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추(晩秋)
석양이 지고
꽃 져내리고
어둠이 져내려
모든 세상이 지고 져내림으로만 가득할 때
한 사람의 그리움이 지고
마음이 지고
외로움마저 떨어질 때
새벽이 지고
사랑도 지고……
(김하인·시인, 1962-)
+ 만추
움직일 때마다
관절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손끝 절여 오듯
말초 신경부터 말라 드는
푸르던 시절
하루가 길어 슬프던 날
또 하루가 짧아 기쁘던 날
겸손해져 가는 알곡은
점점 더 고개를 숙이고
마른기침만 해 대던
허수아비 옷자락이
금박물 가득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이미순·시인, 경남 의령 출생)
+ 만추(晩秋)
까맣게 여문 씨앗
톡톡
햇살 사이로 벌어진다.
호랑나비 한 마리
거미줄에 퍼덕이고
억새는
바람으로 남아
산하(山河)에 눕는다.
논배미 십자가 허수아비
참새 몇 마리 날아와
쫑알대고
혼기(婚期) 넘은 처녀들
삼베바지 방귀 새듯
시집갈 날 기다린다.
(서혜미·시인, 1951-2007)
+ 만추
늘 남부끄럽지 않게 산다는 일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창과 방패를 버리고
시냇물이 흘러가듯이 그냥 물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눈도 마음도 가슴도 간도 모두 돌리고
먼 산을 바라보고 야위어 가는 녹색빛 단풍을 보고
이런 산중에서 익어가는 노란 감을 보고 사는 일인가
(민경대·시인, 1951-)
+ 만추(晩秋)
춘천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북한산 밑을 지났다.
산의 계곡 아래쪽으로는
단풍이 다투어 제 몸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등성이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나뭇잎들은
이미 제 빛깔을 잃고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뭇잎들은 여름날의 찬란했던 그 빛깔들을
가볍게 내려놓고 아주 홀가분히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작별이었다.
한때 온몸을 감싸고 있던 붉고 푸르던 빛깔들이
차츰 그 빛을 잃어 다해 갈 때쯤이면
우리도 떠나야 하는 단풍이겠거니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이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버스가 지나는 북한산 길
노을이 지는 나무 사이로 단풍이 곱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엄원용·목사 시인, 충남 서산 출생)
+ 늦가을의 질문
휙
한줄기 바람에
분분히 날리는
낙엽들
어느새
가을이 성큼 깊다.
내 가슴
얼마나 깊은가
내 사랑
얼마나 깊은가
나의 생
얼마나 깊은가.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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