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지 | 한국 경주 읍천항
카메라 | 올림푸스 OM-D E-M5 마크2, 초점거리 100mm, 촬영모드 M(매뉴얼)모드, ISO 100, 조리개 F8, 셔터스피드 30초, 벤로 ND1000 필터 사용
●글에서만큼 효과적인
사진의 은유법
바다에 가면 파도가 있다. 사진을 찍기 전까지 파도는 그냥 파도지만 사진을 찍는다면 파도는 그냥 파도가 아니다.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김춘수 시인의 시구처럼 바다에서 어떻게 사진을 찍느냐에 따라 파도는 전혀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주상절리가 유명한 경주 읍천항. 일출 촬영을 위해 찾았던 그날은 파도가 썩 괜찮았다. 태곳적 지구의 신비를 간직한 신묘한 바위들 사이로 끊임없이 들락거림을 반복하는 파도. 문득 해안선에 솟아오른 수많은 바위들이 뾰족뾰족 솟아오른 산봉우리처럼 느껴졌다. 맞아! 정말 조그만 바위들이 아니라 웅장한 산의 모습처럼 보이게 사진을 찍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아이디어를 갖고 삼각대에 카메라를 물렸다. 빠른 셔터스피드보다는 느린 셔터스피드를 써서 파도의 움직임을 잔상으로 표현하면 마치 산 능선에 자욱하게 낀 구름이나 안개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예상을 했기 때문. 그러나 이미 해가 꽤 올라온 시간이었고 맑은 날이었기에 아무리 ISO를 낮추고 조리개를 조여도 셔터스피드가 원하는 만큼 느리게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준비해 간 ND1000 필터를 렌즈 앞에 끼웠다. ND필터는 마치 선글라스를 쓴 것처럼 빛의 세기를 감소시켜 주는 효과가 있다.
그렇게 ND필터를 끼우자 카메라는 마치 밤이 된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되고 비로소 원하는 느린 셔터스피드를 얻을 수 있었다. 셔터스피드를 점점 느리게 하며 촬영하다 마지막에는 30초라는 매뉴얼 모드에서 촬영할 수 있는 가장 느린 셔터스피드를 설정해 보았다. 그랬더니 사진에서처럼 파도가 정말 산에서나 볼 법한 안개나 운해처럼 부드럽게 표현되었다. 30초 동안 왔다갔다 한 파도의 움직임이 반복되면서 눈으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표현된 것. 만약 찰나의 빠른 셔터스피드로 촬영했다면 파도의 포말까지 생생히 담긴 전혀 다른 느낌의 사진이 촬영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느린 셔터스피드로 파도를 촬영하고 나니 조금 어설프긴 하지만 진짜 산 능선에 자욱하게 안개가 흐르는 듯한 모습이 표현되었다. 시공간을 초월한 기분이랄까. 이렇게 촬영한 이 사진에 나는 좀 거창하지만 ‘몽유도원도’란 이름을 붙여 보았다.
●자신만의 창조적 사진을 만드는
셔터스피드의 힘
셔터스피드는 셔터의 막이 열렸다 닫히는 시간을 뜻한다.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셔터스피드는 카메라가 빛을 받아들이는 시간이겠다. 그 시간을 얼마나 주냐에 따라 눈앞에 움직이는 현상은 다양하게 표현된다. 그런데 조리개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생각하면서 셔터스피드에 대해서는 그렇게 세밀하게 고민을 안 하기 마련이다. 특히 조리개 우선모드(A, Av)로 촬영을 할 때 셔터스피드 값을 카메라에게 맡기다 보니 더욱 더 그런 상황이 많이 생기게 된다. 그렇게 셔터스피드를 간과하다 보면 흔들린 사진이 생각보다 훨씬 많이 생긴다거나, 자신만의 창조적인 표현을 하는 데 있어 치명적인 한계가 생긴다.
여행에서 삼각대를 가져갔다면 카메라를 단단히 물리고 느린 셔터스피드로 촬영을 해보자. 느린 셔터스피드의 기준은 상황에 따라 애매하지만 보통 움직임의 잔상을 표현할 수 있는 기준을 1/30초 정도로 잡는데 이보다 느린 셔터스피드로 사진을 찍을 경우, 물체의 움직임은 우리 눈으로 인지하는 것과는 다른 형태로 표현된다.
특히 야경을 촬영할 때 느린 셔터스피드를 이용하면 더 재미난 세계가 펼쳐진다. 자동차 헤드라이트나 라이터의 불빛, 별처럼 발광체인 경우는 셔터를 열어 놓은 시간 동안 고스란히 표현되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것과 달리 궤적으로 표현할 수가 있다. 어두운 밤뿐 아니라 낮에도 장노출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발광체가 아닌 경우, 셔터스피드가 길수록 움직임이 사라진다. 아주 느린 셔터스피드로 촬영하면 움직이는 물체는 잔상으로 표현되거나 사진 속에서 아예 사라지기도 한다.
이 밖에 장노출을 잘 사용하면 가장 좋은 소재는 물이다. 여행지에서 가게 되는 개천이나 강, 폭포, 바다의 파도 등은 장노출로 표현하면 아주 멋진 사진의 소재가 된다. 셔터스피드가 느릴수록 물의 움직임은 부드럽게 표현되며, 30초 이상 장노출을 할 경우 물의 표면이 아예 거울이나 얼음장처럼 표현되기도 한다.
장노출은 이처럼 삼각대와 상황에 맞게 ND필터만 잘 사용한다면 생각보다 굉장히 쉽게 활용할 수 있는 기법이다. 그리고 셔터스피드의 설정에 따라 각기 다르게 표현되는 현상을 통해 자신만의 색깔과 의도를 담을 수 있다. 여행에서 창조적인 사진을 촬영하고 싶다면 꼭 장노출을 시도해 보도록 하자.
▶tip
장노출을 위한 필수품, ND필터
ND는 ‘Neutral Density’의 약자로 ND필터는 렌즈에 들어오는 광량의 밀도를 균등하게 감소시켜 준다. 유리 전면에 선글라스처럼 선팅이 되어 있기에 주간에도 느린 셔터스피드를 확보할 수 있게 해 준다. 벤로, 켄코, 호야, 호루스벤누, 슈나이더 등 다양한 제조사의 제품군이 있으며 가격대도 다양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주로 풍경 촬영에 사용하는 렌즈의 구경에 맞게 구입하는 것이 좋으며 농도를 잘 보고 선택해야 한다.
농도는 통상 ND2부터 시작한다. 2, 4는 그렇게 권장하지 않으며, 5초 미만의 짧은 장노출을 위해서는 ND8, 보다 빛이 강한 상황에 촬영하거나 30초 정도의 장노출을 위해서라면 ND400 정도가 되어야 효과가 강하다. 여명 촬영시 사용할 목적이라면 ND8을, 완연한 주간에 사용할 목적이라면 ND400을 따로 구입하는 게 일반적이다. ND4부터 1000까지 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가변ND필터를 사는 것도 편리하나 가격이 20만원 이상으로 비싸다.
▶tip
장노출시 상황에 맞는 느린 셔터스피드 설정하기
① 자동차의 궤적을 길게 나오게 하고 싶다면?
장노출의 단골 대상은 도심의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궤적이다. 앞으로 오는 차는 하얀 헤드라이트 불빛, 나를 지나쳐 가는 차는 빨간 브레이크등의 움직임이 궤적으로 표현된다. 궤적은 길수록 좋으니 매뉴얼 모드에서 최장 셔터스피드인 30초. 적정노출에 따라 다르겠지만 벌브 모드에서 30초 이상을 줘도 좋다.
② 밤하늘의 별을 잘 찍고 싶다면?
여행에서 도시 야경과 더불어 대표적인 밤의 장노출 사진이라면 별을 찍을 때다. 별은 북반구 기준으로 항상 북극성을 중심으로 동심원 운동을 한다. 30초 이상 셔터스피드를 설정할 경우 그동안 별이 움직이는 궤적이 표현되므로 별 점상 촬영을 할 때는 15~20초 정도의 셔터스피드가 적절하다. 고로 별을 찍을 때 적정노출을 맞추려면 iso를 많이 올릴 수 있는 고감도 카메라나 최대개방조리개값이 밝은 렌즈들을 사용해야 한다.
③ 바닷가의 파도를 부드럽게 표현하고 싶다면?
파도가 좋은 날, 특히 바위가 있는 바닷가에서 파도가 바위를 쳤다가 빠져나가는 순간을 찍으면 물의 흐름이 멋지게 표현된다. 너무 느린 셔터스피드보다는 1~2초, 심지어 그보다 더 빠른 1/10초 정도가 적당하다.
④ 폭포나 계곡의 물줄기를 멋지게 표현하고 싶다면?
주간 장노출의 인기 포인트. 폭포의 떨어지는 물줄기 역시 1~2초 정도면 충분하며 그보다 느린 셔터스피드는 물줄기의 흐름을 망가뜨릴 때가 많다. 간혹 생기는 소용돌이의 움직임을 찍을 때는 더 느린 셔터스피드가 좋다.
⑤ 움직이는 사람의 잔상을 표현하고 싶다면?
인파가 많은 거리에서 휙휙 지나가는 사람의 잔상을 찍으려면 걷는 속도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1/30초 미만부터 움직임이 표현된다. 광각렌즈로 찍는다면 1/10초 정도가 손으로 들고 찍을 수 있는 최대치.
⑥ 패닝이나 틸팅, 주밍샷을 잘 찍고 싶다면?
카메라를 움직이는 물체의 방향으로 움직이며 찍는 패닝,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며 찍는 틸팅, 찍으면서 주밍을 하는 주밍은 움직이는 힘의 표현이 관건. 세 가지 기법 다 1/30초 혹은 그보다 약간 느린 셔터스피드가 적정하다.
⑦ 빗줄기를 눈으로 보는 것처럼 표현하고 싶다면?
비가 내리는 속도에 따라 조금 다르지만 통상 1/100초 전후가 가장 좋다. 너무 빠르면 비가 점처럼 표현된다. 너무 느리면 선은 길게 나오지만 사진이 흔들릴 가능성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