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려야 한다는 뜻으로,
이는 '삼국지'의 화용도 전투 이야기에서
유래했습니다.

위나라의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거의 모든 병력을 잃고 도망치던 중이었습니다.
이에 촉나라의 전략가인 제갈공명은
퇴각하는 조조군이 지나갈 것으로 예상되는
화용도에 군대를 배치했습니다.

그날은 날씨가 몹시 추웠는데 비까지 내렸습니다.
조조의 병사들은 비에 젖어 추위에 떨었으며,
제대로 먹지도 못한 굶주린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화용도의 길은 온통 진흙탕이 되어
걷는 것조차도 불편했습니다.

그때, 관우가 이끄는 촉나라 병사들이 나타났습니다.
관우는 촉나라에서 제일가는 명장이었고,
병사들은 최강의 부대였습니다.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조건이었지만,
관우는 한때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조조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퇴로를 열어 조조의 군사들이
도망갈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제갈공명은 관우의 죄를 물어 처형하려 했지만
유비의 간청으로 살려주게 되었습니다.

이후, 제갈공명은 유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조조는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니었고,
저는 제가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였사옵니다.
사람의 목숨은 하늘의 뜻에 달려 있으니
그 명을 기다릴 수밖엔 방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거미줄도 모이면 사자를 묶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최선을 다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먼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하늘에 맡겨야 합니다.


# 오늘의 명언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때,
우리 혹은 타인의 삶에 어떤 기적이 나타나는지
아무도 모른다.
– 헬렌 켈러 –

언제나 은혜가 먼저입니다

 




마리아 앤더슨은 세계 최초 흑인 오페라 가수이자
미국의 위대한 여자 성악가 중 한 사람입니다.
앤더슨은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어릴 적 교회 성가대에서 음악을 처음 접한 후
성악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던 그녀는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협연자로 뽑히기도 했으며
뉴욕 맨해튼 홀에서 독창회를 가질 정도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나 앤더슨이 활약하던 시기는
인종차별이 심했던 때였습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식당 출입을 거절당하기도 했으며
호텔에서도 투숙을 거부당했습니다.

심지어 워싱턴 DC에 있는 컨스티튜션 홀에서는
그녀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예정되어 있던
공연을 취소해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녀는 노래할 수 없는 현실에 깊이 절망했습니다.
그때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위로했습니다.

"얘야, 먼저 은혜를 알아야 한다.
오늘 네가 여기까지 온 것도 다 누군가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줬기 때문이야."

이 말에 그녀는 평안과 감사를 회복하고
다시 일어나 목청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래, 홀에서 노래할 수 없다면
어디서든 하면 되지!'

1939년 워싱턴 링컨 기념관 광장에서 진행한
무료 야외 연주회에서 7만 5천여 명의 청중들이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받았던
은혜를 기억하며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위해
무료로 노래를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지방 도시에서 공연을 갖게 되었을 때
가난한 한 흑인 소녀가 호텔 구석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많이 외로워 보이는구나."

"네, 오늘 그토록 보고 싶었던
마리안 앤더슨의 공연이 근처에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일을 해야 했기에...
갈 수, 없었어요..."

앤더슨은 울상이 된 소녀의 손을 잡고는
나지막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를 들은 소녀는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당신이 마리안 앤더슨이었군요."





성공, 성취보다 언제나 은혜가 먼저입니다.
나에게 끼쳤던 은혜를 믿고 그 은혜 안에 살면
세상이 어떠할지라도 평안할 수 있고,
당당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햇빛처럼 모든 사람에게 두루 내리는 것이 은혜지만
오직 겸손한 사람만이 그것을 은혜로
받을 수 있습니다.

볼품없던 자신을 보살펴준 누군가의 도움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아는 사람만이
은혜를 은혜로 누릴 수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과거의 은혜를 회상함으로 감사는 태어난다.
– 제퍼슨 –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소녀



여러분은 '얄개'라는 말을 아시나요?
'야살스러운(얄망궂고 되바라진) 짓을 하는 아이'라는
뜻을 가진 이 말은 주로 자유분방하고
얄궂은 젊은 시절을 가리켜 쓰는
말인데요!

1950년대에는 소설에서,
1970년대에는 영화에서,
1990년대에는 대중가요에서
'얄개시대'라는 말이 계속 등장하는 것을 볼 때면
우리 모두가 얄궂은, 얄개의 때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여러분에게는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날 만큼 풋풋하고 짓궂었던
시절이 있으신가요?

빛바랜 일기장처럼 언제 꺼내 봐도
아름답고 소중했던 기억으로 간직되는
추억이 있나요?

그 아름다운 기억 속에서
여러분과 함께했던 그 소년, 소녀는
누구였나요?

그 시절,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의
그 순수한 얼굴과 풋풋한 모습을 꾹꾹 눌러 담아
삽화를 준비해 봤습니다.

이번에도 일러스트 안에 총 5개의
그림이 숨어있답니다~


따뜻한하루그림 찾기5회 숨은그림찾기

5회 숨은그림찾기

내 옆에서 걸으라



미국의 콜로라도 주 서부와 유타 주 동부에 살면서
쇼쇼니어를 쓰는 인디언 유트족이 있습니다.
이 부족은 평등한 인간관계를 강조했는데,
다음은 유트족 인디언의 격언입니다.

'내 뒤에서 걷지 말라
나는 그대를 이끌고 싶지 않다
내 앞에서 걷지 말라
나는 그대를 따르고 싶지 않다
다만 내 옆에서 걸으라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그들은 신분이나 계급으로 차별하지 않고,
모든 부족민을 독립적인 존재로
존중했습니다.

또한, 부족을 대표하는 추장도
부족민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의견을 실행에 옮기는
역할만 했다고 합니다.





사람으로서 내가 소중하다면
당연히 다른 사람도 소중해야 합니다.
타인을 존중하고 아끼면 나 자신도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고 물으면
사람, 사람,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 마오리족 격언 –

 

반지의 진짜 의미



반지는 손가락에 끼우기 위해 존재합니다.
반지(斑指)의 '반(斑)'은 '나누다'는 뜻이고
'지(指)'는 손가락을 가리킵니다.

결혼반지의 유래에는 여러 이야기가 있는데
그중에서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동그라미가 영원을 상징해
원형인 반지가 두 사람이 영원히 함께하는
결혼을 의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변함없는 사랑을 언약하며
'나의 사랑이 되어주세요', '결혼해 주세요'라는 의미로
손가락에 반지를 나누어 낍니다.

금이든, 은이든, 옥이든 무엇으로 만들어도
반지가 가지는 의미는 퇴색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눈앞의 반짝임에 현혹돼
금이라는 재료에만 오직 초점을 맞춘다면
반지는 그저 욕망덩어리가 됩니다.





사랑의 무게는 눈에 보이지 않고
몇 그램인지 잴 수도, 값을 매길 수도 없습니다.
그 무엇보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두 사람의 순수한 마음입니다.

진정한 가치 있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자신의 운명도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힘써라.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순서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19세기, 중국 청나라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벌어졌을 때 일어난 이야기라고 합니다.

황제는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지만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는 반란군의 세력에
황제가 보낸 토벌군은 계속 싸웠지만
계속 지고 말았습니다.

'연전연패(連戰連敗)'라는 글이 포함된
보고서가 올라올 때마다 황제는 토벌군의 장수에게
큰 벌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유능한 관료인 '증국번'이
토벌군 장수로 임명되었지만, 갈수록 강해지는
반란군을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황제에게 보내는 보고서에
연전연패가 아니라 '연패연전(連敗連戰)'이라고
순서를 바꿔 보고했습니다.

즉 자신은 비록 계속 패배하고 있지만,
패배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싸우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에 황제는 '증국번'에게 벌을 내리기보다
오히려 증원군을 보냈습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서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성공이 되기도 하고 실패가 되기도 합니다.


# 오늘의 명언
먼저 당신이 원하는 것을 결정하라.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당신이 기꺼이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라.
다음으로 그 일들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곧바로 그 일에 착수하라.
– H. L. 린트 –

참 오래된 마을인가 보다 

도심이지만 오래된 가옥과 나이많은 노인네들이 텃밭을 가꾸며 사는 달 동네

이곳을 지나는 마을 주민들이 연세가 많아 뒤뚱 뛰뚱 걷는 모습이 팽귄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팽귄마을

오래된달 동네에 에술인들이 모여 오래된 고물들을 줏어 모아 하나 하나 꾸며 낸 마을 풍경이 

정감이 가고 손때 묻은 오래된 물건들에 눈길이 가는 곳

마지막까지 총을 놓지 않았던 영웅들



온 국민이 월드컵에 열광하고 있던
2002년 6월 29일, 그날은 한일 월드컵 3, 4위 전이
열리던 날이었습니다.

경북 의성에서 과수원 농사를 짓던 서영석 씨는 오전 9시,
TV 뉴스에서 제2연평해전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서영석 씨는 곧바로 지도를 가지고 와서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어? 여기 우리 아들 근무지인데?"

그리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오더니
아들이 전사자 명단에 있다고 했습니다.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국군수도병원 영안실에서 태극기를 가슴에 안고
하얗게 잠들어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니
모든 상황이 비로소 실감이 났습니다.

"내 아들 후원이가, 정말 떠났구나...
너를 지켜주지 못해서 너무 미안하구나..."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故 서후원 중사는
삼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평생 농사를 짓던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
장기 복무를 신청했을 만큼 이름난 효자였습니다.

군에서 받는 월급은 모두 부모님께 드리고
본인은 용돈을 받아 생활했고,
입대 전 아버지 서영석 씨가 고된 농사일로 몸져눕자
홀로 과수원 농사를 짓기도 했습니다.

그는 2001년 8월, 군에 입대했고
제2연평해전이 일어나기 3개월 전
참수리 고속정 357호의 기관실 내연사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북한 경비정 두 척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해 온 그날,
그들은 우리 해군의 참수리 357호정을
기습 공격했습니다.

기관실 내연사였던 故 서후원 중사는
끝까지 대응 사격을 하다가 적의 총탄이 가슴을 관통하면서
그 자리에서 전사했는데 그의 나이 겨우
22살이었습니다.





따뜻한 하루는 조국을 위한 불굴의 투지와 정신력으로,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임무를 끝까지 완수한
故 서후원 중사의 희생을 기억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유가족분들에게
500만 원 위로금을 전달했습니다.

비록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유가족들의
마음을 달래기엔 턱없이 작고 부족하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말해야 했습니다.
정말 감사하다고...

제2연평해전에서는 서후원 중사 외에도
5명의 청춘들이 끝까지 NLL을 사수하다 전사했습니다.
따뜻한 하루는 제2연평해전 22주년을 맞아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합니다.


= 제2연평해전 영웅들을 영원히 기억해 주세요 =



꼭 기억해야 할 역사, 제2연평해전.
서해 NLL을 사수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치열한 교전을 벌였던 참수리 357호정의 해군들과
그곳에서 전사한 6인의 영웅들...

미안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당신들의 희생이 우리를 살게 했습니다.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점심 식사를 하기위해 들린 중국집 한켠에 그려진 낙서들

유명한 맛집에만 있다는 낙서판 그곳에 삶의 애환과 행복함을 느낄수 있는 따뜻한 글들이... 

홍어 장수 문순득 표류기



문순득(1777년~1847년)은
조선의 어물 장수였으며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 일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평범한 삶을 살던 그가 조선왕조실록에
이름 석 자를 남긴 이유는 그가 표류하면서 벌어진
파란만장한 여정 때문이었습니다.

1801년 12월, 24살의 청년이었던 문순득은
흑산도 인근에서 홍어를 사고 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거친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문순득이 탄 배는 망망대해를 2주일이나
속절없이 표류하고 낯선 섬에 도착했습니다.
류큐 왕국의 '대도(大島)'라는 곳이었는데
지금의 일본 오키나와였습니다.

다행히 현지인들은 표류자들을 잘 보살펴 주었고
그곳에서 문순득은 8개월을 머물면서
그 나라 말과 풍습을 배우면서
빠르게 적응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아냈는데
그것은 중국으로 가는 류큐 왕국의 조공선에 탑승해서
중국을 거쳐 조선으로 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1802년 10월, 문순득은 중국을 향하는 배를
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풍랑을 만나 하염없이 동남쪽으로 흘러갔고,
열흘 후 배가 도착한 곳은 중국이 아닌
스페인 제국 필리핀 도독령이던 루손 섬에
표착한 것이었습니다.

긍정적이며 호기심 많고 영리한 사람이었던
문순득은 9개월간 그곳에서 머물며
현지어를 익히고 서양 문물을
열심히 배웠습니다.

그 후 문순득은 마카오, 광저우, 난징, 연경을 거쳐
조선 관리를 따라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가 고향에 돌아온 건 1805년 1월.
홍어를 사서 배에 오른 지 3년 2개월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정약전이 쓴 '표해시말(漂海始末)'에 기록되었으며
책 속에는 문순득의 체험과 정약전의
실학 정신이 잘 드러나 있고,
200년 전의 일본, 필리핀, 마카오, 중국의
풍속, 의복, 집, 배, 언어 등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문순득은 조선 시대 신분 구조인
'사농공상(士農工商)' 중
가장 낮은 상인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글을 잘 쓰지 못해,
정약전을 만나지 못했다면 자신의 경험을
후대에 남기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비록 신분도 낮고 배움도 적었지만
불굴의 용기와 강인한 정신력을 가졌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역경을 헤쳐 나갔습니다.


# 오늘의 명언
당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결심하는 그 순간이다.
- 앤서니 라빈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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