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있는 세천 한라비발디의 아침 일출전 모습입니다.

이른 아침 일어나 105동 뒤 산책로를 걷다보니 와룡산을 향해 삼각대를 펼치고 사진을 찍는 진사가 보이네요

와룡산은 운해에 휩사여 산 봉우리만 보이고 카메라를 잡고 이 모습을 담는 사진사의 모습을 찍어 보았습니다.



105동을 거쳐 커뮤니티센타에 다다를 쯤은 안개에 휩싸여 와룡산의 모습이 보이질 않더니 102동 뒤쪽을 돌다 보니

산 봉우리가 조금 나타나 보입니다 그래서 또 한번 사진을 찍어 보았습니다




이곳은 마천산 쪽 방향 입니다 마천산 역시도 운해에 휩싸여 산봉우리가 겨우 보일 정도 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 한라비발디는 정말 주변 경관과 view가 좋은 곳이죠  동의 하시나요?

정말 이런 VIEW를 가진 아파트가 대구시에서 몇이나 될까요?  정말 VIEW가 좋습니다










성서공단이 있는 달구벌 대로의 가로수를 밑둥지에서 부터 하늘로 카메라 앵글을 잡아 보았다

뷰파인더를 들여다 보기에는 힘이 들어 대략적으로 렌즈방향을 가늠 하여 위로 치켜 올린채 셔터를 눌렀다.

그렇게 썩 좋은 앵글은 아니나 나름 의도 했던 것과 비슷한 장면을 잡을수 있었다

시선을 달리보면 사소한 것도 또 다른 하나의 묘미를 얻을수 있다












이른 아침 성서공단에 둔차를 가지러 나섰다.

그리고 차를 가져오며 차 트렁크에 둔 카메랄르 꺼내 들었다

성서 계명대로 가려고 나서다 상가거리 뒤편에 조성된 공원 같지 않은 공원에 섰다

평소 상업지구옆 건물들로 가리워져 잘 보이지 않던곳이다

주변엔 쓰레기가 널부려 지고 외딴곳이긴 하지만 나름 낙엽이 내려 앉아

낙엽 밟는 발자욱이 폭신 폭신 하기도 한듯하여 카메라 렌즈를 겨눠 보았다.

가을의 정취가 제법  묻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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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입구 주변에 있는 대나무와 풍경을 여러가지 카메라 촬영 기법을 사용하여 찍어보았다

운주사는 화순시처에서 보내온 관광 자료에 따르면

정말 볼만하고 역사학적 가치가 많다고 하며 천불 천탑에 대한 관광 안내문을 많이 써놓았는데

막상 보고나니 여늬의 절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다른 절과 다른 부분은

앞서서도 이야기 했듯 천왕문이 없다는것과 사천왕상이 없다는것 그리고 많은 부처들이 누워 있거나

비스듬히기대어 서있다는 것 그리고 유난히도 많은 석탑들 일반 적인 부처님을 모신 절과는 차이가 난다.















































운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창건에 관한 이야기는 도선()이 세웠다는 설과 운주()가 세웠다는 설, 마고할미가 세웠다는 설 등이 전해지나,

도선이 창건하였다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법당과 석불, 석탑이 많이 훼손되어 폐사로 남아 있다가

1918년에 박윤동()·김여수()를 비롯한 16명의 시주로 중건하였다. 건물은 대웅전과 요사채, 종각 등이 있다.

1942년까지는 석불 213좌와 석탑 30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석탑 12기와 석불 70기만 남아 있다.

크기는 10m 이상의 거구에서부터 수십cm의 소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매우 투박하고 사실적이며 친숙한 모습이 특징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 좌우의 산등성이에 1,000개의 석불과 석탑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980년 6월에는 절 주변이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소장되어 있는 문화재로는 연화탑과 굴미륵석불, 보물 제796호인 9층석탑, 보물 제 797호인 석조불감, 보물 제798호인 원형다층석탑,

부부 와불() 등이 있다. 운주사의 천불천탑은 우리 국토의 지형을 배로 파악한 도선이 배의 중간 허리에 해당하는 호남이 영남보다 산이 적어

배가 기울 것을 염려하고 이곳에 1,000개의 불상과 불탑을 하룻밤 사이에 조성하였다고 한다.

잘 알려진 부부와불(화순 운주사 와형 석조 여래불)은 천불천탑 중 마지막 불상으로 길이 12m, 너비 10m의 바위에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의 조각이다.

이 불상을 일으켜 세우면 세상이 바뀌고 1,000년 동안 태평성대가 계속된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운주사 [雲住寺] (두산백과)

운주사에 관한 두산 백과의 설명이다 운주사는 운주사에는 천왕문이 없다. 사천왕상도 없다.

일반적인 절집의 형식 같은 것은 아예 찾아볼 수가 없다.

울타리도 문도 따로 없는 천불산 다탑봉 아래 남북으로 뻗은 완만한 골짜기 안에는 탑과 돌부처만이 즐비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운주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5 - 전남, 초판 1995., 23쇄 2010., 돌베개)

정말 그렇다 천왕문과 사천왕상을 보지 못했다

누워있는 와불과 벽을 기대어 세워둔 불상을 보았는데 머리가 없다든지 신체 일부가 떨어져 나간 불상들이 대부분 이였다.

그런 가운데 천불천탑이 있는 운주사에는 단풍으로 곱게 물든 가을이 고무 곱게 보였다

오늘의 정찰은 그런 석탑위에 붉은 단풍을 덧 씌우는 촬영 이다라고 쌤이 말해 주어 그렇게 찍어 보았다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는 나무위 석탑이라든가 아웃포커스와 인포커스를 적절히 살려 석탑과 석불을 담아내는 작업 이다.


































찍긴 하였지만 집에와서 가만히 살펴보니 쓸만한 사진은 하나 없다

모두 인증샷만 남아 있다 내가 이곳에 다녀 간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한

참 암담하다 사진을 배워 그럴싸한 작품 한점 얻을까 했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하게 모두 인증 샷이라니

정찰온 보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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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운주사로 정찰을 갔다.

지난번 화순 여행시 가보지 못한 곳이라 기대를 많이 했었다.

꼭 들려 보아야 할 화순의 명승지 이긴 하지만 화순 적벽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가보지 못한 곳이라 설레임을 갖고 운주사에 도착 했다.

운주사는

‘운주사는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천기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다.’(동국여지승람)

여기에 도선이 하룻밤 사이 도력으로 인근 돌을 불러모아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구전과 <동국여지지>에 혜명법사가 조성했다는 기록 등이 덧붙여지는 게 고작이다.

80~90년대 전남대 박물관 발굴조사로 이 절은 11세기께 처음 세워졌으며 석탑 등은 12~13세기 중기 이후에 건립했다는 점이 드러났을 뿐,

천불천탑 조성 경위는 수수께끼로 묻혀 있었다. 호족, 이민족, 천민, 노비 등 건립 주체를 둘러싼 억측들이 지금도 난무한다.

2000년대에 들어 미술사학계에서는 이 천불천탑이 몽골의 고려 간섭기 때 원나라 군부가 고려 백성들과 물자를 강제동원해 세운 수난의 불사라는 외압설이 등장했다.

그 장본인은 석탑 전문가인 소재구 현 국립고궁박물관장이다.

2001년 동원학술대회에 발표한 논문 <운주사 탑상의 조성불사>에서 그는 천불천탑 조성은 엄청난 재원과 석공인력의 동원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라며 이렇게 적고 있다.

“불상과 탑들의 스타일이 천편일률적이라는 점은 원 침략기 수많은 석공들이 단기간에 완성한 것임을 알게 한다. …

원래 몽고인들은 티벳불교의 영향으로 다탑 조성의 관습이 있었다. …

당시 고려 왕조가 원과 전쟁 끝에 화친한 뒤에도 계속 항전하는 삼별초 군단들이 진도를 거점으로 서남해 지역에서 항전을 계속했기 때문에

운주사는 서남해의 대몽항쟁군에 맞서는 원 군부의 주둔지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주 평야에서 군량미를 동원할 수 있고 영산강 포구는 국제적 항구여서 중국, 고려 왕경과 교류할 수 있었다.

원 군부는 운주사에 강제로 인력을 동원시켜 탑과 불상을 만들고는 타국에 나온 원나라 군사들의 무운을 빌고 삼별초에 대한 전승을 기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설이 설득력이 있는 것은 다층 탑에 엑스(X) 자나 마름모꼴 무늬를 새긴 생소한 탑의 문양 자체가 몽골 전통 건축이나 공예물,

현재의 우표에까지 활발히 쓰이는 데서 드러난다. 운주사 불사는 원나라 군대가 자기네 나라의 모델을 제시하고

석공과 백성들에게 단기간에 완성하라고 막무가내로 몰아부쳐 이뤄진 유산일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다.

기초 공사 없이 바위 같은 데 아무데나 불상과 석탑을 놓은 운주사 천불천탑의 특징 또한 군대가 단기간에 기념물 건립을 강압적으로

재촉했다는 전제 아래서 풀리게 된다. 우리 사서에 전하지 않는 것은 결국 우리 문화사의 정수가 아니었던 타율적 불사였던 탓이라는 주장이다.

소 관장의 추론은 추가 논의가 더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천불천탑의 역사가 민중의 주체적 역사가 아니라

민중을 착취하는 고통의 불사였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맺힌 천불천탑의 탄생이 훗날 전혀 다른 의미로 찬양받게 된 셈이니 역사의 심술이라고 해야 할까.

<한겨레 뉴스에 있는 묵향 속의 우리 문화유산 (39) 운주사 천불천탑 글을 발췌했다. >

 

 원문  : http://www.hani.co.kr/kisa/section-005001000/2005/11/005001000200511092102571.html

 

<요약: 고려의 삼별초군을 섬멸하기 위해 몽골의 군사가 운주사에 주둔 해 있으며 원나라의 고향이 그리움을 달래고

또 무운을 빌며 삼별초에 전승을 빌기위해 천불천탑을 만들었다고 전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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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살이 내리 쬐는 운주사 입구에서 석탑을 역광으로 찍어 보았다

같이 정찰나간 아라님의 모습을 모델로 실루엣으로 잡아 보았다

참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사람이 서 있는 모습에서 아우라 비치는 듯한 모습을 담아내고 싶었는데

실제 같이 간 회원중에는 그런 사진을 담은 회원도 많지만 자리 다툼에 밀려난 덕분에

좋은 위치를 선점 하지 못해 사실 그건 하나의 핑게 일 뿐

그런 장면을 얻을수 있을 만큼 카메라를 잘 다루지 못한 덕분 이리라

참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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