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야화 자동선(제23화)

 
 

동기(童妓) 자하(紫霞)가 며칠 전부터 시장을 오가며 각종 혼숫감을 사들인다.

자동선은 일가친척이 없고 수양어미 제일청과 동기 자하가 가장 가까운 관계며 자동선은 영천군과 부부가 될 것을 대비하여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다.

호박 관자를 받고 마음을 굳혔으며 비록 양가 부모와 친척들을 모셔 놓은 자리가 아니더라도 조촐히 결혼식을 올린 뒤 초야를 치르려는 속내다.

그렇게라도 해야 18년 동안을 고이 간직했던 정조를 아낌없이 줄 수 있어서다.

숱한 사내들이 금은보화로 회유했으나 지금껏 어렵사리 지켜온 정조를 떳떳이 바칠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동선은 영천군이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해올 경우를 위해서 결혼 준비를 하고 있다.

이웃집 찾아가서 서너번 부르자/ 아이가 나와서 주인 안계시다 말하네

막대 짚고 꽃 찾아가지 않았으면/ 거문고 끼고서 술꾼 찾아 가겠지.

조선전기 문인 성희(成禧)의 딸 성씨(成氏)의 '꽃 찾아가지 않았으면'이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들은 결혼을 하면 남편이 외도할까 걱정이 태산인 것 같고 오다가다 예쁜 여인이 지나가면 반사적으로 힐끗힐끗 쳐다며 동물적이다.

동물적이란 원시시대에 사냥감을 보고 달려 나가는 맹수의 본능과 같은 것이며 그 본능이 없으면 맹수는 먹이를 놓친다.

남자에게 예쁜 여인이 지나갈 때 무관심은 맹수에게 사냥의 본능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이라 할 것이라 할까? 지금 이 시에서 꽃은 여자를 지칭함일 게다.

어쩌면 자동선과 숱한 사내들이 자신의 정조를 노렸으나 끝까지 지켜 이제 평생을 맡길 수 있다고 판단한 영천군에게 화촉동방을 허락하였다.

사실 기녀의 몸이야 어차피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재화(花代)가 필요하여 노류장화의 길을 택하였으니 사람을 가려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하지만 더러는 자동선 같이 화대보다는 사람을 고르는 기녀도 있으며 황진이가 그러했고 지금 자동선이 대표적이다.

화대를 내는 사내가 아니고 화대를 받는 여자가 사내를 선택하는 기막힌 경우며 자동선이 18년 동안 고이 간직해 온 초야권을 영천군에게 넘겼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으론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은 것이고 평범한 사내가 아니여서며 임금의 조카요 효령대군의 자제가 아닌가!

그리고 자신은 노류장화로 불리는 기녀가 아니던가! 아무리 노래와 가무에 뛰어나고 학식이 높아도 기녀는 노류장화에 불과하다.

그래서 자동선은 호박관자를 받고서야 꼭꼭 잠가 두었던 정조를 아낌없이 바치려 하는 것이며 결혼식은 자신의 집에서 한다.

결혼식에 필요한 혼수품은 자신이 틈틈이 오늘과 같은 경사스런 일이 생기면 지체없이 치르려고 준비해 놓았으며 식장은 내실이다.

영천군은 제일청의 안내로 내실로 들어섰고 자동선은 녹의홍상(綠衣紅裳)에 머리엔 족두리를 썼으며얼굴엔 연지곤지를 찍어 완연한 신부차림새다.

이때 자동선이 속삭였다.

“나으리께서 입으실 사모관대를 마련했으니 초례복(醮禮服)으로 갈아입으시고 소녀의 배례를 받아주시옵소서.”

드디어 영천군이 자동선의 초야권을 허락받는 순간이고 영천군의 화촉동방은 순간적으로 치러졌을 것이며 아마 하룻밤이 일향(一晌:짧은 순간)처럼 지나갔을 터다.

자동선은 18년을 고이 간직했던 동정(童貞)이 한순간에 무너졌으며 영천군은 30여년에 처음으로 기가 막힌 여인의 사랑을 맛보았을 것이다.

영천군과 자동선의 첫날밤이 조선의 밤을 지배하는 여인 중의 여인이 그의 품에 있음이고 밤이 짧다.

조금 전에 자동선을 품었는데 동창으로 어느새 여명이 들어오고 조금 있자 사가정의 인기척이 났다.

봄밤이 짧아 해 뜬 후에 일어나니/ 천자는 그때부터 늦잠만 자더라

사가정은 짜증섞인 어조로 백락천의 '장한가'(長恨歌) 중에서 일부를 소리쳐 낭송하였다.

그리고 “제일청이 새신랑 부부를 위해서 반살미상(갓 결혼한 신랑신부 초대상)을 차려준다니 어서 준비하시고 갑시다.”라고 외쳤다.

사가정이 월하빙인으로 영천군과 자동선이 맺어져 화촉동방을 치렀는데 그도 남자로 은근한 질투로 속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한양을 넘어 명나라에까지 소문이 그 이름이 자자하여 사신들이 조선에 오면 꼭 찾아와 수청 들기를 간청으로 안되면 위협까지 했으나

끝까지 지킨 정조를 영천군한테 바쳤으니 사내로서 질투를 넘어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터다.

사실 영천군과 사가정의 풍류와 멋을 즐김은 조선팔도에서 둘째가라면 손을 절레절레 흔들면서 사양을 할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사가정은 언제 어디서나 영천군이 먼저고 학식이나 재능으로만 보면 사가정이 영천군 보다 한발 앞설 것이나 사가정은 언제나 뒷전에 섰다.

지금 화촉동방에서 꿀맛같은 사랑의 미봉 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영천군과 자동선의 소원성취가 이뤄진 것도 사가정의 희생에서 꽃피어진 경사다.

영천군도 그림에는 능하지만 대인관계에선 사가정이 스승격이며 더욱이 영천군은 왕손으로 한양에선 거칠 것이 없다.

옥골선풍에 헌헌장부로 왕손이 아니더라도 사내가 예쁜 여인이 지나가면 힐끗힐끗 쳐다보듯 여인들도 영천군을 도둑시선으로 훔쳐볼 사내다.

영천군은 좀처럼 신혼방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자동선의 체취에 취해버렸고 자동선의 몸에선 야릇한 향기가 피어났다.

밤새 방사를 거듭해도 피곤하지 않았으며 하면 할수록 힘이 솟고 더욱 짙은 향기가 피어올랐다.

동창이 밝자 자동선은 일어나 꿀물부터 대령하였고 흡족한 표정이며 영천군도 자동선이 살포시 일어날 때 깨어있었다.

그러나 잠든 척하며 자동선의 행동을 살폈고 자동선도 밤새 시달렸으니 피곤할 것이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는 순간 영천군의 손이 끌어당겼고 그들은 밤샘도 부족한 듯 다시 뜨겁게 한 몸이 되었다.

- 24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자동선(제22화)

 
 

얼떨결에 내실로 떠밀려 들어온 영천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며 사내를 먼저 들여보내고 뒷물을 하고 여자는 들어오리라 생각해서다.

영천군은 피곤하였고 요며칠 사이에 송악산을 두 번이나 오르내렸으며 자동선을 품으려고 온갖 묘수를 다 써 봤으나 번번이 헛수고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자동선의 내실에 들어왔고 여자의 방에 남자 혼자 있게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남자는 온갖 상념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 영천군은 그러하지 않았고 자동선의 내실은 의외로 단조롭다.

네벽이 모두 하얀 백합처럼 흰종이로 되었고 남향의 벽에는 성명미상의 그림 '원앙'이 걸려있을 뿐이며 머리맡엔 자리끼까지 준비가 되었다.

영천군은 옷도 벗지 않은 채 벌러덩 누웠고 화촉동방을 상상하고 있다.

그런데 영천군은 자리에 눕자 금방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졌고 영천군이 잠에서 깨어났을 땐 동창이 밝아오고 있을 때며 옷도 입은 채다.

화들짝 놀라 일어났을 때는 자동선이 옆에서 “너무 피곤하게 주무셔서 소녀 그냥 이렇게 옆에서 밤새 지켜드렸나이다! 목이 타실 거예요. 어서 자리끼를 드시지요.”

자동선은 영천군이 일찍 잠에 빠져 오히려 아쉬운 밤을 보냈다는 말투다.

“허허 그랬느냐? 내가 너무 피곤해서 자동선 네가 들어오는 것도 몰랐느니라.” 남자체면이다.

밖에서 두런두런 사가정과 제일청의 대화소리가 들렸고 잠시 뒤 “영천군 나으리, 일어나셨는지요? 사가정이 옵니다.”라고 문안을 알렸다.

툇돌엔 영천군 신발과 자동선의 신발이 나란히 놓여있고  사가정과 제일청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으며 이젠 됐다는 표정이다.

“밖에 누가 오셨어요?” 자동선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다.

“자동선아! 영천군 나으리 잘 모시고 잤느냐?”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소녀를 어떻게 보시고 그런 망측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자동선이 뿌루퉁한 표정으로 방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 집은 대궐 뒤의 막바지 골목/ 내 남편은 광명문의 젊은 파수꾼

여자의 마음은 일월같이 밝아서/ 생사를 걸고 섬겨 오는 내 낭군이오

패물을 돌리자니 눈물이 거침없어/ 시집 전에 못 만난 것 한스럽구려.

중국 장적(張籍)시인의 '절부음'(節婦吟)이다.

자동선도 마음이 타긴 영천군과 다를 바 없으며 영천군이 조바심을 내면서 자기를 원하는 표정은 역력한데

딱 부러지는 언행이 없어 몸을 열 수가 없는 것이며 낭랑18세의 보배같은 몸을 선뜻 내어놓기가 무섭고 두려울 터다.

사내들은 여자가 한번 몸을 주면 자기 전유물처럼 행동하고 염치라는 것은 생각지도 않는 속성이 있으며 그런 사내들을 자동선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명나라 사신 김식이 껄떡거리며 안절부절 못하는 자리에서 위기일발로 벗어나 영천군에게 왔으나

내여자가 되어달라는 아무런 징표를 내어놓고 있지 않아 자동선도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다.

‘사내들은 다 같은 족속들이야’하는 마음이 차츰 굳어가는 즈음 사가정과 제일청이 다시 찾아왔다.

사가정과 제일청은 싱글벙글이고 엊저녁에 뜨거운 살을 마음껏 섞은 흡족한 표정이 역력하다.

“사가정 나으리, 사가정 나으리는 항상 즐거운 표정이세요?” 자동선이 샘이 나고 부럽다는 말투다.

“그러하느냐? 나야 어디를 가나 술과 여자가 있어 얼굴 짱그리고 속을 태울 여유가 없단다.

그런데 너는 어찌 표정이 밝지 않은 것을 보니 영천군 나으리와 화촉동방을 못치룬 눈치로구나?”

“사가정 나으리, 그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니까? 소녀를 어찌 보시고 청교방 창기와 같이 보시는지요? 소녀 매우 섭섭하옵나이다.”

“아니다.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내가 사과하느니라.” 그랬다. 자동선의 마음은 영천군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초야를 치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영천군은 자동선의 마음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이며 사가정은 자동선이 방문을 열어놓고 나간 열린 문으로 내실로 들어갔다.

“영천군 나으리 아직도 호박관자를 자동선에게 주지 않았습니까?”

“글쎄. 그게...” 영천군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으며 당황하는 표정이 뚜렷하다.

“자동선을 청교월 창녀 정도로 생각하시면 아니 되옵고 자동선은 조선팔도 한양을 넘어서

중국 사신들까지 품지 못해 속을 태우는 명기라기보다 여자사대부라고 해야 적절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어서 기회를 봐서 호박관자를 주시면서 평생을 책임진다는 약속을 하셔야 몸을 내어 놓을 것입니다.”

그때서야 영천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고 두 사내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자동선과 제일청이 들어왔다.

자동선의 손엔 술병이 들렸고 제일청의 손엔 거문고가 들렸으며 사내들에겐 술이 최고이며 자신들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데에는 술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두 분이 무슨 얘기를 그토록 달콤하게 하시나이까?”

가시가 돋친 제일청의 말투이고 이틀 사이에 '송악도'(松岳圖) 두 폭을 그리는 사이 자동선의 마음을 충분히 알았을 터인데 아직도 호박관자를 주지 않았느냐는 질책이 섞인 어투다.

술과 거문고를 보자 두 사내 표정이 밝아졌고 영천군의 표정이 더욱 환하게 피어났으며 자동선을 보자 영천군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쉽고 원망스런 표정 같기도 하고 자신은 고단한데다 술에 취해 금방 잠에 들어 깼을 때는 옆에 자동선이 마치 등신불(等身佛)처럼 앉아 있는 것을 보았으며 밤새 지켜만 보았냐는 표정이다.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어지고/ 땅에선 한 나무 가지가 되어지고/

설사 하늘과 땅이 다할 때가 있어도/ 알뜰한 우리사랑 끊길 줄이 있으랴.

제일청의 신기에 가까운 거문고 음률과 사가정의 시낭송에 영천군과 자동선의 뜨악했던 정서가 봄눈 녹듯 녹고 진달래 피듯 하나가 되었다.

영천군이 호박관자를 자동선의 가슴에 달자 자동선은 감격에 못이겨 사내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으며 이제 몸을 맡겨도 된다는 안도의 울음일 게다.

- 23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자동선(제21화)

 
 

세상의 아름다움은 미녀로 귀결되고 여인의 아름다움에서 세상은 시작되어 여인의 아름다움으로 끝이 난다.

세상의 아름다움은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으며 아름다움을 표시하는 방식이 다를 뿐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아름다움을 대중화한다.

지금 자동선의 의식주는 당시 조선사회가 최고로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가졌으며 그것은 신윤복(申潤福)의 '미인도'가 잘 나타내고 있다.

가슴에 그득 서린 일만 가지 봄 운을 담아/ 붓 끝으로 능히 인물의 참 모습을 나타내었다.

얼마나 감탄스런 표현인가? 봄기운이란 겨우내 동토(凍土)에서 웅크리고 있던 삼라만상들이 서로 다투어 세상으로 나옴을 뜻하는 것일 게다.

또한 붓끝으로 여인의 극치의 아름다움을 구현함을 말하였을 것이다.

지금 영천군의 손을 잡고 있는 자동선이 신윤복의 '미인도'에 나오는 미인이 살아나온 주인공은 아닐까?

사가정과 제일청은 영천군과 자동선이 한시라도 빨리 화촉동방에서 만리장성을 쌓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을 것이 자명하며 열쇠는 자동선이 가지고 있다.

"영천군 나으리! 아직도 소첩이 명나라 사신 김식한테 갔다 너무 늦게 와서 화가 나셨는지요?”

영천군이 자동선의 활짝핀 함박꽃 빛의 얼굴로 예쁜 짓을 해 보여도 어딘가 그늘이 있어 보여 속이 타는 목소리다.

“아니다. 내 너를 보니 너무 기뻐 어떻게 기쁨을 표시할까 궁리중이란다. 잠시만 기다리려무나.”

영천군 특유의 여인 포로작전이고 서둘러 오느라 자동선은 숨이 찬 목소리며 두 볼은 발그레하게 상기된 채다.

“영천군 나으리, 사실은 소첩이 오지 못할 뻔 했었나이다. 그 영감택이 비취노리개를 가슴에 달아주며 수작을 걸어와서 위기를 겨우 넘겼어요.

마침 비취기생이 있어 비취주인은 따로 있다고 하여 그 기생에게 비취를 넘겨주고 어렵게 빠져나왔나이다.”

자동선은 위기일발로 중국사신의 품에서 힘겹게 빠져나와준 것도 몰라준다는 섭섭함이 묻어있는 말투며 바로 그때다.

“자자.. 사랑하는 남녀사이에는 체면같은 것은 없어야 진정한 사랑의 관계랍니다.

이제 영천군 나으리와 자동선 미인도 자존심 버리고 백년가약을 맺을 준비나 하소서!” 언제나 분위기는 사가정이 잡았다.

어젯밤 산매화가 한 송이 피어났건만/ 산속의 늙은 중은 꺾을 줄을 모르네./

이제 나이도 젊고 다정한 그대가/ 덩굴 옆으로 달려와 사랑을 묻노라.

여기서 늙은 중은 명나라 사신 김식을 알레고리 했을 것이며 사가정의 시는 계속되었다.

한스럽다. 신선이 옥퉁소를 불어서/ 인간의 이별수를 깨뜨려 주지 못함이/

산에 온지 사흘에 아직도 못 올랐으니/ 봄바람이 어찌 그다지도 무정하냐/

어느 날 말을 타고 흥진 속에 파묻히면/ 발에 비쳐있던 그 달은 누가 알아주랴.

너무 비싸게 굴지 말고 어서 영천군을 모시라는 일침이고 시낭송을 마친 사가정은 “자 이제 우리 소임은 끝이 났으니 자리를 뜹시다.”라고 제일청을 감싸 밖으로 나갔다.

단둘이 남자 영천군이 입을 열었다. “왜 대답이 없느냐?” 이젠 사내가 속이 타는 목소리고 자동선은 묵묵부답이며 대답이 없으면 묵시적 동의다.

침묵이 한동안 흐른 뒤 “미천한 소녀가 어찌 영천군 나으리의 말씀에 대꾸를 하겠나이까?

처분만을 기다릴 뿐이옵니다!”라고 영천군 무릎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감격의 울음을 터뜨렸다.

지금 영천군은 채용신(蔡龍臣)의 '팔도미인'의 예쁜 부분만을 선택하여 탄생한 자동선을 품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자동선은 채용신이 그린 '팔도미인' 뿐만이 아니라 중국의 4대 미인들의 장점만을 골라 삼신할머니가 점지 한 빼어난 재색(才色)이다.

그런데 지금 영천군은 인내와 끈기로 자동선을 품었그 사가정의 충실한 월하빙인의 역할에 제일청의 수고로움이 만들어 낸 세기의 연리지 작전이었다.

자동선의 울음이 좀처럼 멈추지 않았고 영천군은 두 어깨를 들썩이며 섧게 통곡하는 자동선의 상체를 어루만지고 있을 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한다.

어떠한 분위기에서도 뛰어난 해학과 기지로 웃음과 부드러운 분위기로 바꾸어 놓는 사가정도 없어 펑펑 눈물을 쏟으며 울음을 끊이지 않는 자동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묘수를 못찾고 있다.

밤은 깊어만 갔고 자정이 훌쩍 지났으며 이게 웬일일까? 자동선이 섧게 울다가 그만 지쳐서 영천군의 품에 안겨 잠이 들어버렸고 가늘게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졌다.

영천군은 오늘저녁이야 말로 오매불망 했던 자동선과 화촉동방을 치룰 수 있을 것을 기대했으나 그 꿈이 문턱까지 갔다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노류장화라 해도 명나라 사신의 수청까지 거부하고 온 자동선을 잠들어 있는 것을 겁간(劫姦)을 할 처지는 아니다.

며칠 동안 사가정과 제일청의 월하빙인한 것도 있으며 더욱이 두 폭의 그림까지 그려줘 환심을 얻어놨는데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겁간을 한다면 왕손으로 체면이 서지 않아서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일까? 어미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자듯 잠을 잔 자동선이 잠시 후 눈을 번쩍 뜨며

“영천군 나으리, 아직 가시지 않고 계셨나이까?”라고 방긋 웃음까지 웃으며 양 볼에 흘린 침을 손으로 쓰윽 닦으며 일어났고 그 웃음이 영천군의 마음을 또 흔들어 놓았다.

“너무 늦으셨어요. 내실로 들어가셔서 주무세요. 소첩은 동기(童妓) 자화(紫霞)와 자고 아침에 다시 오겠나이다.”

자동선은 영천군을 자신의 내실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아버렸으며 영천군의 코에는 자동선에게서 풍겼던 싫지 않은 야릇한 암내가 지워지지 않았다.

- 22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자동선(제20화)

 
 

그들은 말 대신에 손을 잡았다.

“밤공기가 차옵니다.”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가듯 제일청이 사가정을 품고 내실로 들어갔으며 사가정은 제 내실인 냥 들어가자마자 벌러덩 자빠진다.

“사가정 나으리, 잠이 드시면 아니 되옵니다. 소첩이 준비한 해장국을 드시고 자동선 집으로 가셔야 되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이제 한숨 자야지. 너도 이리 오너라! 또 자동선 집으로 간다는 말이냐?”

천하의 사가정이 술을 더 마시지 않고 잠을 자겠다고 했으며 지금쯤 영천군과 자동선은 화촉동방을 치르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제일청아! 너나 가려무나. 나는 여기서 한숨 자야겠다.”

제일청이 끓인 해장국과 술병이 있는데도 사가정이 본 척도 않으며 영천군 월하빙인 노릇하느라 너무 지친 듯하다.

하지만 제일청의 등살을 이겨낼 사가정이 못되며 해장국과 술병을 비운 사가정은 제일청을 앞세워 자동선 집으로 향하였다.

영천군도 마침 해장국을 먹고 차를 즐기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영천군의 표정에 먹구름이 끼여 있다.

사가정이 상상했던 엊저녁에 뜨겁고 아름다운 화촉동방을 치르지 못했던 것이다.

“영천군 나으리, 어젯밤에 잘 주무셨는지요?” 사가정의 깍듯한 아침인사다.

“허허허, 그러했소이다!” 기분이 착 가라 앉은 목소리고 사가정이 그동안 영천군한테 기분이 나쁠 때 듣던 그 목소리다.

“사가정 나으리 오셨어요?”

자동선의 목소리는 영천군과는 정반대로 경쾌하고 기분좋은 목소리며 그녀의 표정은 흡사 무지개 빛깔 같다.

“소첩 영천군 나으리의 기분을 푸시게 '자하동'(紫霞洞)곡을 불러드리겠나이다.”

집은 송산(송악산) 자하동에 있고/ 은구름 중화당에 서로 접해있네./

오늘의 기영회 소식 즐겨 듣고/ 한 잔 불로주 드리려 왔소./

한 잔 마시면 천년 더 사시리니/ 한 잔 들고 또 한 잔 드시라. 여러 손님들...

고려문인 채홍철(蔡洪哲)의 무제(無題)다.

제일청의 거문고 음률은 송도에선 적수가 없으며 퇴기로 물러나 있으나 중요 연회석엔 제일청이 초청되어 거문고 솜씨를 뽐낸다.

젊었을 때는 미색과 노래와 춤으로 명기로 떨치더니 이제 나이 들어 청교방 뒷골목에서

장죽에 엽초나 태우고 있을 신세이나 뛰어난 거문고 음률로 오히려 격조 높은 노년을 즐기고 있다.

사가정과 관계를 맺은 것도 거문고가 매개체가 되었고 사가정의 시에 제일청의 거문고가 만나면 꾀꼬리가 춤을 춘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청교방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가정이 송도에 발길이 뜸해지자 그 우스갯소리가 사라지고 제일청의 거문고 인기마저 시들해졌다.

그런데 지금 그 절정의 음률이 되살아났으며 자동선이 춤을 추고 사가정의 시낭송과 제일청의 거문고에 영천군은 천국에 온 듯 넋을 빼앗겼다.

자동선과 아름다운 화촉동방을 못치뤄 침울해 하는 영천군을 위한 단독 연회고 단독 연회가 끝이 났어도 영천군 특유의 환한 얼굴이 아니다.

사가정은 언제나 영천군 앞에서는 기쁨과 행복감을 만들어주는 어릿광대를 자임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게 해주어야 자신도 즐겁고 죽마고우로서 소임을 다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제일청의 거문고 솜씨는 젊어서 한창 절정일 때 보다 음률이 더 아름답소이다. 그동안 기명(妓名)만 알았지 성씨조차 몰랐네요. 성씨가 무엇이요?”

“예 나으리. 소첩의 성씨는 여(呂)씨 옵니다.”

“여시라... 입구자 두 개를 포개 놓은 여씨 말이요?”

“예 사가정 나으리. 그러하옵니다.”

“허허! 거참 제일청은 윗입보다는 아랫입이 크구만. 그렇지 제일청?”

“그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척 보면 알지 그런 것도 모르는 풍류객이 어디 있소이까? 여자가 윗 입구보다 아래 입구가 더 크지 않소.”

“사가정 나으리는 못 당해! 소첩이 당했네요.”

영천군은 이때서야 박장대소를 하면서 다시 자동선의 손을 꼭 잡았으며 자동선은 춤을 추어 숨소리가 아직도 높고 사가정의 입담은 계속 되었다.

“옛날에 소금장수와 고추장사가 있었는데 두 남자가 배 한척씩 판돈을 평양 명기한테 몽땅 털렸대.

그 입이 자네와는 비교가 안 되게 커서 배 한척씩 거뜬히 들어갔다는 얘기야.” 폭소가 연거푸 터져 나왔다.

“아무튼 사가정 나으리는 못 당해요. 소첩은 두 손을 다 들었어요.”

“이 사람아, 손만 들어 다행이네. 발까지 번쩍 들고 달려들면 어쩌자는 거야? 그 무서운 꼴을 안보니 다행이야. 내가 내친김에 얘기하나 더 하지.

옛날 어느 마을에 꽃같은 처녀가 있는데 두 청년으로부터 청혼을 받아 부모가 딸에게 의사를 물었더니 두 청년을 모두 남편으로 삼겠다는 거야.

부모가 깜짝 놀라 물었더니 밥은 동쪽에서 먹고 잠은 서쪽에서 자면 되지 않겠느냐?”는 얘기며 소위 동가식(東家食) 서가숙(西家宿) 이야기다.

사가정은 중국고전 '소림광기'(笑林廣記)에 나온다는 얘기로 끝을 맺었고 그때서야 영천군은 오매불망 자동선의 꿈속에서 벗어나 잠시 파안대소 하였다.

영천군의 파안대소엔 자조의 표정이 섞여있고 자동선은 잡혀있던 손을 빼서 스스로 영천군의 손을 잡았다.

어차피 허락할 몸, 너무 속을 썩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이르러서고 영천군의 손은 체구에 비해 작고 비단결 같았으며 자동선의 손이 오히려 더 억세 보였다.

이때서야 비로소 영천군의 얼굴에 그늘이 걷혔고 사가정도 얼굴에 웃음기가 생겼으며 영천군의 표정이 어두우면 사가정은 이심전심으로 그늘이 생긴다.

자동선을 보기 위해 한양에서 송도까지 왔으나 꼬박 이틀이 지난 뒤 이제 겨우 손을 잡고 따뜻한 정을 나눌 분위기가 되어서다.

자동선과 영천군이 잘 되어야 자신도 제일청과 오랜만에 재회의 회포를 풀 수 있기 때문이며 사가정은 언제고 손을 내밀면 품에 안길 제일청이 있어 밤이 기다려지는 사내다.

하지만 영천군과 자동선은 그런 사이가 아니고 영천군은 영천군대로 왕손의 체면을 중시하고 있으며

자동선은 그녀대로 명기(名妓)의 위신을 지키려 하기 때문이고 이제 그들은 체면과 위신을 조금씩 내려 놓으려하고 있다.

- 21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자동선(제19화)

 
 

삼현육각(三絃六角)의 풍악소리와 휘황찬란하게 켜진 등불에 자동선은 잠시 눈이 휘둥그레졌다.

푸른 녹음에 젖었던 싱그러움이 삽시간에 적응이 쉽지 않았으며 영천군과 사가정의 넉넉한 풍류 분위기가 아직도 몸에서 떠나지 않은 상태다.

“자동선이 납시었습니다.” 이방의 보고에 흥청대던 분위기가 갑자기 멈추는 듯하였고 명나라 사신 김식(金湜)이 성큼성큼 걸어 나와 자동선을 맞았다.

“네가 자동선이냐?”

명나라 사신은 대국의 체면도 잊은 듯 자동선의 손을 덥석 잡으며 기쁨에 넘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네 소녀 조선국 기녀 자동선이라 하옵니다.” 추호도 떨림이 없는 대답에 김식이 오히려 주춤하였다.

고개를 조아리며 다소곳한 음성으로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조선국 기녀란 또렷한 응답에 상국의 사신이 되려 움찔 했던 것이다.

‘요것 봐라. 기생주제에 조선국이란 나라이름까지 들먹이는 맹랑한 계집...’ 이란 입속말을 하며 손에 힘을 주어 잡고 자리에 앉았다.

“그래 네가 중국에까지 이름이 알려져 있는 자동선이냐?”

“예 사신 나으리, 명나라에까지 소녀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는 말씀은 소녀가 확인할 수 없으나 조선국엔 자동선은 소녀 하나뿐이옵니다.”

너무도 당당한 대답이다.

“중국 사신 장녕이란 한림학사를 알고 있느냐?”

“소녀 중국 분을 여러분을 모셨음으로 어느 분이 장녕이었는지 송구스러우나 장담할 수는 없사옵니다.”

김식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으며 내일 저녁엔 귀국해야 하는데 밤은 오늘 뿐이다.

그런데 맹랑한 자동선과 잠자리를 하려면 오늘밤만으론 불가능해 보여서고 비록 기생이지만 반듯한 언행이 어느 정경부인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소녀 손을 놓으셔야 사신 어른께 술을 권해드리지요.” 김식은 자리에 앉아서도 자동선의 손을 놓지 않았다.

자동선의 손은 따뜻하고 포근하며 중국여자와 이웃 속방국가 여자들과 다르게 김식은 평온함을 느꼈고 자동선이야 말로 진정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이 처음이 아니며 올 때 마다 조선여자들과 잠자리를 했으나 자동선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그 여자들과 전혀 다른 느낌이다.

꼭 잠자리를 같이하고 싶은 여자이고 밤은 속절없이 깊어갔으며 김식의 언행은 점점 노골적으로 나왔다.

삼월이라 조선 땅엔 꽃이 활짝 피어나/ 꽃 속에서 그대 만나 거나하게 취했네./

멀다한들 그다지 먼 나라가 아니니/ 오늘 갔다 내일 또 올 수도 있다네.

김식은 행여 외국인이라 깊은 정이 들어 헤어지면 걱정이 될까 미리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다는 것까지 예고했지만 구렁이 같은 늙은 떼 놈의 속셈을 모를 자동선이 아니다.

산 속에 사는 중이 달빛이 탐이 나/ 물과 함께 달빛도 병에 담아 왔소./

절에 돌아와 병을 기울려 보니/ 달은 간데없고 병에는 물 뿐이어라.

이규보의 시 '무제'(無題)이고 자동선은 늙은 네가 나를 아무리 탐내도 나는 달빛과 같은 여자이니 헛물켜지 말라는 일침이다.

그러나 노련하고 끈질긴 김식이 쉽게 물러설 리가 없으며 손은 어느새 뱀이 혀를 날름대듯 자동선의 속곳 밑을 이곳저곳 오고가고 있었다.

사내의 손은 불같이 뜨겁고 징그러우며 자동선은 계속 옆에 앉아 있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려하였다.

“허허! 너는 내 옆에 그냥 앉아 있거라. 춤이야 딴 아이한테 추라고 하렴.”

김식이 육십은 넘어 보이고 머리까지 백발이나 사신으로 다니면서 주지육림의 대접을 받아 주름 하나 없는 팽팽한 피부다.

김식의 행동은 대담하였지만 상국(上國)의 사신이라 누구하나 감히 충고나 예의를 지키라고 말 한마디 못하는 분위기다.

“내 너에게 선물 하나를 해야겠다.”라고 말한 김식은 호주머니에서 비취(翡翠) 노리개 한 쌍을 꺼내 자동선의 가슴에 달아주었다.

“아니옵니다!”라고 매몰차게 말을 한 자동선은 당나라 시인 장적(張籍)의 '절부음'(節婦吟)을 읊었다.

그대 아시 듯 소첩은 남편 있는 몸/ 어쩌자고 쌍명주를 정표로 주오./

따뜻한 그 애정 사무치게 고마워/ 붉은 비단 저고리에 살짝 차보오.라고 읊고는 말을 이었다.

“이 비취는 주인이 따로 있사옵니다. 여기있는 기녀 중 소첩보다 더 예쁜 비취가 있사옵니다. 그 여인을 불러 따뜻한 가슴에 달아주시옵소서!”

말을 마친 자동선은 가슴에 달린 비취를 빼 김식에게 건넸고 자동선은 김식에게 큰 절을 하고 자리에서 떠났다.

“저런 버릇없는 계집을 봤나! 어디 명나라 사신 앞이 어떤 자리라고...” 송도 유수는 안절부절못하였다.

“아니요. 괜찮소이다. 자동선을 돌아가게 그냥 놔두시오. 동방예의지국다운 절부요. 내 부끄럽소. 남편이 있는 여자를...”

김식도 자동선의 똑 부러진 언행이 기분 나쁘지 않고 보호해 주고 싶은 여자로 보였던 것이며 이때 비취가 나타났다.

“소첩이 비취옵니다.” 자동선에게 성정이 흐려진 김식은 비취도 예뻐 보였다.

“오! 네가 비취냐? 이제 이 비취 주인이 나타났구나.” 김식은 앞뒤 안 가리고 비취를 품었다.

자동선은 집으로 뛰 듯 걸어갔으며 영천군과 사가정은 여전히 술판이다.

“나으리들! 소녀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국익을 위해 잠시 자리를 떴을 뿐 되레 너의 절도 있는 언행에 박수를 보내주어야겠구나.”

사가정의 분위기 통솔 능력은 누구도 당해내지 못할 것이며 영천군은 졸다 마시다 하고 있었다.

“영천군 나으리! 소녀 자동선이 다녀왔습니다.”

자동선이란 말에 영천군은 놀란 토끼모양 반짝 눈을 떴으며 어느새 닭이 홰를 치며 새벽을 알린다.

“자동선은 영천군을 모셔라! 나는 객사로 가련다.”

사가정은 반쯤 남은 술잔에 술을 마저 마시고 일어나 나왔으며 달은 샛별에 가려 아름다움을 잃었고 저만치 희미하게 여인이 보였으며 제일청이다.

- 20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자동선(제18화)

 
 

문밖에서 갑자기 나귀의 울음소리가 들렸으며 자동선이 끌고 온 나귀다.

자동선은 벌써 송악산 유람을 위해 나귀를 끌고 객사로 영천군과 사가정을 모시러 온 것이다.

아직 어둠이 덜 걷힌 상태고 술국을 끓여 두 사내에게 대접하려는 속내다.

“나으리들 일어나셨는지요?” 제일청 목소리다.

“게 누구요? 이렇게 새벽 일찍이?” 사가정은 제일청의 목소리를 알아들었지만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것이다.

“예. 나으리 청교월에 제일청입니다. 자동선이 술국을 끓여서 나으리들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자동선이란 말에 영천군은 천둥에 놀란 아기 노루 모양 발딱 일어났고 두 사내는 자동선의 내실로 안내되었고 내실 안에는 처음 들어갔다.

자동선도 내실에 사내를 안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더욱이 두 사내를 동시에 스스로 안내한 것은 자신도 놀라워하고 있다.

어쩌다 기생이 되어서 사내를 접대하게 되었을 때도 술좌석에서 헤어졌고 잠자리를 같이 하기 위해 집으로 데려온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영천군과 사가정이 자동선의 내실에서 술국을 먹고 있으며 그것도 자동선이 직접 끓여 해장술과 함께 먹이고 있는 것이다.

경천동지 할 사건이며 생애 최초 자동선의 마음을 휘어잡은 두 사내다.

한 사내는 옥골선풍 헌헌장부의 품위로 자동선의 마음을 샀으며 한 사내는 웃음과 해학으로 자칫 위축될 수도 있는 분위기에서 자존심을 부추겨 주었다.

그동안의 사내들은 자동선을 욕정을 채워주는 고깃덩어리로만 보아주었던 것이며 자동선은 그런 눈초리가 죽기보다도 싫었다.

그런데 지금의 두 사내는 자동선을 하나의 인격체를 넘어 재기 넘치는 재녀(才女)로 대하여 더 없이 신나는 표정이다.

이제 해장 술국이 끝나면 제2차 송악산 유람길에 오르려 하고 오늘도 두 남자와 두 여자가 산행에 나섰으며 송악산은 언제 봐도 변함없는 명산이다.

그런데 사내들은 각각 마음이 딴 곳에 가 있으며 특히 영천군은 자동선의 자태에 넋을 빼앗긴 눈치다.

사가정은 자동선의 비위를 맞춰가며 영천군과 가까워지길 온 신경을 쏟으며 월하빙인(月下氷人·중매인)이 되었다.

송악산 중턱 즈음 오르자 옥수같은 물이 흐르고 그늘도 넉넉한 바위가 나타났고 제일청은 재빨리 돗자리를 펴고 술상을 차렸다.

“날도 더운데 더 올라가시지 말고 이곳에서 청풍명월(淸風明月)을 즐기세요!”라며 제일청이 퇴기다운 너스레를 떨었지만 사가정이 그냥 넘길 리가 없다.

“허허 청풍은 있으나 명월은 없지 않느냐?” 하자 자동선이 거들고 나섰다.

“참 나으리도 딱하시네요! 명월은 밤에만 뜨나요? 여기 낮 명월이 두 개나 떴네요?

아직 보지 못하신 모양인데 등하불명이 분명하시군요. 바로 옆에 두둥실 떠 있는데 못 보시고 있으시다니...”

“하하하! 내 이제 막 불혹(不惑:40)인데 봉사가 되었구나. 이를 어찌하면 좋지?”

천하의 사가정이 자동선의 말을 못 알아들을리 없겠으나 능청을 떨었고 이틀사이에 자동선이 농까지 할 정도로 여유로워졌다.

몇 백년은 됐을 소나무 그늘 아래 두 사내와 두 여자는 술판을 벌였으며 무릉도원이요 동천(洞天:신선이 산다는 이상적인 곳)이다.

사내들은 자동선주 몇 잔에 금방 취하였고 특히 사가정이 일부러 일찍 취한 척 혀꼬부라진 소리를 하며 오늘은 월하빙인 역할을 제대로 하려는 속내다.

“자동선아. 네 스스로 낮달이라 했으니 달을 보고 즐거워 할 사람들의 흥을 돋워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네 영리함으로 내 말을 모를리 없을 텐데... 술이 있으면 가무가 있어야 하고 계집이 있어야 하는데 낮달이 떴으니 계집은 됐고 가무가 없지 않느냐?

내가 거문고를 말할 것이고 거문고는 내 입속에 있느니라.” 술판은 점점 무르익어 갔으며 자동선의 춤은 가히 명품이다.

백결(百結:백번을 기웠다는 뜻) 선생의 떡방아소리 못지않은 사가정의 입거문고 음률에 맞춘 자동선의 춤사위는 명품 중 명품이다.

사가정은 신라 자비왕의 사람 백결의 떡방아 소리는 ‘금’ 악기로 켰으나 사가정은 입으로 거문고 소리를 냈다.

거문고 소리에 선녀의 춤을 뺨치는 자동선의 춤사위에 영천군은 넋을 잃었고 이때다.

자동선이 춤을 멈추며 “영천군 나으리, 오늘도 그림 하나 더 그려 주시지요?”라며 영천군 귀에 대고 속삭였고 춤을 추다 갑자기 멈추어 숨이 찬 목소리다.

춤추는 바람에 옷이 헝클어져 겨드랑이 사이로 자동선의 풍만한 한 쌍의 유방이 영천군 눈에 들어왔다.

“영천군 나으리 그리 하시지요! 자동선이 저토록 간청을 하니 소원을 풀어주시지요!”

사가정은 이때다 하고 자동선을 거들었고 자동선도 제일청에 눈짓을 하여 준비했던 비단을 술상 보에서 꺼냈다.

영천군도 기다렸다는 듯이 비단에 송악산과 송도 고을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송악산을 둘러싼 진봉산·봉명산·천마산·오공산 등을 일필휘지로 그려나갔고 영천군의 호탕한 운필에 자동선은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문득 생각이 난 듯이 “사가정 나리, 이 그림에 찬시 한 수 넣어주시지요.”라며 왼쪽 눈을 찡긋 눈웃음을 보냈고 사가정이 누구인가! 샘물처럼 즉각 시 한 수를 토해냈다.

노래는 끝났어도 가락은 끝이 없네/ 지난 일 뜬구름 같아 머리가 비어 있소/

옛 궁의 낙타가 울어 슬픔이 그윽한데/ 두견새 울어 예여 눈물조차 붉도다.

자동선은 그림과 시를 번갈아 감상하며 쏟아지는 감격의 눈물을 억제하였고 그때다.

“자동선이 어디 있느냐? 송도 유수께서 급히 너를 찾느니라. 내 말이 들리면 어서 대답하라!”

유수의 이방(吏房)의 숨이 찬 목소리며 사가정이 나서 이방의 말을 듣는다.

“무슨 연유냐?”

“자세히는 모르나 명나라 사신이 왔습니다.”

명나라 사신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자동선아, 어서 가서 명나라 사신을 맞아라! 우리는 너의 집에 가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라.”

영천군답게 국익을 먼저 생각하며 분위기를 추슬렀고 제일청은 재빨리 술판을 정리하고 자동선과 함께 명나라 사신의 연회장인 옥촉정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닭 쫓던 개꼴이 된 영천군과 사가정 두 사내는 자하동 자동선의 집으로 힘없는 발길을 향하였다.

- 19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자동선(제17화)

 
 

거문고 선율에 맞추어 자동선의 춤은 선녀같고 두 사내는 술잔을 든채 입을 딱 벌리고 자동선의 춤사위에 넋을 잃었다.

제일청의 거문고 솜씨도 뛰어났고 지금은 제일청이 퇴기로 청교방 거리 뒷전에 물러나 있으나 10년여 전만 해도 송도 한량들이 줄을 섰다.

미색에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거문고면 거문고 못하는 것이 없는데다 잠자리와 인심까지 박절하지 않아서 한량들이 부나비처럼 모였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에는 그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으며 지금은 자동선의 심부름과 손님들 길라잡이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더욱이 사가정 같이 가뭄에 콩나듯 예전의 고객이 찾아오면 알뜰히 모았던 주머니 돈까지 탈탈 털어 아낌없이 내주었고 정이 그리운 것이다.

제일청은 특히 사가정에게 애틋한 정을 느끼고 있으며 제일청이 송도유수 진명원(陳明元)에게 수청을 든 지 한 달이 채 안되었을 때 사가정을 맞았다.

그녀는 몸과 마음까지 열어 사내를 맞이한 것은 사가정이 처음이었고 지금도 헌헌장부에 여자들이 한번 보면 빠져드는 호남이지만

10여년 전 모습에선 광채까지 빛나는 옥골선풍이었고 그 모습에 제일청은 영혼까지 뺐겼으며 춤과 노래가 곁들인 술판의 여름밤은 짧기만 하다.

“이제 돌아가셔서 쉬시지요! 내일 송악산 깊은 곳을 유람하시려면 넉넉한 취침을 하셔야 해요.”

자동선은 영천군과 사가정을 닭쫓듯 내몰았고 지난밤도 낮에 찰나적으로 춤사위로 본 자동선의 앙증맞은 엉덩이와

신비하기까지 해 보이는 음문의 꿈만 꾸다 밤을 샜는데 오늘도 닭 쫓던 개 모양 객사로 내어 몰리자 영천군은 부아가 퉁퉁 부어올랐다.

“사가정, 우리 꼴이 이게 뭔가? 아무래도 한양으로 돌아가야 할 듯하네.”

“영천군 나으리!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자동선 하나를 못품고 한양으로 되돌아가자고요? 그것은 아니 됩니다.”

사가정의 말에는 자신감과 자존감이 섞인 단호한 의지가 담겨 있었고 풍류객의 넉넉함의 모습이다.

송도의 왕기는 이미 사라져 버려서/ 무심한 구름과 잡초만 무성하고/

성은 있어도 사람은 옛사람이 아니니/ 산천은 같아도 사람은 나그네 뿐이네.

사가정의 죽마고우 이승소(李承召)의 시다.

영천군은 천하미색 자동선을 오늘밤은 품으려나 하고 기대가 컸으나 헛물만 켠 자신이 너무나 미웠던 것이다.

무심한 달은 휘영청 밝고 깊은 산속에선 부엉이까지 울어댔으며 여름이지만 새벽공기는 제법 차갑다.

얼큰하게 취한 몸에는 한기까지 들며 재채기에 소름까지 돋았고 이처럼 으스스 할 때는 따뜻한 계집이 더욱 그리우며 두 사내 심정이 지금 딱 그러하다.

“영천군 나으리, 내일은 꼭 자동선의 마음을 잡으셔야 됩니다.”

“어떻게 그 아이의 마음을 잡는다는 거요? 나는 자동선의 속내를 알 수가 없어!” 가슴이 답답하다는 난감한 표정이다.

“장래를 책임지겠다는 징표를 주셔야지요? 천하미색 자동선이 몸을 내어줄 때 청교방의 기생이나 한양의 장악원 아이들을 생각하시면 아니 되십니다.”

영천군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에 검은 구름이 흘러갔고 두 사내의 갈피없는 대화는 어느새 새벽을 맞았다.

어젯밤에 마신 술로 속도 쓰리고 잠까지 설쳐 몸이 천근만근이고 영천군이 더 지쳤다.

“나 잠시 눈을 붙여야겠네.” 영천군이 어찌된 영문인지 금방 코를 골았으며 곧이어 잠꼬대를 하였다.

“야 이년아! 내가 누군데 네 년의 콧대가 얼마나 가나 보자!”

자동선에게 하는 소리 같다. 사가정은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여자의 마음을 너무나 모르는 영천군이 한심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사가정은 밖으로 나왔으며 객사 뒤로 개천이 흐르고 개천에는 며칠 전에 내린 비로 옥수같은 물이 철철 넘쳐흐르고 있다.

부엉이 울음소리에 두견새 소리까지 요란하고 한양 북촌과는 판이한 환경이며 바로 그때 등뒤에서 인기척이 났고 제일청이다.

“나으리, 소첩이 술국을 끓여 놨습니다. 영천군 나으리와 함께 오셔서 드시고 자동선에 가서 송악산 나들이를 떠나시죠!” 알뜰한 배려다.

“고마우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내 너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데...”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첩이 좋아서 하는 것인데 나으리는 개념치마소서.” 제일청의 갑자기 울음 섞인 목소리다.

“왜 무슨 일이 있느냐?” 사가정이 제일청을 품었고 제일청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으며 사가정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영천군이 자동선을 설득하여 한양으로 데려가면 사가정도 따라가면 언제 다시 볼지 몰라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 되어서다.

사가정은 제일청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다.

“내 영천군을 모시고 다니는 친구인지라 올라갔다 곧 다시 내려올 것이니라. 너무 아쉬워하지 말거라.” 사가정이 제일청의 등을 두드려 겨우 진정시켰다.

“주제도 모르고 주책없이 날뛰어 소첩이 밉지요?”

“아니니라. 나는 네가 귀엽고 예쁘기만 하니라.”

제일청은 예쁘고 귀엽다는 말에 마음이 진정되는지 울음을 그쳤으나 속으로 우는지 어깨가 들썩이다 한참 후에 멈추었다.

퇴기에게 귀엽다는 얘기는 결코 칭찬이 될 수 없지만 똑같은 말이라도 누구한테 듣느냐가 중요하다.

지금은 사가정에게 듣는 예쁘고 귀엽다는 말은 제일청에겐 진정으로 하는 말로 들려서다.

날은 암담하고 시간은 더디간다./

좋은 시절 돌아왔으나 옆은 싸늘하다./

향로 연기는 내마음 수심같이 끊길 줄 모른다.

술 한 잔 들고 국화를 바라보는데

바람에 흔들리는 여윈 모습이/

문득 내가 아닌가!/

임은 그리움을 부르고 외로움은 임을 부른다.

이청저의 '안개 엷고 구름 짙은 시름 가득한 긴 오후에'이고 지금 제일청의 마음이 이청조와 닮은 꼴일 것이며 사내들은 같을 것이라 생각하는 제일청이다.

품고 욕정을 채울땐 그들은 입속의 혀라도 빼줄 듯이 말하다가도 떠나면 남이 되는 것이 기방을 찾는 사내들의 속성이다.

제일청은 사가정도 그들 중의 한 사내일 것으로 생각하는 분위기다.

- 18화에서 계속 -

 

이곡동 배실공원에서 
새로 시작하는 연인이 들려보면 좋은 장소
제일 마지막 사진은 쌍간목을 알리는 팻말이고
팻말뒤로 쌍간목 다섯그루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쌍간목이란 나무가 한줄기로 자라나다가
가지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 나무를 말하는데 
힘든 세상을 살아가며 서로 의지하고 손잡고 걸어가는 
연인 또는 부부를 상징하는 나무라고 합니다

풍류야화 자동선(제16화)

 
 
송악산은 아름답고 웅장하기까지 하며 개성을 내려다봄은 장관이고 쌍쌍이 앉았다.

몇 백년 됨직한 소나무 밑에 두 사내 두 여인이 술잔을 나누고 있으며 신선이 따로 없다.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이따금씩 쪽빛 하늘에서 뱃놀이를 하듯 오락가락하며 지루한 여름 한낮을 더욱 여유롭게 만들고 있다.

“영천군 나리, 저렇게 아름다운 개성을 한 폭의 그림으로 그리면 어떠하신지요?”

술잔이 두어 순배 돌자 사가정이 영천군을 바라보며 정적을 깼고 소나무 그늘에서 술잔을 기우리며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남자는 남자대로 신나고 가슴이 뻐근한 생각을 했을 것이며 여자는 여자 취향에 맞는 가슴이 뻥 뚫리는 아름다운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생각들은 말하지 않았고 개성을 내려다보며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이에 사가정이 정적을 깼으며 영천군은 말없이 지필묵을 꺼냈다.

“자동선아! 영천군께서 그림을 그리시니까 너는 거문고 선율에 맞추어 춤을 추거라.”

“거문고가 어디 있나이까?”

“거문고는 내 입안에 있느니라. 어서 거문고 걱정은 말고 춤이나 추거라.”

그런데 문제가 생겼고 속곳 바람의 자동선이 갑자기 불어온 돌개바람에 엉덩이와 계곡의 음문까지 보이고 말았다.

“어머나 이를 어쩌나!”

자동선은 기겁을 하고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고 두 사내는 신나고 즐겁다는 듯이 박장대소를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잠자리에서도 보기 쉽지 않은 진짜 보고 싶고 갖고 놀고 싶은 것을 돌개바람이 알아서 해주었으니 얼마나 기분 좋고 신나는 장면이었을까?

자동선의 엉덩이와 계곡의 음문은 미색(美色)과 재기(才氣) 못지않게 예쁘고 앙증맞았으며 영천군은 벌써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자동선은 오늘따라 팬티를 입지 않았으며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속곳과 치마만 입고 왔다.

그런데 심술궂은 돌개바람이 장난을 치는 소동에 본의 아니게 잠자리에서나 보일 수 있는 비밀스런 곳을 드러냈다.

그런데 두 사내는 비밀스런 두 곳만 본 것이 아니며 다리를 번쩍 드는 찰나에 사타구니 등에 불긋불긋하게 돋아나 있는 땀띠도 보았던 것이다.

사실 자동선도 엊저녁은 꼬박 뜬눈으로 밤을 새워 아침도 설치고 얼떨결에 팬티를 못입고 왔던 것이다.

“어머니(제일청 지칭), 나 이제 어떡해요. 창피해서 그대로 못 있겠어요!”

자동선이 헝클어진 치마의 매무새를 다잡으며 석류알처럼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영천군과 사가정을 쳐다보았다.

송악산 신령한 사당을 찾아보려고/ 꼭대기에 오르니 전망이 놀랍구나./

성안의 집들은 벌떼처럼 촘촘하고/ 오가는 사람들은 개미같이 부산하다.

사가정의 읊음이 끝나자 “그 시가 사가정의 시요?”라고 영천군이 물었다.

“당연하지요. 제 시올시다.”

“아니에요. 사가정 풍류객이 읊은 시는 고려시인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의 시 이옵니다.”

자동선이 방금 전까지 돌개바람의 심술궂은 장난에 엉덩이와 음문까지 드러내 침울해 있다가 시 얘기가 나오자 발랄함을 되찾았다.

“역시 자동선은 미색 못지않게 재기와 시문에도 탁월하구나!” 영천군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동선 칭찬에 열을 올렸다.

자동선의 일거수일투족에 정신이 혼미해진 영천군은 애써 마음의 중심을 찾아 허리에 차고 있던 필낭(筆囊)과 묵두(墨斗)를 꺼내 바위에 놓았다.

이때 영천군은 갑자기 생각난 듯 “화선지가 없지 않느냐?”라며 낭패한 표정을 지었고 자동선이 비단치마 한쪽을 부드득 찢어 바위에 펼쳐 놓았다.

“영천군 나으리, 소녀 치마에다 그림을 그리시죠.”라고 생긋 웃음까지 보이며 말하였다.

두 사내는 다시 한 번 놀란으며 거침없는 자동선의 행동에 경의까지 표시하는 눈치다.

“너는 그렇게 치미를 찢으면 속곳 바람이 아니냐?” 제일청이 되레 백지장 얼굴이 되었다.

“괜찮아요. 어머니! 어차피 엉덩이와 계곡의 음문까지 보였는데 더 숨길게 뭐 있어요?”

자동선은 돌개바람에 엉덩이와 음문이 드러났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대담하기까지 하다.

한 떨기 송악산이 하늘 높이 솟았는데/ 노을 진 옛 성터에 잔 연기가 서린다./

애달프게 옛일은 물어 무삼하리오/ 영화롭던 때와는 경치조차 다른 것을...

사가정의 일기가성(一氣呵成)으로 휘갈겨 쓴 영천군의 그림 찬시(贊詩)다.

자동선의 독촉으로 사가정이 흥에 겨워 단숨에 쓴 절창(絶唱)이며 영천군보다 자동선이 더 좋아한다.

“사가정 풍류선비님! 오늘 저녁과 엊저녁 술값은 아니 받을 것이옵니다.”

“허허 그럼 자동선 너는 이 사가정에게서 술값을 받으려 했었느냐?”

“아니 그게 무슨 해괴한 말씀이신지요? 기생집에 와서 술을 마셨으면 당연히 술값을 내셔야지요! 외상술을 드시려 하셨는지요?”

“그것이 아니고 이 사가정은 술값을 내고 기생집에서 술을 마신 적이 없어 그런다.”

이때 옆에 있던 제일청이 자동선에게 눈짓을 하였고 술값 얘기는 하지 말라는 신호다.

제일청은 사가정의 사내답고 풍부한 해학의 매력에 빠져 맛있는 술과 알뜰히 지킨 몸도 주고 노잣돈까지 두둑이 준 사실을 떠올리는 눈치다.

하지만 자동선이 사가정과 제일청의 하늘과 땅만 아는 비밀스런 과거를 알리 만무하다.

그래도 제일청이 자동선에게 지금처럼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언행을 제지시키기는 처음이라 얼른 말길을 돌려야 했다.

지금까지 제일청의 말을 들어서 일을 그르친 적이 없어서다.

“어느덧 저녁때가 되어 가네요. 집으로 가서 그림 턱을 내겠사오니 어서 하산하시지요.”

자동선은 제일청이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여 대비했던 치마를 입고 자하동 집으로 영천군과 사가정을 안내하였다.

“어머니 고마워요!”

자동선은 제일청의 어느 경우에도 철저한 대비로 위기를 지혜롭게 잘 넘기는 기지에 다시한번 놀란다.

한편 두 사내는 오늘 저녁이야 말로 주지육림의 황홀한 밤을 즐길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 부풀어 발걸음이 가볍다.

- 17화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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