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운주사로 정찰을 갔다.
지난번 화순 여행시 가보지 못한 곳이라 기대를 많이 했었다.
꼭 들려 보아야 할 화순의 명승지 이긴 하지만 화순 적벽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가보지 못한 곳이라 설레임을 갖고 운주사에 도착 했다.
운주사는
‘운주사는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천기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다.’(동국여지승람)
여기에 도선이 하룻밤 사이 도력으로 인근 돌을 불러모아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구전과 <동국여지지>에 혜명법사가 조성했다는 기록 등이 덧붙여지는 게 고작이다.
80~90년대 전남대 박물관 발굴조사로 이 절은 11세기께 처음 세워졌으며 석탑 등은 12~13세기 중기 이후에 건립했다는 점이 드러났을 뿐,
천불천탑 조성 경위는 수수께끼로 묻혀 있었다. 호족, 이민족, 천민, 노비 등 건립 주체를 둘러싼 억측들이 지금도 난무한다.
2000년대에 들어 미술사학계에서는 이 천불천탑이 몽골의 고려 간섭기 때 원나라 군부가 고려 백성들과 물자를 강제동원해 세운 수난의 불사라는 외압설이 등장했다.
그 장본인은 석탑 전문가인 소재구 현 국립고궁박물관장이다.
2001년 동원학술대회에 발표한 논문 <운주사 탑상의 조성불사>에서 그는 천불천탑 조성은 엄청난 재원과 석공인력의 동원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라며 이렇게 적고 있다.
“불상과 탑들의 스타일이 천편일률적이라는 점은 원 침략기 수많은 석공들이 단기간에 완성한 것임을 알게 한다. …
원래 몽고인들은 티벳불교의 영향으로 다탑 조성의 관습이 있었다. …
당시 고려 왕조가 원과 전쟁 끝에 화친한 뒤에도 계속 항전하는 삼별초 군단들이 진도를 거점으로 서남해 지역에서 항전을 계속했기 때문에
운주사는 서남해의 대몽항쟁군에 맞서는 원 군부의 주둔지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주 평야에서 군량미를 동원할 수 있고 영산강 포구는 국제적 항구여서 중국, 고려 왕경과 교류할 수 있었다.
원 군부는 운주사에 강제로 인력을 동원시켜 탑과 불상을 만들고는 타국에 나온 원나라 군사들의 무운을 빌고 삼별초에 대한 전승을 기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설이 설득력이 있는 것은 다층 탑에 엑스(X) 자나 마름모꼴 무늬를 새긴 생소한 탑의 문양 자체가 몽골 전통 건축이나 공예물,
현재의 우표에까지 활발히 쓰이는 데서 드러난다. 운주사 불사는 원나라 군대가 자기네 나라의 모델을 제시하고
석공과 백성들에게 단기간에 완성하라고 막무가내로 몰아부쳐 이뤄진 유산일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다.
기초 공사 없이 바위 같은 데 아무데나 불상과 석탑을 놓은 운주사 천불천탑의 특징 또한 군대가 단기간에 기념물 건립을 강압적으로
재촉했다는 전제 아래서 풀리게 된다. 우리 사서에 전하지 않는 것은 결국 우리 문화사의 정수가 아니었던 타율적 불사였던 탓이라는 주장이다.
소 관장의 추론은 추가 논의가 더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천불천탑의 역사가 민중의 주체적 역사가 아니라
민중을 착취하는 고통의 불사였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맺힌 천불천탑의 탄생이 훗날 전혀 다른 의미로 찬양받게 된 셈이니 역사의 심술이라고 해야 할까.
<한겨레 뉴스에 있는 묵향 속의 우리 문화유산 (39) 운주사 천불천탑 글을 발췌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