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야화 황진이(제14화) - 달성습지

풍류야화 황진이(제14화)

 

 

밤새도록 사랑놀이를 하고서도 진이와 이생은 피곤한 기색없이 말에 올랐고 말 등엔 거문고와 점심에 먹을 간단한 음식이 실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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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얻어먹고 유람생활을 할 것을 이것 저것 가지고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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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산을 출발하여 지리산을 거쳐 금강산으로 들어갈 생각이며 그래도 진이의 속주머니에는 외숙부가 건넨 비상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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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자신의 몸뚱이를 여행의 무기로 생각하고 있으며 돈이 떨어지면 이 절 저 암자를 찾아 구걸을 하고 그것이 안 되면 몸을 달라면 주려는 속내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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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까지 하니 무서울 것이 없고 호위무사로 이생이 있으니 짐승한테 물려갈 염려도 없으니 진이 마음이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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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은 이생대로 마음이 즐거웠고 아버지는 포의(布衣:벼슬 없는 선비)로 정암(靜庵:조광조 호)과 의기투합 했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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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궁하여 그를 배신하여 선비로서 자격이 없다하여 15살의 이생이 이름을 버리고 팔도를 유랑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때 한양에서 진이와 연락이 닿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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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정암과 의기투합이 잘 되었다면 출사는 못했어도 높은 학문의 세계에 있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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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아버지가 준 이름을 버리고 세월을 낚으며 팔도를 유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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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이 진이를 만난 것은 그야말로 호박이 덩굴째 굴러들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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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조선팔도 사내들이 품에 넣고 싶어 했던 명월을 매일 곁에 두고 밤잠까지 할 수 있으니 횡재 중에서도 상 횡재한 사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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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묘향산 보현사에 다다랐을 때는 어느덧 땅거미가 지고 있었으며 하늘을 덮은 고목들로 밤같은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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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길 위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으나 허기가 졌으며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주지스님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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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도 남장차림이고 이생만이 진이를 여자로 알고 있을 뿐이며 주지스님은 저녁을 주고 방까지 내주었고 허기를 채우자 그들은 골아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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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생이 문득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코에 선향(仙香)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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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사 특이의 향이려니 하고 다시 잠을 청했으나 선향은 점점 더 짙게 느껴졌고 옆에서 곤히 자던 진이한테서 꽃향기처럼 피어나는 향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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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은 처음엔 자신이 진이한테 홀려 느끼는 착각이려니 생각하기도 했으나 진이가 숨을 내쉴 때마다 선향이 자신을 구름처럼 휘어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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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아니었으며 창문으로 푸른 달빛이 들어와 진이의 얼굴에 머물러있고 신선이 누워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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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인 진이를 여자로 보고 사내 역할을 하려던 욕망을 접자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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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산엔 향목·동청(冬靑) 등 향기로운 나무들이 많아 묘향산(妙香山)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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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은 처음엔 그런 향기려니 생각했었는데 방안에 점점 더 향기로운 향이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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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가 움직일 때마다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향기로운 향취가 안개처럼 퍼졌고 진이는 어느새 이생의 품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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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녀의 입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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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가는 곳 마다 환락의 장소에는/ 음악소리가 호화로운 집 울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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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산가(山家)에선 즐길만한 것 없어/ 하늘이 새들 시켜 피리퉁소 불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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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감(園鑑)의 '새벽에 일어나 새소리를 듣고'를 떠올리며 잠꼬대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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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이 이생의 품에서 꿈틀댔고 첫날의 합방은 얼떨결에 몇 번의 방사를 했으나 태상주 기운에 비몽사몽 상태라 진이의 깊은 맛을 미쳐 느껴보지도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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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흡족하고 멋지게 즐길 수도 있는 순간인데 왠지 명월이 무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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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있을 때엔 형 아우로 하고 뭇사람들이 있을 때는 상전과 하인으로 하자 했는데 첫날부터 상전으로 느껴졌고 여자가 분명한데 젖먹이가 어미를 대하는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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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의 체온이 서서히 옮겨져 오고 있었으며 진이의 두 팔이 벌어져 이생을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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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의 숨결이 가파르게 올라갔으며 가슴이 울렁거리고 얼굴이 달아오르는데 마음은 편치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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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가 쾌락의 대상이 아닌 예사롭지 않은 경계해야 하는 존재로 느껴져 무서워져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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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더욱더 뜨거워진 몸으로 이생을 끌어당겼고 그때 진이의 입에서 시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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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도 기다리는 사람 오지 않고/ 스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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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숲 속에는 새들만 있어/ 지저귀는 소리에 술 생각이 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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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로(李仁老)의 '천수사 벽에 쓰다'이고 진이는 조선시대에 살고 있으나 고려의 여인으로 긍지를 잊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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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벤치마킹한 강좌칠현(江左七賢)을 경모(敬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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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현 중에서 특히 문장에 뛰어나고 절행(節行)으로 추앙받는 함순(咸淳)을 늘 마음속에 두었으나 그가 남긴 작품은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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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역시 강좌칠현의 일원인 이인로의 작품을 진이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암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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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진이가 꿈속에서 함순을 만나고 있으면서 입에서는 이인로의 시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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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은 진이를 가슴에서 떼어놓고 밖으로 나갔으며 으슥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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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山寺)의 깊은 밤은 적막하다 못해 무덤 속 같이 고요하고 하늘엔 보석을 뿌려 놓은 듯이 별들이 반짝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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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닫았으나 진이가 깼으며 이생이 옆에 없자 진이도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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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었소! 잠을 더 자고 일찍 길을 떠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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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남기고 진이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으며 따라 들어오란 말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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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은 잠시 아버지를 떠올렸고 영웅심에 들떠 정암을 고발하고 순간적으로 들떠있던 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을 버리고 비렁뱅이가 된 것에 대한 반추(反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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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 아버지의 정암 모함으로 촉발된 기묘사화(己卯士禍)는 숱한 사림파 선비들이 죽거나 벼슬에서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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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 집안의 체면이 아니다란 신념으로 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을 팽개치고 팔도를 유랑하는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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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도덕군자도 아닐진대 라고 하는 생각에 이르자 그는 총총히 진이가 다시 들어간 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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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들어온 이생은 마음을 굳게 먹고 진이를 뜨겁게 끌어안았으며 진이도 말없이 사내가 하는 대로 몸을 움직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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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관에서 첫 방사를 할 때보다 이생은 몸과 마음이 흡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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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을 흡족히 나눈 그들은 산사의 새벽종이 울리기도 전에 총총히 발길 닿는 대로 길을 재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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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에서 계속 -

 

[출처] 풍류야화 황진이(제14화)|작성자 청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