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야화 황진이(제8화)

 
 

주지스님의 정성어린 보살핌과 간곡한 기도로 진이는 기적적으로 다시 세상을 보게 되었다.

실상암에 들어온 지 보름이 지난 깊은 밤이었고 그날도 주지스님은 대웅전에서 진이를 위해 기도를 하고 있었으며 산사는 바람 한 점 없는 물속처럼 조용하다.

이때 조용했던 산사에 눈보라가 몰아쳤고 갑작스런 바람에 나무 위에서 눈꽃을 피웠던 눈들이 바람에 떨어지면서 눈바람이 산사를 삼켜 버릴 듯 요란하다.

여명이 보이려면 한참은 더 있어야 할 즈음이고 대웅전에 있던 주지스님이 마당으로 나와 기도를 하고 있었다.

이같이 소란스런 광경을 몸소 느끼려고 진이가 방에서 나오는 순간 하늘에선 천둥번개가 작렬하였다.

이 광경을 보려고 희미한 눈을 부비다 진이는 다시 세상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세상이 보인다. 세상이 보여!”

진이는 기도하는 주지스님의 품을 파고들었으며 스님은 이미 알고 있었듯이 진이를 깊고 따뜻하게 품었다.

“이제 날이 밝으면 암자를 떠나가시오!”

주지스님이 말을 남기고 품었던 진이를 풀어놓고 다시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진이와 덕구는 먼동이 트자 암자에서 내려와 한학금의 의동생 퇴기 옥섬의 집으로 갔으며 옥섬의 집은 청루가 즐비한 청교방 거리에 있다.

현학금이 진이를 황진사에게 주고 어디론가 종적을 감춘 후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옥섬은 청교방 거리에 자그마한 집을 얻어 거처하고 있다.

방이 셋인데 하나는 늘 정갈하게 정돈하여 비워두었고 진이가 언제든지 오면 마음 놓고 편히 쉴 수 있게 해둔 방이다.

“옥섬이모, 진이가 왔어요!”

진이가 올 줄 알았다는 옥섬은 덤덤하였고 해는 어느새 중천에 떴다.

“시장하겠다. 아침도 못 먹었을 텐데 밥부터 먹어라!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시래기 국에 감자가 섞인보리밥이었고 숟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진이가 입을 열었다.

“이모, 진이가 전우치(田禹治)를 봤어요. 제가 천둥번개가 작렬하게 칠 때 가슴이 떨리고 무서운데도

세상을 보고 싶어 희미한 눈을 부빌 때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동시에 하늘에서 백마 탄 옥골선풍의 선비가 저에게

‘진이야, 이제 너는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말하고 사라졌어요.

그가 전우치가 아니고서야 그 밤에 어떻게 그곳에 올 수가 있겠어요? 소문으로 들은 전우치와 똑 같았어요! 이모.“

진이의 눈에는 지금도 실상암 앞에서의 비몽사몽 장면이 선명하다.

당시 전우치의 도술(道術) 얘기는 송도에서는 흔한 애기였고 특히 재령군수 박광우(朴光佑)는 전우치와 친구사이였다.

도술은 혹세무민하다 하여 금기시 되었고 전우치도 도술을 부린다하여 경계당한 인물이며 나라에서 사형명령이 떨어진 상태다.

중중(中宗:1506~1544)시대 전우치는 친구인 박광우 집에서 목매 자살하였다.

그런데 몇 년 뒤 누군가 박광우를 찾아와 전우치의 지팡이를 달라기에 그를 쳐다보니 전우치였다는 것이다.

또한 서경덕 형제들과 도술 경쟁 등의 애기들이 송도엔 낯설지 않은 화젯거리다.

진이도 아버지 황진사 집에 있을 때 사랑채와 어머니 신씨 등에 오가는 얘기들은 귀동냥하여 생소하지 않았는데 실상암에서 극적으로 비몽사몽 상태에서 봤던 것이다.

천재 진이로선 전우치의 얘기들이 낯설거나 의문투성이도 아니었고 아버지 서재의 각종 서책에서 도사(道士)들의 얘기를 수없이 접해 익히 알고 있었다.

진이의 기생 입문은 속전속결이었고 동기(童妓)로 시작하여 2년 사이에 송도와 한양의 한량들이 품고 싶은 미색(美色)에 올랐다.

진이가 열여덟살을 맞는 어느 봄날 고을 유수에게 수청을 들게 되었고 본인 진이보다 현학금의 의동생인 옥섬이 더 긴장하였다.

고을 유수의 수청을 잘 들어 좋은 점수를 얻어야 관기(官妓)의 운명도 좋기 때문이다.

진이도 예외가 아니었고 사대부집 딸에서 어느 날 갑자기 서녀가 되어 마침내 기녀(妓女)가 되었으니 한량들 세상의 관심의 여인이 되었다.

고을 수령이 동기들의 초야권을 갖는 것은 이상 할 것도 없으며 진이의 초야권도 그렇게 송도 유수가 태상주(太常酒) 한 잔 마시듯 어느 날 차지하였다.

진이의 기녀생활 삼년 만에 기적에서 나와 자유인으로 한량들의 세계를 주름잡았다.

진이 앞에 한량들의 부나비처럼 몰려들었고 비록 몸을 파는 기생이나 마음에 드는 사내도 있으며 소위 순정이란 것이 있는 것이다.

돈(花代)을 주고 진이의 몸은 샀으나 영혼까지 살 수는 없어서이기 때문이다.

숱한 사내들이 진이의 몸뚱이를 사서 육체의 향락을 즐겼으나 시·서·화의 삼절(三絶)을 넘어 노래와 춤, 기예(技藝)까지 능통한 영혼까지 사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 사내가 진이의 영혼을 사로잡았고 바로 이사종(李士宗)이며 그는 부도 명예도 없는 소리꾼 낭만파 소위 집시(Gipsy)다.

그 청년에게 진이의 영혼이 넋을 빼앗겼고 이사종은 어느 고관대작의 서자(庶子)이며 조선의 대표적 옥골선풍에 소리를 잘하는 떠돌이 인생이다.

그런데 그가 같은 서자 출신인 삼당시인 이달(李達)과 둘도 없는 사이다.

이달은 허엽의 아들 허봉과 가까운 사이이며 허엽은 후에 진이와 같이 서경덕의 동문수학 관계다.

아무튼 이사종은 진이와 영혼이 통해 명월의 집에서 무상으로 먹고 자는 유일한 사내가 되었다.

손님이 없을 땐 그들은 밤을 새는 신혼부부로 자연스럽게 뜨거운 밤으로 갔으며 옥섬은 걱정이 태산이다.

기생 나이 열여덟이면 절정의 꽃같은 시절인데 자칫 무일푼의 떠돌이에게 정신이 팔려 좋은 시절 다 보내고

자신과 같은 신세가 될까 눈앞이 캄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 사내들과 살을 섞을 때면 진이는 옥섬의 말을 잊지 않았다.

“네가 뜨거워져야 사내들도 뜨거워진다?”를 실천하여 비록 화대를 받고 몸을 내어 주었지만 제 남자처럼 사랑스런 여인이 되려하는 것이다.

조선판 '소녀경'(素女經)이나 '현묘경'(玄妙經)이 되어 남녀칠세부동석이 아닌 남녀동등사회의 선구자가 되려는 의지다.

지금은 생사조차 알 길이 없는 어머니 현학금이 열여덟에 거문고의 명인이 되었는데 진이 역시 같은 나이에 그 반열에 올랐다.

진이는 남녀관계를 뛰어넘어 학문의 세계까지 섭렵하여 누구와도 밀리지 않는 역할을 하였고 고려의 핏줄을 이어받은 진이는 항상 길재(吉再)의 시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고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를 되새기며 미래를 꾸몄다.

- 9화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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