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야화 자동선(제22화)

 
 

얼떨결에 내실로 떠밀려 들어온 영천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며 사내를 먼저 들여보내고 뒷물을 하고 여자는 들어오리라 생각해서다.

영천군은 피곤하였고 요며칠 사이에 송악산을 두 번이나 오르내렸으며 자동선을 품으려고 온갖 묘수를 다 써 봤으나 번번이 헛수고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자동선의 내실에 들어왔고 여자의 방에 남자 혼자 있게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남자는 온갖 상념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 영천군은 그러하지 않았고 자동선의 내실은 의외로 단조롭다.

네벽이 모두 하얀 백합처럼 흰종이로 되었고 남향의 벽에는 성명미상의 그림 '원앙'이 걸려있을 뿐이며 머리맡엔 자리끼까지 준비가 되었다.

영천군은 옷도 벗지 않은 채 벌러덩 누웠고 화촉동방을 상상하고 있다.

그런데 영천군은 자리에 눕자 금방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졌고 영천군이 잠에서 깨어났을 땐 동창이 밝아오고 있을 때며 옷도 입은 채다.

화들짝 놀라 일어났을 때는 자동선이 옆에서 “너무 피곤하게 주무셔서 소녀 그냥 이렇게 옆에서 밤새 지켜드렸나이다! 목이 타실 거예요. 어서 자리끼를 드시지요.”

자동선은 영천군이 일찍 잠에 빠져 오히려 아쉬운 밤을 보냈다는 말투다.

“허허 그랬느냐? 내가 너무 피곤해서 자동선 네가 들어오는 것도 몰랐느니라.” 남자체면이다.

밖에서 두런두런 사가정과 제일청의 대화소리가 들렸고 잠시 뒤 “영천군 나으리, 일어나셨는지요? 사가정이 옵니다.”라고 문안을 알렸다.

툇돌엔 영천군 신발과 자동선의 신발이 나란히 놓여있고  사가정과 제일청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으며 이젠 됐다는 표정이다.

“밖에 누가 오셨어요?” 자동선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다.

“자동선아! 영천군 나으리 잘 모시고 잤느냐?”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소녀를 어떻게 보시고 그런 망측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자동선이 뿌루퉁한 표정으로 방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 집은 대궐 뒤의 막바지 골목/ 내 남편은 광명문의 젊은 파수꾼

여자의 마음은 일월같이 밝아서/ 생사를 걸고 섬겨 오는 내 낭군이오

패물을 돌리자니 눈물이 거침없어/ 시집 전에 못 만난 것 한스럽구려.

중국 장적(張籍)시인의 '절부음'(節婦吟)이다.

자동선도 마음이 타긴 영천군과 다를 바 없으며 영천군이 조바심을 내면서 자기를 원하는 표정은 역력한데

딱 부러지는 언행이 없어 몸을 열 수가 없는 것이며 낭랑18세의 보배같은 몸을 선뜻 내어놓기가 무섭고 두려울 터다.

사내들은 여자가 한번 몸을 주면 자기 전유물처럼 행동하고 염치라는 것은 생각지도 않는 속성이 있으며 그런 사내들을 자동선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명나라 사신 김식이 껄떡거리며 안절부절 못하는 자리에서 위기일발로 벗어나 영천군에게 왔으나

내여자가 되어달라는 아무런 징표를 내어놓고 있지 않아 자동선도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다.

‘사내들은 다 같은 족속들이야’하는 마음이 차츰 굳어가는 즈음 사가정과 제일청이 다시 찾아왔다.

사가정과 제일청은 싱글벙글이고 엊저녁에 뜨거운 살을 마음껏 섞은 흡족한 표정이 역력하다.

“사가정 나으리, 사가정 나으리는 항상 즐거운 표정이세요?” 자동선이 샘이 나고 부럽다는 말투다.

“그러하느냐? 나야 어디를 가나 술과 여자가 있어 얼굴 짱그리고 속을 태울 여유가 없단다.

그런데 너는 어찌 표정이 밝지 않은 것을 보니 영천군 나으리와 화촉동방을 못치룬 눈치로구나?”

“사가정 나으리, 그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니까? 소녀를 어찌 보시고 청교방 창기와 같이 보시는지요? 소녀 매우 섭섭하옵나이다.”

“아니다.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내가 사과하느니라.” 그랬다. 자동선의 마음은 영천군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초야를 치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영천군은 자동선의 마음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이며 사가정은 자동선이 방문을 열어놓고 나간 열린 문으로 내실로 들어갔다.

“영천군 나으리 아직도 호박관자를 자동선에게 주지 않았습니까?”

“글쎄. 그게...” 영천군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으며 당황하는 표정이 뚜렷하다.

“자동선을 청교월 창녀 정도로 생각하시면 아니 되옵고 자동선은 조선팔도 한양을 넘어서

중국 사신들까지 품지 못해 속을 태우는 명기라기보다 여자사대부라고 해야 적절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어서 기회를 봐서 호박관자를 주시면서 평생을 책임진다는 약속을 하셔야 몸을 내어 놓을 것입니다.”

그때서야 영천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고 두 사내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자동선과 제일청이 들어왔다.

자동선의 손엔 술병이 들렸고 제일청의 손엔 거문고가 들렸으며 사내들에겐 술이 최고이며 자신들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데에는 술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두 분이 무슨 얘기를 그토록 달콤하게 하시나이까?”

가시가 돋친 제일청의 말투이고 이틀 사이에 '송악도'(松岳圖) 두 폭을 그리는 사이 자동선의 마음을 충분히 알았을 터인데 아직도 호박관자를 주지 않았느냐는 질책이 섞인 어투다.

술과 거문고를 보자 두 사내 표정이 밝아졌고 영천군의 표정이 더욱 환하게 피어났으며 자동선을 보자 영천군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쉽고 원망스런 표정 같기도 하고 자신은 고단한데다 술에 취해 금방 잠에 들어 깼을 때는 옆에 자동선이 마치 등신불(等身佛)처럼 앉아 있는 것을 보았으며 밤새 지켜만 보았냐는 표정이다.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어지고/ 땅에선 한 나무 가지가 되어지고/

설사 하늘과 땅이 다할 때가 있어도/ 알뜰한 우리사랑 끊길 줄이 있으랴.

제일청의 신기에 가까운 거문고 음률과 사가정의 시낭송에 영천군과 자동선의 뜨악했던 정서가 봄눈 녹듯 녹고 진달래 피듯 하나가 되었다.

영천군이 호박관자를 자동선의 가슴에 달자 자동선은 감격에 못이겨 사내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으며 이제 몸을 맡겨도 된다는 안도의 울음일 게다.

- 23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자동선(제21화)

 
 

세상의 아름다움은 미녀로 귀결되고 여인의 아름다움에서 세상은 시작되어 여인의 아름다움으로 끝이 난다.

세상의 아름다움은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으며 아름다움을 표시하는 방식이 다를 뿐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아름다움을 대중화한다.

지금 자동선의 의식주는 당시 조선사회가 최고로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가졌으며 그것은 신윤복(申潤福)의 '미인도'가 잘 나타내고 있다.

가슴에 그득 서린 일만 가지 봄 운을 담아/ 붓 끝으로 능히 인물의 참 모습을 나타내었다.

얼마나 감탄스런 표현인가? 봄기운이란 겨우내 동토(凍土)에서 웅크리고 있던 삼라만상들이 서로 다투어 세상으로 나옴을 뜻하는 것일 게다.

또한 붓끝으로 여인의 극치의 아름다움을 구현함을 말하였을 것이다.

지금 영천군의 손을 잡고 있는 자동선이 신윤복의 '미인도'에 나오는 미인이 살아나온 주인공은 아닐까?

사가정과 제일청은 영천군과 자동선이 한시라도 빨리 화촉동방에서 만리장성을 쌓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을 것이 자명하며 열쇠는 자동선이 가지고 있다.

"영천군 나으리! 아직도 소첩이 명나라 사신 김식한테 갔다 너무 늦게 와서 화가 나셨는지요?”

영천군이 자동선의 활짝핀 함박꽃 빛의 얼굴로 예쁜 짓을 해 보여도 어딘가 그늘이 있어 보여 속이 타는 목소리다.

“아니다. 내 너를 보니 너무 기뻐 어떻게 기쁨을 표시할까 궁리중이란다. 잠시만 기다리려무나.”

영천군 특유의 여인 포로작전이고 서둘러 오느라 자동선은 숨이 찬 목소리며 두 볼은 발그레하게 상기된 채다.

“영천군 나으리, 사실은 소첩이 오지 못할 뻔 했었나이다. 그 영감택이 비취노리개를 가슴에 달아주며 수작을 걸어와서 위기를 겨우 넘겼어요.

마침 비취기생이 있어 비취주인은 따로 있다고 하여 그 기생에게 비취를 넘겨주고 어렵게 빠져나왔나이다.”

자동선은 위기일발로 중국사신의 품에서 힘겹게 빠져나와준 것도 몰라준다는 섭섭함이 묻어있는 말투며 바로 그때다.

“자자.. 사랑하는 남녀사이에는 체면같은 것은 없어야 진정한 사랑의 관계랍니다.

이제 영천군 나으리와 자동선 미인도 자존심 버리고 백년가약을 맺을 준비나 하소서!” 언제나 분위기는 사가정이 잡았다.

어젯밤 산매화가 한 송이 피어났건만/ 산속의 늙은 중은 꺾을 줄을 모르네./

이제 나이도 젊고 다정한 그대가/ 덩굴 옆으로 달려와 사랑을 묻노라.

여기서 늙은 중은 명나라 사신 김식을 알레고리 했을 것이며 사가정의 시는 계속되었다.

한스럽다. 신선이 옥퉁소를 불어서/ 인간의 이별수를 깨뜨려 주지 못함이/

산에 온지 사흘에 아직도 못 올랐으니/ 봄바람이 어찌 그다지도 무정하냐/

어느 날 말을 타고 흥진 속에 파묻히면/ 발에 비쳐있던 그 달은 누가 알아주랴.

너무 비싸게 굴지 말고 어서 영천군을 모시라는 일침이고 시낭송을 마친 사가정은 “자 이제 우리 소임은 끝이 났으니 자리를 뜹시다.”라고 제일청을 감싸 밖으로 나갔다.

단둘이 남자 영천군이 입을 열었다. “왜 대답이 없느냐?” 이젠 사내가 속이 타는 목소리고 자동선은 묵묵부답이며 대답이 없으면 묵시적 동의다.

침묵이 한동안 흐른 뒤 “미천한 소녀가 어찌 영천군 나으리의 말씀에 대꾸를 하겠나이까?

처분만을 기다릴 뿐이옵니다!”라고 영천군 무릎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감격의 울음을 터뜨렸다.

지금 영천군은 채용신(蔡龍臣)의 '팔도미인'의 예쁜 부분만을 선택하여 탄생한 자동선을 품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자동선은 채용신이 그린 '팔도미인' 뿐만이 아니라 중국의 4대 미인들의 장점만을 골라 삼신할머니가 점지 한 빼어난 재색(才色)이다.

그런데 지금 영천군은 인내와 끈기로 자동선을 품었그 사가정의 충실한 월하빙인의 역할에 제일청의 수고로움이 만들어 낸 세기의 연리지 작전이었다.

자동선의 울음이 좀처럼 멈추지 않았고 영천군은 두 어깨를 들썩이며 섧게 통곡하는 자동선의 상체를 어루만지고 있을 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한다.

어떠한 분위기에서도 뛰어난 해학과 기지로 웃음과 부드러운 분위기로 바꾸어 놓는 사가정도 없어 펑펑 눈물을 쏟으며 울음을 끊이지 않는 자동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묘수를 못찾고 있다.

밤은 깊어만 갔고 자정이 훌쩍 지났으며 이게 웬일일까? 자동선이 섧게 울다가 그만 지쳐서 영천군의 품에 안겨 잠이 들어버렸고 가늘게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졌다.

영천군은 오늘저녁이야 말로 오매불망 했던 자동선과 화촉동방을 치룰 수 있을 것을 기대했으나 그 꿈이 문턱까지 갔다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노류장화라 해도 명나라 사신의 수청까지 거부하고 온 자동선을 잠들어 있는 것을 겁간(劫姦)을 할 처지는 아니다.

며칠 동안 사가정과 제일청의 월하빙인한 것도 있으며 더욱이 두 폭의 그림까지 그려줘 환심을 얻어놨는데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겁간을 한다면 왕손으로 체면이 서지 않아서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일까? 어미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자듯 잠을 잔 자동선이 잠시 후 눈을 번쩍 뜨며

“영천군 나으리, 아직 가시지 않고 계셨나이까?”라고 방긋 웃음까지 웃으며 양 볼에 흘린 침을 손으로 쓰윽 닦으며 일어났고 그 웃음이 영천군의 마음을 또 흔들어 놓았다.

“너무 늦으셨어요. 내실로 들어가셔서 주무세요. 소첩은 동기(童妓) 자화(紫霞)와 자고 아침에 다시 오겠나이다.”

자동선은 영천군을 자신의 내실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아버렸으며 영천군의 코에는 자동선에게서 풍겼던 싫지 않은 야릇한 암내가 지워지지 않았다.

- 22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자동선(제19화)

 
 

삼현육각(三絃六角)의 풍악소리와 휘황찬란하게 켜진 등불에 자동선은 잠시 눈이 휘둥그레졌다.

푸른 녹음에 젖었던 싱그러움이 삽시간에 적응이 쉽지 않았으며 영천군과 사가정의 넉넉한 풍류 분위기가 아직도 몸에서 떠나지 않은 상태다.

“자동선이 납시었습니다.” 이방의 보고에 흥청대던 분위기가 갑자기 멈추는 듯하였고 명나라 사신 김식(金湜)이 성큼성큼 걸어 나와 자동선을 맞았다.

“네가 자동선이냐?”

명나라 사신은 대국의 체면도 잊은 듯 자동선의 손을 덥석 잡으며 기쁨에 넘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네 소녀 조선국 기녀 자동선이라 하옵니다.” 추호도 떨림이 없는 대답에 김식이 오히려 주춤하였다.

고개를 조아리며 다소곳한 음성으로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조선국 기녀란 또렷한 응답에 상국의 사신이 되려 움찔 했던 것이다.

‘요것 봐라. 기생주제에 조선국이란 나라이름까지 들먹이는 맹랑한 계집...’ 이란 입속말을 하며 손에 힘을 주어 잡고 자리에 앉았다.

“그래 네가 중국에까지 이름이 알려져 있는 자동선이냐?”

“예 사신 나으리, 명나라에까지 소녀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는 말씀은 소녀가 확인할 수 없으나 조선국엔 자동선은 소녀 하나뿐이옵니다.”

너무도 당당한 대답이다.

“중국 사신 장녕이란 한림학사를 알고 있느냐?”

“소녀 중국 분을 여러분을 모셨음으로 어느 분이 장녕이었는지 송구스러우나 장담할 수는 없사옵니다.”

김식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으며 내일 저녁엔 귀국해야 하는데 밤은 오늘 뿐이다.

그런데 맹랑한 자동선과 잠자리를 하려면 오늘밤만으론 불가능해 보여서고 비록 기생이지만 반듯한 언행이 어느 정경부인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소녀 손을 놓으셔야 사신 어른께 술을 권해드리지요.” 김식은 자리에 앉아서도 자동선의 손을 놓지 않았다.

자동선의 손은 따뜻하고 포근하며 중국여자와 이웃 속방국가 여자들과 다르게 김식은 평온함을 느꼈고 자동선이야 말로 진정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이 처음이 아니며 올 때 마다 조선여자들과 잠자리를 했으나 자동선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그 여자들과 전혀 다른 느낌이다.

꼭 잠자리를 같이하고 싶은 여자이고 밤은 속절없이 깊어갔으며 김식의 언행은 점점 노골적으로 나왔다.

삼월이라 조선 땅엔 꽃이 활짝 피어나/ 꽃 속에서 그대 만나 거나하게 취했네./

멀다한들 그다지 먼 나라가 아니니/ 오늘 갔다 내일 또 올 수도 있다네.

김식은 행여 외국인이라 깊은 정이 들어 헤어지면 걱정이 될까 미리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다는 것까지 예고했지만 구렁이 같은 늙은 떼 놈의 속셈을 모를 자동선이 아니다.

산 속에 사는 중이 달빛이 탐이 나/ 물과 함께 달빛도 병에 담아 왔소./

절에 돌아와 병을 기울려 보니/ 달은 간데없고 병에는 물 뿐이어라.

이규보의 시 '무제'(無題)이고 자동선은 늙은 네가 나를 아무리 탐내도 나는 달빛과 같은 여자이니 헛물켜지 말라는 일침이다.

그러나 노련하고 끈질긴 김식이 쉽게 물러설 리가 없으며 손은 어느새 뱀이 혀를 날름대듯 자동선의 속곳 밑을 이곳저곳 오고가고 있었다.

사내의 손은 불같이 뜨겁고 징그러우며 자동선은 계속 옆에 앉아 있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려하였다.

“허허! 너는 내 옆에 그냥 앉아 있거라. 춤이야 딴 아이한테 추라고 하렴.”

김식이 육십은 넘어 보이고 머리까지 백발이나 사신으로 다니면서 주지육림의 대접을 받아 주름 하나 없는 팽팽한 피부다.

김식의 행동은 대담하였지만 상국(上國)의 사신이라 누구하나 감히 충고나 예의를 지키라고 말 한마디 못하는 분위기다.

“내 너에게 선물 하나를 해야겠다.”라고 말한 김식은 호주머니에서 비취(翡翠) 노리개 한 쌍을 꺼내 자동선의 가슴에 달아주었다.

“아니옵니다!”라고 매몰차게 말을 한 자동선은 당나라 시인 장적(張籍)의 '절부음'(節婦吟)을 읊었다.

그대 아시 듯 소첩은 남편 있는 몸/ 어쩌자고 쌍명주를 정표로 주오./

따뜻한 그 애정 사무치게 고마워/ 붉은 비단 저고리에 살짝 차보오.라고 읊고는 말을 이었다.

“이 비취는 주인이 따로 있사옵니다. 여기있는 기녀 중 소첩보다 더 예쁜 비취가 있사옵니다. 그 여인을 불러 따뜻한 가슴에 달아주시옵소서!”

말을 마친 자동선은 가슴에 달린 비취를 빼 김식에게 건넸고 자동선은 김식에게 큰 절을 하고 자리에서 떠났다.

“저런 버릇없는 계집을 봤나! 어디 명나라 사신 앞이 어떤 자리라고...” 송도 유수는 안절부절못하였다.

“아니요. 괜찮소이다. 자동선을 돌아가게 그냥 놔두시오. 동방예의지국다운 절부요. 내 부끄럽소. 남편이 있는 여자를...”

김식도 자동선의 똑 부러진 언행이 기분 나쁘지 않고 보호해 주고 싶은 여자로 보였던 것이며 이때 비취가 나타났다.

“소첩이 비취옵니다.” 자동선에게 성정이 흐려진 김식은 비취도 예뻐 보였다.

“오! 네가 비취냐? 이제 이 비취 주인이 나타났구나.” 김식은 앞뒤 안 가리고 비취를 품었다.

자동선은 집으로 뛰 듯 걸어갔으며 영천군과 사가정은 여전히 술판이다.

“나으리들! 소녀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국익을 위해 잠시 자리를 떴을 뿐 되레 너의 절도 있는 언행에 박수를 보내주어야겠구나.”

사가정의 분위기 통솔 능력은 누구도 당해내지 못할 것이며 영천군은 졸다 마시다 하고 있었다.

“영천군 나으리! 소녀 자동선이 다녀왔습니다.”

자동선이란 말에 영천군은 놀란 토끼모양 반짝 눈을 떴으며 어느새 닭이 홰를 치며 새벽을 알린다.

“자동선은 영천군을 모셔라! 나는 객사로 가련다.”

사가정은 반쯤 남은 술잔에 술을 마저 마시고 일어나 나왔으며 달은 샛별에 가려 아름다움을 잃었고 저만치 희미하게 여인이 보였으며 제일청이다.

- 20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자동선(제18화)

 
 

문밖에서 갑자기 나귀의 울음소리가 들렸으며 자동선이 끌고 온 나귀다.

자동선은 벌써 송악산 유람을 위해 나귀를 끌고 객사로 영천군과 사가정을 모시러 온 것이다.

아직 어둠이 덜 걷힌 상태고 술국을 끓여 두 사내에게 대접하려는 속내다.

“나으리들 일어나셨는지요?” 제일청 목소리다.

“게 누구요? 이렇게 새벽 일찍이?” 사가정은 제일청의 목소리를 알아들었지만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것이다.

“예. 나으리 청교월에 제일청입니다. 자동선이 술국을 끓여서 나으리들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자동선이란 말에 영천군은 천둥에 놀란 아기 노루 모양 발딱 일어났고 두 사내는 자동선의 내실로 안내되었고 내실 안에는 처음 들어갔다.

자동선도 내실에 사내를 안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더욱이 두 사내를 동시에 스스로 안내한 것은 자신도 놀라워하고 있다.

어쩌다 기생이 되어서 사내를 접대하게 되었을 때도 술좌석에서 헤어졌고 잠자리를 같이 하기 위해 집으로 데려온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영천군과 사가정이 자동선의 내실에서 술국을 먹고 있으며 그것도 자동선이 직접 끓여 해장술과 함께 먹이고 있는 것이다.

경천동지 할 사건이며 생애 최초 자동선의 마음을 휘어잡은 두 사내다.

한 사내는 옥골선풍 헌헌장부의 품위로 자동선의 마음을 샀으며 한 사내는 웃음과 해학으로 자칫 위축될 수도 있는 분위기에서 자존심을 부추겨 주었다.

그동안의 사내들은 자동선을 욕정을 채워주는 고깃덩어리로만 보아주었던 것이며 자동선은 그런 눈초리가 죽기보다도 싫었다.

그런데 지금의 두 사내는 자동선을 하나의 인격체를 넘어 재기 넘치는 재녀(才女)로 대하여 더 없이 신나는 표정이다.

이제 해장 술국이 끝나면 제2차 송악산 유람길에 오르려 하고 오늘도 두 남자와 두 여자가 산행에 나섰으며 송악산은 언제 봐도 변함없는 명산이다.

그런데 사내들은 각각 마음이 딴 곳에 가 있으며 특히 영천군은 자동선의 자태에 넋을 빼앗긴 눈치다.

사가정은 자동선의 비위를 맞춰가며 영천군과 가까워지길 온 신경을 쏟으며 월하빙인(月下氷人·중매인)이 되었다.

송악산 중턱 즈음 오르자 옥수같은 물이 흐르고 그늘도 넉넉한 바위가 나타났고 제일청은 재빨리 돗자리를 펴고 술상을 차렸다.

“날도 더운데 더 올라가시지 말고 이곳에서 청풍명월(淸風明月)을 즐기세요!”라며 제일청이 퇴기다운 너스레를 떨었지만 사가정이 그냥 넘길 리가 없다.

“허허 청풍은 있으나 명월은 없지 않느냐?” 하자 자동선이 거들고 나섰다.

“참 나으리도 딱하시네요! 명월은 밤에만 뜨나요? 여기 낮 명월이 두 개나 떴네요?

아직 보지 못하신 모양인데 등하불명이 분명하시군요. 바로 옆에 두둥실 떠 있는데 못 보시고 있으시다니...”

“하하하! 내 이제 막 불혹(不惑:40)인데 봉사가 되었구나. 이를 어찌하면 좋지?”

천하의 사가정이 자동선의 말을 못 알아들을리 없겠으나 능청을 떨었고 이틀사이에 자동선이 농까지 할 정도로 여유로워졌다.

몇 백년은 됐을 소나무 그늘 아래 두 사내와 두 여자는 술판을 벌였으며 무릉도원이요 동천(洞天:신선이 산다는 이상적인 곳)이다.

사내들은 자동선주 몇 잔에 금방 취하였고 특히 사가정이 일부러 일찍 취한 척 혀꼬부라진 소리를 하며 오늘은 월하빙인 역할을 제대로 하려는 속내다.

“자동선아. 네 스스로 낮달이라 했으니 달을 보고 즐거워 할 사람들의 흥을 돋워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네 영리함으로 내 말을 모를리 없을 텐데... 술이 있으면 가무가 있어야 하고 계집이 있어야 하는데 낮달이 떴으니 계집은 됐고 가무가 없지 않느냐?

내가 거문고를 말할 것이고 거문고는 내 입속에 있느니라.” 술판은 점점 무르익어 갔으며 자동선의 춤은 가히 명품이다.

백결(百結:백번을 기웠다는 뜻) 선생의 떡방아소리 못지않은 사가정의 입거문고 음률에 맞춘 자동선의 춤사위는 명품 중 명품이다.

사가정은 신라 자비왕의 사람 백결의 떡방아 소리는 ‘금’ 악기로 켰으나 사가정은 입으로 거문고 소리를 냈다.

거문고 소리에 선녀의 춤을 뺨치는 자동선의 춤사위에 영천군은 넋을 잃었고 이때다.

자동선이 춤을 멈추며 “영천군 나으리, 오늘도 그림 하나 더 그려 주시지요?”라며 영천군 귀에 대고 속삭였고 춤을 추다 갑자기 멈추어 숨이 찬 목소리다.

춤추는 바람에 옷이 헝클어져 겨드랑이 사이로 자동선의 풍만한 한 쌍의 유방이 영천군 눈에 들어왔다.

“영천군 나으리 그리 하시지요! 자동선이 저토록 간청을 하니 소원을 풀어주시지요!”

사가정은 이때다 하고 자동선을 거들었고 자동선도 제일청에 눈짓을 하여 준비했던 비단을 술상 보에서 꺼냈다.

영천군도 기다렸다는 듯이 비단에 송악산과 송도 고을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송악산을 둘러싼 진봉산·봉명산·천마산·오공산 등을 일필휘지로 그려나갔고 영천군의 호탕한 운필에 자동선은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문득 생각이 난 듯이 “사가정 나리, 이 그림에 찬시 한 수 넣어주시지요.”라며 왼쪽 눈을 찡긋 눈웃음을 보냈고 사가정이 누구인가! 샘물처럼 즉각 시 한 수를 토해냈다.

노래는 끝났어도 가락은 끝이 없네/ 지난 일 뜬구름 같아 머리가 비어 있소/

옛 궁의 낙타가 울어 슬픔이 그윽한데/ 두견새 울어 예여 눈물조차 붉도다.

자동선은 그림과 시를 번갈아 감상하며 쏟아지는 감격의 눈물을 억제하였고 그때다.

“자동선이 어디 있느냐? 송도 유수께서 급히 너를 찾느니라. 내 말이 들리면 어서 대답하라!”

유수의 이방(吏房)의 숨이 찬 목소리며 사가정이 나서 이방의 말을 듣는다.

“무슨 연유냐?”

“자세히는 모르나 명나라 사신이 왔습니다.”

명나라 사신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자동선아, 어서 가서 명나라 사신을 맞아라! 우리는 너의 집에 가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라.”

영천군답게 국익을 먼저 생각하며 분위기를 추슬렀고 제일청은 재빨리 술판을 정리하고 자동선과 함께 명나라 사신의 연회장인 옥촉정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닭 쫓던 개꼴이 된 영천군과 사가정 두 사내는 자하동 자동선의 집으로 힘없는 발길을 향하였다.

- 19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자동선(제17화)

 
 

거문고 선율에 맞추어 자동선의 춤은 선녀같고 두 사내는 술잔을 든채 입을 딱 벌리고 자동선의 춤사위에 넋을 잃었다.

제일청의 거문고 솜씨도 뛰어났고 지금은 제일청이 퇴기로 청교방 거리 뒷전에 물러나 있으나 10년여 전만 해도 송도 한량들이 줄을 섰다.

미색에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거문고면 거문고 못하는 것이 없는데다 잠자리와 인심까지 박절하지 않아서 한량들이 부나비처럼 모였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에는 그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으며 지금은 자동선의 심부름과 손님들 길라잡이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더욱이 사가정 같이 가뭄에 콩나듯 예전의 고객이 찾아오면 알뜰히 모았던 주머니 돈까지 탈탈 털어 아낌없이 내주었고 정이 그리운 것이다.

제일청은 특히 사가정에게 애틋한 정을 느끼고 있으며 제일청이 송도유수 진명원(陳明元)에게 수청을 든 지 한 달이 채 안되었을 때 사가정을 맞았다.

그녀는 몸과 마음까지 열어 사내를 맞이한 것은 사가정이 처음이었고 지금도 헌헌장부에 여자들이 한번 보면 빠져드는 호남이지만

10여년 전 모습에선 광채까지 빛나는 옥골선풍이었고 그 모습에 제일청은 영혼까지 뺐겼으며 춤과 노래가 곁들인 술판의 여름밤은 짧기만 하다.

“이제 돌아가셔서 쉬시지요! 내일 송악산 깊은 곳을 유람하시려면 넉넉한 취침을 하셔야 해요.”

자동선은 영천군과 사가정을 닭쫓듯 내몰았고 지난밤도 낮에 찰나적으로 춤사위로 본 자동선의 앙증맞은 엉덩이와

신비하기까지 해 보이는 음문의 꿈만 꾸다 밤을 샜는데 오늘도 닭 쫓던 개 모양 객사로 내어 몰리자 영천군은 부아가 퉁퉁 부어올랐다.

“사가정, 우리 꼴이 이게 뭔가? 아무래도 한양으로 돌아가야 할 듯하네.”

“영천군 나으리!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자동선 하나를 못품고 한양으로 되돌아가자고요? 그것은 아니 됩니다.”

사가정의 말에는 자신감과 자존감이 섞인 단호한 의지가 담겨 있었고 풍류객의 넉넉함의 모습이다.

송도의 왕기는 이미 사라져 버려서/ 무심한 구름과 잡초만 무성하고/

성은 있어도 사람은 옛사람이 아니니/ 산천은 같아도 사람은 나그네 뿐이네.

사가정의 죽마고우 이승소(李承召)의 시다.

영천군은 천하미색 자동선을 오늘밤은 품으려나 하고 기대가 컸으나 헛물만 켠 자신이 너무나 미웠던 것이다.

무심한 달은 휘영청 밝고 깊은 산속에선 부엉이까지 울어댔으며 여름이지만 새벽공기는 제법 차갑다.

얼큰하게 취한 몸에는 한기까지 들며 재채기에 소름까지 돋았고 이처럼 으스스 할 때는 따뜻한 계집이 더욱 그리우며 두 사내 심정이 지금 딱 그러하다.

“영천군 나으리, 내일은 꼭 자동선의 마음을 잡으셔야 됩니다.”

“어떻게 그 아이의 마음을 잡는다는 거요? 나는 자동선의 속내를 알 수가 없어!” 가슴이 답답하다는 난감한 표정이다.

“장래를 책임지겠다는 징표를 주셔야지요? 천하미색 자동선이 몸을 내어줄 때 청교방의 기생이나 한양의 장악원 아이들을 생각하시면 아니 되십니다.”

영천군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에 검은 구름이 흘러갔고 두 사내의 갈피없는 대화는 어느새 새벽을 맞았다.

어젯밤에 마신 술로 속도 쓰리고 잠까지 설쳐 몸이 천근만근이고 영천군이 더 지쳤다.

“나 잠시 눈을 붙여야겠네.” 영천군이 어찌된 영문인지 금방 코를 골았으며 곧이어 잠꼬대를 하였다.

“야 이년아! 내가 누군데 네 년의 콧대가 얼마나 가나 보자!”

자동선에게 하는 소리 같다. 사가정은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여자의 마음을 너무나 모르는 영천군이 한심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사가정은 밖으로 나왔으며 객사 뒤로 개천이 흐르고 개천에는 며칠 전에 내린 비로 옥수같은 물이 철철 넘쳐흐르고 있다.

부엉이 울음소리에 두견새 소리까지 요란하고 한양 북촌과는 판이한 환경이며 바로 그때 등뒤에서 인기척이 났고 제일청이다.

“나으리, 소첩이 술국을 끓여 놨습니다. 영천군 나으리와 함께 오셔서 드시고 자동선에 가서 송악산 나들이를 떠나시죠!” 알뜰한 배려다.

“고마우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내 너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데...”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첩이 좋아서 하는 것인데 나으리는 개념치마소서.” 제일청의 갑자기 울음 섞인 목소리다.

“왜 무슨 일이 있느냐?” 사가정이 제일청을 품었고 제일청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으며 사가정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영천군이 자동선을 설득하여 한양으로 데려가면 사가정도 따라가면 언제 다시 볼지 몰라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 되어서다.

사가정은 제일청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다.

“내 영천군을 모시고 다니는 친구인지라 올라갔다 곧 다시 내려올 것이니라. 너무 아쉬워하지 말거라.” 사가정이 제일청의 등을 두드려 겨우 진정시켰다.

“주제도 모르고 주책없이 날뛰어 소첩이 밉지요?”

“아니니라. 나는 네가 귀엽고 예쁘기만 하니라.”

제일청은 예쁘고 귀엽다는 말에 마음이 진정되는지 울음을 그쳤으나 속으로 우는지 어깨가 들썩이다 한참 후에 멈추었다.

퇴기에게 귀엽다는 얘기는 결코 칭찬이 될 수 없지만 똑같은 말이라도 누구한테 듣느냐가 중요하다.

지금은 사가정에게 듣는 예쁘고 귀엽다는 말은 제일청에겐 진정으로 하는 말로 들려서다.

날은 암담하고 시간은 더디간다./

좋은 시절 돌아왔으나 옆은 싸늘하다./

향로 연기는 내마음 수심같이 끊길 줄 모른다.

술 한 잔 들고 국화를 바라보는데

바람에 흔들리는 여윈 모습이/

문득 내가 아닌가!/

임은 그리움을 부르고 외로움은 임을 부른다.

이청저의 '안개 엷고 구름 짙은 시름 가득한 긴 오후에'이고 지금 제일청의 마음이 이청조와 닮은 꼴일 것이며 사내들은 같을 것이라 생각하는 제일청이다.

품고 욕정을 채울땐 그들은 입속의 혀라도 빼줄 듯이 말하다가도 떠나면 남이 되는 것이 기방을 찾는 사내들의 속성이다.

제일청은 사가정도 그들 중의 한 사내일 것으로 생각하는 분위기다.

- 18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자동선(제15화)

 
 

두 사내와 한 여자는 송도 유람에 나섰고 사가정의 제의로 성사되었으며 자동선은 술과 안주를 챙겨서 나귀에 올랐다.

사가정은 영천군에게 나귀를 탈 것을 권하고 싶었으나 자동선에게 아직 효령대군의 자제라는 것을 밝히지 않은 상태다.

건장한 사내에게 나귀를 타라고 여자인 자동선에게 양보를 권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송도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송악산으로 발길을 재촉하였고 자동선이 길라잡이며 나귀 위의 자동선은 더 예쁘다.

사가정이 고삐를 잡고 영천군이 뒤따랐으며 제일청도 자동선이 불러서 함께 동행을 하였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상쾌하며 여름이지만 오전에는 송도의 날씨가 시원하고 사가정은 콧노래가 절로 나왔으며 제일청이 따라와서다.

제일청은 비록 이젠 노기(老妓)로 옥골선풍 헌헌장부의 발길은 뚝 끊겨 청교방거리 뒤켠에서조차 밀려났다.

그러나 인간미가 넘쳐 옛정을 못잊어 심심치 않게 사내들이 드나들었고 사가정도 그 중의 한 사내며 세월의 무게가 실린 아름다움이다.

썩어도 준치라고 어찌 보면 한창 때는 자동선을 뛰어넘는 미색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세월에 밀려 자동선 손님의 뒷바라지에 나섰다.

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가 없다고 하더니 빈말이 아니었다.

청교방 거리에서 제일청하면 오가는 사람에게 물어봐도 “저기 저 집이요!” 라고 했는데 지금은 철지난 꽃으로 쳐다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가정에겐 제일청이 철 맞아 한창 피어난 꽃처럼 보였으며 영천군은 나귀에 탄 자동선의 동태만 살피고 사가정은 제일청의 속삭임에 정신이 없다.

송악산으로 가는 길엔 왕윤사(王輪寺)가 있으며 울창한 삼림에 둘러싸인 왕윤사는 한 때 수백명의 스님들이 거주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웅전과 초라한 건물 몇 채만이 옛 영화를 대변해 주고 있으며 대웅전에 닿자 자동선이 나귀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대뜸

전각은 황량하고 중은 보이지 않네/ 황금 부처님만이 뉘연히 앉아 있네/

선탑에 쌓인 먼지를 바람이 쓸어가고/ 어두운 창가에 달이 등불처럼 비친다.

용재 성현(慵齋 成俔)의 시다.

사가정이 깜짝 놀라 “네가 어떻게 내 친구 성현의 시를 알고 있었느냐?”라며 자동선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한양 나으리는 풍류엔 뛰어난데 기녀들을 너무 낮게 보시는 경향이 있으시네요? 앞으론 그렇게 보지 마세요.

그렇게 했다간 큰 봉변을 당할 수도 있사옵고 기녀들을 길가에 핀 한 떨기 꽃으로 보시고 꺾었다 버리면 그만이란 생각은 이젠 버리셔야 하옵니다.”

자동선의 단호한 말투에 천하의 풍류객 사가정도 움찔하였고 어설피 행동했다간 영천군 앞에서 망신을 당할 것 같아 언행에 신중을 속으로 다짐하였다.

자동선은 단순히 미색으로만 보았는데 높은 인격과 풍부한 학식을 갖추어 웬만한 사대부는 우습게 볼 학기(學妓:학식이 높은 기생)가 아니었던가?

영천군도 성현의 시를 읊는 자동선을 보고는 침착해 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으며 사내들은 충동적이고 본능이다.

농경사회에서 사냥을 해 가족을 먹여 살리는 생태적 본능이 시대가 바뀌어도 본능은 바뀌지 않으며 시대와 환경에 발전, 진화하여 언행도 바뀔 뿐이다.

두 사내와 두 여자는 짝을 이뤄 어느새 귀산사(龜山寺)에 이르렀고 왕윤사에 공민왕이 자주 들린 것과 같이 귀산사에 충렬왕이 들려 국태민안의 기도를 올렸다.

산이 깊어 갈수록 송악산 절경이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울창한 나무 위에선 꾀꼬리들이 쌍쌍을 이루어 노래 부르며 사랑을 나누고 있다.

벌써 영천군은 피곤해 보이는 기색이고 사가정은 어떻게든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야했으며 마침 널따란 바위가 나타났다.

“제일청아! 우리는 봉우리로 올라가 정상을 보자꾸나! 두 분은 여기서 잠시 쉬었다 올라오시게 하고...”

말을 마치기도 전에 사가정은 제일청의 손을 잡고 달리듯 정상을 향해서 발길을 재촉했으며 영천군도 기다렸다는 듯이 행동에 나섰다.

“자동선아, 사가정의 말대로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자! 내 어젯밤에 한숨도 못자 피곤해서 더는 못가겠다.”

영천군은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고 그는 바위에 주저앉아 이인로(李仁老)의 '산거'라는 시를 읊었다.

봄은 가고 꽃은 아직 남아 있는데/ 하늘은 맑고 골짜기는 그윽하다./

두견새 소리가 한낮에 들려오니/ 여기가 살기 좋은 곳임을 알았노라.

사랑을 하면 누구나 시인이 되는 듯 자동선 앞에서의 영천군도 도연명이 오얏마을에서 심정인 듯하다.

사가정은 산봉우리에서 영천군을 기다리다 못해서 술병을 들고 다시 바위로 내려왔다.

“두분께선 서로 보기만 하고 뭘 하고 계십니까?” 젊은이들이 만났으면 한바탕 불꽃을 튕겨야 하지 않나요?“

자동선은 사가정의 말에 즉각 반응을 보였다. ”그게 무슨 해괴한 말씀이세요? 이 대명천지에...“

그러나 사가정이 누구인가! 한 치도 물러설 리 없다. ”허허 하늘이 맺어준 배필 같으오.“

사가정은 말과 동시에 술잔을 영천군에게 건넸으며 연천군은 마침 목이 탈 때다.

“허허 자동선이 눈치도 빠르고 웃어른을 모실 줄 아는 현숙한 여인인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알았나 보네.

이 어른이 어떤 어른인지 아느냐? 세종임금의 손자이시고 효령대군의 자제분이시다. 정성껏 잘 모셔야 하느니라!”

세종임금의 손자라는 사가정의 말에 깜짝놀란 듯 자동선이 발딱 일어나서 큰절을 올린다.

“소녀 어르신을 몰라 뵈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주시옵소서.”

“아니니라. 내가 밝히지 않은 죄가 더 크니라!” 옆에 있는 사가정의 표정이 밝아졌고 영천군이 그 어느때 보다도 표정이 밝아서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피로한 표정이 역력했는데 그런 기미가 온데간데없어졌다.

영천군은 자동선이 따라준 술잔을 받아 마시고 그녀의 손을 덥썩 잡아서 산봉우리를 향해 뛰듯 걸었고 산봉우리에 올라가선 무슨 일을 결심한 눈치다.

- 16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황진이(제29화)

 
 

마음이 답답하거나 세상의 갈피가 보이지 않을 때면 진이는 박연폭포를 찾았다.

폭포수 앞에서 노래가 아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 가슴이 조금은 열려지기 때문이다.

한양 살이 3년 동안 생기가 넘치는 세상을 보고 송도에 들어서자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유몽인(柳夢寅)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진이는 여자들 중에서 뜻이 높고 협기가 있는 자로 평했으며

허균(許筠)은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에서 성품이 활달하여 남자와 같으며 거문고를 잘 타고 노래를 잘 불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진이는 예쁜 여자로 태어났으나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한혈마를 타고 만주벌판을 질풍노도처럼 달리고 싶어하는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의 기개를 닮은 여장부다.

그런데 그녀는 고려의 수도가 아닌 조선시대의 송도에서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나

사대부집 딸로 출생한 것으로 15년 동안 금지옥엽 호의호식하며 성장하여 신동소리를 들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서녀 신분으로 바뀌어 기생(妓生)의 길로 들어섰다.

숱한 사내들의 품을 통하여 세상살이를 살펴봤으나 진이는 성에 차지 않았다.

사내들은 진이를 정복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녀는 그들을 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남자 특유의 정복 심리이고 사내는 여자에게 들어오면 죽으며 정복이 아닌 포로가 되는 신세다.

진이는 숱한 사내들을 품어 봤으나 마음에 들고 존경할 만한 상대를 찾지 못하여 방황하고 있다.

진이는 문득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을 번개처럼 떠올렸고 화담이라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존경의 대상이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진이는 어느 때 보다도 곱고 단아하게 차려입었고 하늘에서 하강한 선녀(仙女)의 모습이다.

어깨엔 자신의 키 만한 거문고가 메어져있고 손에는 송도 명주인 태상주와 간단한 안주가 들려졌다.

화담을 공략하러 가는 길이고 때마침 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으며 진이는 비를 맞으면서도 '대학'(大學)은 젖지 않도록 가슴에 품었다.

제자가 되게 해달라고 호소하러 가는 길이며 술과 거문고는 자신의 재능을 보여주려는 속내다.

지체 높은 사대부집에서 천하의 소리꾼과 바람둥이들에게서 세상살이를 체득한 당돌한 계집이다.

진이의 명성은 송도를 넘어 한양은 물론이고 중국의 사신들은 조선에 오면 그녀를 찾아 자고 가는 것을 최고의 예우를 받는 것으로 생각하기까지 하였다.

중국의 사신뿐만이 아니며 그들을 보내고 영접하는 조선의 관리들도 명월관에 들려 진이를 탐하였다.

화담도 제자들의 얘기를 통하여 진이의 신상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진이가 화담을 뵈러 가겠다고 연통을 넣고 갔으나 집에 있지 않았으며 진이가 화담의 제자가 된다면 홍일점(紅一點)이 되는 것이다.

화담의 문하엔 기라성 같은 문인들이 많으며 행촌 민순, 사암 박순, 초당 허엽, 술한 박민헌,

토정 이지함, 지채 홍인우, 수암 박지화, 연방 이구, 동강 남언경, 죽계 마희경, 이재 차식,

남봉 정지연, 이소재 이중호, 척암 김근공, 사재 장가순 등 그밖에도 많은 인물들이 있다.

이 같은 문하에 진이가 군침을 흘렸고 그녀가 존경하며 사랑하고 싶어질 사내가 행여 생길까 기대를 하는 속내다.

하지만 화담의 문하생이 되는 길이 그렇게 쉽게 열리지 않았고 당나귀 등에 화담이 즐긴다는 음식과 태상주를 싣고 화담에 도착했을 때는 집안이 텅 비었다.

아름다운 집이었고 진이는 마음속으로 화담선생의 거처가 선인(仙人)들이 산다는 동리(東籬)인가 싶어 눈이 휘둥그레졌다.

송악산 동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오관산 화곡이 그곳이고 오관산은 산봉우리가 다섯 개 나란히 서 있어 멀리서 보면 왕관처럼 보인다.

기암괴석이 둘러선 화곡에는 봄엔 진달래와 산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 산기슭을 불꽃처럼 물들이고 가을엔 붉은 단풍이 타올라 절경이다.

화곡을 한참 오르면 거대한 바위가 움푹 패어 이루어진 연못 화담(花潭)이 있다.

서경덕은 화담 곁에 초당을 짓고 세속과는 거리를 둔 채 ‘주기론’(主氣論)을 주창하며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다.

이곳에 진이가 오늘 나타났다.

붉은 나무 병풍처럼 둘러친 산에 어른거리고/ 푸른 시냇물 거울 같은 웅덩이로 쏟아지네./

신선세계 가운데 거닐며 시 읊으니/ 갑자기 마음이 맑고 깨끗해짐 느끼네.

서경덕의 '대흥동'을 떠올렸을 것이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말끔히 개고 반짝 해까지 났다으며 비온 뒤의 날로 청자 빛의 상쾌한 분위기다.

초당 주위엔 여름 꽃들이 만발하였고 비까지 내려줘 활짝 핀 꽃들이 생기발랄함으로써 화담은 더욱 아름다운 신선들이 산다는 동리로 보였다.

진이는 피곤함도 잊은 채 화담 주위와 초당 곁을 살폈고 연못엔 이름 모를 고기들이 춤을 추며 노래라도 하는 듯이 즐거워 보였다.

연못 주위엔 나팔꽃과 해란초, 그리고 금낭화와 패랭이꽃까지 다투어 피어 또 다른 꽃의 세상을 만들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며 꽃 그림자들이 화담을 감쌀 때 두런두런 인기척이 났으며 화담 일행이 연못 앞으로 드러났다.

진이는 가슴이 뛰기 시작하였고 허엽이 다가와 당나귀에 실린 짐을 받아 광에 들여놓고 진이를 화담에게 소개해 주었다.

진이의 얼굴이 활짝 핀 나팔꽃 빛깔로 변하였다.

소나무 아래서 동자에게 물었더니/ 스승님은 약초 캐러 가셨어요./

이 산중에 계시긴 하지만/ 구름이 자욱하여 계신 곳을 모르겠습니다.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의 '은자를 찾아 갔으나 만나지 못하다'를 회상한 듯하다.

하지만 진이는 화담을 극적으로 만났으며 진이는 화담을 만난 것만으로도 황홀하다.

조선팔도를 누비고 다니며 숱한 남자와 뜨거운 살을 섞으며 사랑을 찾아 봤으나 아직까지 찾지 못하였다.

진이 그녀가 찾아 헤매는 사랑하는 사내는 22살이나 위인 화담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어렵사리 황홀한 기분으로 꿈속에서도 마음대로 못 뵈었던 화담을 극적으로 만났다.

- 30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황진이(제28화)

 
 

몇 년 만에 극적인 해우로 정염을 불태운 진이와 이생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제 정신을 찾았다.

동창으로 새벽달이 들어와서 알몸뚱이 남녀를 감싸고 있으며 접동새 울음이 멀리서 들려온다.

밤새 풀무질 하고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이생의 손이 진이의 사타구니로 뱀처럼 기어온다.

진이도 싫지 않았으며 자기 마음에 드는 사내의 살 내음을 맡은지 얼마만인가?

한양에서도 송도에서도 진이가 마음만 먹으면 사내는 굴비를 꿰듯 꿸 수가 있으나 그녀는 화담 서경덕 같은 사내를 찾고 있는 것이다.

제2 화담(서경덕 호)은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이 뻔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계속 찾는 걸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는 순간 진이의 삶은 무의미해지기 때문에 그녀가 존재하는 한 제2의 화담 찾기는 지속될 것이다.

이럴 때면 진이는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를 떠올렸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진이의 집념은 서릿발 같고 숱한 사내들을 품에 안았으나 화담으로 향한 마음은 변치 않았다.

30년 면벽 수행의 지족선사를 뜨겁게 품었으나 그녀의 펄펄 끓는 가슴을 식힐 남심(男心)은 아직 찾지 못하고 오늘도 방황하고 있다.

그래서 진이는 전국을 바람처럼 거침없이 마음 가는대로 나도는 남사당을 찾았고 진이의 기질과 딱 맞는 느낌을 받았다.

구경꾼으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인지 아니면 단원의 한사람으로 참여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을 때 이생이 나타났다.

하룻밤 정도는 미륵(彌勒)같은 존재일지는 모르나 진이의 마음을 채워줄 영혼의 사내는 결코 아니다.

그들은 새벽 운우지락을 한바탕 즐기고 낮 동안은 밤새 뜨거운 살을 섞으며

육체의 허기를 채울 때와는 다르게 뜨악한 분위기로 있다 날이 저물자 다정한 부부모양 남사당패 놀이마당을 찾았다.

낮에는 논·밭으로 나가 일하고 해가 서산으로 고개를 숙이자 농부들은 집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몇 백 년은 됐을 소나무 밑에 차려진 남사당놀이는 어둠이 깔리자 횃불로 사위를 밝히고 판이 벌어졌다.

진이는 어름사니 재주에 마음이 쏠렸고 기생이 되기 전에 남사당을 알았다면 어름사니가 되었으리라 생각하였다.

언듯언듯 횃불에 비치는 얼굴이 당차 보였고 자신보다는 어려보이지만 줄 위에서 날렵하게 자유자재로 재주를 부리는 개성 있는 연기에 매료되었다.

진이는 어름사니가 부러웠고 몇 년 전에만 이 같은 남사당놀이를 알았다면 기꺼이 입단하여

어름사니가 되었으리라는 생각에 이르자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에 갑자기 서글픈 마음이 앞섰다.

“뭘 그렇게 골돌이 생각하고 보시오? 가서 국밥으로 저녁이나 먹읍시다.”

이생이 잡아끄는 대로 국밥집에 가서 이화주(梨花酒)에 국밥으로 저녁을 때웠다.

주막으로 온 이생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오뉴월 들소모양 진이에게 달려들었고 한바탕 제멋대로 육체의 허기를 채운 후

“나하고 아주 삽시다. 지난번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집에 갔더니 나는 할 일이 없었소이다.

나는 아버지가 싫어 집을 뛰쳐나왔는데 아버지는 나를 버리지 않고 유산을 남기셨더라고.

그 유산이 만만치 않아 우리 둘이 넉넉히 여생을 즐길 정도야! 그동안 나하고 재미있는 추억이 많았지 않소?”

의기양양한 이생의 말투였고 진이의 귀에는 이생의 말이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광평의 쇠처럼 굳은 심지 일찍 알았으니/ 내 본래 잠자리 같이 할 마음 없었네./

다만 하룻밤 시 짓고 술 마시는 자리에서/ 풍월을 읊으며 꽃다운 인연을 맺고 싶을 뿐...

고려시대 기생 우돌(于咄)의 '국섬에게'이다.

진이가 이생이 자기와 평생을 같이 살자는 제의에 갑자기 우돌의 시가 떠올라 사내 손을 버러지인 냥 소스라쳐 떨쳐버렸다.

진이에게 남자는 화담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몽주가 단심가로 고려 충신으로 영원히 남았듯이

진이가 번개처럼 포은(정몽주)의 단심가를 떠올린 것은 이승에선 화담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끝내려 하는 것이다.

포은은 이방원이 '하여가'(何如歌)로 회유했으나 끝까지 버티다 선죽교에서 포살되었다.

목숨을 건 고려 충신의 마지막 모습이었고 그리하여 포은은 역사에 영원히 역사로 살고 있으며 진이도 그렇게 하려는 의지다.

“왜 대답이 없소? 아버지에게 성(姓)은 받지 않았으나 유산을 받아 어차피 불효자로 찍혔으니 진이의 남자로 여생을 살고 싶소!”

“이생 서방님은 아직도 이 진이의 마음을 모르고 계십니까?

삼남을 비롯하여 금강산·지리산을 유람하면서 저의 온갖 것을 다 보고서도 더 보고 싶은 것이 남았습니까?

정신 차리세요! 이 진이는 어는 한 남자의 여자로 애초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에요.”

진이는 이생에게 말을 퍼붓고 벌떡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입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엔 보석을 뿌려 놓은 듯이 별이 총총하고 몸에선 이생의 정액이 비릿하게 풍겼다.

유람할 때 수없이 느꼈던 익숙한 향기 같은 냄새이고 몇 년 전의 일이 어젯밤 정사처럼 또렷이 떠올랐다.

갈피를 못잡아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려는 듯이 진이가 부리나케 남사당놀이 마당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구경꾼들의 요란한 함성과 박수에 신명나는 예쁜 어름사니는 줄 위에서 멋진 곡예를 부렸다.

저벅저벅 이생도 진이 뒤를 따랐고 남사당놀이는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보름달은 아침 해가 붉게 떠오르자 하늘의 자리를 내어주며 서쪽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넓디넓은 하늘의 자리에서 떠나기가 서러운지 붉은 태양이 아침 하늘에 불쑥 솟구치고서야 겨우 자리를 비켜주었다.

태양은 천상 사내여서인지 보름달이어도 여자는 수줍은 표정으로 하늘자리를 계속 버티지 않았다.

진이는 말로는 이생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으나 마음 한 구석엔 따뜻한 양지를 만들었다.

이생 정도면 마음을 터놓고 투정을 부리며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세양과 이사종은 넘치고 처졌으며 어쩌면 이생이 자기에게 딱 맞는 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비몽사몽의 상태에서 화담이 홀연히 나타나 학춤을 추며 힐긋힐긋 진이를 훔쳐보았다.

- 29화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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