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세로 요절한 천재화가, 성당 앞뜰 감나무도 빈 가지 울려 애도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2가에 빨간 벽돌로 지은 천주교 계산주교좌성당(계산성당)이 있고 그 구내에 수령이 백년도 넘어 보이는 감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서있다. 계산성당은 1902년 서울과 평양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양식의 성당이다. 이 성당은 대구에서 최초로 세워진 서양식 건물이다. 계산성당의 감나무는 '이인성 나무'라 부른다. 이인성(李仁星·1912~1950)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6회 연속 특선을 하고 25세에 추천작가 겸 심사위원이 된, 대구가 낳은 희대의 천재화가이다. 그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치안이 극도로 혼란하던 서울에서, 치안을 책임지고 있던 치안대원과의 사소한 다툼 끝에, 치안대원의 총에 맞아, 천재적 재능을 미처 피워보지도 못한 채, 38년이란 짧은 생을 허망하게 마감하였다. 너무도 아쉽고 어이가 없어 감나무도 그동안 정신 줄을 놓고 있은 모양이다. 이제 그때의 아름다운 기억을 추억하고자 한다.

1926년 어느 가을날, 계산성당의 성모상이 따사로운 햇살을 쬐며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천고마비의 계절이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그림 그리기 좋은 날씨였다. 이인성은 집을 나와 병원에서 스케치북을 찾아 인근 계산성당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동네 조그마한 식당에서 밥과 대포를 팔며 어렵게 살아가는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는 아들을 보면 몽둥이를 들고 따라와 혼을 내기 때문에 인성은 부모 눈을 피해 남성로 집에서 제법 떨어진 계산성당 근처에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 안 그래도 어려운 형편에 그림을 그리면 굶어죽는다는 것이 아버지의 지론이었다. 그림을 그리면 밥이 나오나, 돈이 나오나? 그림 그리는 어린 인성에게 아버지는 버릇처럼 말하며 인성의 엉덩이를 때리곤 했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서동진(徐東振) 선생이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미술을 이해하는 남산병원 원장 김재명을 인성에게 소개해주었다. 명문 교남학교(대륜학교 전신)의 미술교사였던 서동진 선생은 대구 화단을 이끌고 있던 서양화의 선구자였고 병원을 하는 김재명은 대구의 대표적인 인텔리로 기꺼이 인성의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성당 앞 감나무에 주홍색 감이 탐스럽게 달려있었다. 감꽃이 한창이던 때, 김옥순은 그녀 부모를 졸라 인성에게 이젤을 사주었다. 옥순은 김재명 원장의 딸이었다. 인성은 감꽃을 따 실에 꿰어 감꽃 목걸이를 만들어 옥순이에게 걸어주었다. 옥순이는 너무 예쁘다며 깡충깡충 뛰며 좋아했다. 그때 옥순이가 했던 말이 귓가에 생생했다.

“인성아, 이담에 꽃 가락지도 만들어 줘야돼!”

인성은 그 귀여운 모습과 그 사랑스런 목소리를 하얀 도화지에 담고 싶었다. 성당을 배경으로 한 감나무를 그리고 그 아래에서 감꽃 목걸이를 걸고 좋아하는 옥순이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인성은 아버지인가 여겨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림 그리는 모습을 훔쳐보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이쾌대였다. 이쾌대(李快大·1913~1965)는 인성이 다니는 수창학교 학생으로 나이는 인성보다 한 살 어렸지만 학년은 인성보다 두 학년이나 높아서 피장파장으로 서로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인성의 집이 너무 가난하여 열한 살에 입학한 까닭이었다. 이쾌대는 군수까지 지낸 칠곡 대지주의 막내아들로 인성이 그림을 잘 그려 도쿄에서 열린 세계아동미전에서 특선을 한 이후 유명세를 타자 인성을 관심 있게 지켜보던, 인성도 호감을 가지고 있던, 그림에 재능이 많은 친구였다. 쾌대는 체구가 크고 건강하여 운동에 재능을 보여 야구를 하려했으나 집안에서 극구 반대하여 그림에 취미를 붙이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미술에 조예가 깊었던 그의 맏형 이여성(李如星)의 영향 때문인지 쾌대도 일찍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그 솜씨도 남달랐다. 인성은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는 사이 인성의 주위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고 옥순이와 서동진(徐東振) 선생도 어느 틈에 왔는지 구경꾼 사이에 끼여 그림을 보고 있었다.

“인성아, 날 그린 거 맞지?”

인물의 특징이 드러나자 옥순이가 좋아서 만세를 불렀다. 순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쾌대의 미간이 실룩거렸다.

“야, 그게 감나무 그림이지 옥순이 그림이냐? 내가 제대로 한 번 그려보지.”

쾌대가 불편한 마음을 드러내며 앞으로 나섰다. 쾌대는 인성의 연필을 빼앗아 들고 인성이 그렸던 그림을 다른 도화지에 그리기 시작했다. 서동진 선생도 흥미로운 듯 미소를 띠며 두 사람의 그림 경연을 지켜보았다. 같은 구도의 그림이었지만 두 그림이 주는 느낌은 완전히 판이했다. 쾌대의 스케치가 완성되자 두 사람의 그림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서동진 선생에게 쏠렸다. 서동진 선생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없이 발길을 돌렸다. 그때 같이 옆에서 지켜보던 옥순이가 소리쳤다.

“난 이게 더 좋아!” 하고는 인성의 그림을 가지고 달아났다.

쾌대의 얼굴에 먹구름이 지나갔다. 쾌대는 옥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고개를 숙인 채 인교동 쪽으로 사라졌다. 인성도 그림 도구를 챙겨 옥순이네 병원에 맡기고 감나무 아래로 돌아왔다.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철부지 옥순이의 칭찬이 전문가인 서동진 선생의 칭찬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인성은 감나무에 기대어 옥순이와 결혼하여 같이 사는 자신을 상상해보며 얼굴을 붉혔다. 감나무가 사랑스러웠다. 잘 익은 감들이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았다. 그 날 이후로 인성은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감나무 아래에서 서성거리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고 열에 아홉 정도는 거기에서 옥순이를 만날 수 있었다. 들국화로 만든 꽃반지도 옥순이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옥순이는 인성이 주었던 감꽃 목걸이와 꽃반지를 표구까지 해서 책상 위에 걸어두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감나무 아래에서 옥순이네 병원 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그의 등을 탁 쳤다. 이쾌대였다.

“야, 인성아! 너, 옥순이 좋아하지? 내가 옥순이랑 사귀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우리 한판 붙을까? 내가 너한테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하는 거다. 지는 쪽이 깨끗이 양보하기로 하고 사나이답게 한판 붙자.”

인성은 너무 어이가 없어 잠시 동안 멍하니 쾌대를 바라보았다. 쾌대는 평소와 달리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 있었고 꽤 흥분한 상태로 보였다. 인성은 싸워서 이길 자신도 없었고 섣불리 옥순이를 책임질 자신도 없었다.

“쾌대야, 그건 옥순이 마음이지 우리 뜻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

“그렇다면 내가 옥순이와 사귀어도 괜찮다는 말이지? 확실히 말해라!”

“…그러니까 내 말은 옥순이 뜻에 따라야 한다는 말이지….”

“알았다. 옥순이한테 그렇게 말할게.”

쾌대가 남산병원 쪽으로 쏜살같이 뛰어갔다. 인성은 자기와 쾌대를 비교해 보았다. 쾌대는 만석꾼 대지주 아들에 집안도 좋고 공부도 잘 하는 데다 운동도 잘하고 키도 크며 인물도 좋았다. 인성이 더 나은 것이라곤 그림 실력밖에 없었다. 그림 그려서 밥이 나오나 돈이 나오나, 라는 아버지의 나무람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대포 한 잔에 김치 한 점 씹으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아버지 모습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병원의 의젓한 의사 선생님인 옥순이 아버지와 대비가 되었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번에는 옥순이가 상기된 얼굴로 급히 달려왔다.

“인성아, 너 진짜 쾌대한테 그렇게 말했나? 진짜가? 내가 쾌대랑 사귀어도 괜찮다고 했나?”

“…그냥 네 마음에 달렸다고 했다.”

인성이 겁먹은 눈빛으로 옥순의 눈을 피하며 몸을 뒤로 빼자 옥순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몸을 휙 돌려 집으로 달려가 버렸다. 인성은 비겁한 자신이 너무 미워 감나무에 머리를 찧었다.

그날 이후로 옥순은 인성을 의식적으로 피했고 더 이상 감나무 아래로 오지도 않았다. 인성은 서동진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림 공부에 더욱 매진했다. 쾌대보다 더 잘하고 또 앞으로도 더 잘할 수 있는 것은 그림밖에 없다는 것을 인성은 명백히 알았다. 그림에서 최고가 되는 길만이 옥순이를 찾아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이인성은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이래 제10회부터 내리 6번을 특선하는 유례 없는 쾌거를 달성하였고 일본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던 김옥순과 재회하여 결혼까지 하고 남산병원 3층에 꿈에 그리던 개인 화실도 내었다. 그러나 결혼 4년 만에 김옥순과 사별한 이인성은 실의에 빠져 우울증과 고독으로 세월을 보냈다. 이 시절 그린 그림 중에 계산성당과 감나무를 그린 것이 몇 점 남아 있어 그의 울적함과 상실감을 엿볼 수 있다. 1947년 그의 나이 35세 때, 이인성은 김창경과 재혼하고 장남을 낳은 후 전시회를 여는 등 야심찬 재기를 노렸으나, 1950년 전쟁 중에 치안대원과의 사소한 다툼으로 인해 어이없는 죽음을 맞았다.

일찌감치 통행금지가 내려진 골목길을 술 취한 취객 하나가 걷고 있었다.

“누구냐. 정지.”

돌연 거리를 차단하고 있던 치안대원이 지나가던 사내의 발걸음을 막아 세운다.

“나 말이요, 나. 천하의 나를 모르오? 이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나를 모르오. 난 이인성이오. 천하의 천재 이인성이오.”

치안대원은 어이가 없었지만 사내의 기세가 너무나 등등하여 고위층의 인물인가 은근히 겁도 나서, 일단은 치밀던 화를 자제하고 집으로 보내준다. 그리고 경비소로 돌아온다.

“누구 저기 위에 사는 이인성이라는 사람 알아? 그 사람 뭐하는 사람이야?”

“뭐하긴 뭐해. 환쟁이지.”

“환쟁이? 아니 그 자식이 환쟁이야?”

치안대원은 분기탱천하여 뛰쳐나간다. 그리고는 씩씩거리며 종전의 사내가 들어간 집 대문을 발길로 걷어찬다.

“누, 누구요.”

술 취해 자리에 누워 있던 이인성이 몸도 채 가누지 못하고 문을 열고 나서려는 순간. 치안대원의 총이 잠결에 뛰쳐나온 이인성의 이마를 향한다. 방아쇠를 잡아당긴다.

"타앙!"

한 발의 총성이 적막을 찢는다. 이인성은 쓰러진다.

작가 최인호가 오래 전에 화가 이인성의 최후를 소설적으로 각색해 쓴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의 한 부분이다.

이쾌대도 이인성에 못지않은 천재성을 보여주었으나 이인성에 가려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맏형인 이여성의 영향 때문인지 6·25전쟁 후 자진 월북하였고 그 후 맏형 이여성이 숙청됨에 따라 이쾌대도 그의 천재적인 재능을 미처 발휘하지 못한 채 1965년 북한에서 그 한 많은 생을 쓸쓸히 마감했다고 한다.

대구 수창학교가 낳은 두 천재, 이인성과 이쾌대는 1946년 독립미술가협회에서 함께 활동하기도 했으나 서로가 서로에 대한 애정을 다 보여주지도 못하고 재능도 제대로 발휘해 보지 못한 채,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여 허덕이다가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안타깝게 우리 곁을 떠나갔다.

오늘도 계산성당 내에는 감나무 한 그루가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서있다. 사람들은 이 감나무를 '이인성 나무' 라 불렀다. 감나무는 이쾌대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오철환(소설가·대구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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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 성당에 몇차례 들렸지만 이인성 나무를 찾을수가 없었다
분명 이인성 나무가 있다고 했는데 하긴 계산성당을 지나다니며 구경을 다니고 사진을 찍고 하였지만 구석구석 뜯어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지 이인성나무의 존재는 알았지만 정확한 위치를 몰랐다.
어제밤 야간 촬영차 계산 성당에 갔었다 본당 앞 감나무에 감이 주렁 주렁 매 달렸다 멀리 제일교회에 불이켜지고 제일교회와
감나무에 매달린 감나무를 찍어보면 좋겠다 싶어 감나무를 찍었다 감이 제법 많이 열려 있다.
감나무에 매달린 감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아 감나무에 촛점을 맞춰도 pin이 맞질 않는다 더욱이 밤이라 촛점을 맞출수가 없다.
감나무에 매달린 감의 색감을 찾아 또렸하게 찍으면 오늘 촬영 수업은 마친다 고 했다
조리개를 개방하니 촛점은 맞질 않는다 조리개를 조이면 조일수록 조금더 선명한 감 열매를 또렷이 잡을수가 있을것 같다.
촬영중 이곳에 분명 이인성 나무가 있다는데 오늘은 꼭 찾아보마 마음 먹었다.
감나무를 촬영하고 이인성 나무를 찾아 헤매던중 이인성 나무라고 쓴 표지판을 보았다.
여태 내가 촬영한 그 나무가 이인성 나무이다.
참 바보구나 이인성나무가 감나무 인지도 그것조차도 몰르고 찾아 헤매다니 그래서 이인성 나무를 찾아 보았다
대구문화방송국에서 대구의 캠페인으로 이인성 나무를 이야기하며 이인성나무가 있음을 알게되었는데
대구매일신문사의 기사를 찾아보니 이인성 나무에 얽힌 이야기가 나온다 대구 수창학교 출신의 천재화가 이인성 그리고 이쾌대
그리고 옥순이에 얽힌 이야기 천재화가의 천재성을 꽃피우지못하고 짧은 생은 마감한 이인성 그리고 이인성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천재화가 이쾌대 아쉽게도 짧은 생을 마감 하였다.
오늘도 이인성나무는 말없이 긴 세월을 침묵하며 감나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어린시절 명덕네거리에서 아래로는 중앙로까지

위로는 영대 네거리 까지 나의 나와바리 였다.

초딩시절 신문을 배달 하였던 나는 매일신문사(지금의 국민은행 위치)에서

윤전기가 돌아가 신문이 인쇄되어 지면 150부나 되는 신문을

무게를 못이겨 어깨끈을 하고 신문의 잉크가 묻어 나와 옷버릴까 싶어

밀가루 포대를 갈라 신문지 제일 마지막장에 대고 힘에 부쳐 어깨끈에 의지한채

반월당 덕산동부터 대봉동으로 이천동 일대를 누비며 배달을 하였다.

학교를 마치고 매일 신문사에 신문을 배급 받기 위해 다니던 길이랑

그리고 신문 배달을 할때 다니던 길 골목 일부를 다니며 사진으로 남겨 보았다.

내가 어린 시절 다니던 길과는 사뭇 많이 달라 졌지만

그래도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인 길을 마주 할때 옛생각에

가슴 찡한 무엇을 느껬다.

그런 길들을 사진으로 남겨 둔다 모두 재개발 지역에 포함 되어

어느순간 없어질 길 들이기에 그런 기억들을 남겨 두고 푼 까닭이기도 하다


정면 수도멘션

이층집 우리집 물론 어린시절의 그집은 아니다 개축을 하여 부모님이 사시던곳 지금은 어머니 혼자 2층에 사신다

영선 시장으로 가는길 초등학교때 등교 길이기도 하다

우측 타일 이층 양옥이 어머니가 사시는 곳

어머니가 사시는 집을 정면에서 찍은 사진 이다

명덕로에서 익골목으로 들어서 영선 시장 까지 연결 되는 소방 도로 내가 이곳에서 자라고 컷다

명덕로에서본 청수장 모텔과 상가들 이제는 주택주합이 모두 매수하여 곧 헐리고 새로운 아파트가 생길 예정이다 (신일해피트리 예정지 우리집을 포함)

이 지역이 모두 재 개발 지역이다

명덕로를 건너 이쪽은 중구 관할 이다 수도멘션 뒤쪽이 되겠다

매일 이길을 지나 다녔다 매일신문사를 가는 길도 그랬고 그전 대도극장 대한극장을 가자면 이길로 다니곤 했다.

어머니가 장사하던 로얄제리 가게를 가자면 이길을 따라 제일여중 제일여상 을 거쳐 대구초등학교를 지나 반월당 까지

이후 사회에 나와 대구 시청에 다닐때도 이 길을 애용했다

이 길을 지날때면 떠오르는 기억하나 초딩때 일이다 푸세식 변소를 애용 할때 분뇨수거는 사람이 똥통을 지게를 메고 다니며 수거를 하였는데

그날은 신입 수거원이 작업을 나왔나 보다 그래서 고참 사원이 신입에게 분뇨수거 하는 방법을 현장 학습 (?) 하였던가 보다

분뇨를 휘휘저어 건더기와 똥물을 같이 퍼야 편하지 나중에 건더기만 건져 내려면 힘들다고 훈시를 하던 장면이 떠 오른다

지저분하고 하찮은 분뇨 수거하는 일도 모두 다 메뉴얼(작업표준)이 있는 것

그것이 명문화 되어 있지 않아도 입에서 입으로 전하고 내려오는 방법들

경북여고 뒷담이다 예전에 담벼락이 꽤나 높았고 은행나무들이 꽤나 큰 것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학교 교정이 다 보이도록 개방 도어 있다.

경북 여고 뒷담을 지나 가면 예전 남구청과 대한극장 대도극장이 나왔었는데 그길은 아직 그대로 다

이길도 여전하고

이길은 바닥을 새로 깔았나보다 남문시장으로 나가는 지름길로 애용 했었다

참으로 낡은 옛집 이집은 아직도 스레트 지붕으로 되어 있다 스레트 집은 석면의 유해성 때문에 이제는 사용 하지 않고 모두 거둬 내는 추세인데

아직 거둬낼 형편이 되지 않는건지 스레트 지붕을 개량 하는 작업은 위험한 일이고 그곳에 거주하는것도 건강상 아주 위험 하여 철거 비용이 관에서 지원 될텐데...

예전엔 모두 이런 좁은 골목길이 많았었다 둘이만 지나 다녀도 어깨가 마주치는 그런 좁은 골목들 옛 주택가에는 이런 골목들이 계속 이어 지곤햇다.

정면 대구제일중학교 이곳이 예전 제일여자상업고등학교 제일여중이 있던 자리이다 여전히 제일중학교란 이름으로 학생들이 면학을 하는 곳인가 보다.

대구 향교이다

향교에서 대봉동 수도산 가는길 수도산이 원래 이름이 삼봉산이 엿다고 한다. 삼봉산에 수도 시설(배수장)이 들어서고 수도산이 되었다

대구 향교 이다

향교를 지나 수도산 쪽으로 가다 우측 조그만 골목으로 들어 섰다 좁은 골목길 풍경이다 담벼락이 옛날 모습이고 그마져도 내려 앉아 구멍이 났는지 합판으로 막아 두었다

주택가 좁은 골목의 전형 이다 신문을 돌리고 건들바위 쪽에서 올라 오면 가파른 게단길이 보이고

계단을 지날때면 바위에 새겨진 석불상을 만지곤 했는데 그길을 찾긴 했지만 석불상도 없고 옛날 그 길인지 조차도 구분이 안갈 만큼 변해 있었다.

계단을 따라 내려 오니 건들 바위다.

건들 바위에 얽힌 이야기는 다시 건들 바위란 이름으로 글을 쓰봐야 할것 같다








 

‘관덕당(觀德堂)’이라고도 불리는 관덕정은 1749년(영조 25)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 민백상(閔百祥)이 건립한 건물로,

별무사(別武士)와 군관(軍官)을 선발하는 도시(都試)를 실시하는 도시청(都試廳)으로 사용되었다.

그 위치는 대구읍성 남문 밖 서남 200보 지점으로, 현재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이다.


관덕정에 관련된 사항은 다음의 링크를 따라 가면 상세히 볼수 있다


원래 이곳은 쓸모 없는 땅이라고 해서  조선시대에 중죄인을 참수형으로 처형하는 형장으로 사용되었다.

이곳은 동학(東學)의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1864년(고종 1) 이곳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고,

또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의병들이 총살당한 장소이다.

관덕정 마루의 형장이 우리 역사에서 특히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815년(순조 15) 을해박해 이후로

천주교 신자 25명이 이곳에서 여러 차례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천주교 신자들의 성지로 1984년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관덕정순교기념관의 건립을 추진하여 순교 터로 고증된 땅 512.40㎢를 확보한 다음,

1985년 착공하여 1990년 지하 1층 지상 3층의 한옥 누각 형식의 건물을 완공해

1991년 5월에 개관식을 가졌다 ( 위 링크 주소의 다음 백과에서 발췌)










대구 글로벌 게임 문화축제가 열리는 동성로 축제장 입니다.

중앙파출소 부터 대구백화점 가는길에 게임 부스와 게임 관련 부스들이 만들어 져 있네요

베틀그라운드 게임이 현장에서 벌어지고 게임 실황이 전광판에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게그맨 한민관이 게임의 사회를 보고 있네요

이제 제조업은 한물이 가고 이런 게임 산업이 활발히 개발되어지고

소비자에게 먹혀 드는 세상이 되었는가 봅니다.

아무리 게임산업이 발달 한다 하더라도 1차산업과 2차산업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으면

가장 기본적인 산업 구조가 무너질것 같은데 정부는 제조업이 망조가 들도록 내비 둘 모양 이네요

경제가 살아날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제조업에 종사해 온 나 로서는 무척 안타까운 일 입니다.





참으로 많이 변했다.

이곳에는 어린 시절부터 무척이나 많이 다니든 길이였는데

이곳에서 중앙파출소로 가다 보면 우측에 청소년 적십자 회관이 있었는데

학창시절 청소년 적십자회원이던 나는 이곳에서 헌혈 캠페인도 하였는데

이젠 청소년 적십자회관이 있던 건물은 뜯겨나가고 새로이 건축을 한다.

두번째 사진 파란 비계가 설치된 공사장이 그곳이다.

이곳을 지나 자니 옛 생각에 젖어 들어 한컷 남겨 두어야겠단 생각이 들어 카메라에 담아 본다
















어린 시절 석간 신문을 배달했다.

신문사에서 기사와 원고가 마감 되자 마자 윤전기는 돌아 가고

윤전기에서 쏟아내는 신문지가 차곡 차곡 쌓여 지국장에게 인계되면

150부나 되는 버거운 무게의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이 골목 저 골목 누비며 독자들에게 배달 하였다.

덕산동 골목길을 돌아 봉산동 남산동 대봉동 대명동 골목 골목마다 누비며

신문을 돌리고 나면 어둑 어둑 어둠이 밀려 온다.

이 골목에 들어서면 고생한다고 사과를 쥐어주던 아주머니들과

더운날 수고 많다고 다독여 주시며 시원한 얼음 물에

미수가루를 태워 주시던 아저씨를 만날수 있었는데

이제는 다 뜯겨 나가고 흉폐한 폐허가 된 듯한 뒷골목

추억이 서려 있는 골목길을 사진에 담아 본다.


사문진에서  내가 찍은사진이 다음포털 포토 뉴스에 올라 사람들에게 읽혀지게 되었네요 
 
https://news.v.daum.net/v/20180912183018680


[포토친구] 사문진에 핀 해바라기

입력 2018.09.12. 18:30

대구 사문진에 핀 해바라기도 수명이 다 한듯합니다.
알알이 박혀 있던 씨앗들을 다 토해내고 석양에 섰네요.
여름이 물러나고 찬바람 부는 가을이 오면 머릴 떨구겠지요.

사진가 예하옆지기 청운


내가 찍은 사진이 다음 포털에 포토뉴스에 실렸네요


아산 신정 호수의 모습입니다. 높고 푸른 전형적인 가을 하늘의 모습입니다.

사진가 예하옆지기 청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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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v.daum.net/v/20180913150106727


[포토친구] 신정 호수의 하늘

입력 2018.09.13. 15:01

아산 신정 호수의 모습입니다.
높고 푸른 전형적인 가을 하늘의 모습입니다.

사진가 예하옆지기 청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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