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야화 황진이(제9화)

 
 

진이가 마련한 집은 그림같은 풍광이고 자삼동 동쪽 선죽동 선죽교 이웃에 자리 잡았다.

행랑방이 두 개씩 붙은 솟을대문과 사랑채로 드나드는 샛문을 따로 갖추고

사랑채와 안채와 별채 사이에 담과 중문을 두었으며 사랑채 뒤쪽으론 대숲을 경계로 사당이 모셔졌다.

지체 높은 사대부 집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진이는 이곳에서 손님을 맞는다.

이사종(李士宗)과 계약결혼을 하여 여자노릇을 제대로 해보려는 속내다.

마음에 쏙 드는 사내이니 영혼까지 받쳐 사랑을 불태우려는 것이다.

화대를 받고 몸을 내줄 때는 돈값을 해주어야 하니 억지로 웃고 상대의 성정에 들도록 몸도 움직여 주어야 하지만

내 남자라고 생각한 상대엔 몸과 마음이 기쁨에 넘쳐 영혼까지 콧노래를 부를 수 있어서다.

이사종과는 관아의 기생시절 풋사랑으로 예비꽃잠(첫날밤)이 있었고 그때 진이는 이미 이사종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진이가 이사종에게 넋을 잃은 것은 헌헌장부이기도 하지만 소리에 반했기 때문이며 이사종은 팔도에서 명실 공히 소리를 제일 잘하는 사내다.

몇 십 명이 그와 대결을 청하여도 당당히 응해주었으며 하루 종일도 쉬지 않고 소리를 할 수 있는 풍부한 레퍼토리도 갖고 있었다.

그 소리의 매력에 진이의 영혼이 빨려들었고 그래서 관기시절 잠시 풋사랑을 나누었으나 못다한 사랑을 불태우려 하는 것이다.

그들은 풋사랑을 나누고 헤어질 때 사내는 책임 있는 몸으로 진이는 자유인이 되어 만나자고 약속하였다.

지금 진이는 그 약속을 지키려 하는 것이며 이사종은 선전관(宣傳官)이 되었고 진이는 자유인이 되었다.

계약결혼은 진이가 먼저 제의하였고 이사종은 이게 웬 떡이냐 하고 즉시 승낙을 했을 것이며 사실 이사종은 계획적으로 진이에게 접근하였다.

시·서·화 삼절(三絶)에 가무까지 능통한 진이에게 접근하여 사랑은 물론 기예(技藝)대결도 해보고 싶었던 욕망이 꿈틀댔던 것이다.

그런데 진이가 이사종이 천수원(天壽院)에서 유혹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마침 이곳을 지나던 그녀와 인연이 되어 풋사랑을 나눈 후 극적으로 5년 만에 해후하여 일부종사의 사랑을 하는 계약결혼에 들어갔다.

“내가 당신을 서방으로 우리 집에서 3년간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3년은 서방님 집에 가서 살도록 하렵니다.”

진이의 표정은 절대자에게 맹세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겠다는 단호하면서도

어미 앞에서는 어리광스럽게 순진한 눈망울을 보이는 젖먹이 같이 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 묘한 여인의 얼굴이다.

방금 하늘에서 하강한 선인(仙人)의 모습 그대로였고 화촉동방은 명월관에서 가장 뒤쪽인 선죽교가 빤히 보이는 별채에 차렸다.

이 방을 화촉동방으로 잡으며 아마 정몽주(鄭夢周)의 '단심가'(丹心歌)를 떠올렸을 것이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이 시조는 이방원(李芳遠:후에 태종)이 '하여가'(何如歌)를 부르며 정몽주를 회유했으나 '단심가'로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고려의 충신의 길을 걸었다.

정몽주는 그 후 선죽교에서 타살 당하였고 진이는 그 선죽교를 바라보며 이사종에게 정조(貞操)를 지키리라 마음먹었을 것이다.

이사종은 진이와 풋사랑을 나눈 후 헤어져 한양으로 가 무과에 응시하여 전전관이 되었다.

3년간 전하의 침소 경호에 공로를 인정받아 외직인 풍덕군 군수로 부임하였다.

후원이 내려다보이는 별채엔 남녀의 뜨거운 호흡이 끊이지 않는다.

후원엔 봄꽃들이 만발하였고 산철죽·모란·연산홍·자목련, 그리고 나무로는 매화·동백·복사꽃·살구꽃 등이 흐드러지게 되었다.

진이는 특히 연산홍과 매화꽃을 사랑하였고 지금 진이는 이사종과 뜨거운 살을 섞으면서도 창문너머 후원의 꽃들을 연상하고 있다.

이사종의 뜨거운 호흡이 가파르게 치솟았고 진이의 두 팔이 이사종의 등을 끌어안고 그 가파른 흥분을 동시에 타고 올라갔다.

“너무 보고 싶었소! 내 영혼은 항상 당신 곁에 있었소!”

진이는 이사종의 입술과 뺨에 두 눈과 입술을 맞추었고 이사종은 급히 진이를 눕히고 속바지를 벗겼으며 진이는 스스로 저고리 고름과 가슴띠를 풀었다.

봄날의 환한 햇살 속에서 뼈를 녹이는 사랑을 나눈 두 사람은 알몸인 채 까슬까슬한 홑이불을 감고 아랫도리가 얼얼한 채 두 손을 꼭 잡고 이야기꽃을 피워나갔다.

“내가 왜 풍덕군수가 된지 알겠소?”

이사종이 진이의 불두덩에 손을 얹으며 말하였다.

“글쎄요! 사내대장부 속내를 어찌 계집이 짐작하겠어요? 더욱이 한양에 계신 서방님의 속내를 머나먼 송동의 진이가 어찌 상상이나 하겠어요!”

진이의 반응은 의외로 신통치 않았다.

“나는 한양에 몸이 있으나 한시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소이다. 한양에 올라가 나는 장가를 들어 아들이 세 살이나 되었소.”

"그만하세요. 진이는 이사종 개인을 원할 뿐 그 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6년 동안은 저만 사랑해 주세요. 3년은 저의 집에서 살고 3년은 한양 서방님 집에서 살고 저는 다시 송도로 내려옵니다.“

이사종이 풍덕 관아로 들어가잔 말을 사전에 막기 위해 6년 후의 계획까지 말하여 버렸다.

사내들은 진이와 뜨거운 살을 섞고 난 후엔 예외 없이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한다.

이사종도 풍덕 관아로 들어오란 말을 할 것이 명약관화해서다.

“저는 관아에서 통제하는 관기가 아니에요! 저는 서방님이 저를 다시 찾아오리라 믿고 자유인이 되었어요. 기적에서 나온 지 벌써 3년이 지났어요.”

진이가 아사종의 엉덩이를 다시 끌어 당겼다.

진이가 영업은 하지 않고 이사종에 빠져있자 옥섬이모가 몸이 달았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놔야 자신과 같은 꼴이 되지 않는데 사내에 빠져 정신을 못차리고 있어 걱정이 태산이다.

옥섬은 퇴기로 청교방거리 뒷방에서 장죽에 담배를 피우며 죽을 날만 기다리다 현학금과의 의동생 신분으로

진이를 만나서 생기를 되찾아 살만한데 이 시간이 짧아질까 노심초사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이의 생각은 다르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 예고 가는고

그랬다. 진이도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유인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려한다.

외화내빈의 몸을 파는 기생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생각이며 진이는 한양으로 가기 전에 송도팔경을 보려한다.

등하불명이라 했듯이 진이는 송도에 살면서 송도팔경 중 단 한곳도 보지 못하여 소리꾼 이사종을 데리고 구경에 나서는 것이다.

태상주를 마시며 천하의 절창 이사종의 노래를 들으며 송도 절경을 구경하면 진이는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적선(謫仙:인간 세상에 귀양 온 신선)이 되려는 욕망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딸을 돌보듯 자신을 보살피는 옥섬이모의 걱정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 10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황진이(제8화)

 
 

주지스님의 정성어린 보살핌과 간곡한 기도로 진이는 기적적으로 다시 세상을 보게 되었다.

실상암에 들어온 지 보름이 지난 깊은 밤이었고 그날도 주지스님은 대웅전에서 진이를 위해 기도를 하고 있었으며 산사는 바람 한 점 없는 물속처럼 조용하다.

이때 조용했던 산사에 눈보라가 몰아쳤고 갑작스런 바람에 나무 위에서 눈꽃을 피웠던 눈들이 바람에 떨어지면서 눈바람이 산사를 삼켜 버릴 듯 요란하다.

여명이 보이려면 한참은 더 있어야 할 즈음이고 대웅전에 있던 주지스님이 마당으로 나와 기도를 하고 있었다.

이같이 소란스런 광경을 몸소 느끼려고 진이가 방에서 나오는 순간 하늘에선 천둥번개가 작렬하였다.

이 광경을 보려고 희미한 눈을 부비다 진이는 다시 세상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세상이 보인다. 세상이 보여!”

진이는 기도하는 주지스님의 품을 파고들었으며 스님은 이미 알고 있었듯이 진이를 깊고 따뜻하게 품었다.

“이제 날이 밝으면 암자를 떠나가시오!”

주지스님이 말을 남기고 품었던 진이를 풀어놓고 다시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진이와 덕구는 먼동이 트자 암자에서 내려와 한학금의 의동생 퇴기 옥섬의 집으로 갔으며 옥섬의 집은 청루가 즐비한 청교방 거리에 있다.

현학금이 진이를 황진사에게 주고 어디론가 종적을 감춘 후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옥섬은 청교방 거리에 자그마한 집을 얻어 거처하고 있다.

방이 셋인데 하나는 늘 정갈하게 정돈하여 비워두었고 진이가 언제든지 오면 마음 놓고 편히 쉴 수 있게 해둔 방이다.

“옥섬이모, 진이가 왔어요!”

진이가 올 줄 알았다는 옥섬은 덤덤하였고 해는 어느새 중천에 떴다.

“시장하겠다. 아침도 못 먹었을 텐데 밥부터 먹어라!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시래기 국에 감자가 섞인보리밥이었고 숟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진이가 입을 열었다.

“이모, 진이가 전우치(田禹治)를 봤어요. 제가 천둥번개가 작렬하게 칠 때 가슴이 떨리고 무서운데도

세상을 보고 싶어 희미한 눈을 부빌 때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동시에 하늘에서 백마 탄 옥골선풍의 선비가 저에게

‘진이야, 이제 너는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말하고 사라졌어요.

그가 전우치가 아니고서야 그 밤에 어떻게 그곳에 올 수가 있겠어요? 소문으로 들은 전우치와 똑 같았어요! 이모.“

진이의 눈에는 지금도 실상암 앞에서의 비몽사몽 장면이 선명하다.

당시 전우치의 도술(道術) 얘기는 송도에서는 흔한 애기였고 특히 재령군수 박광우(朴光佑)는 전우치와 친구사이였다.

도술은 혹세무민하다 하여 금기시 되었고 전우치도 도술을 부린다하여 경계당한 인물이며 나라에서 사형명령이 떨어진 상태다.

중중(中宗:1506~1544)시대 전우치는 친구인 박광우 집에서 목매 자살하였다.

그런데 몇 년 뒤 누군가 박광우를 찾아와 전우치의 지팡이를 달라기에 그를 쳐다보니 전우치였다는 것이다.

또한 서경덕 형제들과 도술 경쟁 등의 애기들이 송도엔 낯설지 않은 화젯거리다.

진이도 아버지 황진사 집에 있을 때 사랑채와 어머니 신씨 등에 오가는 얘기들은 귀동냥하여 생소하지 않았는데 실상암에서 극적으로 비몽사몽 상태에서 봤던 것이다.

천재 진이로선 전우치의 얘기들이 낯설거나 의문투성이도 아니었고 아버지 서재의 각종 서책에서 도사(道士)들의 얘기를 수없이 접해 익히 알고 있었다.

진이의 기생 입문은 속전속결이었고 동기(童妓)로 시작하여 2년 사이에 송도와 한양의 한량들이 품고 싶은 미색(美色)에 올랐다.

진이가 열여덟살을 맞는 어느 봄날 고을 유수에게 수청을 들게 되었고 본인 진이보다 현학금의 의동생인 옥섬이 더 긴장하였다.

고을 유수의 수청을 잘 들어 좋은 점수를 얻어야 관기(官妓)의 운명도 좋기 때문이다.

진이도 예외가 아니었고 사대부집 딸에서 어느 날 갑자기 서녀가 되어 마침내 기녀(妓女)가 되었으니 한량들 세상의 관심의 여인이 되었다.

고을 수령이 동기들의 초야권을 갖는 것은 이상 할 것도 없으며 진이의 초야권도 그렇게 송도 유수가 태상주(太常酒) 한 잔 마시듯 어느 날 차지하였다.

진이의 기녀생활 삼년 만에 기적에서 나와 자유인으로 한량들의 세계를 주름잡았다.

진이 앞에 한량들의 부나비처럼 몰려들었고 비록 몸을 파는 기생이나 마음에 드는 사내도 있으며 소위 순정이란 것이 있는 것이다.

돈(花代)을 주고 진이의 몸은 샀으나 영혼까지 살 수는 없어서이기 때문이다.

숱한 사내들이 진이의 몸뚱이를 사서 육체의 향락을 즐겼으나 시·서·화의 삼절(三絶)을 넘어 노래와 춤, 기예(技藝)까지 능통한 영혼까지 사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 사내가 진이의 영혼을 사로잡았고 바로 이사종(李士宗)이며 그는 부도 명예도 없는 소리꾼 낭만파 소위 집시(Gipsy)다.

그 청년에게 진이의 영혼이 넋을 빼앗겼고 이사종은 어느 고관대작의 서자(庶子)이며 조선의 대표적 옥골선풍에 소리를 잘하는 떠돌이 인생이다.

그런데 그가 같은 서자 출신인 삼당시인 이달(李達)과 둘도 없는 사이다.

이달은 허엽의 아들 허봉과 가까운 사이이며 허엽은 후에 진이와 같이 서경덕의 동문수학 관계다.

아무튼 이사종은 진이와 영혼이 통해 명월의 집에서 무상으로 먹고 자는 유일한 사내가 되었다.

손님이 없을 땐 그들은 밤을 새는 신혼부부로 자연스럽게 뜨거운 밤으로 갔으며 옥섬은 걱정이 태산이다.

기생 나이 열여덟이면 절정의 꽃같은 시절인데 자칫 무일푼의 떠돌이에게 정신이 팔려 좋은 시절 다 보내고

자신과 같은 신세가 될까 눈앞이 캄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 사내들과 살을 섞을 때면 진이는 옥섬의 말을 잊지 않았다.

“네가 뜨거워져야 사내들도 뜨거워진다?”를 실천하여 비록 화대를 받고 몸을 내어 주었지만 제 남자처럼 사랑스런 여인이 되려하는 것이다.

조선판 '소녀경'(素女經)이나 '현묘경'(玄妙經)이 되어 남녀칠세부동석이 아닌 남녀동등사회의 선구자가 되려는 의지다.

지금은 생사조차 알 길이 없는 어머니 현학금이 열여덟에 거문고의 명인이 되었는데 진이 역시 같은 나이에 그 반열에 올랐다.

진이는 남녀관계를 뛰어넘어 학문의 세계까지 섭렵하여 누구와도 밀리지 않는 역할을 하였고 고려의 핏줄을 이어받은 진이는 항상 길재(吉再)의 시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고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를 되새기며 미래를 꾸몄다.

- 9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황진이(제7화)

 
 

추풍낙엽처럼 진이의 신분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고 사대부집 딸에서 서녀(庶女)가 되었다. 

“너는 다리 밑에서 주어온 계집애야!”로 놀려대던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기생의 어미에서 태어나 그동안 사대부집에 들어와 호의호식하며 컸으니 이제 제자리인 서녀로 돌아가라는 것이며 발단은 이러하다. 

지체높은 사대부집에서 청혼이 들어왔는데 그 자리를 동생인 난이한테 양보하라며 출생의 비밀을 털어놨다. 

서녀가 어떻게 사대부집 옥골선풍의 총각의 신부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며 그때서야 진이도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되었다. 

집을 나온 진이는 하늘아래 천애고아 신세이고 게다가 진이는 갑작스런 충격으로

앞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였고 뿌옇게 안개가 끼여 상하좌우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진이는 직감으로 경이 오빠와 동생 난이와 자주 찾았던 실상암쪽을 향하여 걷기 시작했는데 누군가 뒤에서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성숙한 처녀의 몸으로 아침 일찍 집에서 나온 진이는 해질 무렵 실상암에 도착하였고 주지는 어떻게 알았는지 진이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뒤따라온 발자국의 주인공은 실상암까지 따라왔고 뒤따라오던 주인공은 황진사집을 드나들며 살림살이를 사 나르던 저잣거리 총각 덕구(德玖·가명)였다. 

그는 비록 사농공상(士農工商)중 상에도 들지 못하는 천민이지만 허우대는 사대부도 부러워 할 헌헌장부다. 

진이도 사춘기가 지난 여자로서 사내를 볼 줄 아는 나이가 되자 그가 집안에 오갈 때면 그의 시선이 덕구의 가슴에 머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진이가 사대부집 딸에서 서녀로 신분이 바뀌어 집을 내쫓기다시피 하여 나서는 길에 그가 따라온 것이다. 

대문을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여섯 발자국 뒤에서 따라붙기 시작하여 실상암 관음굴 앞에 도착할 때까지 말 한마디 없이 두 사람은 걸었다. 

짧은 가을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너는 집에 돌아가지 않고 나를 계속 따라오면 어쩌자는 거냐?” 

“아씨, 아씨를 혼자 두고 제가 어떻게 그냥 돌아갈 수 있겠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왜 내 걱정을 하느냐! 어서 당장 돌아가거라.” 

묵묵부답이고 진이는 대답이 없자 뒤를 돌아봤으며  사내는 덕구로 대답대신 계속 걸어와 진이의 눈앞에 와 섰다. 

“돌아가지 않고 내 말이 말 같지 않게 들리느냐?” 

“아씨 제가 돌아가도 될까요?” 

둘이 옥신각신하고 있는 사이에 어떻게 알았는지 주지스님이 나왔다. 

현암(玄岩) 주지는 비몽사몽간에 황진사가 나타나 밖에 좀 나가보게 하고 사라져 밖으로 나와보니 진이와 덕구가 입씨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실상암은 사월초파일 등에 황진사가 넉넉한 시주를 하여 인연이 돈독한 관계다. 

“젊은이들은 날이 저물었으니 안으로 들어가 쉬게나. 지금 다시 마을로 돌아가긴 너무 늦었어!

해가 지면 여긴 맹수들이 날뛰어 여간 위험하지 않아.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게.” 

현암 주지스님은 둘을 떠밀다시피 하여 안으로 들여보냈고 점심도 거른 그들은 주지스님이 준 저녁밥을 맞바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아직 어둠이 깔리지 않았는데 벌서 관음굴 쪽에서 부엉이가 울었고 부엉이 울음소리 사이엔 간간이 늑대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산사의 밤이고 진이는 산사의 자신이 믿어지지 않았으며 꿈속을 헤메고 있는 것 같았다.

손으로 두 뺨을 꼬집어 보았으나 분명한 현실이고 이때 맞은편에 앉아있던 덕구가 말했다.

“아씨, 이 덕구는 문밖에서 잘 터이니 아씨는 편히 주무세요”라고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아니다. 밤 바람이 차니라! 이곳에서 너도 자려무나...” 

다 자란 남녀가 한방에서 잘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진이는 즉흥적으로 한 말이다. 

“아니 될 말이예요! 이 방에선 진이 아씨 혼자 주무시고 소승도 대웅전에서 자렵니다.” 

산사의 좁은 공간에서 젊은 남녀의 잠자리를 정리해 주고 주지스님은 대웅전으로 갔다. 

사실 덕구도 진이 말대로 못이기는 척 같은 방에서 자고싶지만 자신이 한 말도 있고 주지스님도 자리를 비워주며

진이 혼자 조용히 편안하게 잘 분위기를 만들어주는데 덕구도 마음과는 다르게 밖으로 나왔으며 밤하늘엔 별들이 총총하다.

밤바람에 거목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이름 모를 산짐승들의 울음소리처럼 들렸으며 덕구가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고 소름까지 끼쳤다. 

밤바람이 제법 차갑고 밤이 깊어지자 오슬오슬 추위에도 덕구는 소르르 잠이 왔으며 잠이 들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눈이 자꾸 감겼다. 

진이를 지키려는 뜨거운 마음에서 산사까지 따라왔는데 산짐승들이 울어대는 깊은 밤에 잠이 들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밀물처럼 밀려드는 좋음엔 속수무책이고 어느 때쯤인가 덕구의 어깨에 무거운 짐처럼 눌려옴을 느꼈다. 

“누구얏!” 

소리치며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났고 덕구는 순간적으로 산짐승이 자신을 덮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던 것이다. 

“나다. 잠이 안와서 밤하늘의 별이라도 보고 있으려고 나왔느니라!” 

덕구의 어깨에 몸을 의탁했는데 놀라 단발마를 토해냈고 덕구는 가슴이 뛰고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사내가 그만한 일에 그렇게 화들짝 놀래서야?” 

진이가 다시 덕구의 어깨에 몸을 의탁하였고 덕구의 코에 진이 한테서 풍겨나오는 신비스런 향기에 넋을 잃을 지경이다. 

덕구의 고함소리에 주지스님도 대웅전에서 나왔고 진이를 가운데로 덕구는 왼쪽에 주지스님은 오른쪽에 앉았다. 

“이곳은 가을이지만 곧 초겨울이 됩니다. 산사의 암자가 협소하고 불편하시더라도 참고 견디세요! 며칠을 지내보면 곧 적응이 될 겁니다.” 

주지스님은 다시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진이아씨, 아씨도 방으로 들어가셔서 주무세요. 밤이 깊었습니다.” 

덕구는 진이를 떠밀다시피 하여 방으로 들여보냈고진이는 덕구의 손이 옆구리에 닫자 순간적으로 가슴이 뛰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덕구도 역시 옷 속이지만 말랑한 진이의 살이 손에 느껴오자 정신이 혼미해지고 밀려왔던 잠이 은하수 밖으로 도망갔다. 

진이도 방으로 들어갔으나 쿵쾅거리는 가슴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지 못하였다. 

문밖 덕구도 대웅전 앞을 서성대며 밤을 샜고 그들은 지금껏 평소의 진이와 덕구가 아님을 동시에 느꼈다. 

- 8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황진이(제6화)

 

천재는 세상에 쉽게 나오려하지 않았고 임신 소식을 우서(羽書·서찰)로 황진사에게 알리자 얼굴이 백짓장 같이 질려왔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장님 기생을 건드려 임신 시켰다는 소문이 퍼지면 아직 출사도 제대로 못하였는데 출세 길이 영영 막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황진사는 오자마자 낙태를 권하였지만 현학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황진사는 겁쟁이에다 철부지였다.

현학금은 황진사가 돌아간 후부터 초승달이 뜨면 추렴을 걷고 섬돌에 내려앉아 그리운 님을 생각하며 깊은 상념에 빠지고는 하였다.

그녀의 폭넓은 학문의 세계로 아마도 당(唐)의 이단(李端)의 '초승달에 절함'을 떠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주렴을 걷고 초승달을 보고는/ 섬돌에 내려 다소곳이 절하나니/

속삭이는 하소연은 아무도 못 듣는데/ 북쪽 바람이 치마 띠를 휘날린다.’의 분위기와 너무나 흡사하다.

조선에 당나라 시를 그들의 수준만큼 이해하고 쓰는 소위 삼당시인(三唐詩人:백광훈·최경창·이달)을 존경의 시선으로 볼 정도이니

당시 시문학이 차지하는 문화예술 수준이 어느 정도였다는 것이 짐작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사실 왕조시대엔 규방(閨房) 문화는 기를 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으나 상대적으로 기방(妓房) 문화는 극소수이지만 힘차게 맥을 이어왔다.

현학금은 보통 기생이 아니었고 요즘말로 하면 예술가였지만 그녀도 여자였다.

임신을 하고는 엄마가 될 준비에 들어갔고 황진사와 뼈를 녹인 애틋한 순간에 매몰되어 있을 시간이 없었으며 배는 하루가 다르게 불러왔다.

가려야 할 음식을 경계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의남초(宜男草:허리에 차면 아들을 낳는다는 약초)를 허리에 차는 일도 빠뜨리지 않았다.

배는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는데 출산할 장소가 문제였지만 거문고를 타고 노래 부르는 것은 복대를 두르고도 출산 며칠 전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현학금의 옆에는 친정 동생과 의동생 옥섬이 그림자처럼 있었고 해산달이 다가오면서 걱정이 현실로 밀려왔다.

출산 며칠 전까지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른 것은 유수와 아전들에게 뇌물을 써 입을 막으려는 술책이었다.

그렇게 하여 몇 주간의 출산휴가를 얻어 박연폭포를 거슬러 올라 실상암 관음굴로 숨어들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출산을 하려는 의도였지만 아이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사흘 밤낮의 산통을 하면서도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고 양수도 터지지 않을 뿐 아니라 자궁은 오히려 체면을 지키려는 듯이 조개모양 더욱 오그라들었다.

현학금은 파죽음이 되어 갔으며 친정 동생과 의동생 옥섬을 본인보다 더 앉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이다.

이때도 현학금은 마음속으로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잊지 않았다.

몸은 고달프나 곧 나올 새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출산의 고통으로 인해 잃지 않으려는 치열한 자기 체면이다.

미인이 환하고 환하여/ 얼굴이 능소화 같구나./ 운명이지 운명이로다./ 천시(天詩)를 만나 태어났건만/ 아무도 나를 아리땁다 하지 않는구나.

조(趙)나라 무령왕의 꿈에서 처녀가 거문고 타는 모습의 장면을 연상한 맹요의 '열녀전'을 애기하는 것일 게다.

비록 지독한 산통으로 정신을 잃을 아찔한 찰나에까지 이르렀으나 중국의 신화 '산해경'의 애기들을 계속 떠 올렸다.

그같이 극락과 연옥을 오가며 뱃속의 아기와 씨름을 하는데 새벽 종소리에 놀란 듯 놀랍게도 지궁이 열리며 툭하고 어미를 떠났다.

박연폭포처럼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리며 세상에 신고를 하였고 진이의 탄생은 관음굴에서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날 밤 현학금은 아이를 안고 동생을 따라 관가로 가지 않고 집으로 갔다.

그의 집은 사대부 가문은 아니었으나 중인(中人)의 악사집으로 체면을 중시하고 분수를 아는 집안이었다.

고려때부터 대대로 이어지는 악사(樂士)집안으로 예인(藝人)의 DNA가 전통이다.

현학금이 비록 군왕(郡王)을 잘못 만나 비장의 결의로 장님이 되는 비극적인 운명이 되었으나 자존심은 어느 누구보다 강하다.

현학금이 기녀신분이나 사대부 못지 않은 문화예술세계를 가졌으며 그 같은 시가(詩歌)의 재능은 진이한테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황진사는 출산 며칠 후 현학금 앞에 나타났고 진이를 데려다 조강지처가 낳은 딸로 키우려는 속내다.

진이의 탄생을 본가 동생과 의동생, 그리고 유수와 몇몇 아전들만 알 뿐 세상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맹인의 딸로 키우려는 것이냐? 내가 네가 원하는 딸 이상으로 데려다 키울 것이다.“

한량 아진의 아버지 진정성에 현학금도 계속 버티지 못하고 진이를 품에서 내어주었다.

진이는 보쌈하듯 칠흑같은 어둠에 황진사 집으로 옮겨졌고 조강지처 신씨품에 안겨 친딸처럼 쑥쑥 컸다.

진이를 황진사에게 넘긴 이튿날 현학금은 거문고를 메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말만 듣던 금강산을 직접보고 몸소 체험하고 싶은 것이며 일만 이천봉 퍌만구암자 골짜기마다 거문고 소리에 맞춰 신명나는 유람을 하려는 속내다.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야 핏덩이를 떼어놓고 떠나는 간장을 녹이는 어미 마음이 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며 금강산은 아름답고 실로 경이롭다.

진이는 현학금의 생각대로 총명하고 아름답게 성장해 주었다.

배다른 동생 난(蘭)이도 “언니 언니”하며 잘 따랐고 두 살 위 오빠 경(敬)이 역시 배다른 동생 티 안내고 슬기롭게 처신하였다.

누가 봐도 의좋은 삼남매였고 황진사와 조강지처 신씨도 그같이 의좋은 삼남매 생활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진이의 행복은 거기까지였고 키워준 어머니 신씨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진이의 신분이 사대부집 딸에서 서녀로 둔갑되었던 것이다.

맹인 몸에서 출생했으나 범상치 않은 미색(美色)에 영리하기 까지 한 진이에게 천성이 착한 신씨는 배 아파 낳은 자식과 차별없이 키웠다.

경이와 난이와는 다르게 자고 깨면 아버지 서재에 들어가 책을 읽는 모습에 겉으론 드너내지 않으나 속으론 키운 보람이 있구나 생각하였다.

진이도 철석같이 신씨가 친엄마로 알고 15년을 살아왔으며 그러던 어느 날 청천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소실로 들어가라는 아버지 황진사의 권고를 뿌리치고 집을 나섰다.

“아버지 소녀 집을 나가겠습니다.”

진이는 큰절을 넙죽하고 입던 차림 그대로 집을 나와 기생의 길로 들어갈 결심을 굳혔고 자유인이 되려하는 첫걸음이다.

- 7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황진이(제5화)

 
 

동쪽 동인문밖 물가에서 거문고를 타면 아득히 먼 중국의 장강(長江·양자강의 본명) 이남에서 흑학들이 떼 지어 날아와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 춤을 주었다.

현악금(玄鶴琴)이 거문고를 타면 학들이 날아와 춤을 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진이의 모친인 진(陳) 현학금의 이름에 대한 유례다.

현학금은 열한 살에 기적에 올라 비파와 가야금을 거쳐 거문고에 빼어난 기량을 보여 열다섯 살에 악사(樂士) 기생으로 자리를 잡았다.

현학금은 이때부터 어디를 가든 자신보다 훨씬 큰 거문고를 가로로 메고 다녔다.

현학금의 열아홉 살 단풍이 풍악산(금강산 가을 山名)에 곱게 물든 가을 어느 날이었다.

1504년 연산군(燕山君:1476~1506)의 집권 10년이 되는 해다.

처음엔 성군의 자질을 보였으나 친어머니(폐비 尹氏)의 참극을 안 후 그는 폭군이 되었다.

국정은 팽개치고 원수 갚기와 계집질로 세월을 보냈으며 홍문관을 없애고 정치 논쟁을 금하기 위해 경연(經筵)을 폐지했다.

조선 불교의 산실인 원각사(圓覺寺)는 장악원(掌樂院)으로 바꾸어 기생들의 교육장으로 바꾸었다.

한양에서 마음에 드는 미녀가 모자라자 전국으로 채홍준체찰사라는 대신과 채홍준사와 채청사라는 급조된 관리들이 송도에까지 내려왔다.

그때 송도 관아엔 현학금도 있었고 빼어난 미모의 현학금도 여러 미녀들과 새로 설치된 운평에 갇힌 채 자색을 평가 받았다.

현학금은 뛰어난 절색에 거문고의 기예까지 갖추어 최고 점수인 천과흥청이 되었다.

천과흥청과 지과흥청의 미녀는 대궐에 들어가 임금의 성은을 입으며 임금의 특명이었으므로 고을의 유수조차 미처 손 쓸 겨를이 없었다.

현학금은 경악하였고 악사기녀로서 은밀하게 자존심을 지켜왔는데 그 자존심이 일순간에 무너짐을 느꼈다.

곰곰이 생각끝에 의동생 기생 옥섬에게 비상약을 짓게 하였고 단호한 현학금의 부탁에 옥섬도 거부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약을 먹은 현학금은 하룻밤 사이에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으로 변하였고 채홍준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연산군의 마음에 쏙 드는 미녀를 뽑아오면 특별진급이나 두둑한 상금이 걸려있어 현학금이 딱 마음에 들었는데 그만 낭패가 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의원을 불러 검사를 해봤으나 장님이 틀림없다는 결론이다.

그들은 현학금의 두 눈을 뒤집어 보기까지 했으며 채홍준사는 현학금을 체념하고 기적에서 빼내주어 운평에서 나와 집으로 왔다.

현학금은 채홍준사와 채청사들이 한양으로 올라간 후 금강산에 몸을 의탁하였다.

약을 먹고 억지 장님이 되어 이 골짜기 저 골짜기 사찰로 다니며 걸식을 하면서도 거문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그렇게 걸인 악사로 봄엔 금강산, 여름엔 봉래산, 가을엔 풍악산, 겨울엔 개골산 등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6년의 세월을 보냈다.

현학금의 거문고 연주는 신기(神技)에 이르렀고 그녀는 장님 악사로 소문이 퍼져 관아의 연회 때마다 단골로 초대되었다.

현학금이 초대되었다는 연회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모여든 사람들은 현학금의 천상의 거문고 음률에 세상시름을 실어 보내 홧병을 앓던 사람이 낫고

무릎이 내려앉은 앉은뱅이는 걸어서 집으로 가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소문은 소문을 낳고 현학금의 거문고 기적은 송도의 일상사가 되었고 그러던 어느 봄날이다.

“현학금 언니, 집에 있으면 뭐해! 병부교에 나가서 바람이나 쐬지...”

현학금은 이웃 악가들의 성화에 못이겨 병부교 빨래터에 나갔고 그날도 현학금은 천상의 음률로 거문고를 탔으며 고단한 아낙들의 세상시름을 덜어주기 위함이다.

현학금이 비록 앞을 보지 못할 뿐 마음속으로 천상의 음률에 서경덕이 평생 흠모한 송(宋)의 시인 소옹(邵雍)의 '수미음'(首尾吟)의 일부를 실어 보내고 있다.

그녀는 하늘의 침묵을 대변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요부는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요부가 사랑할 수 있을 때/ 이미 마음을 쓸 때는 마음을 쓰고/ 말을 가하지 않은 곳엔 말을 가한다./

사물엔 모두 이치가 있는데 나는 무엇인가/ 하늘이 말하지 않으니 사람이 그것을 대신한다./

자연 조화의 무한한 말을 대신하는 것이니/ 요부는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현학금은 눈만 보이지 않을 뿐 눈을 뜨고 삼라만상을 보는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눈으로 보지 못하는 세상사를 탁월한 감수성의 발달로 범인들의 수준을 뛰어 넘었고 게다가 천상의 음률을 타는 거문고의 명인에 절세미인이었다.

이때 마침 이곳을 지나는 한량이 있었으며 황진사(黃進士)였고 그의 눈에 현학금이 들어왔다.

황진사는 이미 현학금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송도가 넓다고 하지만 저잣거리에서 나도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금방 전 송도로 퍼져 나갔다.

병부교(兵部橋) 아래의 빨래터 아낙들의 입방아에 올라오면 그 소문은 바로 송도의 화젯거리가 되었고현학금의 거문고 소문을 황진사가 모를리 없다.

아낙들의 성화에 현학금은 천상의 음률을 관아의 연회가 아니면 타지 않는 연주를 하기도 하였다.

오늘도 현학금은 아낙들의 성화에 떠밀려 병부교 빨래터에 나와 거문고를 탔던 것이다.

현학금의 천상의 거문고 음률에 빨려들었고 청춘남녀가 만나면 서로의 콤플렉스에 빠진다.

황진사와 현학금도 그러했을 것이며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으라 했으니 그들도 예외없이 사랑의 만리장성을 쌓았을 게다.

그때 현학금은 사랑의 만리장성을 쌓고 임신하여 조선 제일의 여류시인이며 송도삼절의 하나인 황진이를 낳는 어머니가 되었다.

그들은 이 시(詩)를 떠올렸을 것이다.

가시리 가시리 잇고

버리고 가시리 잇고 위 증즐가 태평성대

날러든 어이 살라하고

버리고 가시리 잇고 위 증즐가 태평성대

잡사와 두어리 마는

선하면 아니 올세라 위 증즐가 태평성대

설온님 보내옵나니

가시는 듯 돌아오소서 위 증즐가 태평성대

고려가요 '가시리'다.

황진사와 현학금이 뜨겁게 사랑을 나누고 헤어질 때 '가시리'의 내용과 별 온도차이가 없을 심정이었을 것이다.

- 6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황진이(제4화)

 
 

양곡은 젊은 시절에 여색에 빠진 자는 남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명월이 시재(詩才)와 미모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친구들과 약속을 하였다.

“내가 그 여자와 30일을 동숙(同宿)하고 이별을 못하고 하루라도 더 머물면 사람이 아니다.”

양곡이 친구들과 약속을 하였으나 그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했는데 사대부의 나라에서 친구들에게 한 약속을 선비가 지키지 않았다.

그것도 천재지변이나 연로한 부모의 갑작스런 병고나 몸담고 있는 벼슬길에서 왕명도 아닌

한낱 노류장화(路柳墻花)인 기생으로 사내대장부가 친구들과 한 약속을 헌신짝처럼 팽개쳤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벌어진 사건이고 동네 청년들이 이웃집 예쁜 아가씨를 놓고 한 약속이 아니다.

당시 송도 명월의 소문이 한양에까지 퍼져 한량들의 마음이 온통 들떠 있을 때였다.

고려를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 넣고 조선을 세운 신흥 사대부들은 체면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국교(國敎)로 대대로 이어오던 불교를 과감히 유교(儒敎)로 교체했다.

남녀칠세부동석과 삼종지덕(三從之德)등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인격체로 규정하여

사회적 제약을 법적(종모법 從母法)으로 또는 도덕적 올가미를 씌워 놓았다.

세계사적으로도 여성의 사회활동은 상당히 제한적이었으나 조선은 그 정도가 특히 더 하였다.

그런 역사 속에서 잘 나가는 사대부 양곡이 일개 기생인 명월에게 빠져 ‘남아일언중천금’이란 세상에서 일탈하여 약속을 어겼다.

사대부의 나라 조선도 허리 밑에는 별수 없이 약했을 터지만 지체높은 양곡이 진이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허리 밑도 봄꽃처럼 피어나는 즐거움도 기쁨이지만 바다같고 만리장성같은 문화예술 세계에 탄복했을 것이다.

이웃인 일본은 사무라이의 나라로서 허리 밑이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선비의 나라 조선에선 일본과 달리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하지 않았던가!

사실 사내들이 여자를 찾는 것은 찰나적이나 마초(macho)의 본능에 충실하려 한다.

색향(色鄕)으로 소문이 난 송도에 가려함은 허리 밑을 충족시키려는 목적이 강하다.

양곡도 진이와 30일이란 기간을 정하고 소위 계약 동숙(결혼)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진이는 평소에 양곡이 생각했던 노류장화가 아니었고 계약결혼 마지막 날 시 한 수에 그의 영혼은 넋을 잃었다.

달빛어린 뜨락에 오동잎 다 지고/ 서리맞은 들국화 노랗게 피었는데

누각이 높아 하늘이 한 척 이요/ 사람이 취해 술이 천 잔이라

흐르는 물은 거문고 가락에 맞춰 서늘하고/ 매화는 피리소리에 들어 향기롭구나

내일 아침 서로 헤어지고 나면/ 그리는 정은 푸른 물결처럼 길게 뻗치리라.

양곡은 진이의 이 시를 듣고 한양의 친구들에게 “나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할 용기가 생겼을 것이고 진이를 알게 됨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소문으로 떠도는 진이를 직접 만나 뜨거운 살을 섞고 보니 저잣거리에 나도는 풍문이 얼마나 잘못 알려졌음을 알수 있었다.

노류장화나 말하는 꽃이 아닌 지식인 진이라는 것을 알게 됨에 스스로 그녀 앞에 겸손하여 졌음일 게다.

아마도 진이가 한시, 시조에 능통한 자유인으로 남자로 태어났다면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남명 조식, 하서 김인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학자 위치에서 경륜(經綸)을 논하며 문화예술세계를 한층 더 풍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양곡은 그후 두 번 더 진이를 찾았다.

계약결혼이란 세기적 발상은 조선사회를 경천동지(驚天動地)케 했을게다.

낭만과 문화의 나라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와 여성해방운동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1929)보다 378년 앞섰으며

영화감독 문여송과 소설가 김이연과의 계약결혼보다는 무려 400여년이나 앞선 선구적 페미니스트였다.

양곡은 진이의 시·서·화의 삼절(三絶)을 넘어 춤·노래·거문고 등으로 당시 조선이 상국(上國)관계로 있는

중국 문화에도 정통하였던 그녀에게 녹아든 것은 어쩌면 사내로서 자연스런 현상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진이는 옥섬(진현금 의동생)으로부터 잠자리 기술도 배웠다.

“네가 싸늘하면 사내 역시 싸늘할 것이요. 네가 뜨거우면 사내도 뜨거워 질 것이고 네가 깊어지면 사내 또한 깊어질 것이다.

헛되이 움직이거나 소리를 질러서 힘을 빼지 말고 깊이 숨을 마시며 음기를 몸 전체에 고루 모아 낮은 소리로 한없이 속으로 빨아들이거라.

사내란 겉으론 천하를 움직일 듯 하지만 알고보면 연약하느니라.”라고 꽃잠(첫날밤)의 기술을 가르쳤다.

이토록 진이는 여자로서도 완벽하였으며 학자(지식인)로서까지 조선의 사대부 수준에 손색이 없었다.

화담 서경덕의 수제자 허엽과 동문수학했으나 오히려 그의 학문 수준을 훌쩍 뛰어 넘었지 않았나 싶다.

허엽의 딸 허난설헌이 역시 조선시대에 출생하여 남성사회에서 그녀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고 27년이란 짧은 삶을 마쳤다.

허난설헌은 사대부집 고명딸로 태어나 엄격한 사회적 제약으로 기를 펴지 못했으나 진이는 달랐고 그녀는 과감히 자유를 선택하였다.

양가집 딸에서 어느 날 갑자기 얼녀(孼女)로 전략하여 소실의 길 정도를 선택할 수 있었으나

그녀는 과감히 자유인 기생의 길로 들어섰고 억압의 비단길보다 자유의 자갈밭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기녀생활 3년 만에 기적(妓籍)에서 빠져 나와 자유인이 되어 지족선사·소세양·벽계수·이생 등을 품어 진이의 세상을 만들었다.

진이의 경륜과 문화예술세계는 외숙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머니 진현금의 DNA로부터 이어받은 천부적 예능의 자질은 외숙부가 원천(源泉)이다.

외숙부는 비록 하급 악사였으나 사대부 못지않게 학문이 높았으며 그의 서재엔 만여 권의 책이 빼곡히 꽂혀 있었고 그런 가족사를 진이는 고스란히 이어 받았다.

그같은 진이의 세상에 대보름달이 휘영청 뜬 분위기에 남녀칠세부동석과 삼종지덕의 사내들이 불을 본 부나비처럼 하나 둘 날아들었다.

- 5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황진이(제3화)

 

양곡과 명월의 말이 나란히 걷고 있으며 풍악산(금강산의 가을 山名) 유람 길에 올랐고 잠자리에서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다.

양곡은 말 위에서 꾸벅꾸벅 졸았으며 어젯밤에 명월과 서너 번의 방사로 기진맥진한 상태다.

명월도 사타구니가 얼얼해 걷기조차 힘들지만 추호도 내색이 없었고 사내에게 지기 싫어서다.

또한 그녀는 사내를 맞을 때마다 우리나라 최초 여왕 선덕여왕의 여근곡(女根谷)에서 백제군을 섬멸한 역사를 상기시켰다.

양곡이 30일 동거후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렸다고 생각하여 특히 잠자리에 신경쓰고 있다.

명월은 양곡의 30일 동거는 허풍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토하고 "나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친구들한테 고백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개성에 온지 30일 후에 개선장군처럼 한양에 나타나 번듯한 요릿집에서 한턱내며

“나는 역시 인간이었다.”라고 일갈 하려는 배포를 무참히 꺾으려는 속내다.

가을의 금강산은 풍악산으로 불리고 늦 단풍이 붉게 타고 있으며 바람이 쌀쌀하다.

어젯밤에 태상주 술기운에 둘은 밤새는 줄 모르고 욕심껏 육체의 향락을 즐겼음이 지금은 과욕이었다는 것을 둘은 한 몸처럼 느끼고 있다.

그들은 박연폭포에서 점심을 먹고 말고삐를 돌렸으며 명월이 먼저 말을 꺼냈다.

“소녀 엊저녁에 대감께서 너무 깊이 사랑해 주셔서 더는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풍악산은 다음에 구경하시고 오늘은 이만 돌아감이 어떠하실 지요?”

“그래도 되겠느냐?”

양곡은 방금 본인이 하려는 말을 명월이 대신 해준 말이라고 생각하였다.

목소리는 쇳소리가 나고 입에선 단내가 풀풀 풍겼으며 자칫하다가는 말 등에서 떨어질 뻔 아찔한 순간까지 있었다.

하지만 박연폭포까지 와서 그냥 바람처럼 떠나갈 명월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한 줄기 물줄기가 골짜기를 갈 듯 뿜어내니/ 용추에 떨어지는 백 길 물소리 우렁차라./

솟아 내리는 물줄기 쏟아지는 은하수인가 싶고/ 노한듯 가로 드리운 물줄기 바로 흰 무지개일세/

소쿠라지는 물벼락 온 골짜기에 가득하고/ 물보라는 부서지는 옥인양 갠 하늘에 사무치네./

유람객이여 여산폭포가 낫다는 말은 하지마오./ 천마산의 박연폭포 우리나라의 으뜸이라오.

황진이의 '박연폭포'다.

그들은 풍악산으로 가려다 천마산의 박연폭포 늦가을 단풍에 취하여 있다가 귀가했으며 그들의 온 몸에선 늦가을 단풍향이 향수처럼 풍겨 나왔다.

명월의 특이한 선향(仙香 )과 단풍향이 어우러진 향이 양곡의 가슴을 다시 뜨겁게 달구었고 방에 들어서자 양곡은 명월을 힘껏 쓸어안았다.

양곡은 내일 한양으로 갈 몸이고 명월은 양곡이 하는 대로 몸을 맡겼으며 뜨거운 입김엔 어젯밤 열정의 단내가 얼굴을 감쌌다.

“명월이 나하고 한양에 가지 않으련? 개성보다 한양이 명월에겐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장악원(掌樂院)에 들어가 예약연구를 더하여 이론을 만들어 놓으면 후세가 그것을 배우지 않겠느냐?”

“소녀를 소실(小室)이 되라는 말씀인가요?”

초롱초롱하면서도 가을 호수같이 평온하였고 표정이 먹이를 노리는 맹금류(猛禽類) 눈초리로 변하였다.

“그런 뜻이 아니고 개성도 좋은 고장이고 천하의 명산인 금강산이 있어 유명한 도시이긴 하지만 조선의 중심은 역시 대궐이 있는 한양이지.

그곳에 가서 명월의 명성을 더욱 높였으면 하는 생각이지. 내 다른 뜻이 있어 한 말은 아니네!”

“뜻은 고마우시나 소녀는 개성의 몸으로 태어나 고려여인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렵니다.”

명월의 진지함이 흡사 출사표를 던진 전장에 나가는 장수의 표정이다.

“내 알았느니라. 너의 미색과 학식이면 한양에 가면 이곳보다 더 뜨겁고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네 의향을 물어본 것 뿐이니라.”

명월은 양곡의 검은 마음을 첫마디에서 알아차렸다.

사내들은 마음에 드는 기생을 노류장화(路柳墻花) 쯤으로 보고 소실로 집에다 앉혀 놓으려는 심보를 명월은 숱한 사내들의 유혹을 단호히 뿌리쳤던 것이다.

명월의 싸늘한 표정을 등 뒤로 느끼면서 양곡이 지필묵을 주섬주섬 챙겼다.

“지금 떠나시려고요?”

“가려하느니라...”

양곡답지 않은 풀죽은 목소리였고 명월은 말 등에 실린 거문고를 연두(몸종)에게 가져오라 하여 자신이 만든 곡을 타며 창을 불렀다.

낙양성 동쪽에 핀/ 복사꽃 오얏꽃/ 꽃잎이 날아가면 뒤 집에 떨어지나!/

낙양에 사는 계집애들은/ 얼굴이 시들까봐/ 떨어지는 꽃잎만 봐도/ 긴 한숨을 내 쉰다네./

금년에 핀 꽃지고 나면/ 얼굴 다시 여위리니/ 그 누가 와서 보여주리.

이백(李白)의 '늙음을 서러워하며'다.

명월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내려와 거문고에 떨어졌다.

그때 명월을 젖먹이가 어미를 바라보듯 바라본 양곡이 갑자기 지필묵이 싸인 보따리를 들고

“진이야! 나를 예성강까지 배웅을 해주면 어떠하겠느냐?”라는 말을 등 뒤로 하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어느새 해는 지고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별들의 하늘엔 벌레 먹은 사과모양의 달이 기우뚱하게 떴다.

말 두 필이 준비되었고 양곡은 대명천지에 명월관을 나서고 싶지 않아 계획적으로 밤에 길을 나서는 것이다.

“대감! 왜 제 기명인 명월을 부르지 않으시고 본명인 진이를 부르셨습니까?”

“기명으로 부르지 않는 것이 궁금하더냐?”

“그러하옵니다.”

“진이는 기명으로 부르는 것 보다 진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려서 내 앞으로는 그리 부르기로 마음먹었느니라.

명월이란 기명은 너무 멋스럽고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워 쉽게 다다가기가 어려우니라.

하늘에 두둥실 떠 있으면서 인간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어떻게 명월을 품을 수 있겠느냐?

앞으론 네 본명을 부르고 내 주위의 친구들에게도 진이로 부르도록 입소문을 낼 것이니라.”

그 후 명월이란 기명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고 그들이 예성강에 도착하자 나룻배 한 척이 대기하고 있다.

“내 한양에 가 정무를 처리하고 곧 다시 올 것이니라.”

진이는 왼손 약지의 은가락지를 뽑아서 양곡에게 건넸다.

나룻배의 횃불이 강 건너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을 한 진이는 밤이 이슥해서야 명월관에 도착하였다.

- 4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황진이(제2화)

 
 

아침을 명월과 겸상하여 그윽하게 마친 양곡은 개성 유람에 나섰다.

그러나 그의 눈엔 선녀같은 명월의 모습이 앞을 가려 아름다운 개성의 가을 풍광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점심때도 넘기지 못하고 허둥지둥 명월관으로 돌아왔다.

명월은 양곡이 말을 타고 명월관을 나갈 때부터 개성의 절경을 절반도 못보고 말고삐를 되돌릴 것을 생각하고 일찌감치 몸치장을 서둘렀다.

엊저녁엔 선비체면에 소극적으로 명월의 독특한 선향(仙香)이 아침안개처럼 풍기는 몸을 문만 열었을 뿐 오늘은 들소모양 덤벼들 것이 뻔해서다.

명월도 꽃잠(첫날밤)에서 사랑의 지혜를 첫 장면만 보여주었을 뿐 퇴기 옥섬 이모가 가르쳐 준 잠자리 기술을 시작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수한테 들은 '30일을 넘기면 인간이 아니다' 라는 약속을 깨도록 하려는 속내다.

명월 자신을 두고 내기를 했다는 데에 체면을 중시하는 사대부들의 콧대를 보기 좋게 꺾어주려는 심보다.

열린 창문밖의 모과나무 위로 찬란한 가을 햇빛이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있다.

명월은 직접 점심상을 들고 들어갔으며 양곡은 명월을 보자 피로했던 표정이 봄꽃같이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송도 팔경을 다 보시지는 못하신 것 같네요?”

명월이 무지개빛 미소를 지으며 점심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며 던지는 말투였고 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다.

“그랬느니라. 내 명월과 더 많은 시간을 가지려고 잠시 개성 저잣거리만 보고 돌아왔느니라!

네가 익제[益齊·李齊賢(1287~1369)의 호]의 '송도팔경'을 말하는 모양이구나!

풍류객이 이곳에 오면 첫째는 명월을 보러 오는 것 외엔 송도팔경인 곡령의 개인 봄, 용산의 늦가을,

자하동의 스님찾아 들에서 나그네 보내며, 웅천에서 술계, 용산의 들에서 봄을 찾아, 감포의 어옹, 서강의 배가 아니더냐?

참으로 아름답고 멋이 풍기는 시(詩)로다.”

의기양양한 표정이고 네가 시를 안다고 하지만 나를 당하지는 못할 것이란 태도다.

명월의 점심상엔 태상주(太常酒:개성의 고급술)와 안주론 잉어찜과 산채, 그리고 요기를 할 두부추탕이 놓여있다.

양곡은 배가 고팠는지 두부추탕을 맞바람에 게 눈 감추듯 선비의 체면도 아랑곳 않고 단숨에 먹어치웠다.

“천천히 드세요! 체하시면 어찌하시려고 그렇게 서두르세요! 즐거운 밤은 어찌하시려고요.”

여유가 있는 명월의 태도다.

두부추탕을 가을밤이면 양반댁 마님이 은밀히 사랑채로 나갈 때 미리 내보내는 사랑의 묘약으로 통하는 음식이다.

양곡은 그윽한 표정으로 명월을 쳐다보았고 사내가 계집을 보는 표정이 아닌 신뢰와 경의가 섞인 얼굴의 분위기다.

총명한 이마와 조는 듯 고운 눈썹, 그 아래에 눈부시게 희고 검은 두 눈은 비온 뒤 나뭇잎 위에 작은 벌레집처럼 고요하고

깊은 숲속에 핀 작은 꽃같이 향긋하며 검은 비단 모양 잔바람이 이는 연못의 파문처럼 아련하며 가녀리고 단정한 콧날은 오연하면서도 사랑스럽다.

입술은 적당한 크기로 아물게 꼭 닫혀 얌전하지만 의지가 느껴지고 갸름한 턱은 안아주고 싶도록 연약해 보이며

가늘고 긴 목은 그 곳에 파고들고 싶은 충동으로 벌써부터 가슴이 뛰고 낭심이 허리 밑에서 날뛰고 있다.

명월은 고수이며 학문만 높은 것이 아니라 남자들의 성정도 독심술(讀心術)로 읽듯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사실 양곡은 두부추탕을 허겁지겁 먹으며 독주인 태상주 몇 잔에 어느새 정신이 혼미해졌다.

하지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여 겨우 명월을 직접 품게 되었는데 섣불리 서둘렀다 체면을 구길까 마음이 복잡하다.

명월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양곡이 출사표(出師表)를 던진 장수모양 비장한 표정의 긴장된 어투로

“내 실은 한양에 있는 친구들과 내기를 했느니라. 너와의 사랑을 30일을 넘기면 사람이 아니란 장담을 했느니라. 내 그 약속을 꼭 지키리라.”

양곡의 말하는 표정이 자못 진지하고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다.

명월은 원앙 한 쌍이 지나가며 파문을 일으킨 연못 위의 물결 같은 미소를 지여보일 뿐 입을 떼지 않았고 가소롭다는 표정이다.

네가 내 품에 들어왔는데 어떻게 내 뜻과는 상관도 없이 네 마음대로 30일 만에 내 품을 벗어날 수 있겠느냐는 반문같은 표정으로 양곡을 쳐다봤다.

석가가 수제자 가섭을 보는 눈초리다.

태상주 한 병이 바닥을 드러냈고 명월도 태상주 두 병의 바닥이 보이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사실 명월은 고금을 통털어 우리나라 최고의 주선(酒仙)으로 선정되었다.

평생 술과 시와 자기 이상에 취해 평생을 살다가 간 수주 변영로(卞榮魯)가 2위이며 김삿갓 4위,

김시습(金時習) 5위, 임제(林悌) 6위, 임꺽정(林巨正) 8위, 원효(元曉) 10위 등이 겨우 10위권에 들었다.

명월은 15세에 기생이 되고 3년 만에 기적(妓籍)에서 빠져나왔다.

그 후로는 자기 영혼을 찾아서 소위 페미니즘적 자유인이 되었다.

그래서 기생이면서 기명인 명월(明月)을 쓰지 않고 진이(眞伊)란 본명으로 끝까지 불리였으며 진이로 파란만장한 40평생을 살았다.

술은 역시 여자나 남자나 꽁꽁 묶어두었던 마음을 열어 놓는다.

“이제 주무시죠! 그렇게 시만 쓰고 계실 것입니까?”

명월이 양곡에게 잠자리를 재촉하였고 창밖의 보름달이 창공에 두둥실 떴다.

양곡이 명월을 힐끗 쳐다 보았고 네가 웬일로 잠자리를 재촉하느냐는 표정이다.

그리고는 기쁨이 넘치는 목소리로 “그렇게 하자구나.”로 응수해 왔다.

불이 꺼지자 휘영청 밝은 달빛만이 꿈특대는 남녀의 알몸뚱이를 지켜보고 있다.

어져 내일이야 그릴줄을 모르던가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이 시가 명월이 네 시더냐?”

“그러하옵니다! 대감의 시에 비해 졸작 부끄럽습니다.”

그때 대장간의 풀무모양 뜨거운 양곡의 손이 명월의 가슴을 훑고 허리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명월의 두 다리도 견우를 맞으려 자연스럽게 벌어졌으며 허리와 엉덩이도 덩달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때 창밖 뜨락 오동나무 위에서 짝짓기를 하던 접동새가 푸드득 날아갔다.

- 3화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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