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추억기행] 향촌동 주점가 이야기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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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춘호기자 
  • 2004-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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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추억기행] 향촌동 주점가 이야기  <상>[대구 추억기행] 향촌동 주점가 이야기  <상>[대구 추억기행] 향촌동 주점가 이야기  <상>

1983년 4월18일 오전 1시30분쯤, 대구시 중구 향촌동 51의7 디스코 클럽 '초원의 집'에서 초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유흥가 화재로선 단군 이래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다. 사망 25명, 중경상 67명. 화재는 2층 초원의 집에서 발생했고 그 아래층 쌍쌍클럽으로도 옮겨붙었다. 불이 난 초원의 집은 일제 때는 영화관 '호락관(好樂館)', 초원의 집이 생기기 전에는 '향미'란 음식점이 있었다. 언론은 미성년자 출입, 미로같은 대피로, 방화 장비도 없는 디스코장을 신랄하게 질타했다. 1∼2층이 모두 디스코텍이 들어설 정도로 당시 유흥가는 디스코장 전성시대였다. 업소 주인들은 디스코장만 만들면 돈을 벌거라고 맹신했다. 자연 안전불감증에 걸릴 수밖에 없었고 전두환 정권도 '정화운동'에 한눈이 팔려 청소년의 탈선과 일탈문화에 제동을 걸 여력도 없었다. 

사상자 중에는 고교생들도 적잖이 섞여 있었고, 화재가 난 시간이 새벽이란 사실에 당시 내무부장관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도 큰 충격을 받는다. 고삐 풀린 망아지같은 청소년들에 대한 지도단속이 강화됐고 당연히 미성년자들의 고고장 출입도 한동안 제동이 걸린다. 하지만 채 1년도 안돼 초원의 집 악몽은 세인들의 기억속에서 잊히고 디스코장은 보란듯이 거의 20여년간 더욱 맹렬한 기세로 번창해갔다. 

한국의 서양춤 바람은 일제시대 때부터 불었다. 1910년대 미국에선 무려 100여종의 새로운 춤이 유행했다. 맘보, 차차차, 허슬, 도둠바, 포크댄스…. 6·25 직후 한국은 '양춤 공화국'으로 전락한다. 당시 춤은 청년들과는 무관했고 돈있는 기성세대들의 몫이었다. 그런데 60년대 중반 자니 리버스란 미국 가수가 로스앤젤레스의 유명 댄스클럽 '위스키어 고고'에서 발라드 형식의 춤곡을 보급하면서 고고붐이 일어난다. 다양한 변형 스타일의 고고춤이 한국 유명 호텔로 스며든다. 조선호텔 투모로, 오리엔탈 호텔의 디스코 텍 니르바다, 풍전호텔 나이트클럽 등지에는 박스 탑스의 'The Letter', 레이더스의 'Indian Reservation', 스팀의 'Nana hey hey him goodbye', CCR의 'Proud Mary'가 사랑을 받는다. 당시 블루스 타임엔 프로콜 하럼의 'A white shade of pale'가 많이 등장했다. 물론 그 고고붐은 대구에도 70년대 초∼중반부터 분다. 이에 앞서 62년 결성된 신중현 리더의 에드 훠(Add 4)는 '빗속의 여인', 윤항기 등이 소속된 키보이스는' 해변으로 가요'(1968년)를 발표하면서 잠잠하던 60년대 청년문화를 이끌면서 찬연한 70년대를 불러들인다. 고교생들 사이에선 고고춤에 걸맞게 바지통을 6인치대로 줄인 당꼬바지가 유행한다. 소풍지는 물론 여름 휴가철 기찻간, 플랫폼, 심지어 고교 축구·야구대회는 그들만의 춤판으로 변했다. 고고시절엔 전문 고고장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디스코 바람이 불면서 전용 업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난다. 한국 디스코의 원년은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존 트라볼타 주연의 '토요일 밤의 열기'가 상영된 78년. 디스코 음악은 한국 유흥가를 완전 판갈이해버렸다. 밴드 음악이 죽기 시작한 것이다. 매머드급 출력의 스피커와 믹싱 DJ를 전진 배치시킨 디스코장이 80년대 밤 주점가 대표 업종으로 부상한 것이다. 고고시절 밴드를 앞세운 업장은 밴드 전속료란 고비용에 허덕이다가 거의 문을 닫고 디스코장으로 업종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의 요청이었다. 특히 비지스 음악과 케이시 앤 더 션샤인 밴드의 'Shake your booty', 빌리지 피플의 'YMCA', 보니엠의 'Rivers of babylon', 도나 서머의 'Hot stuff', 립싱크의 'Funky town'의 현란한 선율에 팔을 내지르면서 90년대 신세대의 출현을 예고했다.

사실 고고·디스코장은 나이트클럽과 카바레, 회관과 달리 젊은이들을 위한 무도장이다. 물론 고고장 시대가 먼저 생겨난뒤, 그 다음 디스코장 시대가 펼쳐진다. 언뜻 둘이 비슷한 공간인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고고장은 밴드가 있고 디스코장은 거의 밴드가 없고 보면 된다. 고고장 시절엔 춤이 세련되지 않았다. CCR의 Cotton Field와 존 트라볼타의 토요일 밤의 열기는 리듬자체가 좀 틀렸다. 고고장 춤은 솔직히 '무데포'인 탓에 좀 촌스러웠다. 하지만 디스코는 춤 동작이 훨씬 세련됐고 예술성도 가미됐다. 또한 고고장은 디스코장에 비해 후졌다. 디스코장은 90년대로 접어들면서 호텔 나이트클럽까지 점령한다. 60∼70년대까지만 해도 지역 호텔 나이트클럽은 돈있는 성인만을 위해 존재했다. 하지만 나이트클럽측은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걸 절감한다. 

고고장과 디스코장파의 공통점은 뭘까. 그것은 블루스 타임 때 여실하게 드러났다. 그들은 독무에만 능했지 파트너와 함께 추는 블루스는 꽝이었다. 요즘 40대 같으면 예전 자신이 저질렀던 우스꽝스러운 순간을 생생히 기억할 것이다. 2∼3곡의 빠른 곡이 끝나고 블루스 타임으로 접어들때쯤 장내는 갑자기 비명소리가 난무한다. 신사도를 상실해버린 몇몇 술취한 남성들이 파트너 있는 여성의 손목을 느닷없이 낚아채는 무례를 범한 탓이다. 

이로 인해 폭력사태가 일어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자 디스코장 총지배인들이 도입한 시스템이 바로 '부킹'이었다. 웨이터가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댄스파트너를 연결해주는 것이다. 처음엔 좋은 취지였지만 나중엔 '불륜 조장'이란 낙인이 찍힌다. 디스코장도 경쟁이 치열하자 점차 '박리다매 시스템'을 도입한다. 입장료로 콜라값만 지불하면 부담없이 즐길 수 있었다. 학생들은 학사주점 같은 곳에서 1차를 한다. 빈대떡, 파전 등을 안주로 소콜, 소탠, 소맥 등 저급 칵테일을 진탕 먹고 디스코장으로 2차를 온다. 80년대초 청소년들이 비로소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마련됐다. 교복자유화, 두발 자유화, 야간통행금지 해제. 팝송과 음악다방 붐. 조숙한 미성년자들의 경우 옷만 어른 걸로 바꿔입으면 업소 주인들은 거의 10대인 줄 분간하지 못했다. 다음주는 향촌동 골목을 주름잡았던 비어홀, 바, 살롱 얘기가 이어진다. 

(영남일보 기사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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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촌동 디스코텍 초원의 집 화제 사건으로 내가 아는 어느 한 분이 이 사건으로 인해 옷을 벗게 되었다.

대구시청 상수도 사업본부 건축직으로 근무하다 중구청 건축과로 영전 하였는데 이 사건과 연루 되어 책임이 있다고

판정되어 공직 생활을 접어야 했던 분이다.

설상 가상 으로 공직 생활을 마감하고 옮긴 직장이 광명 건설이였는데 그때 대구에서는 광명 건설이라면 아주 잘 나가는 기업중 하나 였지만

이듬해 부도 처리 되어 광명건설이 와해 되어 내가 아는 그 분이 호된 시련을 겪어야 했다는 후담이 있어

초원의 빛 화재 사건이 더욱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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