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야화 황진이(제28화) -이끼

풍류야화 황진이(제28화)

 

 

몇 년 만에 극적인 해우로 정염을 불태운 진이와 이생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제 정신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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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으로 새벽달이 들어와서 알몸뚱이 남녀를 감싸고 있으며 접동새 울음이 멀리서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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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풀무질 하고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이생의 손이 진이의 사타구니로 뱀처럼 기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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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도 싫지 않았으며 자기 마음에 드는 사내의 살 내음을 맡은지 얼마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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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에서도 송도에서도 진이가 마음만 먹으면 사내는 굴비를 꿰듯 꿸 수가 있으나 그녀는 화담 서경덕 같은 사내를 찾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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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화담(서경덕 호)은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이 뻔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계속 찾는 걸 포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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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는 순간 진이의 삶은 무의미해지기 때문에 그녀가 존재하는 한 제2의 화담 찾기는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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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면 진이는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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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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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의 집념은 서릿발 같고 숱한 사내들을 품에 안았으나 화담으로 향한 마음은 변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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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면벽 수행의 지족선사를 뜨겁게 품었으나 그녀의 펄펄 끓는 가슴을 식힐 남심(男心)은 아직 찾지 못하고 오늘도 방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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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진이는 전국을 바람처럼 거침없이 마음 가는대로 나도는 남사당을 찾았고 진이의 기질과 딱 맞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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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꾼으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인지 아니면 단원의 한사람으로 참여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을 때 이생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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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정도는 미륵(彌勒)같은 존재일지는 모르나 진이의 마음을 채워줄 영혼의 사내는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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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새벽 운우지락을 한바탕 즐기고 낮 동안은 밤새 뜨거운 살을 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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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허기를 채울 때와는 다르게 뜨악한 분위기로 있다 날이 저물자 다정한 부부모양 남사당패 놀이마당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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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논·밭으로 나가 일하고 해가 서산으로 고개를 숙이자 농부들은 집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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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백 년은 됐을 소나무 밑에 차려진 남사당놀이는 어둠이 깔리자 횃불로 사위를 밝히고 판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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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어름사니 재주에 마음이 쏠렸고 기생이 되기 전에 남사당을 알았다면 어름사니가 되었으리라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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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듯언듯 횃불에 비치는 얼굴이 당차 보였고 자신보다는 어려보이지만 줄 위에서 날렵하게 자유자재로 재주를 부리는 개성 있는 연기에 매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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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어름사니가 부러웠고 몇 년 전에만 이 같은 남사당놀이를 알았다면 기꺼이 입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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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름사니가 되었으리라는 생각에 이르자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에 갑자기 서글픈 마음이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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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그렇게 골돌이 생각하고 보시오? 가서 국밥으로 저녁이나 먹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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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이 잡아끄는 대로 국밥집에 가서 이화주(梨花酒)에 국밥으로 저녁을 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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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으로 온 이생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오뉴월 들소모양 진이에게 달려들었고 한바탕 제멋대로 육체의 허기를 채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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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고 아주 삽시다. 지난번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집에 갔더니 나는 할 일이 없었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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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버지가 싫어 집을 뛰쳐나왔는데 아버지는 나를 버리지 않고 유산을 남기셨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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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산이 만만치 않아 우리 둘이 넉넉히 여생을 즐길 정도야! 그동안 나하고 재미있는 추억이 많았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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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기양양한 이생의 말투였고 진이의 귀에는 이생의 말이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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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평의 쇠처럼 굳은 심지 일찍 알았으니/ 내 본래 잠자리 같이 할 마음 없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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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하룻밤 시 짓고 술 마시는 자리에서/ 풍월을 읊으며 꽃다운 인연을 맺고 싶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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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기생 우돌(于咄)의 '국섬에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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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가 이생이 자기와 평생을 같이 살자는 제의에 갑자기 우돌의 시가 떠올라 사내 손을 버러지인 냥 소스라쳐 떨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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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에게 남자는 화담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몽주가 단심가로 고려 충신으로 영원히 남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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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가 번개처럼 포은(정몽주)의 단심가를 떠올린 것은 이승에선 화담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끝내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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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은 이방원이 '하여가'(何如歌)로 회유했으나 끝까지 버티다 선죽교에서 포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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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건 고려 충신의 마지막 모습이었고 그리하여 포은은 역사에 영원히 역사로 살고 있으며 진이도 그렇게 하려는 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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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답이 없소? 아버지에게 성(姓)은 받지 않았으나 유산을 받아 어차피 불효자로 찍혔으니 진이의 남자로 여생을 살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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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 서방님은 아직도 이 진이의 마음을 모르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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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을 비롯하여 금강산·지리산을 유람하면서 저의 온갖 것을 다 보고서도 더 보고 싶은 것이 남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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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차리세요! 이 진이는 어는 한 남자의 여자로 애초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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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이생에게 말을 퍼붓고 벌떡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입고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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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엔 보석을 뿌려 놓은 듯이 별이 총총하고 몸에선 이생의 정액이 비릿하게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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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할 때 수없이 느꼈던 익숙한 향기 같은 냄새이고 몇 년 전의 일이 어젯밤 정사처럼 또렷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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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피를 못잡아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려는 듯이 진이가 부리나케 남사당놀이 마당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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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꾼들의 요란한 함성과 박수에 신명나는 예쁜 어름사니는 줄 위에서 멋진 곡예를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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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벅저벅 이생도 진이 뒤를 따랐고 남사당놀이는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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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은 아침 해가 붉게 떠오르자 하늘의 자리를 내어주며 서쪽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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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디넓은 하늘의 자리에서 떠나기가 서러운지 붉은 태양이 아침 하늘에 불쑥 솟구치고서야 겨우 자리를 비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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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천상 사내여서인지 보름달이어도 여자는 수줍은 표정으로 하늘자리를 계속 버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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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말로는 이생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으나 마음 한 구석엔 따뜻한 양지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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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 정도면 마음을 터놓고 투정을 부리며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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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세양과 이사종은 넘치고 처졌으며 어쩌면 이생이 자기에게 딱 맞는 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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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자 비몽사몽의 상태에서 화담이 홀연히 나타나 학춤을 추며 힐긋힐긋 진이를 훔쳐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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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화에서 계속 -

[출처] 풍류야화 황진이(제28화)|작성자 청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