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옆에서 걸으라



미국의 콜로라도 주 서부와 유타 주 동부에 살면서
쇼쇼니어를 쓰는 인디언 유트족이 있습니다.
이 부족은 평등한 인간관계를 강조했는데,
다음은 유트족 인디언의 격언입니다.

'내 뒤에서 걷지 말라
나는 그대를 이끌고 싶지 않다
내 앞에서 걷지 말라
나는 그대를 따르고 싶지 않다
다만 내 옆에서 걸으라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그들은 신분이나 계급으로 차별하지 않고,
모든 부족민을 독립적인 존재로
존중했습니다.

또한, 부족을 대표하는 추장도
부족민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의견을 실행에 옮기는
역할만 했다고 합니다.





사람으로서 내가 소중하다면
당연히 다른 사람도 소중해야 합니다.
타인을 존중하고 아끼면 나 자신도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고 물으면
사람, 사람,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 마오리족 격언 –

 

반지의 진짜 의미



반지는 손가락에 끼우기 위해 존재합니다.
반지(斑指)의 '반(斑)'은 '나누다'는 뜻이고
'지(指)'는 손가락을 가리킵니다.

결혼반지의 유래에는 여러 이야기가 있는데
그중에서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동그라미가 영원을 상징해
원형인 반지가 두 사람이 영원히 함께하는
결혼을 의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변함없는 사랑을 언약하며
'나의 사랑이 되어주세요', '결혼해 주세요'라는 의미로
손가락에 반지를 나누어 낍니다.

금이든, 은이든, 옥이든 무엇으로 만들어도
반지가 가지는 의미는 퇴색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눈앞의 반짝임에 현혹돼
금이라는 재료에만 오직 초점을 맞춘다면
반지는 그저 욕망덩어리가 됩니다.





사랑의 무게는 눈에 보이지 않고
몇 그램인지 잴 수도, 값을 매길 수도 없습니다.
그 무엇보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두 사람의 순수한 마음입니다.

진정한 가치 있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자신의 운명도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힘써라.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순서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19세기, 중국 청나라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벌어졌을 때 일어난 이야기라고 합니다.

황제는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지만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는 반란군의 세력에
황제가 보낸 토벌군은 계속 싸웠지만
계속 지고 말았습니다.

'연전연패(連戰連敗)'라는 글이 포함된
보고서가 올라올 때마다 황제는 토벌군의 장수에게
큰 벌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유능한 관료인 '증국번'이
토벌군 장수로 임명되었지만, 갈수록 강해지는
반란군을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황제에게 보내는 보고서에
연전연패가 아니라 '연패연전(連敗連戰)'이라고
순서를 바꿔 보고했습니다.

즉 자신은 비록 계속 패배하고 있지만,
패배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싸우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에 황제는 '증국번'에게 벌을 내리기보다
오히려 증원군을 보냈습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서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성공이 되기도 하고 실패가 되기도 합니다.


# 오늘의 명언
먼저 당신이 원하는 것을 결정하라.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당신이 기꺼이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라.
다음으로 그 일들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곧바로 그 일에 착수하라.
– H. L. 린트 –

참 오래된 마을인가 보다 

도심이지만 오래된 가옥과 나이많은 노인네들이 텃밭을 가꾸며 사는 달 동네

이곳을 지나는 마을 주민들이 연세가 많아 뒤뚱 뛰뚱 걷는 모습이 팽귄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팽귄마을

오래된달 동네에 에술인들이 모여 오래된 고물들을 줏어 모아 하나 하나 꾸며 낸 마을 풍경이 

정감이 가고 손때 묻은 오래된 물건들에 눈길이 가는 곳

마지막까지 총을 놓지 않았던 영웅들



온 국민이 월드컵에 열광하고 있던
2002년 6월 29일, 그날은 한일 월드컵 3, 4위 전이
열리던 날이었습니다.

경북 의성에서 과수원 농사를 짓던 서영석 씨는 오전 9시,
TV 뉴스에서 제2연평해전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서영석 씨는 곧바로 지도를 가지고 와서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어? 여기 우리 아들 근무지인데?"

그리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오더니
아들이 전사자 명단에 있다고 했습니다.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국군수도병원 영안실에서 태극기를 가슴에 안고
하얗게 잠들어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니
모든 상황이 비로소 실감이 났습니다.

"내 아들 후원이가, 정말 떠났구나...
너를 지켜주지 못해서 너무 미안하구나..."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故 서후원 중사는
삼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평생 농사를 짓던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
장기 복무를 신청했을 만큼 이름난 효자였습니다.

군에서 받는 월급은 모두 부모님께 드리고
본인은 용돈을 받아 생활했고,
입대 전 아버지 서영석 씨가 고된 농사일로 몸져눕자
홀로 과수원 농사를 짓기도 했습니다.

그는 2001년 8월, 군에 입대했고
제2연평해전이 일어나기 3개월 전
참수리 고속정 357호의 기관실 내연사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북한 경비정 두 척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해 온 그날,
그들은 우리 해군의 참수리 357호정을
기습 공격했습니다.

기관실 내연사였던 故 서후원 중사는
끝까지 대응 사격을 하다가 적의 총탄이 가슴을 관통하면서
그 자리에서 전사했는데 그의 나이 겨우
22살이었습니다.





따뜻한 하루는 조국을 위한 불굴의 투지와 정신력으로,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임무를 끝까지 완수한
故 서후원 중사의 희생을 기억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유가족분들에게
500만 원 위로금을 전달했습니다.

비록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유가족들의
마음을 달래기엔 턱없이 작고 부족하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말해야 했습니다.
정말 감사하다고...

제2연평해전에서는 서후원 중사 외에도
5명의 청춘들이 끝까지 NLL을 사수하다 전사했습니다.
따뜻한 하루는 제2연평해전 22주년을 맞아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합니다.


= 제2연평해전 영웅들을 영원히 기억해 주세요 =



꼭 기억해야 할 역사, 제2연평해전.
서해 NLL을 사수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치열한 교전을 벌였던 참수리 357호정의 해군들과
그곳에서 전사한 6인의 영웅들...

미안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당신들의 희생이 우리를 살게 했습니다.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점심 식사를 하기위해 들린 중국집 한켠에 그려진 낙서들

유명한 맛집에만 있다는 낙서판 그곳에 삶의 애환과 행복함을 느낄수 있는 따뜻한 글들이... 

홍어 장수 문순득 표류기



문순득(1777년~1847년)은
조선의 어물 장수였으며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 일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평범한 삶을 살던 그가 조선왕조실록에
이름 석 자를 남긴 이유는 그가 표류하면서 벌어진
파란만장한 여정 때문이었습니다.

1801년 12월, 24살의 청년이었던 문순득은
흑산도 인근에서 홍어를 사고 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거친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문순득이 탄 배는 망망대해를 2주일이나
속절없이 표류하고 낯선 섬에 도착했습니다.
류큐 왕국의 '대도(大島)'라는 곳이었는데
지금의 일본 오키나와였습니다.

다행히 현지인들은 표류자들을 잘 보살펴 주었고
그곳에서 문순득은 8개월을 머물면서
그 나라 말과 풍습을 배우면서
빠르게 적응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아냈는데
그것은 중국으로 가는 류큐 왕국의 조공선에 탑승해서
중국을 거쳐 조선으로 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1802년 10월, 문순득은 중국을 향하는 배를
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풍랑을 만나 하염없이 동남쪽으로 흘러갔고,
열흘 후 배가 도착한 곳은 중국이 아닌
스페인 제국 필리핀 도독령이던 루손 섬에
표착한 것이었습니다.

긍정적이며 호기심 많고 영리한 사람이었던
문순득은 9개월간 그곳에서 머물며
현지어를 익히고 서양 문물을
열심히 배웠습니다.

그 후 문순득은 마카오, 광저우, 난징, 연경을 거쳐
조선 관리를 따라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가 고향에 돌아온 건 1805년 1월.
홍어를 사서 배에 오른 지 3년 2개월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정약전이 쓴 '표해시말(漂海始末)'에 기록되었으며
책 속에는 문순득의 체험과 정약전의
실학 정신이 잘 드러나 있고,
200년 전의 일본, 필리핀, 마카오, 중국의
풍속, 의복, 집, 배, 언어 등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문순득은 조선 시대 신분 구조인
'사농공상(士農工商)' 중
가장 낮은 상인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글을 잘 쓰지 못해,
정약전을 만나지 못했다면 자신의 경험을
후대에 남기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비록 신분도 낮고 배움도 적었지만
불굴의 용기와 강인한 정신력을 가졌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역경을 헤쳐 나갔습니다.


# 오늘의 명언
당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결심하는 그 순간이다.
- 앤서니 라빈스 -

퍼플섬을 다녀 오면서 다음 행선지로 광주송정역 시장을 들렸다

역앞 구시장 한켠에는 청소년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 있다

예전 역앞에는 의례히 몸을 팔아 하루 하루 먹고 사느 창녀들이 있었다 

그런 골목길엔 청소년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 있지만 

지금은 예전의 그런 창녀촌은 없겠지만 아직 그런 때를 싹 벗겨 내진 못햇나보다

송정역시장은 예날 구시장거리와 신시장거리 들로 나눠 진듯 하다

때마침 야간 맥주를 즐길수 있는 야시장 풍물거리를 조성 하고 있는듯 하다

시장 한가운데 둥그런 탁자들이 놓이고 시장한가운데를 지나는 전선들 그리고 야간 조명 시설들 

밤에 와 보면 재미난 구경을 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도 생긴다

삶은 '혼자'가 아닌 '함께'의 이야기다



봉천동 슈바이처로 불리며
평생 가난한 사람들의 주치의로 살아온 공로로
국민훈장인 동백장을 수훈한
의사 윤주홍 님.

윤주홍 님의 헌신적인 삶은
1973년, 판자촌이 늘어섰던 서울의 한 마을에
'윤주홍 의원'을 열면서 시작합니다.

윤주홍 님은 평생 진료비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주민들을 생각해 진료비는 절반 수준만 받았고,
부모가 없는 보육원 아이들을 위해서
무료로 치료와 수술을 해주었고,
매년 의사가 없는 섬마을에도 찾아가서도
의료 봉사를 했습니다.

작은 질병부터 골절이나 화상,
맹장 수술에서 분만까지 전반적인 치료와 수술로
아픈 주민들을 돌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삶은 무려 46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또한, 생계가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서
'관악장학회'를 설립한 후, 지금까지 장학금을
지원받은 학생 수만 무려 2,000여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윤주홍 님에 대한 감동적인 일화가 있었는데
수십 년 전 한 청년이 주문하지도 않은 자장면 한 그릇을
철가방에 담아 가져왔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수년 전 인근 보육원에서
교사가 밤중에 맹장염을 앓는 아이를 데려왔는데
윤주홍 님은 돈을 받지 않고 수술을
해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이는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가
청년이 되어 중국집에 취직한 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들고 온 자장면은 첫 월급으로 사 온 것인데
윤주홍 님은 그때의 일을 말했습니다.

"그 청년의 마음이 고마워 눈물을 흘리며
자장면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2019년 병원 문을 닫게 되었는데
그건 아내의 건강이 나빠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내는 평생 무료 진료와 사비를 털어 왕진을 다닐 때도
잔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내가 아니었다면 이런 삶을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아내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병원은 닫았지만, 다른 이들을 돕는
삶의 방식은 변하지 않았는데 2021년에는
고려대의료원에 의학발전기금 10억 원을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나눔과 봉사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고운 빛으로 물들일
한 알의 꽃씨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 오늘의 명언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보라.
그들이 걸어온 길은 고난과 자기희생의 길이었다.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만이
위대해질 수 있는 법이다.
– G.E. 레싱 –

신안군 안좌면에 있는 퍼플섬 신안군에서 천사대교를 건너

안좌면 안좌섬을거쳐 반월도와 박지도를 퍼플섬이라 한다.

주민은 모두 60대 이상이 대부분인 이섬에는 약135명의 섬 마을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보랏빛 명소를 만들기 위해 보랏빛으로 물들여 집도 마을도 길도 모두 보랏빛으로 물들여 

꽃들도 사시사철 볼 수 있는 보랏빛 꽃들만 심는다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청년이 인생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
버킷리스트를 작성했습니다.

청년의 버킷리스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건강한 삶'을 위해 꾸준히 운동하고
'사랑받는 삶'을 위해 주변 사람들을 먼저 배려하며
'풍족한 삶'을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고
'명예로운 삶'을 위해 정의롭고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남다르게 노력하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청년은
누구보다 '충실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청년은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무언가 부족한 듯한 느낌에 항상 걱정과 불안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청년은 자신의 스승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저는 충실한 삶을 위해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훌륭히 실행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뭔가 부족합니다.
저에게 빠진 것이 무엇인가요?"

스승은 제자의 버킷리스트를 보고 말했습니다.
"참 훌륭하고 일리가 있는 계획이네.
그런데 자네는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네.
그것이 없을 때 이런 것들은 오히려
큰 고통이 될 걸세."

그리고 스승은 청년의 리스트 맨 윗줄에
한 줄을 더 적어 주었습니다.

'마음의 평안'





우리는 오늘도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더 멀리 날기 위해, 바쁘게 살고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많은 재물과 성공적인 삶을 살아도
쉽게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족하고 어려운 삶 속에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풍족한 혜택으로 편안하게 살면서도
불행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당신에게 평안을 주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 랠프 월도 에머슨 –

착한 빵집 아저씨



어느 마을에 빵집이 있었습니다.
착한 마음을 가진 빵집 주인은 마을에 사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매일 맛있는 빵을
만들어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침에 만든 빵을 봉지에 담아서 놓으면
아이들이 가져가게 했습니다.

몰려온 아이들은 가장 큰 빵이 담겨있는 봉지를
먼저 가져가려고 경쟁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는 언제나 끝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 남은 가장 작은 빵이 담겨있는
봉지를 가져갔습니다.

아이는 '아저씨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날도 아이는 마지막 빵을 들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나눠 먹기 위해 빵 봉지에서
빵을 꺼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빵 봉지 안에는
금반지가 들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주인아저씨가 실수로 넣은 것으로 생각하고는
다시 빵집으로 향했습니다.

https://youtu.be/ClWI6qA9UYo?si=SRjT6m0rrycOA8y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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