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야화 황진이(제4화)
양곡은 젊은 시절에 여색에 빠진 자는 남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명월이 시재(詩才)와 미모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친구들과 약속을 하였다.
“내가 그 여자와 30일을 동숙(同宿)하고 이별을 못하고 하루라도 더 머물면 사람이 아니다.”
양곡이 친구들과 약속을 하였으나 그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했는데 사대부의 나라에서 친구들에게 한 약속을 선비가 지키지 않았다.
그것도 천재지변이나 연로한 부모의 갑작스런 병고나 몸담고 있는 벼슬길에서 왕명도 아닌
한낱 노류장화(路柳墻花)인 기생으로 사내대장부가 친구들과 한 약속을 헌신짝처럼 팽개쳤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벌어진 사건이고 동네 청년들이 이웃집 예쁜 아가씨를 놓고 한 약속이 아니다.
당시 송도 명월의 소문이 한양에까지 퍼져 한량들의 마음이 온통 들떠 있을 때였다.
고려를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 넣고 조선을 세운 신흥 사대부들은 체면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국교(國敎)로 대대로 이어오던 불교를 과감히 유교(儒敎)로 교체했다.
남녀칠세부동석과 삼종지덕(三從之德)등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인격체로 규정하여
사회적 제약을 법적(종모법 從母法)으로 또는 도덕적 올가미를 씌워 놓았다.
세계사적으로도 여성의 사회활동은 상당히 제한적이었으나 조선은 그 정도가 특히 더 하였다.
그런 역사 속에서 잘 나가는 사대부 양곡이 일개 기생인 명월에게 빠져 ‘남아일언중천금’이란 세상에서 일탈하여 약속을 어겼다.
사대부의 나라 조선도 허리 밑에는 별수 없이 약했을 터지만 지체높은 양곡이 진이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허리 밑도 봄꽃처럼 피어나는 즐거움도 기쁨이지만 바다같고 만리장성같은 문화예술 세계에 탄복했을 것이다.
이웃인 일본은 사무라이의 나라로서 허리 밑이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선비의 나라 조선에선 일본과 달리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하지 않았던가!
사실 사내들이 여자를 찾는 것은 찰나적이나 마초(macho)의 본능에 충실하려 한다.
색향(色鄕)으로 소문이 난 송도에 가려함은 허리 밑을 충족시키려는 목적이 강하다.
양곡도 진이와 30일이란 기간을 정하고 소위 계약 동숙(결혼)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진이는 평소에 양곡이 생각했던 노류장화가 아니었고 계약결혼 마지막 날 시 한 수에 그의 영혼은 넋을 잃었다.
달빛어린 뜨락에 오동잎 다 지고/ 서리맞은 들국화 노랗게 피었는데
누각이 높아 하늘이 한 척 이요/ 사람이 취해 술이 천 잔이라
흐르는 물은 거문고 가락에 맞춰 서늘하고/ 매화는 피리소리에 들어 향기롭구나
내일 아침 서로 헤어지고 나면/ 그리는 정은 푸른 물결처럼 길게 뻗치리라.
양곡은 진이의 이 시를 듣고 한양의 친구들에게 “나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할 용기가 생겼을 것이고 진이를 알게 됨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소문으로 떠도는 진이를 직접 만나 뜨거운 살을 섞고 보니 저잣거리에 나도는 풍문이 얼마나 잘못 알려졌음을 알수 있었다.
노류장화나 말하는 꽃이 아닌 지식인 진이라는 것을 알게 됨에 스스로 그녀 앞에 겸손하여 졌음일 게다.
아마도 진이가 한시, 시조에 능통한 자유인으로 남자로 태어났다면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남명 조식, 하서 김인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학자 위치에서 경륜(經綸)을 논하며 문화예술세계를 한층 더 풍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양곡은 그후 두 번 더 진이를 찾았다.
계약결혼이란 세기적 발상은 조선사회를 경천동지(驚天動地)케 했을게다.
낭만과 문화의 나라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와 여성해방운동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1929)보다 378년 앞섰으며
영화감독 문여송과 소설가 김이연과의 계약결혼보다는 무려 400여년이나 앞선 선구적 페미니스트였다.
양곡은 진이의 시·서·화의 삼절(三絶)을 넘어 춤·노래·거문고 등으로 당시 조선이 상국(上國)관계로 있는
중국 문화에도 정통하였던 그녀에게 녹아든 것은 어쩌면 사내로서 자연스런 현상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진이는 옥섬(진현금 의동생)으로부터 잠자리 기술도 배웠다.
“네가 싸늘하면 사내 역시 싸늘할 것이요. 네가 뜨거우면 사내도 뜨거워 질 것이고 네가 깊어지면 사내 또한 깊어질 것이다.
헛되이 움직이거나 소리를 질러서 힘을 빼지 말고 깊이 숨을 마시며 음기를 몸 전체에 고루 모아 낮은 소리로 한없이 속으로 빨아들이거라.
사내란 겉으론 천하를 움직일 듯 하지만 알고보면 연약하느니라.”라고 꽃잠(첫날밤)의 기술을 가르쳤다.
이토록 진이는 여자로서도 완벽하였으며 학자(지식인)로서까지 조선의 사대부 수준에 손색이 없었다.
화담 서경덕의 수제자 허엽과 동문수학했으나 오히려 그의 학문 수준을 훌쩍 뛰어 넘었지 않았나 싶다.
허엽의 딸 허난설헌이 역시 조선시대에 출생하여 남성사회에서 그녀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고 27년이란 짧은 삶을 마쳤다.
허난설헌은 사대부집 고명딸로 태어나 엄격한 사회적 제약으로 기를 펴지 못했으나 진이는 달랐고 그녀는 과감히 자유를 선택하였다.
양가집 딸에서 어느 날 갑자기 얼녀(孼女)로 전략하여 소실의 길 정도를 선택할 수 있었으나
그녀는 과감히 자유인 기생의 길로 들어섰고 억압의 비단길보다 자유의 자갈밭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기녀생활 3년 만에 기적(妓籍)에서 빠져 나와 자유인이 되어 지족선사·소세양·벽계수·이생 등을 품어 진이의 세상을 만들었다.
진이의 경륜과 문화예술세계는 외숙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머니 진현금의 DNA로부터 이어받은 천부적 예능의 자질은 외숙부가 원천(源泉)이다.
외숙부는 비록 하급 악사였으나 사대부 못지않게 학문이 높았으며 그의 서재엔 만여 권의 책이 빼곡히 꽂혀 있었고 그런 가족사를 진이는 고스란히 이어 받았다.
그같은 진이의 세상에 대보름달이 휘영청 뜬 분위기에 남녀칠세부동석과 삼종지덕의 사내들이 불을 본 부나비처럼 하나 둘 날아들었다.
- 5화에서 계속 -
[출처] 풍류야화 황진이(제4화)|작성자 청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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