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야화 황진이(제12화)

 
 

이별의 날을 세어 나가는 이사종의 마음은 촌각이 아까웠고 그는 아침저녁 잠시 진이를 볼때도 표정을 유심히 살폈으며 열흘에 한번은 나들이를 꼭 나섰다.

송도도 아름답지만 한양의 활기차고 역동적인 육조거리와 사대문 안팎의 풍광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봄에는 성밖 북둔(성북동)으로 함께 말을 타고 복사꽃 장관 속을 거닐었고 홍인문밖 낙산아래 휘늘어진 봄버들 길도 구경시켜주었다.

“어떻소? 한양 풍광 영미가 마음에 드오?”

진이는 묵묵부답이고 진이의 몸은 한양에 와 있어도 마음은 송도에 가 있었다.

한양이 역동적이면서 마음에 조금씩 정이 붙어가면 갈수록 고향 송도가 그리워지고 종적을 알 수 없는 어머니가 몸서리 쳐지도록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몸과 마음에 착 달라붙어지는 이사종과의 하루하루도 싫지 않았다.

기생의 길로 들어선 이후 손에 물 한 방울 걸레질 한번 안 해본 자신이 지금은 부엌에도 들어가고 걸레질도 하는 보통의 아낙이 되었다.

이사종의 덕분이며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면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진이는 이제야 알았다.

한참 침묵이 흐르는 사이에 진이와 이사종을 태운 말은 한강 노들 녘에 다다랐다.

“이 진이는 한양에 와서 늘 삼봉의 '한양찬가' 중 '서강조박'(西江漕泊)에 관심이 높아요.

'한양찬가'는 이제현의 '송도팔경'을 연상케 하는 시(詩)지요! 그 중에서도 '제방기포'(諸坊碁布)에 매료 됐어요.

어느새 점심때가 되었네요. 진이가 점심을 간단하게 준비했어요!”

진이는 간단히 먹을 것과 송도의 명주 태상주를 꺼냈다.

“허허허, 언제 점심 준비까지 했소이까? 나는 이곳을 잠시 둘러보고 종로 피맛골에 가서 요기를 하려 했는데...”

이사종은 그윽한 표정으로 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태상주 한병을 비운 그들은 흐드러지게 늘어진 버들이 바람에 춤을 추는 분위기에 맞추어 노래를 주고받는다.

이사종은 '송도팔경'에서 '백악청운'(白嶽晴雲)을 불렀고 진이는 '한양찬가' 중에 '열서성공'(列署星拱)을 절창하였다.

피맛골에 들려 옥인동 집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조강지처 정씨가 도끼눈을 뜨고 불호령을 떨어뜨렸으나 이제 계약결혼 3년이 얼마 안 남아 눈을 감아 주는 분위기다.

오히려 정씨가 아쉬워하는 태도이며 진이가 시어머니에겐 대화의 상대가 되어주었고 아들에겐 선생님이 되어주어 고마운 존재가 되었었다.

어느새 그들은 날카롭게 물어뜯는 적에서 서로 필요로 하는 존재로 발전하였고 진이의 헌신적 노력이 만들어 낸 가족적 분위기다.

“형님, 제가 송도에 가더라도 형님의 따뜻한 사랑은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진이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뜻한 밥상을 정씨한테서 받고는 두 눈에서 눈물을 와락 쏟아냈고 더욱이 이사종과 겸상차림이었다.

계약결혼 만기는 이제 보름 앞으로 다가왔고 떠날 때까지 잠자리를 매일 허락한다는 조강지처 정씨 말에 이사종은 밥을 먹다말고 벌떡 일어나 덩실덩실 춤까지 추었다.

“진이 내 그동안 독하게 대한 것 양해해 주시게! 자네도 내 처지가 돼보면 여자마음 알걸세.”

정씨는 정말 아쉽고 미안했다는 표정이며 무거운 침묵이 잠시 흐른 뒤 정씨는 주섬주섬 밥상을 정리해 들고 나갔다.

3년 사이에 조강지처와 소실은 언니동생이 되었고 떠날 날이 다가오자 진이는 주위를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잠자리도 매일밤 양해를 받았으나 되도록 피했고 마음은 보이지 않으나 몸은 행동이 보여 떠날 때일수록 아름답게 정리하고 싶어서다.

이사종은 매일밤 운우지락을 하려 했으나 진이는 매정하게 거절하였고 한양의 마지막 밤에 최후의 몸을 활짝 열어주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달이 휘영청 밝은 보름밤이고 그날만은 진이가 아닌 명월(明月)이 되어 철저한 이사종의 여자가 되었다.

송도로 갈 날짜가 내일이고 진이는 오랜만에 거문고를 꺼냈으며 그동안 첩살이를 하면서 거문고를 탈 만큼 여유있는 생활이 아니었다.

아무리 너그러운 조강지처라도 첩이 예뻐보일 여인은 이 세상엔 없으며 씨앗엔 돌부처도 돌아앉는다 하지 않았던가!

진이는 오랜만에 거문고를 꺼내 타면서 '한양찬가' 중 '북교목마'(北郊牧馬)를 불렀다.

숫돌같이 평평한 북녘들 바라보니/ 봄 오자 풀 무성하고 물맛도 좋아/

만마가 구름처럼 모여 뛰놀고/ 목자는 마음대로/ 여기저기 서성이네.

진이의 노래에 이사종이 곧바로 이었고 '송도팔경' 중 '청교송객'(靑郊送客)이다.

들 절간에 송화꽃은 떨어지고/ 비갠 냇가엔 버들 솜이 날리네./

타고 갈 백마에겐 재갈을 물려놓고/ 떠나려해도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네./

모이면 헤어짐은 예나 이제나 마찬가진데/ 인간의 공명은 꿈이 아니고 무엇이랴/

청산은 남몰래 꾸짖으며 나무라기를/ 누가 소광(疏廣)과 소수(疏受) 두 사람을 아꼈으랴!

노래를 마친 이사종은 진이를 덥석 안았고 진이도 기다렸다는 듯이 거문고를 팽개치듯 옆으로 제쳐놓고 이사종의 품에 안겼다.

이 밤이 밝으면 진이는 이사종의 여자가 아니고 사내는 성급히 달려들었으며 여자도 그런 사내가 싫지 않았다.

오늘밤은 영원히 밝지 않기를 그들은 마음속으로 기원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며 한 몸이 되었다.

이사종이 진이의 두 다리를 벌려서 밀고 들어왔으며 뜨거운 신음소리를 내는 진이의 두 눈엔 알 수 없는 눈물이 쉼없이 흘러나왔다.

거대한 파도에 배가 흔들리듯 이사종은 진이의 몸에서 신명나게 연자방아를 찧는다.

뜨거운 살이 교합되자 이사종이 몸을 틀어 진이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묻으려 한다.

“아니 됩니다. 더렵혀진 몸입니다.”

진이는 몸을 돌려 등을 보였다.

“아니요. 내가 당신을 깨끗이 씻어 주리다. 이 시간 이후 당신은 옥황상제께서 이승으로 잠시 휴가를 보낸 선인(仙人)이 되는 겁니다.”

이사종은 돌아누운 진이를 다시 돌려서 정성껏 청나라로 끌려갔다 돌아온 화냥년(환향년)들이 세검정에서 몸을 씻듯 깨끗이 정화시켰다.

이사종은 금방 코를 골며 잠들었고 알몸이며 반듯한 이마와 깊이 그늘져 감긴 눈과 오뚝한 콧날에 꼭 다문 입과 턱...

진이는 밤이 새도록 초롱초롱하게 눈을 뜨고 이사종의 모습을 가슴속에 담았다.

먼동이 트면 말을 타고 송도로 갈 준비가 되었고 이사종도 이제 자신의 삶에서 지워버리려는 것이다.

- 13화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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