍광 영미가 마음에 드오?”

진이는 묵묵부답이고 진이의 몸은 한양에 와 있어도 마음은 송도에 가 있었다.

한양이 역동적이면서 마음에 조금씩 정이 붙어가면 갈수록 고향 송도가 그리워지고 종적을 알 수 없는 어머니가 몸서리 쳐지도록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몸과 마음에 착 달라붙어지는 이사종과의 하루하루도 싫지 않았다.

기생의 길로 들어선 이후 손에 물 한 방울 걸레질 한번 안 해본 자신이 지금은 부엌에도 들어가고 걸레질도 하는 보통의 아낙이 되었다.

이사종의 덕분이며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면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진이는 이제야 알았다.

한참 침묵이 흐르는 사이에 진이와 이사종을 태운 말은 한강 노들 녘에 다다랐다.

“이 진이는 한양에 와서 늘 삼봉의 '한양찬가' 중 '서강조박'(西江漕泊)에 관심이 높아요.

'한양찬가'는 이제현의 '송도팔경'을 연상케 하는 시(詩)지요! 그 중에서도 '제방기포'(諸坊碁布)에 매료 됐어요.

어느새 점심때가 되었네요. 진이가 점심을 간단하게 준비했어요!”

진이는 간단히 먹을 것과 송도의 명주 태상주를 꺼냈다.

“허허허, 언제 점심 준비까지 했소이까? 나는 이곳을 잠시 둘러보고 종로 피맛골에 가서 요기를 하려 했는데...”

이사종은 그윽한 표정으로 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태상주 한병을 비운 그들은 흐드러지게 늘어진 버들이 바람에 춤을 추는 분위기에 맞추어 노래를 주고받는다.

이사종은 '송도팔경'에서 '백악청운'(白嶽晴雲)을 불렀고 진이는 '한양찬가' 중에 '열서성공'(列署星拱)을 절창하였다.

피맛골에 들려 옥인동 집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조강지처 정씨가 도끼눈을 뜨고 불호령을 떨어뜨렸으나 이제 계약결혼 3년이 얼마 안 남아 눈을 감아 주는 분위기다.

오히려 정씨가 아쉬워하는 태도이며 진이가 시어머니에겐 대화의 상대가 되어주었고 아들에겐 선생님이 되어주어 고마운 존재가 되었었다.

어느새 그들은 날카롭게 물어뜯는 적에서 서로 필요로 하는 존재로 발전하였고 진이의 헌신적 노력이 만들어 낸 가족적 분위기다.

“형님, 제가 송도에 가더라도 형님의 따뜻한 사랑은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진이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뜻한 밥상을 정씨한테서 받고는 두 눈에서 눈물을 와락 쏟아냈고 더욱이 이사종과 겸상차림이었다.

계약결혼 만기는 이제 보름 앞으로 다가왔고 떠날 때까지 잠자리를 매일 허락한다는 조강지처 정씨 말에 이사종은 밥을 먹다말고 벌떡 일어나 덩실덩실 춤까지 추었다.

“진이 내 그동안 독하게 대한 것 양해해 주시게! 자네도 내 처지가 돼보면 여자마음 알걸세.”

정씨는 정말 아쉽고 미안했다는 표정이며 무거운 침묵이 잠시 흐른 뒤 정씨는 주섬주섬 밥상을 정리해 들고 나갔다.

3년 사이에 조강지처와 소실은 언니동생이 되었고 떠날 날이 다가오자 진이는 주위를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잠자리도 매일밤 양해를 받았으나 되도록 피했고 마음은 보이지 않으나 몸은 행동이 보여 떠날 때일수록 아름답게 정리하고 싶어서다.

이사종은 매일밤 운우지락을 하려 했으나 진이는 매정하게 거절하였고 한양의 마지막 밤에 최후의 몸을 활짝 열어주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달이 휘영청 밝은 보름밤이고 그날만은 진이가 아닌 명월(明月)이 되어 철저한 이사종의 여자가 되었다.

송도로 갈 날짜가 내일이고 진이는 오랜만에 거문고를 꺼냈으며 그동안 첩살이를 하면서 거문고를 탈 만큼 여유있는 생활이 아니었다.

아무리 너그러운 조강지처라도 첩이 예뻐보일 여인은 이 세상엔 없으며 씨앗엔 돌부처도 돌아앉는다 하지 않았던가!

진이는 오랜만에 거문고를 꺼내 타면서 '한양찬가' 중 '북교목마'(北郊牧馬)를 불렀다.

숫돌같이 평평한 북녘들 바라보니/ 봄 오자 풀 무성하고 물맛도 좋아/

만마가 구름처럼 모여 뛰놀고/ 목자는 마음대로/ 여기저기 서성이네.

진이의 노래에 이사종이 곧바로 이었고 '송도팔경' 중 '청교송객'(靑郊送客)이다.

들 절간에 송화꽃은 떨어지고/ 비갠 냇가엔 버들 솜이 날리네./

타고 갈 백마에겐 재갈을 물려놓고/ 떠나려해도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네./

모이면 헤어짐은 예나 이제나 마찬가진데/ 인간의 공명은 꿈이 아니고 무엇이랴/

청산은 남몰래 꾸짖으며 나무라기를/ 누가 소광(疏廣)과 소수(疏受) 두 사람을 아꼈으랴!

노래를 마친 이사종은 진이를 덥석 안았고 진이도 기다렸다는 듯이 거문고를 팽개치듯 옆으로 제쳐놓고 이사종의 품에 안겼다.

이 밤이 밝으면 진이는 이사종의 여자가 아니고 사내는 성급히 달려들었으며 여자도 그런 사내가 싫지 않았다.

오늘밤은 영원히 밝지 않기를 그들은 마음속으로 기원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며 한 몸이 되었다.

이사종이 진이의 두 다리를 벌려서 밀고 들어왔으며 뜨거운 신음소리를 내는 진이의 두 눈엔 알 수 없는 눈물이 쉼없이 흘러나왔다.

거대한 파도에 배가 흔들리듯 이사종은 진이의 몸에서 신명나게 연자방아를 찧는다.

뜨거운 살이 교합되자 이사종이 몸을 틀어 진이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묻으려 한다.

“아니 됩니다. 더렵혀진 몸입니다.”

진이는 몸을 돌려 등을 보였다.

“아니요. 내가 당신을 깨끗이 씻어 주리다. 이 시간 이후 당신은 옥황상제께서 이승으로 잠시 휴가를 보낸 선인(仙人)이 되는 겁니다.”

이사종은 돌아누운 진이를 다시 돌려서 정성껏 청나라로 끌려갔다 돌아온 화냥년(환향년)들이 세검정에서 몸을 씻듯 깨끗이 정화시켰다.

이사종은 금방 코를 골며 잠들었고 알몸이며 반듯한 이마와 깊이 그늘져 감긴 눈과 오뚝한 콧날에 꼭 다문 입과 턱...

진이는 밤이 새도록 초롱초롱하게 눈을 뜨고 이사종의 모습을 가슴속에 담았다.

먼동이 트면 말을 타고 송도로 갈 준비가 되었고 이사종도 이제 자신의 삶에서 지워버리려는 것이다.

- 13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황진이(제11화)

 
 

한양은 송도와 달랐으며 송도는 색향(色香)으로만 떠들썩하게 알려졌지 실속은 없어보였고 진이는 번개처럼 시상(詩想)이 떠올랐다.

옛절은 쓸쓸히 어구 곁에 있고/ 해질 무렵 교목에 사람들 시름겹도다./

연기와 놀은 쓸쓸히 스님의 꿈결을 휘감고/ 세월만 첩첩이 깨어진 탑머리에 어렸다./

누런 봉황새 날아간 뒤 참새 날아들고/ 철죽꽃 핀 곳에서 소와 양을 치는데/

송도의 번화했던 날을 추억하니/ 어찌 지금처럼 봄이 가을 같을 줄 생각이나 했으랴.

'만월대를 생각하며'다.

한양은 생기가 있으며 고려를 역사의 뒷길로 밀어 붙이고 새 역사를 써가는 조선의 중추며 경복궁 앞 육조(六曹)거리는 붐볐다.

진이는 옥인동 이사종 집으로 들어온 이후 시간이 있을 때 마다 육조거리를 살폈다.

그때마다 진이는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의 '진신도팔경시'(進新都八景詩)를 떠올렸다.

그리고 진이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29명의 부인도 동시에 상기시켰다.

경복궁의 위용과 육조거리의 질서 정연함과 활기찬 모습에 고려 초기 개성 모습이 동시에 떠올라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나에 혼란을 느꼈다.

진이는 조선에 태어났어도 고려 여인임을 자부하면서 살았는데 한양에 와서 경복궁과 육조의 거리를 걸어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고려의 여인으로 자부함은 어느 남성에게도 예속되지 않으려는 태도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이사종의 소실로 한양에 와 있지 않은가! 이율배반의 자신의 행동에 전율을 느끼며 서둘러 옥인동 집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가을 해는 짧았으며 아침밥을 먹고 설거지까지 하고 육조거리를 거쳐 청계천까지 둘러보고 집에 왔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어딜 그렇게 매일 다니오?” 이사종의 볼멘소리다.

“육조거리와 청계천과 피맛골을 둘러보느라 늦었네요! 미안해요. 서둘러 저녁준비를 하겠어요.”

진이의 옥인동 계약결혼 3년이 시작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고 그 한 달 동안 진이는 새로운 세상을 많이 배웠다.

말로만 들었던 소실생활을 자청하여 들어왔고 짐작은 했었으나 조강지처가 얼마나 당당한 자리이고 소실의 위치가 얼마나 굴욕적 자리인가를 몸소 생활해 보고 있는 것이다.

소실로 들어오란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는데 지금 진이가 이사종의 소실이 되었다는 소문이 한양에 퍼지면 세상 사람들이 여자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며 수군댈 것이 뻔하다.

세상이치로만 보면 그것이 맞고 소세양을 비롯한 송도의 거부와 신분은 낮으나 고대광실을 가진 의원이 소실자리를 제의 했을 때에는 콧방귀 뀌었는데

무관직 정삼품에 지나지 않는 선전관의 소실자리에 들어간 천하의 진이를 비웃고 빈정댈 것이 뻔하며 한양 아낙네들의 수군대는 소리에 귀가 따갑다.

“남녀관계란 알 수 없어. 천하의 송도 진이가 한양에까지 와서 이사종의 첩이 될 때에는 뭣이 있겠지? 아마 속궁합이 기가 막히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고관대작의 소실자리도 팽개치고 고작 선전관 소실로 들어갔을 때엔 무엇이 있어도 있어...

이사종이 천하제일의 소리꾼에 허우대야 어느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지! 아마 진이가 그 허우대에 빠졌을 거야.”

빨래터의 아낙들의 얘기가 딱 맞았고 진이는 이사종의 사회적 지위나 재물에 팔려온 것이 아니라 옥골선풍에 달콤한 밤 자리도 빼 놓을 수도 없다.

화대를 받고 몸을 내줄 때에는 돈 값을 해주기 위해 인형처럼 움직여 주며 코맹맹이 소리도 적당히 내주어 사내의 기쁨을 안기는 기생이었으나

이사종과는 몸과 마음이 통하는 관계가 아닌가! 그런 관계를 빨래터의 아낙들이 알 리가 없다.

이사종과 진이의 관계는 하늘도 땅도 모르고 오직 당사자인 둘만이 알고 있는 잠자리 비밀이며 진이의 계약결혼은 그렇게 성사되었다.

소세양과 30일의 계양결혼이 그렇게 맺어졌다 헤어졌으며 이사종과의 관계도 역시 약속된 6년 후엔 또한 그렇게 미련없이 진이는 송도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진이는 삼봉의 '한양찬가'인 '진신도팔경시'에 관심이 끌렸다.

송도엔 '송도팔경'이 있는데 그에 비교가 되어서고 특히 진이는 '도성궁원'(都城宮苑)에 마음이 끌렸다.

성은 높아 천 길의 철옹이고/ 구름은 봉래오색을 둘렀구나./

해마다 정원에는 앵화(鶯花:꾀꼬리 날고 꽃이 만발함) 가득하고/ 세세로 도성사람 놀며 즐기네.

송도와는 너무도 다른 풍광이고 그렇게 진이의 한양생활에서 첩살이는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 놀았다.

낮에는 부엌일에서 아이 가정교사 역할에 밤엔 이사종과 속궁합을 맞춰가며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육신은 고달프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달콤한 잠자리의 행복에 낮의 고단함이 묻혔다.

송도에서 진이와 한양에서의 진이는 공주와 무수리만큼이나 차이가 있는 생활이었다.

하지만 진이는 행복하며 그토록 오매불망했던 이사종을 곁에서 볼 수 있고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마음껏 품을 수 있다는 데에 욕망의 나래를 접었다.

“후회하지 않소?”

이사종은 뜨겁게 살을 섞고 나면 꼭 묻는다.

“왜 서방님은 후회 하세요?”

진이의 말이 떨어지면 그들은 다시 이합(二合)에 들어갔다.

일합(一合)으로 육체의 허기를 채우고 이합은 더 길고 느긋하게 밀고 당기며 사랑의 진수를 음미하려는 것이다.

진이는 이때마다 옥섬이모가 말해 준 잠자리 기술을 행동으로 옮겼다.

“참으로 서방님은 참 잘생기셨어요! 진이의 눈엔 천하의 남정네 중 가장 헌헌장부예요.”

진이의 손이 이사종의 뿌리를 움켜쥐었고 이합까지 즐긴 뿌리는 오뉴월 엿가락처럼 쳐졌다.

진이의 손이 닿자 번개를 맞은 듯 놀라 다시 고개를 들었고 진이는 두 팔과 두 다리를 벌리어 이사종의 등을 끌어안았다.

이사종이 입을 커다랗게 벌려 백합처럼 흰 진이의 탱탱한 젖가슴을 잘 익은 사과를 깨물 듯 깊게 물었고 진이의 몸도 해일처럼 일어나며 출렁이기 시작하였다.

이사종은 일주일에 한 번씩 진이의 방을 찾았고 조강지처 정씨의 허가를 받은 합방이며 몇 시간의 양해지 밤새 허가는 아니다.

하지만 계약결혼 3년이 부득부득 다가오자 이사종은 조강지처의 눈치는 아랑곳 않고

진이의 방에 들어오면 동창이 밝아올 때까지 송도 명월관에서 알몸뚱이로 사랑을 할 때를 연상케 하는 방사를 즐겼다.

- 12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황진이(제10화)

 
 

송도팔경 구경 채비에 부산하고 한양으로 올라가기 전에 팔경을 모두 보지는 못해도 몇몇 곳은 보고 가려는 속내다.

진이는 신이 났는데 옥섬은 시무룩하고 며칠 전부터는 식사도 거를 때도 있다.

진이가 송도팔경을 구경하고 한양으로 올라가면 옥섬은 다시 퇴기신세로 돌아갈 우려 때문이다.

옥섬은 퇴기생활이 무섭고 진이가 황진사 딸로 어느 사대부집 며느리로 들어갔으면 오늘의 고대광실의 명월관에서 살기는커녕

구경도 못할 신세인데 후원을 오가며 행복을 누리는 삶이 깨질까 벌써부터 겁이 났으며 진이는 옥섬이모의 심정을 익히 알고 있다.

“이모 진이가 송도를 떠나 명월관을 없앨까 걱정하시는 것 같은데 마음 놓으세요! 명월관은 이모 생전엔 진이가 주인으로 있을 거예요.

진이가 한양에 올라가더라도 이모가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해 드리고 갈게요! 진이는 한양에서 3년만 살고 송도로 다시 옵니다!”

“진이야, 내가 이 한 몸뚱이를 걱정해서가 아니고 낭랑(朗朗)18세란 것이 있단다!

이 바닥(기생의 세상)엔 낭랑18세 때 한몫 잡아야 퇴기 때 설움을 당하지 않아. 진이 너도 어느새 낭랑18세를 넘어가고 있어.”

옥섬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내려와 진이 손등에 떨어졌다.

“이모 걱정 말아요! 이 진이만 믿고 지금처럼 사세요.”

옥섬을 끌어안은 진이의 두 눈에서도 비 오듯 눈물이 쏟아졌다.

옥섬을 볼 때마다 진이는 십수 년째 생사를 모르는 어머니가 떠올랐다.

이때다. 팔경 구경 할 채비가 다 되었다는 손으로 신호를 보냈고 이사종은 옥섬의 눈엣가시다.

이사종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진이가 한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으리란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사종은 옥섬의 눈에 되도록 띄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으며 밥도 사랑채에서 혼자 먹고 후원에서 주로 낮 시간을 보낸다.

관아의 정무는 명월관에서 출근하여 처리해 되도록 진이와 낮 시간을 보내려 하고 관아의 아전(衙前:관아의 말단 실무자)들은 제 세상이다.

상전이 정무만 간단히 처리하고 자리를 비우니 눈치 보지 않고 잇속을 차리고 관기(官妓)까지 희롱하면서 노는 재미에 날 새는 줄 모른다.

아침을 먹는둥 시늉만 하고 이사종과 말에 올라 팔경 구경 길에 올랐으며 이사종도 옥섬의 따가운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어 하늘을 나는 기분이다.

“서방님, 오늘은 우선 팔경을 모두 볼 수 없으니 서강풍설(西江風雪)과 장단석벽(長湍石壁)만 구경하시죠!

이 두 곳이 진이는 팔경 중 제일 마음을 사로잡아요. 팔경은 고려 대학자 이제현(李齊賢)이 '익제난고'에 최초로 나옵니다.

하지만 팔경은 중국의 북송(北宋)화가 송적(宋迪)의 소상팔경(瀟湘八景)에서 유래했고 이를 고려말 개성의 아름다운 여덟 곳에 응용한 것이지요!

한문을 중국에서 들여다 우리 것으로 만들 듯 고사성어 등 각종 문물도 중국의 것을 모방한 것들이 많아요!”

진이의 표정이 상기되기까지 하였고 소리꾼 이사종은 갑자기 진이의 진지한 표정에 엄숙한 자세를 취한다.

“진이는 특히 '서강풍설'에 매료되었어요! 제가 곡을 붙였어요.

눈은 강변가의 지붕을 덮었고/ 바람은 포구가의 돛대를 흔들어 놓네/

정자에 올라가 남창을 열고 보니/ 구름 낀 바다는 아득하기만 하네./

은실같은 생선회를 썰어 놓고/ 술 단지 기울여 한 잔 마시네./

예성강 굽어보며 한 곡 부르니/ 하두강은 애간장 끊어지는 듯 아프리라.

"이 얼마나 멋과 풍류가 있나요?”

진이의 거문고 반주에 명창 이사종의 노래가 서강풍설의 아름다움에 화룡점정 시켰다.

서강풍설을 구경한 뒤 말 채찍에 힘을 가해 장단석벽을 거쳐 그들은 서둘러 명월관으로 돌아왔다.

어젯밤에도 허리가 아프도록 욕정을 채웠으나 그 밤이 그리워졌다.

진이는 숱한 사내들의 욕정을 채워 주었으나 이사종은 자신이 좋아 계약결혼까지 한 사내이니 마음 놓고 육체의 허기를 채울 수 있는 상대다.

더욱이 송도생활 3년은 모든 것을 자신이 대고 한양의 3년은 소실(小室)의 자리로 계약을 맺었다.

이처럼 철저하게 계획된 생활을 하루하루 뜨겁게 보냈고 그토록 뜨거운 세월은 세 번의 봄과 세 번의 가을을 향하여 이미 유수같이 흐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식지 않았다.

“내일 한양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한양에 가면 3년은 송도에 올 수 없으니 장단석벽을 한 번 더 보고 떠나면 어떨까요?”

아침을 먹고 관아로 출근하려는 이사종에게 의사를 물었으며 풍덕군수는 엄연히 매일매일 정무가 있는 몸이다.

“내 관아로 가서 잠시 정무를 보고 곧 돌아오리다.”

이사종은 말에 올라 바람처럼 사라졌다.

진이는 옥섬이모가 걸렸고 명월관엔 옥섬이모 말고도 여러 식구가 있다.

진이가 한양으로 올라가면 명월관은 임금 없는 대전(大殿)같이 썰렁해져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퇴기생활을 했었던 옥섬이 더욱 노심초사한다.

“이모 걱정하지 마세요. 진이가 이모가 3년 동안 편히 사실 수 있게 모든 준비를 해 두었으니 편히 계세요!

진이가 3년 후 가을에 정확히 송도로 돌아올 거예요!

이 아름다운 송도팔경을 두고 어디로 떠나겠어요.”

진이는 또 장단석벽에 거문고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구름은 산높이 떠 있는데/ 공중에 눈썹같은 절벽 열렸네./

고기와 용은 굴 구비로 굴러가네./ 백리나 푸른빛이 감도네 그려./

달은 파리한 물속에 잠겼는데/ 꽃은 비단처럼 곱게 쌓였네./

화려한 배에서 술 마시고 풍악 치며/ 돌고 또 돌아 천 바퀴나 돌았네.’

오늘따라 진이의 노래가 옥섬의 귀엔 장송곡(葬送曲)처럼 들렸다.

점심때가 조금 지나자 이사종이 돌아왔고 점심도 거른 채였으며 진이가 겸상을 하여 대낮이지만 태상주를 곁들였다.

얼큰하게 달아오른 그들은 송도의 마지막 밤이 되기도 전에 뜨겁게 엉켰고 진이는 이사종의 움직임에 옥섬이 가르쳐 준대로 몸을 움직였다.

아직 몸은 달아오르지도 않았는데 선수를 쳤으며 숨을 몰아쉬고 콧구멍을 벌름벌름 대며 입을 벌리고 두 다리에 힘을 넣어 뻗기까지 하였다.

이사종이 의아해 하면서도 덩달아 몸을 움직여 주자 진이는 가식이 아닌 송도팔경을 보며 막연히 그리워하였던 신선세계로 빠져들었다.

- 11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황진이(제9화)

 
 

진이가 마련한 집은 그림같은 풍광이고 자삼동 동쪽 선죽동 선죽교 이웃에 자리 잡았다.

행랑방이 두 개씩 붙은 솟을대문과 사랑채로 드나드는 샛문을 따로 갖추고

사랑채와 안채와 별채 사이에 담과 중문을 두었으며 사랑채 뒤쪽으론 대숲을 경계로 사당이 모셔졌다.

지체 높은 사대부 집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진이는 이곳에서 손님을 맞는다.

이사종(李士宗)과 계약결혼을 하여 여자노릇을 제대로 해보려는 속내다.

마음에 쏙 드는 사내이니 영혼까지 받쳐 사랑을 불태우려는 것이다.

화대를 받고 몸을 내줄 때는 돈값을 해주어야 하니 억지로 웃고 상대의 성정에 들도록 몸도 움직여 주어야 하지만

내 남자라고 생각한 상대엔 몸과 마음이 기쁨에 넘쳐 영혼까지 콧노래를 부를 수 있어서다.

이사종과는 관아의 기생시절 풋사랑으로 예비꽃잠(첫날밤)이 있었고 그때 진이는 이미 이사종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진이가 이사종에게 넋을 잃은 것은 헌헌장부이기도 하지만 소리에 반했기 때문이며 이사종은 팔도에서 명실 공히 소리를 제일 잘하는 사내다.

몇 십 명이 그와 대결을 청하여도 당당히 응해주었으며 하루 종일도 쉬지 않고 소리를 할 수 있는 풍부한 레퍼토리도 갖고 있었다.

그 소리의 매력에 진이의 영혼이 빨려들었고 그래서 관기시절 잠시 풋사랑을 나누었으나 못다한 사랑을 불태우려 하는 것이다.

그들은 풋사랑을 나누고 헤어질 때 사내는 책임 있는 몸으로 진이는 자유인이 되어 만나자고 약속하였다.

지금 진이는 그 약속을 지키려 하는 것이며 이사종은 선전관(宣傳官)이 되었고 진이는 자유인이 되었다.

계약결혼은 진이가 먼저 제의하였고 이사종은 이게 웬 떡이냐 하고 즉시 승낙을 했을 것이며 사실 이사종은 계획적으로 진이에게 접근하였다.

시·서·화 삼절(三絶)에 가무까지 능통한 진이에게 접근하여 사랑은 물론 기예(技藝)대결도 해보고 싶었던 욕망이 꿈틀댔던 것이다.

그런데 진이가 이사종이 천수원(天壽院)에서 유혹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마침 이곳을 지나던 그녀와 인연이 되어 풋사랑을 나눈 후 극적으로 5년 만에 해후하여 일부종사의 사랑을 하는 계약결혼에 들어갔다.

“내가 당신을 서방으로 우리 집에서 3년간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3년은 서방님 집에 가서 살도록 하렵니다.”

진이의 표정은 절대자에게 맹세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겠다는 단호하면서도

어미 앞에서는 어리광스럽게 순진한 눈망울을 보이는 젖먹이 같이 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 묘한 여인의 얼굴이다.

방금 하늘에서 하강한 선인(仙人)의 모습 그대로였고 화촉동방은 명월관에서 가장 뒤쪽인 선죽교가 빤히 보이는 별채에 차렸다.

이 방을 화촉동방으로 잡으며 아마 정몽주(鄭夢周)의 '단심가'(丹心歌)를 떠올렸을 것이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이 시조는 이방원(李芳遠:후에 태종)이 '하여가'(何如歌)를 부르며 정몽주를 회유했으나 '단심가'로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고려의 충신의 길을 걸었다.

정몽주는 그 후 선죽교에서 타살 당하였고 진이는 그 선죽교를 바라보며 이사종에게 정조(貞操)를 지키리라 마음먹었을 것이다.

이사종은 진이와 풋사랑을 나눈 후 헤어져 한양으로 가 무과에 응시하여 전전관이 되었다.

3년간 전하의 침소 경호에 공로를 인정받아 외직인 풍덕군 군수로 부임하였다.

후원이 내려다보이는 별채엔 남녀의 뜨거운 호흡이 끊이지 않는다.

후원엔 봄꽃들이 만발하였고 산철죽·모란·연산홍·자목련, 그리고 나무로는 매화·동백·복사꽃·살구꽃 등이 흐드러지게 되었다.

진이는 특히 연산홍과 매화꽃을 사랑하였고 지금 진이는 이사종과 뜨거운 살을 섞으면서도 창문너머 후원의 꽃들을 연상하고 있다.

이사종의 뜨거운 호흡이 가파르게 치솟았고 진이의 두 팔이 이사종의 등을 끌어안고 그 가파른 흥분을 동시에 타고 올라갔다.

“너무 보고 싶었소! 내 영혼은 항상 당신 곁에 있었소!”

진이는 이사종의 입술과 뺨에 두 눈과 입술을 맞추었고 이사종은 급히 진이를 눕히고 속바지를 벗겼으며 진이는 스스로 저고리 고름과 가슴띠를 풀었다.

봄날의 환한 햇살 속에서 뼈를 녹이는 사랑을 나눈 두 사람은 알몸인 채 까슬까슬한 홑이불을 감고 아랫도리가 얼얼한 채 두 손을 꼭 잡고 이야기꽃을 피워나갔다.

“내가 왜 풍덕군수가 된지 알겠소?”

이사종이 진이의 불두덩에 손을 얹으며 말하였다.

“글쎄요! 사내대장부 속내를 어찌 계집이 짐작하겠어요? 더욱이 한양에 계신 서방님의 속내를 머나먼 송동의 진이가 어찌 상상이나 하겠어요!”

진이의 반응은 의외로 신통치 않았다.

“나는 한양에 몸이 있으나 한시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소이다. 한양에 올라가 나는 장가를 들어 아들이 세 살이나 되었소.”

"그만하세요. 진이는 이사종 개인을 원할 뿐 그 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6년 동안은 저만 사랑해 주세요. 3년은 저의 집에서 살고 3년은 한양 서방님 집에서 살고 저는 다시 송도로 내려옵니다.“

이사종이 풍덕 관아로 들어가잔 말을 사전에 막기 위해 6년 후의 계획까지 말하여 버렸다.

사내들은 진이와 뜨거운 살을 섞고 난 후엔 예외 없이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한다.

이사종도 풍덕 관아로 들어오란 말을 할 것이 명약관화해서다.

“저는 관아에서 통제하는 관기가 아니에요! 저는 서방님이 저를 다시 찾아오리라 믿고 자유인이 되었어요. 기적에서 나온 지 벌써 3년이 지났어요.”

진이가 아사종의 엉덩이를 다시 끌어 당겼다.

진이가 영업은 하지 않고 이사종에 빠져있자 옥섬이모가 몸이 달았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놔야 자신과 같은 꼴이 되지 않는데 사내에 빠져 정신을 못차리고 있어 걱정이 태산이다.

옥섬은 퇴기로 청교방거리 뒷방에서 장죽에 담배를 피우며 죽을 날만 기다리다 현학금과의 의동생 신분으로

진이를 만나서 생기를 되찾아 살만한데 이 시간이 짧아질까 노심초사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이의 생각은 다르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 예고 가는고

그랬다. 진이도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유인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려한다.

외화내빈의 몸을 파는 기생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생각이며 진이는 한양으로 가기 전에 송도팔경을 보려한다.

등하불명이라 했듯이 진이는 송도에 살면서 송도팔경 중 단 한곳도 보지 못하여 소리꾼 이사종을 데리고 구경에 나서는 것이다.

태상주를 마시며 천하의 절창 이사종의 노래를 들으며 송도 절경을 구경하면 진이는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적선(謫仙:인간 세상에 귀양 온 신선)이 되려는 욕망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딸을 돌보듯 자신을 보살피는 옥섬이모의 걱정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 10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황진이(제8화)

 
 

주지스님의 정성어린 보살핌과 간곡한 기도로 진이는 기적적으로 다시 세상을 보게 되었다.

실상암에 들어온 지 보름이 지난 깊은 밤이었고 그날도 주지스님은 대웅전에서 진이를 위해 기도를 하고 있었으며 산사는 바람 한 점 없는 물속처럼 조용하다.

이때 조용했던 산사에 눈보라가 몰아쳤고 갑작스런 바람에 나무 위에서 눈꽃을 피웠던 눈들이 바람에 떨어지면서 눈바람이 산사를 삼켜 버릴 듯 요란하다.

여명이 보이려면 한참은 더 있어야 할 즈음이고 대웅전에 있던 주지스님이 마당으로 나와 기도를 하고 있었다.

이같이 소란스런 광경을 몸소 느끼려고 진이가 방에서 나오는 순간 하늘에선 천둥번개가 작렬하였다.

이 광경을 보려고 희미한 눈을 부비다 진이는 다시 세상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세상이 보인다. 세상이 보여!”

진이는 기도하는 주지스님의 품을 파고들었으며 스님은 이미 알고 있었듯이 진이를 깊고 따뜻하게 품었다.

“이제 날이 밝으면 암자를 떠나가시오!”

주지스님이 말을 남기고 품었던 진이를 풀어놓고 다시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진이와 덕구는 먼동이 트자 암자에서 내려와 한학금의 의동생 퇴기 옥섬의 집으로 갔으며 옥섬의 집은 청루가 즐비한 청교방 거리에 있다.

현학금이 진이를 황진사에게 주고 어디론가 종적을 감춘 후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옥섬은 청교방 거리에 자그마한 집을 얻어 거처하고 있다.

방이 셋인데 하나는 늘 정갈하게 정돈하여 비워두었고 진이가 언제든지 오면 마음 놓고 편히 쉴 수 있게 해둔 방이다.

“옥섬이모, 진이가 왔어요!”

진이가 올 줄 알았다는 옥섬은 덤덤하였고 해는 어느새 중천에 떴다.

“시장하겠다. 아침도 못 먹었을 텐데 밥부터 먹어라!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시래기 국에 감자가 섞인보리밥이었고 숟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진이가 입을 열었다.

“이모, 진이가 전우치(田禹治)를 봤어요. 제가 천둥번개가 작렬하게 칠 때 가슴이 떨리고 무서운데도

세상을 보고 싶어 희미한 눈을 부빌 때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동시에 하늘에서 백마 탄 옥골선풍의 선비가 저에게

‘진이야, 이제 너는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말하고 사라졌어요.

그가 전우치가 아니고서야 그 밤에 어떻게 그곳에 올 수가 있겠어요? 소문으로 들은 전우치와 똑 같았어요! 이모.“

진이의 눈에는 지금도 실상암 앞에서의 비몽사몽 장면이 선명하다.

당시 전우치의 도술(道術) 얘기는 송도에서는 흔한 애기였고 특히 재령군수 박광우(朴光佑)는 전우치와 친구사이였다.

도술은 혹세무민하다 하여 금기시 되었고 전우치도 도술을 부린다하여 경계당한 인물이며 나라에서 사형명령이 떨어진 상태다.

중중(中宗:1506~1544)시대 전우치는 친구인 박광우 집에서 목매 자살하였다.

그런데 몇 년 뒤 누군가 박광우를 찾아와 전우치의 지팡이를 달라기에 그를 쳐다보니 전우치였다는 것이다.

또한 서경덕 형제들과 도술 경쟁 등의 애기들이 송도엔 낯설지 않은 화젯거리다.

진이도 아버지 황진사 집에 있을 때 사랑채와 어머니 신씨 등에 오가는 얘기들은 귀동냥하여 생소하지 않았는데 실상암에서 극적으로 비몽사몽 상태에서 봤던 것이다.

천재 진이로선 전우치의 얘기들이 낯설거나 의문투성이도 아니었고 아버지 서재의 각종 서책에서 도사(道士)들의 얘기를 수없이 접해 익히 알고 있었다.

진이의 기생 입문은 속전속결이었고 동기(童妓)로 시작하여 2년 사이에 송도와 한양의 한량들이 품고 싶은 미색(美色)에 올랐다.

진이가 열여덟살을 맞는 어느 봄날 고을 유수에게 수청을 들게 되었고 본인 진이보다 현학금의 의동생인 옥섬이 더 긴장하였다.

고을 유수의 수청을 잘 들어 좋은 점수를 얻어야 관기(官妓)의 운명도 좋기 때문이다.

진이도 예외가 아니었고 사대부집 딸에서 어느 날 갑자기 서녀가 되어 마침내 기녀(妓女)가 되었으니 한량들 세상의 관심의 여인이 되었다.

고을 수령이 동기들의 초야권을 갖는 것은 이상 할 것도 없으며 진이의 초야권도 그렇게 송도 유수가 태상주(太常酒) 한 잔 마시듯 어느 날 차지하였다.

진이의 기녀생활 삼년 만에 기적에서 나와 자유인으로 한량들의 세계를 주름잡았다.

진이 앞에 한량들의 부나비처럼 몰려들었고 비록 몸을 파는 기생이나 마음에 드는 사내도 있으며 소위 순정이란 것이 있는 것이다.

돈(花代)을 주고 진이의 몸은 샀으나 영혼까지 살 수는 없어서이기 때문이다.

숱한 사내들이 진이의 몸뚱이를 사서 육체의 향락을 즐겼으나 시·서·화의 삼절(三絶)을 넘어 노래와 춤, 기예(技藝)까지 능통한 영혼까지 사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 사내가 진이의 영혼을 사로잡았고 바로 이사종(李士宗)이며 그는 부도 명예도 없는 소리꾼 낭만파 소위 집시(Gipsy)다.

그 청년에게 진이의 영혼이 넋을 빼앗겼고 이사종은 어느 고관대작의 서자(庶子)이며 조선의 대표적 옥골선풍에 소리를 잘하는 떠돌이 인생이다.

그런데 그가 같은 서자 출신인 삼당시인 이달(李達)과 둘도 없는 사이다.

이달은 허엽의 아들 허봉과 가까운 사이이며 허엽은 후에 진이와 같이 서경덕의 동문수학 관계다.

아무튼 이사종은 진이와 영혼이 통해 명월의 집에서 무상으로 먹고 자는 유일한 사내가 되었다.

손님이 없을 땐 그들은 밤을 새는 신혼부부로 자연스럽게 뜨거운 밤으로 갔으며 옥섬은 걱정이 태산이다.

기생 나이 열여덟이면 절정의 꽃같은 시절인데 자칫 무일푼의 떠돌이에게 정신이 팔려 좋은 시절 다 보내고

자신과 같은 신세가 될까 눈앞이 캄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 사내들과 살을 섞을 때면 진이는 옥섬의 말을 잊지 않았다.

“네가 뜨거워져야 사내들도 뜨거워진다?”를 실천하여 비록 화대를 받고 몸을 내어 주었지만 제 남자처럼 사랑스런 여인이 되려하는 것이다.

조선판 '소녀경'(素女經)이나 '현묘경'(玄妙經)이 되어 남녀칠세부동석이 아닌 남녀동등사회의 선구자가 되려는 의지다.

지금은 생사조차 알 길이 없는 어머니 현학금이 열여덟에 거문고의 명인이 되었는데 진이 역시 같은 나이에 그 반열에 올랐다.

진이는 남녀관계를 뛰어넘어 학문의 세계까지 섭렵하여 누구와도 밀리지 않는 역할을 하였고 고려의 핏줄을 이어받은 진이는 항상 길재(吉再)의 시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고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를 되새기며 미래를 꾸몄다.

- 9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황진이(제7화)

 
 

추풍낙엽처럼 진이의 신분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고 사대부집 딸에서 서녀(庶女)가 되었다. 

“너는 다리 밑에서 주어온 계집애야!”로 놀려대던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기생의 어미에서 태어나 그동안 사대부집에 들어와 호의호식하며 컸으니 이제 제자리인 서녀로 돌아가라는 것이며 발단은 이러하다. 

지체높은 사대부집에서 청혼이 들어왔는데 그 자리를 동생인 난이한테 양보하라며 출생의 비밀을 털어놨다. 

서녀가 어떻게 사대부집 옥골선풍의 총각의 신부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며 그때서야 진이도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되었다. 

집을 나온 진이는 하늘아래 천애고아 신세이고 게다가 진이는 갑작스런 충격으로

앞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였고 뿌옇게 안개가 끼여 상하좌우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진이는 직감으로 경이 오빠와 동생 난이와 자주 찾았던 실상암쪽을 향하여 걷기 시작했는데 누군가 뒤에서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성숙한 처녀의 몸으로 아침 일찍 집에서 나온 진이는 해질 무렵 실상암에 도착하였고 주지는 어떻게 알았는지 진이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뒤따라온 발자국의 주인공은 실상암까지 따라왔고 뒤따라오던 주인공은 황진사집을 드나들며 살림살이를 사 나르던 저잣거리 총각 덕구(德玖·가명)였다. 

그는 비록 사농공상(士農工商)중 상에도 들지 못하는 천민이지만 허우대는 사대부도 부러워 할 헌헌장부다. 

진이도 사춘기가 지난 여자로서 사내를 볼 줄 아는 나이가 되자 그가 집안에 오갈 때면 그의 시선이 덕구의 가슴에 머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진이가 사대부집 딸에서 서녀로 신분이 바뀌어 집을 내쫓기다시피 하여 나서는 길에 그가 따라온 것이다. 

대문을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여섯 발자국 뒤에서 따라붙기 시작하여 실상암 관음굴 앞에 도착할 때까지 말 한마디 없이 두 사람은 걸었다. 

짧은 가을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너는 집에 돌아가지 않고 나를 계속 따라오면 어쩌자는 거냐?” 

“아씨, 아씨를 혼자 두고 제가 어떻게 그냥 돌아갈 수 있겠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왜 내 걱정을 하느냐! 어서 당장 돌아가거라.” 

묵묵부답이고 진이는 대답이 없자 뒤를 돌아봤으며  사내는 덕구로 대답대신 계속 걸어와 진이의 눈앞에 와 섰다. 

“돌아가지 않고 내 말이 말 같지 않게 들리느냐?” 

“아씨 제가 돌아가도 될까요?” 

둘이 옥신각신하고 있는 사이에 어떻게 알았는지 주지스님이 나왔다. 

현암(玄岩) 주지는 비몽사몽간에 황진사가 나타나 밖에 좀 나가보게 하고 사라져 밖으로 나와보니 진이와 덕구가 입씨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실상암은 사월초파일 등에 황진사가 넉넉한 시주를 하여 인연이 돈독한 관계다. 

“젊은이들은 날이 저물었으니 안으로 들어가 쉬게나. 지금 다시 마을로 돌아가긴 너무 늦었어!

해가 지면 여긴 맹수들이 날뛰어 여간 위험하지 않아.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게.” 

현암 주지스님은 둘을 떠밀다시피 하여 안으로 들여보냈고 점심도 거른 그들은 주지스님이 준 저녁밥을 맞바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아직 어둠이 깔리지 않았는데 벌서 관음굴 쪽에서 부엉이가 울었고 부엉이 울음소리 사이엔 간간이 늑대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산사의 밤이고 진이는 산사의 자신이 믿어지지 않았으며 꿈속을 헤메고 있는 것 같았다.

손으로 두 뺨을 꼬집어 보았으나 분명한 현실이고 이때 맞은편에 앉아있던 덕구가 말했다.

“아씨, 이 덕구는 문밖에서 잘 터이니 아씨는 편히 주무세요”라고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아니다. 밤 바람이 차니라! 이곳에서 너도 자려무나...” 

다 자란 남녀가 한방에서 잘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진이는 즉흥적으로 한 말이다. 

“아니 될 말이예요! 이 방에선 진이 아씨 혼자 주무시고 소승도 대웅전에서 자렵니다.” 

산사의 좁은 공간에서 젊은 남녀의 잠자리를 정리해 주고 주지스님은 대웅전으로 갔다. 

사실 덕구도 진이 말대로 못이기는 척 같은 방에서 자고싶지만 자신이 한 말도 있고 주지스님도 자리를 비워주며

진이 혼자 조용히 편안하게 잘 분위기를 만들어주는데 덕구도 마음과는 다르게 밖으로 나왔으며 밤하늘엔 별들이 총총하다.

밤바람에 거목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이름 모를 산짐승들의 울음소리처럼 들렸으며 덕구가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고 소름까지 끼쳤다. 

밤바람이 제법 차갑고 밤이 깊어지자 오슬오슬 추위에도 덕구는 소르르 잠이 왔으며 잠이 들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눈이 자꾸 감겼다. 

진이를 지키려는 뜨거운 마음에서 산사까지 따라왔는데 산짐승들이 울어대는 깊은 밤에 잠이 들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밀물처럼 밀려드는 좋음엔 속수무책이고 어느 때쯤인가 덕구의 어깨에 무거운 짐처럼 눌려옴을 느꼈다. 

“누구얏!” 

소리치며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났고 덕구는 순간적으로 산짐승이 자신을 덮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던 것이다. 

“나다. 잠이 안와서 밤하늘의 별이라도 보고 있으려고 나왔느니라!” 

덕구의 어깨에 몸을 의탁했는데 놀라 단발마를 토해냈고 덕구는 가슴이 뛰고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사내가 그만한 일에 그렇게 화들짝 놀래서야?” 

진이가 다시 덕구의 어깨에 몸을 의탁하였고 덕구의 코에 진이 한테서 풍겨나오는 신비스런 향기에 넋을 잃을 지경이다. 

덕구의 고함소리에 주지스님도 대웅전에서 나왔고 진이를 가운데로 덕구는 왼쪽에 주지스님은 오른쪽에 앉았다. 

“이곳은 가을이지만 곧 초겨울이 됩니다. 산사의 암자가 협소하고 불편하시더라도 참고 견디세요! 며칠을 지내보면 곧 적응이 될 겁니다.” 

주지스님은 다시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진이아씨, 아씨도 방으로 들어가셔서 주무세요. 밤이 깊었습니다.” 

덕구는 진이를 떠밀다시피 하여 방으로 들여보냈고진이는 덕구의 손이 옆구리에 닫자 순간적으로 가슴이 뛰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덕구도 역시 옷 속이지만 말랑한 진이의 살이 손에 느껴오자 정신이 혼미해지고 밀려왔던 잠이 은하수 밖으로 도망갔다. 

진이도 방으로 들어갔으나 쿵쾅거리는 가슴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지 못하였다. 

문밖 덕구도 대웅전 앞을 서성대며 밤을 샜고 그들은 지금껏 평소의 진이와 덕구가 아님을 동시에 느꼈다. 

- 8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황진이(제6화)

 

천재는 세상에 쉽게 나오려하지 않았고 임신 소식을 우서(羽書·서찰)로 황진사에게 알리자 얼굴이 백짓장 같이 질려왔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장님 기생을 건드려 임신 시켰다는 소문이 퍼지면 아직 출사도 제대로 못하였는데 출세 길이 영영 막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황진사는 오자마자 낙태를 권하였지만 현학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황진사는 겁쟁이에다 철부지였다.

현학금은 황진사가 돌아간 후부터 초승달이 뜨면 추렴을 걷고 섬돌에 내려앉아 그리운 님을 생각하며 깊은 상념에 빠지고는 하였다.

그녀의 폭넓은 학문의 세계로 아마도 당(唐)의 이단(李端)의 '초승달에 절함'을 떠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주렴을 걷고 초승달을 보고는/ 섬돌에 내려 다소곳이 절하나니/

속삭이는 하소연은 아무도 못 듣는데/ 북쪽 바람이 치마 띠를 휘날린다.’의 분위기와 너무나 흡사하다.

조선에 당나라 시를 그들의 수준만큼 이해하고 쓰는 소위 삼당시인(三唐詩人:백광훈·최경창·이달)을 존경의 시선으로 볼 정도이니

당시 시문학이 차지하는 문화예술 수준이 어느 정도였다는 것이 짐작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사실 왕조시대엔 규방(閨房) 문화는 기를 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으나 상대적으로 기방(妓房) 문화는 극소수이지만 힘차게 맥을 이어왔다.

현학금은 보통 기생이 아니었고 요즘말로 하면 예술가였지만 그녀도 여자였다.

임신을 하고는 엄마가 될 준비에 들어갔고 황진사와 뼈를 녹인 애틋한 순간에 매몰되어 있을 시간이 없었으며 배는 하루가 다르게 불러왔다.

가려야 할 음식을 경계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의남초(宜男草:허리에 차면 아들을 낳는다는 약초)를 허리에 차는 일도 빠뜨리지 않았다.

배는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는데 출산할 장소가 문제였지만 거문고를 타고 노래 부르는 것은 복대를 두르고도 출산 며칠 전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현학금의 옆에는 친정 동생과 의동생 옥섬이 그림자처럼 있었고 해산달이 다가오면서 걱정이 현실로 밀려왔다.

출산 며칠 전까지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른 것은 유수와 아전들에게 뇌물을 써 입을 막으려는 술책이었다.

그렇게 하여 몇 주간의 출산휴가를 얻어 박연폭포를 거슬러 올라 실상암 관음굴로 숨어들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출산을 하려는 의도였지만 아이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사흘 밤낮의 산통을 하면서도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고 양수도 터지지 않을 뿐 아니라 자궁은 오히려 체면을 지키려는 듯이 조개모양 더욱 오그라들었다.

현학금은 파죽음이 되어 갔으며 친정 동생과 의동생 옥섬을 본인보다 더 앉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이다.

이때도 현학금은 마음속으로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잊지 않았다.

몸은 고달프나 곧 나올 새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출산의 고통으로 인해 잃지 않으려는 치열한 자기 체면이다.

미인이 환하고 환하여/ 얼굴이 능소화 같구나./ 운명이지 운명이로다./ 천시(天詩)를 만나 태어났건만/ 아무도 나를 아리땁다 하지 않는구나.

조(趙)나라 무령왕의 꿈에서 처녀가 거문고 타는 모습의 장면을 연상한 맹요의 '열녀전'을 애기하는 것일 게다.

비록 지독한 산통으로 정신을 잃을 아찔한 찰나에까지 이르렀으나 중국의 신화 '산해경'의 애기들을 계속 떠 올렸다.

그같이 극락과 연옥을 오가며 뱃속의 아기와 씨름을 하는데 새벽 종소리에 놀란 듯 놀랍게도 지궁이 열리며 툭하고 어미를 떠났다.

박연폭포처럼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리며 세상에 신고를 하였고 진이의 탄생은 관음굴에서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날 밤 현학금은 아이를 안고 동생을 따라 관가로 가지 않고 집으로 갔다.

그의 집은 사대부 가문은 아니었으나 중인(中人)의 악사집으로 체면을 중시하고 분수를 아는 집안이었다.

고려때부터 대대로 이어지는 악사(樂士)집안으로 예인(藝人)의 DNA가 전통이다.

현학금이 비록 군왕(郡王)을 잘못 만나 비장의 결의로 장님이 되는 비극적인 운명이 되었으나 자존심은 어느 누구보다 강하다.

현학금이 기녀신분이나 사대부 못지 않은 문화예술세계를 가졌으며 그 같은 시가(詩歌)의 재능은 진이한테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황진사는 출산 며칠 후 현학금 앞에 나타났고 진이를 데려다 조강지처가 낳은 딸로 키우려는 속내다.

진이의 탄생을 본가 동생과 의동생, 그리고 유수와 몇몇 아전들만 알 뿐 세상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맹인의 딸로 키우려는 것이냐? 내가 네가 원하는 딸 이상으로 데려다 키울 것이다.“

한량 아진의 아버지 진정성에 현학금도 계속 버티지 못하고 진이를 품에서 내어주었다.

진이는 보쌈하듯 칠흑같은 어둠에 황진사 집으로 옮겨졌고 조강지처 신씨품에 안겨 친딸처럼 쑥쑥 컸다.

진이를 황진사에게 넘긴 이튿날 현학금은 거문고를 메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말만 듣던 금강산을 직접보고 몸소 체험하고 싶은 것이며 일만 이천봉 퍌만구암자 골짜기마다 거문고 소리에 맞춰 신명나는 유람을 하려는 속내다.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야 핏덩이를 떼어놓고 떠나는 간장을 녹이는 어미 마음이 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며 금강산은 아름답고 실로 경이롭다.

진이는 현학금의 생각대로 총명하고 아름답게 성장해 주었다.

배다른 동생 난(蘭)이도 “언니 언니”하며 잘 따랐고 두 살 위 오빠 경(敬)이 역시 배다른 동생 티 안내고 슬기롭게 처신하였다.

누가 봐도 의좋은 삼남매였고 황진사와 조강지처 신씨도 그같이 의좋은 삼남매 생활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진이의 행복은 거기까지였고 키워준 어머니 신씨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진이의 신분이 사대부집 딸에서 서녀로 둔갑되었던 것이다.

맹인 몸에서 출생했으나 범상치 않은 미색(美色)에 영리하기 까지 한 진이에게 천성이 착한 신씨는 배 아파 낳은 자식과 차별없이 키웠다.

경이와 난이와는 다르게 자고 깨면 아버지 서재에 들어가 책을 읽는 모습에 겉으론 드너내지 않으나 속으론 키운 보람이 있구나 생각하였다.

진이도 철석같이 신씨가 친엄마로 알고 15년을 살아왔으며 그러던 어느 날 청천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소실로 들어가라는 아버지 황진사의 권고를 뿌리치고 집을 나섰다.

“아버지 소녀 집을 나가겠습니다.”

진이는 큰절을 넙죽하고 입던 차림 그대로 집을 나와 기생의 길로 들어갈 결심을 굳혔고 자유인이 되려하는 첫걸음이다.

- 7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황진이(제5화)

 
 

동쪽 동인문밖 물가에서 거문고를 타면 아득히 먼 중국의 장강(長江·양자강의 본명) 이남에서 흑학들이 떼 지어 날아와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 춤을 주었다.

현악금(玄鶴琴)이 거문고를 타면 학들이 날아와 춤을 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진이의 모친인 진(陳) 현학금의 이름에 대한 유례다.

현학금은 열한 살에 기적에 올라 비파와 가야금을 거쳐 거문고에 빼어난 기량을 보여 열다섯 살에 악사(樂士) 기생으로 자리를 잡았다.

현학금은 이때부터 어디를 가든 자신보다 훨씬 큰 거문고를 가로로 메고 다녔다.

현학금의 열아홉 살 단풍이 풍악산(금강산 가을 山名)에 곱게 물든 가을 어느 날이었다.

1504년 연산군(燕山君:1476~1506)의 집권 10년이 되는 해다.

처음엔 성군의 자질을 보였으나 친어머니(폐비 尹氏)의 참극을 안 후 그는 폭군이 되었다.

국정은 팽개치고 원수 갚기와 계집질로 세월을 보냈으며 홍문관을 없애고 정치 논쟁을 금하기 위해 경연(經筵)을 폐지했다.

조선 불교의 산실인 원각사(圓覺寺)는 장악원(掌樂院)으로 바꾸어 기생들의 교육장으로 바꾸었다.

한양에서 마음에 드는 미녀가 모자라자 전국으로 채홍준체찰사라는 대신과 채홍준사와 채청사라는 급조된 관리들이 송도에까지 내려왔다.

그때 송도 관아엔 현학금도 있었고 빼어난 미모의 현학금도 여러 미녀들과 새로 설치된 운평에 갇힌 채 자색을 평가 받았다.

현학금은 뛰어난 절색에 거문고의 기예까지 갖추어 최고 점수인 천과흥청이 되었다.

천과흥청과 지과흥청의 미녀는 대궐에 들어가 임금의 성은을 입으며 임금의 특명이었으므로 고을의 유수조차 미처 손 쓸 겨를이 없었다.

현학금은 경악하였고 악사기녀로서 은밀하게 자존심을 지켜왔는데 그 자존심이 일순간에 무너짐을 느꼈다.

곰곰이 생각끝에 의동생 기생 옥섬에게 비상약을 짓게 하였고 단호한 현학금의 부탁에 옥섬도 거부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약을 먹은 현학금은 하룻밤 사이에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으로 변하였고 채홍준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연산군의 마음에 쏙 드는 미녀를 뽑아오면 특별진급이나 두둑한 상금이 걸려있어 현학금이 딱 마음에 들었는데 그만 낭패가 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의원을 불러 검사를 해봤으나 장님이 틀림없다는 결론이다.

그들은 현학금의 두 눈을 뒤집어 보기까지 했으며 채홍준사는 현학금을 체념하고 기적에서 빼내주어 운평에서 나와 집으로 왔다.

현학금은 채홍준사와 채청사들이 한양으로 올라간 후 금강산에 몸을 의탁하였다.

약을 먹고 억지 장님이 되어 이 골짜기 저 골짜기 사찰로 다니며 걸식을 하면서도 거문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그렇게 걸인 악사로 봄엔 금강산, 여름엔 봉래산, 가을엔 풍악산, 겨울엔 개골산 등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6년의 세월을 보냈다.

현학금의 거문고 연주는 신기(神技)에 이르렀고 그녀는 장님 악사로 소문이 퍼져 관아의 연회 때마다 단골로 초대되었다.

현학금이 초대되었다는 연회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모여든 사람들은 현학금의 천상의 거문고 음률에 세상시름을 실어 보내 홧병을 앓던 사람이 낫고

무릎이 내려앉은 앉은뱅이는 걸어서 집으로 가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소문은 소문을 낳고 현학금의 거문고 기적은 송도의 일상사가 되었고 그러던 어느 봄날이다.

“현학금 언니, 집에 있으면 뭐해! 병부교에 나가서 바람이나 쐬지...”

현학금은 이웃 악가들의 성화에 못이겨 병부교 빨래터에 나갔고 그날도 현학금은 천상의 음률로 거문고를 탔으며 고단한 아낙들의 세상시름을 덜어주기 위함이다.

현학금이 비록 앞을 보지 못할 뿐 마음속으로 천상의 음률에 서경덕이 평생 흠모한 송(宋)의 시인 소옹(邵雍)의 '수미음'(首尾吟)의 일부를 실어 보내고 있다.

그녀는 하늘의 침묵을 대변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요부는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요부가 사랑할 수 있을 때/ 이미 마음을 쓸 때는 마음을 쓰고/ 말을 가하지 않은 곳엔 말을 가한다./

사물엔 모두 이치가 있는데 나는 무엇인가/ 하늘이 말하지 않으니 사람이 그것을 대신한다./

자연 조화의 무한한 말을 대신하는 것이니/ 요부는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현학금은 눈만 보이지 않을 뿐 눈을 뜨고 삼라만상을 보는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눈으로 보지 못하는 세상사를 탁월한 감수성의 발달로 범인들의 수준을 뛰어 넘었고 게다가 천상의 음률을 타는 거문고의 명인에 절세미인이었다.

이때 마침 이곳을 지나는 한량이 있었으며 황진사(黃進士)였고 그의 눈에 현학금이 들어왔다.

황진사는 이미 현학금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송도가 넓다고 하지만 저잣거리에서 나도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금방 전 송도로 퍼져 나갔다.

병부교(兵部橋) 아래의 빨래터 아낙들의 입방아에 올라오면 그 소문은 바로 송도의 화젯거리가 되었고현학금의 거문고 소문을 황진사가 모를리 없다.

아낙들의 성화에 현학금은 천상의 음률을 관아의 연회가 아니면 타지 않는 연주를 하기도 하였다.

오늘도 현학금은 아낙들의 성화에 떠밀려 병부교 빨래터에 나와 거문고를 탔던 것이다.

현학금의 천상의 거문고 음률에 빨려들었고 청춘남녀가 만나면 서로의 콤플렉스에 빠진다.

황진사와 현학금도 그러했을 것이며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으라 했으니 그들도 예외없이 사랑의 만리장성을 쌓았을 게다.

그때 현학금은 사랑의 만리장성을 쌓고 임신하여 조선 제일의 여류시인이며 송도삼절의 하나인 황진이를 낳는 어머니가 되었다.

그들은 이 시(詩)를 떠올렸을 것이다.

가시리 가시리 잇고

버리고 가시리 잇고 위 증즐가 태평성대

날러든 어이 살라하고

버리고 가시리 잇고 위 증즐가 태평성대

잡사와 두어리 마는

선하면 아니 올세라 위 증즐가 태평성대

설온님 보내옵나니

가시는 듯 돌아오소서 위 증즐가 태평성대

고려가요 '가시리'다.

황진사와 현학금이 뜨겁게 사랑을 나누고 헤어질 때 '가시리'의 내용과 별 온도차이가 없을 심정이었을 것이다.

- 6화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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