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 팁 바같에서 찍었던 노출 그대로를 가지고 동굴 안에서 밖에서 찍은 노출 과 동일 하게 촬영 동굴 안에서 주변이 어둡다고 노출을 다시 조절하면 안됨

실루엣 기법 이라고도 함 동굴 바같에서 찍었던 노출 조건 그대로 적용해야 함





























































이월드보다는 못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못할것도 없다 뭐>

이월드에서 등불을 촬영 하듯 보켓안에 별도 집어 넣어 보고

원근도 조절 하여 보고 나름 이월드에서 찍고 연습 한것 처럼 해 보는거지 뭐

그런데 뭘 하나 걸고 찍으려니 걸수 있는 것들이 없네 그래서 이월드가 낫다고 하는건지?

사진을 찍어 놓고 보니까 참 못찍었다 노출이 제대로 맞질 않은거 같다.

내 실력에 이 만한 것도 다행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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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췌 사진 수업 한다고 참여는 했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 먹을 수가 있어야지

무슨 말을 하는건 쌤이 외개어를 하는건 아닐껀데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대충 촬영을 하고 이미지를 실내 수업시 가져 오세요 하는데

허접한 쓰레기 밖에는 없는데 뭔 소릴 들을려고 가져 갈게 하나 없다.

아마 촛점을 어디에 맞추느냐 개방하느냐 조이느냐에 따라 보케가 어떻게 형성 되고

보케의 크기를 조절 하는 방법은 이렇다 는걸 설명 하려 했나 보다 짐작 할 뿐이다

그나저나 어쩌나 제재로 찍은게 하나도 없으니 이미지 파일을 들고 갈게 하나도 없다

나 혼자 서라도 나머지 공부를 더 해봐야지 오늘은 말고 내일 사문진에 가 볼거나

사문진에도 등불을 밝혀 두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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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수업시 매년 겨울이면 이월드에 가서 사진을 찍는단다

그래서 이번에도 이곳으로 오자고 했단다.

알록 달록 불빛들이 화려하고 멋지게 보이긴 하지만

내겐 아무 의미도 없는데

그냥 이렇게 저렇게 사진을 찍어 보라는데

어떻게 찍어야 하는 건지 알수가 없다

아마 보케를 만들며 근접촬영과 원근 촬영의 차이를 알려 주려 했던게 아닌지?

근데 뭔 설명이 그리 장황하고 긴지 통 알아 먹을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대충 이렇게 찍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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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추억기행] 향촌동 주점가 이야기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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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춘호기자 
  • 2004-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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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추억기행] 향촌동 주점가 이야기  <상>[대구 추억기행] 향촌동 주점가 이야기  <상>[대구 추억기행] 향촌동 주점가 이야기  <상>

1983년 4월18일 오전 1시30분쯤, 대구시 중구 향촌동 51의7 디스코 클럽 '초원의 집'에서 초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유흥가 화재로선 단군 이래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다. 사망 25명, 중경상 67명. 화재는 2층 초원의 집에서 발생했고 그 아래층 쌍쌍클럽으로도 옮겨붙었다. 불이 난 초원의 집은 일제 때는 영화관 '호락관(好樂館)', 초원의 집이 생기기 전에는 '향미'란 음식점이 있었다. 언론은 미성년자 출입, 미로같은 대피로, 방화 장비도 없는 디스코장을 신랄하게 질타했다. 1∼2층이 모두 디스코텍이 들어설 정도로 당시 유흥가는 디스코장 전성시대였다. 업소 주인들은 디스코장만 만들면 돈을 벌거라고 맹신했다. 자연 안전불감증에 걸릴 수밖에 없었고 전두환 정권도 '정화운동'에 한눈이 팔려 청소년의 탈선과 일탈문화에 제동을 걸 여력도 없었다. 

사상자 중에는 고교생들도 적잖이 섞여 있었고, 화재가 난 시간이 새벽이란 사실에 당시 내무부장관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도 큰 충격을 받는다. 고삐 풀린 망아지같은 청소년들에 대한 지도단속이 강화됐고 당연히 미성년자들의 고고장 출입도 한동안 제동이 걸린다. 하지만 채 1년도 안돼 초원의 집 악몽은 세인들의 기억속에서 잊히고 디스코장은 보란듯이 거의 20여년간 더욱 맹렬한 기세로 번창해갔다. 

한국의 서양춤 바람은 일제시대 때부터 불었다. 1910년대 미국에선 무려 100여종의 새로운 춤이 유행했다. 맘보, 차차차, 허슬, 도둠바, 포크댄스…. 6·25 직후 한국은 '양춤 공화국'으로 전락한다. 당시 춤은 청년들과는 무관했고 돈있는 기성세대들의 몫이었다. 그런데 60년대 중반 자니 리버스란 미국 가수가 로스앤젤레스의 유명 댄스클럽 '위스키어 고고'에서 발라드 형식의 춤곡을 보급하면서 고고붐이 일어난다. 다양한 변형 스타일의 고고춤이 한국 유명 호텔로 스며든다. 조선호텔 투모로, 오리엔탈 호텔의 디스코 텍 니르바다, 풍전호텔 나이트클럽 등지에는 박스 탑스의 'The Letter', 레이더스의 'Indian Reservation', 스팀의 'Nana hey hey him goodbye', CCR의 'Proud Mary'가 사랑을 받는다. 당시 블루스 타임엔 프로콜 하럼의 'A white shade of pale'가 많이 등장했다. 물론 그 고고붐은 대구에도 70년대 초∼중반부터 분다. 이에 앞서 62년 결성된 신중현 리더의 에드 훠(Add 4)는 '빗속의 여인', 윤항기 등이 소속된 키보이스는' 해변으로 가요'(1968년)를 발표하면서 잠잠하던 60년대 청년문화를 이끌면서 찬연한 70년대를 불러들인다. 고교생들 사이에선 고고춤에 걸맞게 바지통을 6인치대로 줄인 당꼬바지가 유행한다. 소풍지는 물론 여름 휴가철 기찻간, 플랫폼, 심지어 고교 축구·야구대회는 그들만의 춤판으로 변했다. 고고시절엔 전문 고고장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디스코 바람이 불면서 전용 업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난다. 한국 디스코의 원년은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존 트라볼타 주연의 '토요일 밤의 열기'가 상영된 78년. 디스코 음악은 한국 유흥가를 완전 판갈이해버렸다. 밴드 음악이 죽기 시작한 것이다. 매머드급 출력의 스피커와 믹싱 DJ를 전진 배치시킨 디스코장이 80년대 밤 주점가 대표 업종으로 부상한 것이다. 고고시절 밴드를 앞세운 업장은 밴드 전속료란 고비용에 허덕이다가 거의 문을 닫고 디스코장으로 업종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의 요청이었다. 특히 비지스 음악과 케이시 앤 더 션샤인 밴드의 'Shake your booty', 빌리지 피플의 'YMCA', 보니엠의 'Rivers of babylon', 도나 서머의 'Hot stuff', 립싱크의 'Funky town'의 현란한 선율에 팔을 내지르면서 90년대 신세대의 출현을 예고했다.

사실 고고·디스코장은 나이트클럽과 카바레, 회관과 달리 젊은이들을 위한 무도장이다. 물론 고고장 시대가 먼저 생겨난뒤, 그 다음 디스코장 시대가 펼쳐진다. 언뜻 둘이 비슷한 공간인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고고장은 밴드가 있고 디스코장은 거의 밴드가 없고 보면 된다. 고고장 시절엔 춤이 세련되지 않았다. CCR의 Cotton Field와 존 트라볼타의 토요일 밤의 열기는 리듬자체가 좀 틀렸다. 고고장 춤은 솔직히 '무데포'인 탓에 좀 촌스러웠다. 하지만 디스코는 춤 동작이 훨씬 세련됐고 예술성도 가미됐다. 또한 고고장은 디스코장에 비해 후졌다. 디스코장은 90년대로 접어들면서 호텔 나이트클럽까지 점령한다. 60∼70년대까지만 해도 지역 호텔 나이트클럽은 돈있는 성인만을 위해 존재했다. 하지만 나이트클럽측은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걸 절감한다. 

고고장과 디스코장파의 공통점은 뭘까. 그것은 블루스 타임 때 여실하게 드러났다. 그들은 독무에만 능했지 파트너와 함께 추는 블루스는 꽝이었다. 요즘 40대 같으면 예전 자신이 저질렀던 우스꽝스러운 순간을 생생히 기억할 것이다. 2∼3곡의 빠른 곡이 끝나고 블루스 타임으로 접어들때쯤 장내는 갑자기 비명소리가 난무한다. 신사도를 상실해버린 몇몇 술취한 남성들이 파트너 있는 여성의 손목을 느닷없이 낚아채는 무례를 범한 탓이다. 

이로 인해 폭력사태가 일어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자 디스코장 총지배인들이 도입한 시스템이 바로 '부킹'이었다. 웨이터가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댄스파트너를 연결해주는 것이다. 처음엔 좋은 취지였지만 나중엔 '불륜 조장'이란 낙인이 찍힌다. 디스코장도 경쟁이 치열하자 점차 '박리다매 시스템'을 도입한다. 입장료로 콜라값만 지불하면 부담없이 즐길 수 있었다. 학생들은 학사주점 같은 곳에서 1차를 한다. 빈대떡, 파전 등을 안주로 소콜, 소탠, 소맥 등 저급 칵테일을 진탕 먹고 디스코장으로 2차를 온다. 80년대초 청소년들이 비로소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마련됐다. 교복자유화, 두발 자유화, 야간통행금지 해제. 팝송과 음악다방 붐. 조숙한 미성년자들의 경우 옷만 어른 걸로 바꿔입으면 업소 주인들은 거의 10대인 줄 분간하지 못했다. 다음주는 향촌동 골목을 주름잡았던 비어홀, 바, 살롱 얘기가 이어진다. 

(영남일보 기사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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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촌동 디스코텍 초원의 집 화제 사건으로 내가 아는 어느 한 분이 이 사건으로 인해 옷을 벗게 되었다.

대구시청 상수도 사업본부 건축직으로 근무하다 중구청 건축과로 영전 하였는데 이 사건과 연루 되어 책임이 있다고

판정되어 공직 생활을 접어야 했던 분이다.

설상 가상 으로 공직 생활을 마감하고 옮긴 직장이 광명 건설이였는데 그때 대구에서는 광명 건설이라면 아주 잘 나가는 기업중 하나 였지만

이듬해 부도 처리 되어 광명건설이 와해 되어 내가 아는 그 분이 호된 시련을 겪어야 했다는 후담이 있어

초원의 빛 화재 사건이 더욱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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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6일 둘째 녀석이 사진을 보내왔다 귀엽지 데려 갈까 하고

엄마가 싫어 할텐데 했더니 기어이 델고 왔다

생후 2개월 되었단다

이름을 뭘로 지을까 고민하다 둘째가 호두라고 정했다 앞으로 호두라고 불러랜다

집안에 데려다 놓고 둘째가 외출하고 없던 날 계속 주변에 따라 다니며 무릎위에 올라와 잠에 든다

이렇게 잠을 자고 또 잠자고 애기다 영락 없는 애기다 얼마나 낑낑 거리는지

차를 타도 잠에들고 깨면 낑낑거리고 하긴 배고프거나 목이 마르면 낑낑 데는 터라 무얼 원하는지 만 알면 원하는대로 해주면 잘 논다

12월5일 또 잔다

12월8일 우린애라서 인지 자꾸 미끄러 진다 너무 미끄러져 미끄럼 방지 양말을 신겨 보았다 불편 한지 벗는다 이날 둘째랑 팻샾에 가서 옷도 하나 샀다

12/16 강아지는 무서워 만지지도 못하겠다는녀석이 혼자 있는 강아지가 안스러워 문을 열어 주었더니 큰녀석의 품에 파고 들어 무릅위에서 잠에 들더 란다

12월16일 큰애가 잠깐 봐주며

12월21일 둘째가 애견 카페에 데리고 간날 애견 카페에서 찍어준 사진

이제 집에 온지 한달이 다 되간다 그 동안 640G에서 1Kg정도 자랐고 어린애 마냥 낑낑대고 하는건 여전하나 그 동안 이빨로 제법 자라 깨물면 아프다

돈이 많이 가는 어린애다 아직 대 소변을 가리지 못해 아무 곳에서나 싼다 둘째 이야기를 빌면 둘째가 기거하는 방에서 같이 자는데 그곳에서는 대 소변을 잘 가린단다

그 동안 제법 친해진건지 정이 든건지 식구들만 보면 꼬리를 흔들고 따라 다닌다 둘째에게는 착 들어붙어 졸졸졸 따라 다니며 눈에서 멀어지면 낑낑 댄다

12/18 예방 접종을 한거 같다 접종후 아픈지 낑낑대며 만지지도 못하게 하더니 이젠 조금 나았나보다 낑낑거리는게 줄어 들었다

집사람이 아는 지인에게 옷을 얻어와 입혔다 POLO이다 제법 잘 어울린다/ 팻샾에서 산 옷은 아직 맞질 않는다 커서 벗겨지고 불편하다 그래서 이옷만 입고 다닌다

귀찮고 어린애 같은 손이 저말 많이가는 어린애 하나 키우는것 같다 제법 잘 놀긴 하는데 식탐이 제법 많다


계산성당에서 이인성 나무를 촬영하고 계산성당의 모습도 같이 담아 보았다

멀리 제일교회의 모습도 담고 계산성당의 지붕위에 세워둔 십자가도 찍어 본다

계산성당은 붉은 벽돌로 지은 최초의 서양 건물 이라고 한다.
























대구·경북지역 신앙의 요람

조선시대 대구는 수도인 한양과 제법 떨어져 있는 데다 박해를 피해 충청도 내륙 산중이나 대구 인근의 오지로 모여든 천주교 신자들이 모이면서 일찍이 큰 교세를 형성한 곳이다. 그중에서도 중심이 바로 계산성당으로, 100년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이곳은 현재 주교좌성당으로 대구와 경북지역 가톨릭의 중심지로 역할을 하고 있다. 전주의 전동성당과 함께 우뚝 솟은 쌍탑이 아름다운 성당으로 유명한데, 원래는 1899년에 지금의 강화도 성공회성당과 유사하게 십자가 형태의 2층 구조에 기와를 올린 한식 건물로 지었으나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불이 나서 무너지고 그 자리에 지금의 모습으로 새로 지었다고 한다.

이곳 성당의 주임이자 대구대교구의 주교로 임명된 파리외방선교회 소속의 로베르 신부가 설계하고 공사를 지휘하였다. 고딕형식의 건물로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로 쌓아올린 성당 외벽은 100년의 시간을 담은 듯 느낌이 장중하다. 안으로 들어서면 양옆으로 기둥이 줄지어 서 있으며, 기둥 곳곳에는 십자가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로베르 신부가 성당을 지을 때 함께 만들어 붙인 것이라 한다. 성당 밖 등나무 벤치 옆으로 이인성나무라 이름 붙은 감나무가 있어 사람들을 궁금하게 한다. 일제 때 활동했던 화가로 자신의 작업실에서 바라보이는 풍경을 그렸다. 계산성당과 함께 그림 안에 나무를 크게 그려 놓았는데, 바로 이인성나무다.

[네이버 지식백과] 계산성당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2010. 1. 15., 마로니에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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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성당에서 야경을 찍어 보았습니다. 역사가 있는 건물입니다.
계산성당주변엔 이상화 시인이 나고 자란 이상화 고택이 있고 그옆에는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님의 고택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 제일교회, 삼일운동길과 청라언덕, 선교박물관이 있으며
음악다방 세라비가 있습니다
꼭 한번 둘려 보아야 할 문화적 가치가 있는 장소 입니다

2018/11/27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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