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의 점일이구 우두불출

 

점일이구 우두불출(點一二口 牛頭不出)

조선 성종시대 개성에 가무 절색 기생이 살았다. 예전의 기생이 명기가 되려면 미색뿐 아니라, 글과 가무에 아주 능해야 했는데 이 기생이 그러했다.

기생의 소문은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나 잰틀맨보다 더 급속히 파급되어 팔도의 많은 한량이 모두 이 기생을 찾아가서 연정을 고백했으나 그때마다 이 기생은 한량의 청을 들어주는 대신 문제를 내고 그 문제를 푸는 조건을 내 세웠다.

그러나 희대의 문장가라는 사람도 기생이 낸 글을 풀이하지 못하고 허탈하게 돌아 갔다. 기생은 자신을 사모하는 한량이나 선비를 모두 이렇게 거절하고 언젠가 자신의 글을 풀고 사랑을 나눌 님을 기다리며 평생 기생으로 가무와 글을 익혔다.

얼핏 한량이라 하면 건달쯤으로 알기 쉽지만 예전엔 한량이라하면 사서삼경은 기본이고 글체가 좋고 속심이 넓으며 기백이 뛰어나고 인물 또한 출중하고 무엇보다 풍류를 알아야 했다.

허지만 내로라하는 한량들 어느 누구도 기생의 앞에서 문장과 지혜를 능가할 기량을 가진 한량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남루한 중년의 선비가 기생집에 들었다. 기생집 하인들은 남루한 그를 쫒아 내려고 했다.

이 소란을 목격한 기생은 선비가 비록 남루했지만 범상치 않은 기품이란 것을 알고 대청에 모시고 큰 주안상을 봐 올린후 그 선비에게 새 집필묵을 갈아 이렇게 써 보였다.

點一二口 牛頭不出

선비는 기생의 글귀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 기생의 명주 속치마를 펼치게 한후 단필로 이렇게 썼다.

순간 기생은 그 선비에게 일어나 큰 절을 삼배 올렸다. 절 삼배는 산자에겐 한번, 죽은 자에겐 두번, 세번은 첫 정절을 바치는 남자에게 하는 여인의 법도이자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하례다.

그 날밤 선비와 기생은 만리 장성을 쌓았다. 그리고 보름이 지난후 선비는 기생에게 문창호지에 시 한수를 적어놓고 홀연히 길을 떠나버렸다.

물은 고이면 강이 되지 못하고 바람이 불지 않으면 꽃은 피지 아니한다. 내가 가는 곳이 집이요 하늘은 이불이며 목마르면 이슬 마시고 배 고프면 초목근피가 있는데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이 어디 있느냐?

이후 기생은 그를 잊지 못하고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워하며 비단가죽 신발을 만들며 세월을 보냈다. 풍운아인 선비의 발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애틋한 사랑에 손마디가 부풀도록 가죽 신발을 손수 다 지은 기생은 마침내 가산을 정리하고 그 선비를 찾아 팔도를 헤매 다녔다.

정처없이 팔도를 떠돌며 선비의 행방을 물색하던중 어느날 선비가 절에 머물고 있다는 풍문을 듣고 찾아가 극적으로 재회했다. 기생은 선비와 꿈같은 재회의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는 선비를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꿈같은 재회의 첫밤을 보낸 다음날 해가 중천에 올라도 움직일 기색이 없는 선비에게 기생이 물었다. 낭군님 해가 중천인데 왜 기침하시지 않으시온지요? 그러자 선비는 두눈을 감은체 이 절간엔 인심이 야박한 중놈들만 살아 오장이 뒤틀려 그런다고 했다.

기생은 선비의 말을 즉시 알아 들었다. 급히 마을로 단걸음에 내려가 거나한 술상을 봐 절간으로 부리나케 돌아왔는데 하룻밤 정포를 풀었던 선비의 방앞 툇마루엔 선비 대신 지난밤 고이 바쳤던 비단 가죽신만 가지련히 놓여 있었다.

수년을 찾아 해맨 끝에 재회한 선비가 홀연히 떠나버린 것을 알고 기생은 망연자실 했지만 이내 선비의 고고한 심증을 깨달았다. 선비의 사랑은 소유해도 선비의 몸은 소유 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친 기생은 선비의 깊고 높은 큰 사랑을 받았다는 것으로 스스로 위로하며 평생을 선비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이 기생이 유명한 평양기생 황진이다. 황진이는 평양기생으로 잘못알고 있는데 사실은 개성기생이고 개성여인들은 미색이 뛰어나고 재주가 특출했다고 한다. 황진이가 그토록 사랑한 남자는 저서 화담집의 조선 성종 때 철학자 서경덕이다.

황진이를 만났을때 서경덕이 푼 황진이의 글 뜻은

點一二口는 글자대로, 點一二口 이고 글자를 모두 합치면 말씀 (言)자가 되고 牛頭不出이란  소머리에 뿔이 없다는 뜻으로 牛에서 머리를 떼어 버리면 (午)자가 되는 것이다. 이 두글자를 합치면 허락할 (許)자다.

결국 황진이는 서경덕에게 자신을 바친다는 뜻을 이렇게 사행시로 전한 것이다. 이 글자를 해역할 수 있는 능력이라면 자신을 송두리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한 황진이의 기발한 사랑찾기가 절묘해서 이 적적한 밤에 한줄 적었다.

- 옮겨온글 -

 

김삿갓과 미인의 로맨스 사랑

 
 
 

김삿갓이 일생을 죽장망혜로 세상을 유람하다

단천 고을에서 결혼을 한 일이 있었다.

 

결혼한 젊은 청춘 남녀의 첫날 밤은, 시간마다

천금이 아닐수 없지 않는가!

마침내 신방의 촛불이 꺼지고, 천재적 시인과

미인이 함께 어울어졌다.

그들의 즐거움이야 어찌 이루 다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있겠는가?

 

뜨거운 시간에 취해 있었던 김삿갓이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 쓴 사람처럼 벌떡 일어났다.

촛불을 켜더니 실망의 표정을 지으며 벼루에

먹을 갈고 그 좋은 명필로 일필휘지하니...

모심내활(毛深內闊)

필과타인(必過他人)

털이 깊고 안이 넓어 허전하니

필시 타인이 지나간 자취로다.

삿갓은 그렇게 써 놓고 여전히 입맛만 다시며

한 숨을 내쉬고 앉아 있었다.

삿갓 신랑의 그런 행동을 보고 신부가 의아해

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신랑이 일어나는 바람에 원앙금침 위에 홀로

남아 부끄러움에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고

김삿갓이 써 놓은 화선지를 살펴보고는 고운

이마를 살짝 찌푸리듯 하더니

이불에 감싼 몸을 일으켜 세워 백옥같은 팔을

뻗어 붓을 잡더니 그대로 내려쓰기 시작했다.

 

후원황률불봉탁(後園黃栗不蜂坼)

계변양유불우장(溪邊楊柳不雨長)

 

뒷동산의 익은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저절로 벌어지고 시냇가 수양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니라.

글을 마친 신부는 방긋 웃더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눈을 사르르 감고 누었다.

신부가 써 놓은 글을 본 김삿갓은 잠시 풀렸던

흥이 다시 샘솟으며 신부를 끌어안았다.

자기의 처녀성을 의심하는 글월도 글월이지만

이에 응답하는 글도 역시 문학적으로 훌륭하게

표현해 놓았으니

유머도 이쯤 되면 누구도 단순히 음담패설이라

하지는 못할 것이로다.

인생의 의미를 알려고 하기보다 인생을 즐기기

위해 살아가는 한 남자......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이야기

 
 
 

얼굴을 추녀로 만들면서까지 사랑을 지킨 홍랑

우리 역사속에는 선비와 기생(妓生)간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많이 전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황진이와 서경덕, 두향과 이황, 홍랑과 최경창, 이매창과 유희경 등이 있으며 이를 두고 조선시대의 4대사랑이라고 한다.

조선 선조 때의 함경남도 홍원 출신의 이름난 예기(藝妓)이자 재색을 겸비한 여류시인이었던 홍랑(洪娘)은 기생으로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위치까지 올라갔던 인물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명문가라고 할 수 있는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 그녀의 무덤과 비석이 버젓이 있으며, 그 문중에서는 지금까지도 해마다 시제와 제사를 홍랑에게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기생으로는 유일하게 사대부의 족보에까지 올라간 홍랑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유교적 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시대적 질곡을 뛰어넘어 천민의 신분으로 양반집 선산에 그의 유골이 묻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홍랑의 이 무덤을 근거로 그녀의 애틋한 삶을 추적해 들어가 보면 역사속의 엄연한 현실로 각인된 한 여인의 지고한 사랑과 정신을 만날 수 있어서 그 감동은 더욱 커진다.

함남 홍원 출신인 홍랑은 경성(鏡城) 관아의 관기였고 기생 출신으로 비록 신분은 비천했으나 문학적인 교양과 미모를 겸비했던 홍랑은 누구나 다 꺾을 수 있는 노류장화로 머물지 않았다.

교방(敎坊)에서 각종 악기와 가무를 단련하면서도 문장과 서화 등의 기예 익히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홍랑은 관아의 연회장에서 흥을 돋우고 미색을 흘리는 여느 기생과는 그 품성과 재주가 남달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문학적 소양과 재주는 이미 양반 사대부나 유명한 시인가객들에 뒤지지 않았으며, 일부종사를 맹목으로 실천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기생이었지만 자신의 정절을 받쳐 사랑할 운명적 만남을 꿈꾸며 몸을 함부로 놀리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남자들의 유혹은 도를 더해갔으나 홍랑은 아무에게도 자신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런 홍랑의 아름다운 재색과 지혜는 마침내 당시 삼당시인(三唐詩人) 또는 팔문장(八文章)으로 명성이 높았던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을 만나면서 세세생생에 변하지 않을 뜨거운 사랑으로 내뿜어지게 된다.

고죽 최경창은 탁월한 문장가인데다 음률을 잘 알고, 악기를 다루는 재주 또한 뛰어났던 인물인데, 과거에 합격한 5년 후인 1573년(선조 6년)에 함경북도 경성 지방의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부임하게 된다.

변방에 위치한 경성은 옛부터 국방의 요지로 취급되는 대단히 중요한 군사 지역이었으므로 가족을 동반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경창은 이미 처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부임하여 오지 중의 오지인 경성에 머물러야 했다.

당시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히던 고죽 최경창과 경성의 최고 기생이었던 홍랑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관기였기 때문에 관리와 만나는 일은 매우 자유로웠을 것인데, 홀로 생활을 하던 최경창에게 홍랑은 운명적 사랑에 불을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농밀한 사랑은 날이 갈수록 더욱 뜨거워져 한 몸처럼 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으며 결국 홍랑은 최경창과 동행하여 군사작전 임무를 수행하는 막중에서 함께 기거하며 부부처럼 정을 쌓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 봄, 두 사람의 사랑에 이별이라는 엄청난 시련이 찾아왔고 임기가 끝난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노비와 비슷한 신분이었던 기생은 관아에 속해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법으로 강력히 구속당하고 있어서 해당 지역의 관청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뜻밖의 이별 앞에 선 홍랑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것 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최경창의 상경은 홍랑에게 있어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으니 이별을 눈앞에 둔 그녀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홍랑은 조금이라도 더 그와 함께 있기 위하여 서울로 가는 최경창을 배웅하며 경성에서 부터 멀리 떨어진 쌍성(雙城)까지 태산준령을 넘고 넘어서 며칠 길을 마다 않고 따라갔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두 사람의 발길은 이윽고 함관령(咸關嶺)고개에 이르렀고, 더 이상 경계를 넘을 수 없었던 홍랑은 사무치는 사모의 정을 뒤로 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 때 그녀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길 옆에 피어있는 산버들이었다.

울음을 삼키면서 버들가지에 다가간 홍랑은 그 가지를 꺾어 고죽에게 주며 구슬프게 시조 한 수를 읊었으니 우리가 지금도 외우고 있는 “묏버들 가려꺾어”이다.

이미 날은 저물고 비는 내리는데 피할 수 없는 이별 앞에서 홍랑도 최경창도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앞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밤비에 새잎이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님에게 바치는 순정은 잎이 시들었다가도 심기만 하면 다시 싹을 틔우는 묏버들처럼 항상 그의 곁에 있겠다고 다짐한 이 연정가(戀情歌)처럼 그가 떠난 뒤 홍랑은 그리움으로 눈물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함관령에서 홍랑과 애끓는 이별을 뒤로 하고 떠나온 최경창 역시 서울에 돌아온 뒤 곧바로 병으로 자리에 누워 그해 봄부터 겨울까지 일년 내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최경창이 아파서 누워있다는 소식은 바람에 바람을 타고 멀고 먼 경성의 홍랑에게도 들렸으니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곧바로 경성을 출발하여 서울을 향해 길을 나섰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7일 만에 서울에 이르렀고, 곧 바로 병석에 누워 신음하는 최경창을 찾아갔다.

거의 2년만에 최경창을 다시 만난 홍랑은 그의 수척함에 마음이 아팠지만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조석으로 병수발을 들었다.

그 결과 최경창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차츰 회복되어 갔다.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두 사람의 재회는 뜻밖의 파란을 몰고 왔다.

홍랑과 최경창이 함께 산다는 소문은 최경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로 까지 비화되었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1576년(선조 9년) 봄에는 사헌부에서 양계(兩界)의 금(禁)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의 파직을 상소하기에 이른다.

결국 최경창은 당쟁의 세력다툼이 치열한 당시 사회의 표적이 되어 파직 당했고, 홍랑은 나라의 법을 원망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경성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양계의 금’이라고 하는 것은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의 서울 도성출입을 제한하는 제도를 말하는데, 함경남도의 홍원 출신인 홍랑이 서울에 들어와 있는 것을 문제로 삼은 것이었다.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때는 마침 명종 왕비인 인순왕후가 돌아가신지 1년이 채 안된 국상 중이라 홍랑의 일은 결국 최경창을 파직까지 몰고 가는 불씨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두 연인의 애틋한 재회는 파직과 이별로 막을 내렸지만 최경창은 자신을 향한 홍랑의 지극한 사랑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되었는데, 안타깝고 가여운 자신의 마음을 ‘송별’이란 시에 담아 떠나는 홍랑에게 주었다고 한다.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을 주노라.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리. 함관령에 올라서 옛노래를 부르지마라. 지금까지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옛날, 함관령에서 이별할 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보내며 이 가지를 자신처럼 여겨 달라 했던 그녀의 시에 최경창은 난초 한포기를 건네는 것으로 화답하며 자신의 애끓는 심정과 쓸쓸한 홍랑의 마음을 위로했던 것이다.

홍랑과의 두 번째 만남과 이별 후에 곧바로 파직을 당한 최경창은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 1583년(선조 9년)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만다.

멀리 함경도 땅에서 사랑하는 임과 다시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홍랑에게 날아든 최경창의 사망소식은 그녀로 하여금 몸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을 안겨주었다.

죽은 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死者不可還生) 법이니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통한에 홍랑은 목을 놓아 울 수밖에 없었으나 홍랑은 곧 바로 마음을 추슬러야만 했다.

객사를 했으니 무덤을 돌보는 사람이 마땅히 없을 것이란 사실에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최경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파주에 당도한 홍랑은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시묘살이를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생각 끝에 방법을 생각해낸 홍랑은 몸을 씻거나 꾸미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기 위해 천하일색인 자신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하여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추녀로 만들었다.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홍랑은 또한 커다란 숯덩어리를 통째로 삼켜서 벙어리가 되어 스스로 병신이 되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시묘살이 하는 것에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으니 그 덕분에 홍랑은 최경창의 삼년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3년간의 상을 마친 뒤에도 고죽의 무덤을 떠나지 않은 채 그의 영혼 앞에서 살다가 죽으려 했던 홍랑이었지만 하늘은 그녀에게 그런 작은 행복조차도 허락하지 않았으니 바로 임진왜란의 발발이 그것이었다.

홍랑 한 몸이야 사랑하는 임의 곁에서 그 즉시 죽더라도 여한이 없지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문장과 글씨들을 보존해야 했기 때문에 죽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최경창이 남긴 유품을 챙겨서 품에 품은 홍랑은 다시 함경도의 고향으로 향했는데, 그로부터 7년의 전쟁 동안 그녀의 종적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전국토가 황폐화할 정도로 잔혹했던 전쟁 중에서도 오늘날까지 고죽 최경창의 시와 문장이 전해지게 된 것은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그것을 지켜온 홍랑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랐던 홍랑은 전쟁이 끝난 뒤 해주 최씨 문중에 최경창의 유작을 전한 후 그의 무덤 앞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홍랑이 죽자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집안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최경창 부부가 합장된 묘소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마련해 주었으니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에 있는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 그녀의 무덤이 있다.

죽음조차도 갈라놓을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은 양반 사대부 문중까지도 감동시켰으니, 비록 천민의 신분이었지만 최경창의 묘소 바로 아래에 그녀를 머물게 하였던 것이다.

숨 막히는 사랑과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절개로 홍랑이 지켜냈던 최경창의 유작은 그 후  '고죽집'이라는 문집으로 만들어졌고, 그의 글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연을 지니고 있는 홍랑의 무덤 옆에는1980년대에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세운 홍랑가비가 부끄러운 듯 다소곳이 서있는데, 그 시비가 매우 인상적이다.

돌로 만들어 세운 이 시비는 앞면이 고죽시비라 되어 있고, 뒷면이 홍랑가비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 가비는 처음에는 마을 뒷편에 세워졌으나 나중에 묘역 옆으로 옮겨서 지금은 묘역 옆에 있다.

이 비석은 살아서는 만남과 이별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사랑이 죽은 후에는 영원히 함께 있으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을 세운 사람의 정성과 재치를 느끼게 하는 노래비가 아닐 수 없다.

가람 이병기가 시조와 한시가 진품임을 확인함

- 옮겨온글 -

 
 

?...?️복을 끌어 당기는 34가지 기술?️
 
1. 힘차게 웃으며 하루를 시작하라. 활기찬 하루가 펼쳐진다.
2. 세수할 때 거울을 보고 미소를 지어라. 거울 속의 사람도 나에게 미소를 보낸다.
3. 밥을 그냥 먹지 말라. 웃으며 먹고 나면 피가 되고 살이 된다.
4. 모르는 사람에게도 미소를 지어라. 마음이 열리고 기쁨이 넘친다.
5. 웃으며 출근하고 웃으며 퇴근하라. 그 안에 천국이 들어있다.  
 
 
6. 만나는 사람마다 웃으며 대하라. 인기인 1위가 된다.
7. 꽃을 그냥 보지 말라. 꽃처럼 웃으며 감상하라.
8. 남을 웃겨라. 내가 있는 곳이 웃음천국이 된다.
9. 결혼식에서 떠들지 말고 큰소리로 웃어라. 그것이 축하의 표시이다.
10. 신랑신부는 식이 끝날 때까지 웃어라. 새로운 출발이 기쁨으로 충만해 진다.  
 
 
11. 집에 들어올 때 웃어라. 행복한 가정이 꽃피게 된다.
12. 사랑을 고백할 때 웃으면서 하라. 틀림없이 점수가 올라간다.
13. 화장실은 근심을 날려 버리는 곳이다. 웃으면 근심걱정이 모두 날아간다.
14. 웃으면서 물건을 팔라. 하나 살 것 두 개를 사게 된다.
15. 물건을 살 때 웃으면서 사라. 서비스가 달라진다.  
 
 
16. 돈을 빌릴 때 웃으면서 말하라. 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한다.
17.
옛날 웃었던 일을 회상하며 웃어라. 웃음의 양이 배로 늘어난다.
18. 실수했던 일을 떠올려라. 기쁨이 샘솟고 웃음이 절로 난다.
19. 웃기는 책을 그냥 읽지 말라. 웃으면서 읽어 보라.
20. 도둑이 들어와도 두려워말고 웃어라. 도둑이 놀라서 도망친다.  
 
 
21. 웃기는 개그맨처럼 행동해 보라. 어디서나 환영받는다.
22. 비디오 웃기는 것을 선택하라. 웃음 전문가가 된다.
23. 화날 때 화내는 것은 누구나 한다. 화가 나도 웃으면 화가 복이 된다.
24. 우울할 때 웃어라. 우울증도 웃음 앞에서는 맥을 쓰지 못한다.
25. 힘든 때 웃어라. 모르던 힘이 저절로 생겨난다.  
 
 
26. 웃는 사진을 걸어 놓고 수시로 바라보라. 웃음이 절로 난다.
27. 웃음노트를 만들고 웃겼던 일 웃었던 일을 기록하라. 웃음도 학습니다.
28. 시간을 정해놓고 웃어라. 그리고 시간을 점점 늘려라.
29. 만나는 사람을 죽은 부모 살아온 것 같이 대하라. 기쁨과 감사함이 충만해진다.
30. 속상하게 하는 뉴스를 보지 말라. 그것은 웃음의 적이다.  
 
 
31. 회의할 때 먼저 웃고 시작하라.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32. 오래 살려면 웃어라. 1분 웃으면 이틀을 더 산다.
33. 돈을 벌려면 웃어라. 5분간 웃을 때 5백만 원 상당의 엔돌핀이 몸에서 생산된다.
34. 죽을 때도 웃어라. 천국의 문은 저절로 열리게 된다 
 

2022년 3월15일 화요일
신문에 나온 알아두면 좋을 이야기들


1.
중장년 여성 사이에서 발레가
인기를 끌고 있다.
어릴 적 꿈이었던 발레에 도전하는 70대 집배원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나빌레라"가 어르신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데다 발레를 하면서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는 반응이 이어진 여파다.

이처럼 발레가 중장년에게 인기를 끌면서 시니어들만 대상으로 하는 발레 프로그램도 생겼다.
강원도 강릉에선 지난 1~2월 매주 수요일 무료 시니어 발레 강습이 열렸다. 이 강습을 듣는 수강생 평균연령은 무려 78세다.
거기다 발레의 운동효과 또한 만만치 않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중장년의 발레사랑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단어 하나만으로 가슴이 뛸수 있다

부모님,막내,바다,반가사유상,
쇼스타코비치,해바라기,
오드리 햅번...그리고 발레다.



2.
흡연으로 죽는 사람의 숫자는 몇명이나 될까?

놀랍게도 하루 평균 159명이다.
연간 5만8000여 명이고 사회경제적 비용은 12조원을 넘는다.
남성이 5만천명정도이며 여성이 7천명정도다.
사회경제적 비용은 흡연자 의료비와 간병비 등 직접 비용 4조6192억원, 투병과 조기 사망에 따른 임금 손실 등 간접 비용 7조5721억원을 합해 총 12조1913억원으로 추산됐다.


내 인생에서 정말 잘한일중 하나다.
"금연"


3.
채식주의자 단계에 따른 분류.

때에 따라 육류를 섭취하는 준채식주의자인 ‘플렉시테리언’(flexitarian) 채식주의자들 중 절대다수인 80%를 차지한다.

소고기·돼지고기 등 육류를 먹지 않는 대신 우유·달걀·생선·닭고기 등은 먹는 채식주의자 ‘폴로’(pollo) 비중은11%

닭고기 등 가금류는 먹지 않고 생선은 먹는 ‘페스코’(pesco) 6%

달걀은 먹지 않고 과일·채소·우유만 먹는 ‘락토’(lacto) 3%

달걀은 먹고 우유는 안 먹는 오보(ovo)
달걀도 우유도 먹지 않는 완전 채식주의자인 ‘비건’(vegan)이다.


스님들은 어느 단계실까?


4.
이혼은?

유책주의와 파탄주의로 나뉜다
유책주의는 혼인 파탄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이혼을
청구할 수 없게 한 제도다.
외도 등 부정을 저지른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제한해 가정 파탄에 책임이 없는 배우자를 보호하려는 것이다. 주로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측면이 크다.

파탄주의는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혼인 파탄’ 상태이면 이혼을 인정하는 것이다.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측면이 크고, 혼인 파탄 여부는 별거 기간 등을 고려해 판단한다.

우리 대법원은 아직 유책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파탄주의로 가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다.
갑자기 부부의세계 이태오가 생각난다.
음........


5.
대파는?
신문지로 싸서 바람이 잘 통하고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에 보관하면 시들거나 누렇게 변색되는 것을
늦출 수 있다.


요즘 신문지 구하기가 참 어렵다


6.
뭐지?
초록색과 빨간색 플라스틱 소쿠리 5376개를 엮어서 미술관 천장에 매단 예술작품이다.

미술가 최정화가 만든 이 작품의 제목은 "카발라"다.
‘카발라’는 유대교 신비주의를 뜻한다. 2013년에 제작했으며 높이는 16m다.

지금은 플라스틱이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지탄받고 있지만
사실 플라스틱은 19세기 말
당구공 제조에 필요한 상아를 대체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개발됐다.
플라스틱은 당구공이 될뻔한 코끼리를 숱하게 살려낸 친환경 재료이자, 누구나 저렴하게 당구를 즐길 수 있게 만든 민주적 물질이다.


플라스틱에 대한 오해가 있다
플라스틱은 잘만 활용하면 얼마든지 재활용 할수있다.
플라스틱은 죄없다
그걸 아무렇게나 버리는 사람들이 문제다.



7.
[그림이 있는 오늘]

이중섭

‘닭과 가족’
1954~1955년作


8.
[詩가 있는 오늘]

지팡이

주영욱

해가 설핏 기울 무렵

시골집 문 앞

누군가에게 몸이 되고 마음이 되고

길동무가 되어주시는 당신

살아온 날이 이따금

쓸쓸한 그림자를 남기지만

아직 사랑할 것이 별처럼 남았다고

바람벽에 버티고선 당신

누군가의 생애가

어스름 속으로 잠기는 저녁

조선왕이 후궁들을 찾는 이유

 

유교국가였던 조선!

여러 관료가 임금과 함께 국정을 논하지만

왕의 말 한마디에 사람의 목숨뿐만 아니라

한 가문을 풍비박산 시킬수 있는 절대적인

권력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선의 임금, 그런 지존도 마음대로

할수 없는 것이 딱하나 있으며 그것은 바로

아내인 중전과의 성관계, 이것 만큼은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왕과 중전이 교합하는 날인 합궁은 상궁의

수장, 제조상궁과 천문을 관장한 관상감이

정했으며, 왕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택일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왕이 중전과 합궁을 할수 없는 날이

있다고 하는데 무엇인지 알아보겠다.

(첫째)

일식과 월식, 동지와 초하루는 불가능하다.

일식과 월식은 태양과 달의 양과 음이 막혀

있어므로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동지와 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지에는 음.양이 지나쳐서

안 된다고 한다.

(둘째)

초하루와 보름, 그믐날에도 안된다고 한다.

초하루와 그믐엔 달이 보이지 않아 안되고

보름에는 달의 기세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한다.

(셋째)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은 음과 양이 조화롭지

못할 수 있으니까 안 된다.

(넷째)

객지에서도 안 되고, 아플 때도 안 되며, 술에

취하였을 때도 안 되고 생리가 끝나고 5일이

지나야 하는 여러가지 조건이 있었다.

이러한 조건들을 모두 충족하고 완전 무결한

왕자를 봐야 하기 때문에 합궁날을 잡는다.

그러나 조선의 왕은 합궁하는 그날에도 별별

여러 간섭을 받으며 모든걸 정해진 법도대로

해야하고 왕만이 움직이고 중전은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되었다.

중전은 눈을 감아야만 되고 왕을 쳐다보아도

안되며 왕의 몸을 만지거나 신음을 내어서도

안 되었다.

특히 더 느끼기 위해 허리를 움직이거나 몸을

떠는 것은 불충한 행위로 왕을 능멸한 행위로

간주했다고 한다.

기가 막히는 것은 그나마도 단 둘이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60세 넘는 상궁 8명이 교대로

방에 들어가 왕과 중전의 성관계를 감독한다.

앞에서 말한 금기 사항을 어기거나 왕이 흥분

상태가 되면 상궁이 다음과 같이 아뢴다.

"전하 자중하시옵소서"

"전하 체통을 지키셔야 하옵니다"

이렇게 분위기를 박살내고 심지어는 끝내라고

타이밍을 지정해주었다고 하며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렵게 성관계를 할바엔 차라리 궁녀들을

찾는편이 훨씬 좋았다.

왕은 품고 싶은 궁녀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고

선택받은 궁녀는 왕의 몸에 상처를 낼 수 있는

손톱과 발톱을 정리하고 목욕을 한 뒤에

왕이 들어오면 날씨나 음양의 조화같은 것을

따질 필요도 없었고 그냥 왕이 하고싶은데로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후궁의 몸에서 태어나 왕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 일곱명이며, 유명한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도 어머니가 후궁이고, 영친왕의

어머니 귀빈 엄씨도 후궁이다.

아들이 세자나 왕이 되면 중전이고 뭐고 간에

그 후궁은 최고의 권력을 얻을수 있는 것이며

중전은 왕의 아내고, 내명부란 궁중 여성집단

수장이라 할 수 있지만

인간의 기본 욕구인 성욕에서는, 자유롭지가

못했고 오직 왕의 후계를 낳기위한 기계적인

성관계와 그에 따른 관리를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계자를 낳지 못하거나

딸만 낳았을 때에는 아들을 출산하여 위치가

달라진 후궁들과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임금도 이런 시스템을 지켜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중전보단 후궁에게 달려갔다.

그런데 왕이나 중전이나 둘다 참으로 불쌍한

생각이 드는데 누가 더 불쌍할까?

왕은 조선의 절대 지배자지만 후계자를 낳기

위해 까다로운 성생활을 지켜야만 했던 조선

왕들의 이야기다.

- 옮겨온글 -

 

송이접신(松茸接神)

 
 

 

 

어떤 청상과부가 여종 하나를 데리고 있는데

그 여종 역시 남편을 여의고 가긍(可矜)하게

되었다.

어느 날 과부가 여종에게 이르기를 "넌 천한

몸이거늘 어찌하여 개가를 하지 않느나?"고

하였다.

여종은 "아씨께서 홀로 계시는데, 제가 어찌

사내를 얻어 홀로 즐길 수 있으리까.

이몸은 죽도록 다시금 시집가지 않으렵니다."

하고 맹세를 하는 것이었다.

과부는 그의 곧은 절개를 기특하게 여겼으며

때는 마침 중추의 가절이었다.

동네에 송이(松茸)장수가 지나치기에 과부는

여종으로 하여금

그 중에 특히 길고 커다란 놈 서너 개를 골라

잡아 갖고 오도록 하였다.

여종이 송이를 사오고 함께 송이의 생김새를

보니 흡사 남자의 양물과 꼴이 같았다.

과부는 여종에게 커다란 송이의 값의 다과를

묻지 말고 모두 사 오라고 하였다.

여종이 곧 송이를 사오자 춘정을 금하지 못한

채 피차 둘이 그것으로 놀음을 시작하여

마치 남녀간의 운우를 나누는 행사처럼 하고

보니, 그 흥취가 극히 아름다웠다.

곧 그놈을 시렁 위에 얹어놓고 이름을 덕거동

(德巨動)이라 불러 조금 한가한 짬이 생기면

둘이 서로 음농(淫弄)을 하곤 하였다.

이때 체장수가 바깥에서 체를 고치고 있을 제

과부는 또 덕거동을 불러내 음농을 시작했다.

체장수가 일을 모두 끝낸 후 여종이 오래도록

나오지 않기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안에서 아까 덕거동을 부르는 것으로 보아서

이는 필시 아이의 이름일 것이라 생각하고

"덕거동아, 빨리 나오지 않느냐!"며 큰 소리로

고함을 치는 것이었다.

체장수의 말이 끝나기 전에 어떤 물건 하나가

돌출하여 체장수를 때려 누이고는, 줄곧 그의

북도(北道)를 찌르는 것이 아닌가.

체장수는 그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크게 놀라

체를 고친 값도 받기전에 겨우 몸만 빠져나와

도주를 하였다.

그후 어느 날 체장수는 동료 체장수를 만나서

그 이야기를 하였다.

동료는 "자네, 그 말이 허망하이. 세상에 어찌

그럴 이치가 있나?" 하고 믿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자네, 만일에 내 말을 믿지 않거든 지금

그 집으로 찾아가 지난 번 내가 체 고친 값을

받아쓰더라도 난 조금도 불평하지 않을 테야."

하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친구는 곧 과부의 집으로 찾아가 곧 덕거동을

불렀더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별안간 어떤

물건이 돌출하여

그를 때려 누이곤 마치 방망이처럼 생긴 어떤

물건이 줄곧 그의 북도를 찌르자, 크게 고함을

치는 것이었다.

"사람 살려다오."

체장수가 멀리서 그 꼴을 바라 보다가 비웃는

어조로 "만일에 그다지 모질고 독하지 않다면

어찌 가벼이 체 고친 값을 네게 양보하겠다고

했을꼬?" 하고 돌아보지도 않은채 줄행랑쳤다.

- 옮겨온글 -

신윤복의 에로티즘 '사시장춘'

 
 
 

사시장춘(四時長春), 혜원 신윤복

혜원 신윤복의 '사시장춘'은 에로티즘의 극치며

한국 춘의도의 으뜸으로 치고 있다.

사시장춘은 '언제나 봄날'이라는 뜻으로 남녀간

사랑의 세계를 담아낸 그림이다.

노골적이지 않으면서도 은근한 상상력을 동반

시키는 춘화이다.

따뜻한 봄날에, 한적한 후원 별당의 문이 굳게

닫혀있고 남녀가 방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다.

댓돌위에 갸날픈 여자의 분홍 비단신 한켤레와

사내의 큼직막한 검은 신발이 놓여 있다.

여자의 신발은 수줍은 듯이 가지런히 놓여있고

그녀의 열린 마음을 상징하듯 붉은 색이다.

남자의 신발이 흐트러져 있는데 이것은 마음이

급한 나머지 후다닥 방에 들어갔음을 뜻한다.

마루를 보면 높기 때문에 남자가 먼저 올라가서

여자를 부축해 방으로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술병을 받쳐든 여자 종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다.

여종의 볼은 약간 붉게 표현되어 있으며 그것은

부끄러운 감정을 일부 표현한 것이다.

나뭇가지가 문을 가리고 있으며 저건 방안에서

일어나는 은밀함을 슬쩍 흘려놓은 것이다.

별당옆에 활짝핀 매화꽃은 방안에 있는 남녀의

사랑이 한창 무르익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방안에 있는 두 남녀의 주고받는 뜨거운 사랑도

매화꽃처럼 활짝 피어날 것이다.

- 옮겨온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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