藝河 옆지기 淸雲

풍류야화 황진이(제10화)

송도팔경 구경 채비에 부산하고 한양으로 올라가기 전에 팔경을 모두 보지는 못해도 몇몇 곳은 보고 가려는 속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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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신이 났는데 옥섬은 시무룩하고 며칠 전부터는 식사도 거를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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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가 송도팔경을 구경하고 한양으로 올라가면 옥섬은 다시 퇴기신세로 돌아갈 우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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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섬은 퇴기생활이 무섭고 진이가 황진사 딸로 어느 사대부집 며느리로 들어갔으면 오늘의 고대광실의 명월관에서 살기는커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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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도 못할 신세인데 후원을 오가며 행복을 누리는 삶이 깨질까 벌써부터 겁이 났으며 진이는 옥섬이모의 심정을 익히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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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 진이가 송도를 떠나 명월관을 없앨까 걱정하시는 것 같은데 마음 놓으세요! 명월관은 이모 생전엔 진이가 주인으로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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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가 한양에 올라가더라도 이모가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해 드리고 갈게요! 진이는 한양에서 3년만 살고 송도로 다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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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야, 내가 이 한 몸뚱이를 걱정해서가 아니고 낭랑(朗朗)18세란 것이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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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닥(기생의 세상)엔 낭랑18세 때 한몫 잡아야 퇴기 때 설움을 당하지 않아. 진이 너도 어느새 낭랑18세를 넘어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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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섬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내려와 진이 손등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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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 걱정 말아요! 이 진이만 믿고 지금처럼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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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섬을 끌어안은 진이의 두 눈에서도 비 오듯 눈물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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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섬을 볼 때마다 진이는 십수 년째 생사를 모르는 어머니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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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다. 팔경 구경 할 채비가 다 되었다는 손으로 신호를 보냈고 이사종은 옥섬의 눈엣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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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종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진이가 한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으리란 생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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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이사종은 옥섬의 눈에 되도록 띄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으며 밥도 사랑채에서 혼자 먹고 후원에서 주로 낮 시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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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의 정무는 명월관에서 출근하여 처리해 되도록 진이와 낮 시간을 보내려 하고 관아의 아전(衙前:관아의 말단 실무자)들은 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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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전이 정무만 간단히 처리하고 자리를 비우니 눈치 보지 않고 잇속을 차리고 관기(官妓)까지 희롱하면서 노는 재미에 날 새는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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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는둥 시늉만 하고 이사종과 말에 올라 팔경 구경 길에 올랐으며 이사종도 옥섬의 따가운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어 하늘을 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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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님, 오늘은 우선 팔경을 모두 볼 수 없으니 서강풍설(西江風雪)과 장단석벽(長湍石壁)만 구경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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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곳이 진이는 팔경 중 제일 마음을 사로잡아요. 팔경은 고려 대학자 이제현(李齊賢)이 '익제난고'에 최초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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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팔경은 중국의 북송(北宋)화가 송적(宋迪)의 소상팔경(瀟湘八景)에서 유래했고 이를 고려말 개성의 아름다운 여덟 곳에 응용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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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을 중국에서 들여다 우리 것으로 만들 듯 고사성어 등 각종 문물도 중국의 것을 모방한 것들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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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의 표정이 상기되기까지 하였고 소리꾼 이사종은 갑자기 진이의 진지한 표정에 엄숙한 자세를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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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특히 '서강풍설'에 매료되었어요! 제가 곡을 붙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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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강변가의 지붕을 덮었고/ 바람은 포구가의 돛대를 흔들어 놓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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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에 올라가 남창을 열고 보니/ 구름 낀 바다는 아득하기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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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실같은 생선회를 썰어 놓고/ 술 단지 기울여 한 잔 마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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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성강 굽어보며 한 곡 부르니/ 하두강은 애간장 끊어지는 듯 아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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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마나 멋과 풍류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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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의 거문고 반주에 명창 이사종의 노래가 서강풍설의 아름다움에 화룡점정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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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풍설을 구경한 뒤 말 채찍에 힘을 가해 장단석벽을 거쳐 그들은 서둘러 명월관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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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도 허리가 아프도록 욕정을 채웠으나 그 밤이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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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숱한 사내들의 욕정을 채워 주었으나 이사종은 자신이 좋아 계약결혼까지 한 사내이니 마음 놓고 육체의 허기를 채울 수 있는 상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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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송도생활 3년은 모든 것을 자신이 대고 한양의 3년은 소실(小室)의 자리로 계약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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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철저하게 계획된 생활을 하루하루 뜨겁게 보냈고 그토록 뜨거운 세월은 세 번의 봄과 세 번의 가을을 향하여 이미 유수같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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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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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한양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한양에 가면 3년은 송도에 올 수 없으니 장단석벽을 한 번 더 보고 떠나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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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고 관아로 출근하려는 이사종에게 의사를 물었으며 풍덕군수는 엄연히 매일매일 정무가 있는 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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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관아로 가서 잠시 정무를 보고 곧 돌아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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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종은 말에 올라 바람처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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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옥섬이모가 걸렸고 명월관엔 옥섬이모 말고도 여러 식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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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가 한양으로 올라가면 명월관은 임금 없는 대전(大殿)같이 썰렁해져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퇴기생활을 했었던 옥섬이 더욱 노심초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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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 걱정하지 마세요. 진이가 이모가 3년 동안 편히 사실 수 있게 모든 준비를 해 두었으니 편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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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가 3년 후 가을에 정확히 송도로 돌아올 거예요!

이 아름다운 송도팔경을 두고 어디로 떠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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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또 장단석벽에 거문고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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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은 산높이 떠 있는데/ 공중에 눈썹같은 절벽 열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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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와 용은 굴 구비로 굴러가네./ 백리나 푸른빛이 감도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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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파리한 물속에 잠겼는데/ 꽃은 비단처럼 곱게 쌓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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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배에서 술 마시고 풍악 치며/ 돌고 또 돌아 천 바퀴나 돌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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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진이의 노래가 옥섬의 귀엔 장송곡(葬送曲)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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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때가 조금 지나자 이사종이 돌아왔고 점심도 거른 채였으며 진이가 겸상을 하여 대낮이지만 태상주를 곁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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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큰하게 달아오른 그들은 송도의 마지막 밤이 되기도 전에 뜨겁게 엉켰고 진이는 이사종의 움직임에 옥섬이 가르쳐 준대로 몸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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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몸은 달아오르지도 않았는데 선수를 쳤으며 숨을 몰아쉬고 콧구멍을 벌름벌름 대며 입을 벌리고 두 다리에 힘을 넣어 뻗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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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종이 의아해 하면서도 덩달아 몸을 움직여 주자 진이는 가식이 아닌 송도팔경을 보며 막연히 그리워하였던 신선세계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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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화에서 계속 -

[출처] 풍류야화 황진이(제9화)|작성자 청솔

풍류야화 황진이(제8화)

주지스님의 정성어린 보살핌과 간곡한 기도로 진이는 기적적으로 다시 세상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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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암에 들어온 지 보름이 지난 깊은 밤이었고 그날도 주지스님은 대웅전에서 진이를 위해 기도를 하고 있었으며 산사는 바람 한 점 없는 물속처럼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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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조용했던 산사에 눈보라가 몰아쳤고 갑작스런 바람에 나무 위에서 눈꽃을 피웠던 눈들이 바람에 떨어지면서 눈바람이 산사를 삼켜 버릴 듯 요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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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이 보이려면 한참은 더 있어야 할 즈음이고 대웅전에 있던 주지스님이 마당으로 나와 기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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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소란스런 광경을 몸소 느끼려고 진이가 방에서 나오는 순간 하늘에선 천둥번개가 작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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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광경을 보려고 희미한 눈을 부비다 진이는 다시 세상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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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보인다. 세상이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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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기도하는 주지스님의 품을 파고들었으며 스님은 이미 알고 있었듯이 진이를 깊고 따뜻하게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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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날이 밝으면 암자를 떠나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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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스님이 말을 남기고 품었던 진이를 풀어놓고 다시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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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와 덕구는 먼동이 트자 암자에서 내려와 한학금의 의동생 퇴기 옥섬의 집으로 갔으며 옥섬의 집은 청루가 즐비한 청교방 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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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금이 진이를 황진사에게 주고 어디론가 종적을 감춘 후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옥섬은 청교방 거리에 자그마한 집을 얻어 거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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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이 셋인데 하나는 늘 정갈하게 정돈하여 비워두었고 진이가 언제든지 오면 마음 놓고 편히 쉴 수 있게 해둔 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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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섬이모, 진이가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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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가 올 줄 알았다는 옥섬은 덤덤하였고 해는 어느새 중천에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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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하겠다. 아침도 못 먹었을 텐데 밥부터 먹어라!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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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래기 국에 감자가 섞인보리밥이었고 숟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진이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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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 진이가 전우치(田禹治)를 봤어요. 제가 천둥번개가 작렬하게 칠 때 가슴이 떨리고 무서운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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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고 싶어 희미한 눈을 부빌 때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동시에 하늘에서 백마 탄 옥골선풍의 선비가 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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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야, 이제 너는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말하고 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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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전우치가 아니고서야 그 밤에 어떻게 그곳에 올 수가 있겠어요? 소문으로 들은 전우치와 똑 같았어요! 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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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의 눈에는 지금도 실상암 앞에서의 비몽사몽 장면이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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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우치의 도술(道術) 얘기는 송도에서는 흔한 애기였고 특히 재령군수 박광우(朴光佑)는 전우치와 친구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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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술은 혹세무민하다 하여 금기시 되었고 전우치도 도술을 부린다하여 경계당한 인물이며 나라에서 사형명령이 떨어진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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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중(中宗:1506~1544)시대 전우치는 친구인 박광우 집에서 목매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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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몇 년 뒤 누군가 박광우를 찾아와 전우치의 지팡이를 달라기에 그를 쳐다보니 전우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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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서경덕 형제들과 도술 경쟁 등의 애기들이 송도엔 낯설지 않은 화젯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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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도 아버지 황진사 집에 있을 때 사랑채와 어머니 신씨 등에 오가는 얘기들은 귀동냥하여 생소하지 않았는데 실상암에서 극적으로 비몽사몽 상태에서 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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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진이로선 전우치의 얘기들이 낯설거나 의문투성이도 아니었고 아버지 서재의 각종 서책에서 도사(道士)들의 얘기를 수없이 접해 익히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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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의 기생 입문은 속전속결이었고 동기(童妓)로 시작하여 2년 사이에 송도와 한양의 한량들이 품고 싶은 미색(美色)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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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가 열여덟살을 맞는 어느 봄날 고을 유수에게 수청을 들게 되었고 본인 진이보다 현학금의 의동생인 옥섬이 더 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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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 유수의 수청을 잘 들어 좋은 점수를 얻어야 관기(官妓)의 운명도 좋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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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도 예외가 아니었고 사대부집 딸에서 어느 날 갑자기 서녀가 되어 마침내 기녀(妓女)가 되었으니 한량들 세상의 관심의 여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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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 수령이 동기들의 초야권을 갖는 것은 이상 할 것도 없으며 진이의 초야권도 그렇게 송도 유수가 태상주(太常酒) 한 잔 마시듯 어느 날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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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의 기녀생활 삼년 만에 기적에서 나와 자유인으로 한량들의 세계를 주름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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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앞에 한량들의 부나비처럼 몰려들었고 비록 몸을 파는 기생이나 마음에 드는 사내도 있으며 소위 순정이란 것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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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花代)을 주고 진이의 몸은 샀으나 영혼까지 살 수는 없어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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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사내들이 진이의 몸뚱이를 사서 육체의 향락을 즐겼으나 시·서·화의 삼절(三絶)을 넘어 노래와 춤, 기예(技藝)까지 능통한 영혼까지 사지는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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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 사내가 진이의 영혼을 사로잡았고 바로 이사종(李士宗)이며 그는 부도 명예도 없는 소리꾼 낭만파 소위 집시(Gipsy)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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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청년에게 진이의 영혼이 넋을 빼앗겼고 이사종은 어느 고관대작의 서자(庶子)이며 조선의 대표적 옥골선풍에 소리를 잘하는 떠돌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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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가 같은 서자 출신인 삼당시인 이달(李達)과 둘도 없는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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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은 허엽의 아들 허봉과 가까운 사이이며 허엽은 후에 진이와 같이 서경덕의 동문수학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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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사종은 진이와 영혼이 통해 명월의 집에서 무상으로 먹고 자는 유일한 사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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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없을 땐 그들은 밤을 새는 신혼부부로 자연스럽게 뜨거운 밤으로 갔으며 옥섬은 걱정이 태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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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나이 열여덟이면 절정의 꽃같은 시절인데 자칫 무일푼의 떠돌이에게 정신이 팔려 좋은 시절 다 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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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같은 신세가 될까 눈앞이 캄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 사내들과 살을 섞을 때면 진이는 옥섬의 말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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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뜨거워져야 사내들도 뜨거워진다?”를 실천하여 비록 화대를 받고 몸을 내어 주었지만 제 남자처럼 사랑스런 여인이 되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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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판 '소녀경'(素女經)이나 '현묘경'(玄妙經)이 되어 남녀칠세부동석이 아닌 남녀동등사회의 선구자가 되려는 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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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생사조차 알 길이 없는 어머니 현학금이 열여덟에 거문고의 명인이 되었는데 진이 역시 같은 나이에 그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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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남녀관계를 뛰어넘어 학문의 세계까지 섭렵하여 누구와도 밀리지 않는 역할을 하였고 고려의 핏줄을 이어받은 진이는 항상 길재(吉再)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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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고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를 되새기며 미래를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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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화에서 계속 -

[출처] 풍류야화 황진이(제7화)|작성자 청솔

풍류야화 황진이(제6화)

천재는 세상에 쉽게 나오려하지 않았고 임신 소식을 우서(羽書·서찰)로 황진사에게 알리자 얼굴이 백짓장 같이 질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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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그럴 것이 장님 기생을 건드려 임신 시켰다는 소문이 퍼지면 아직 출사도 제대로 못하였는데 출세 길이 영영 막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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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사는 오자마자 낙태를 권하였지만 현학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황진사는 겁쟁이에다 철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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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금은 황진사가 돌아간 후부터 초승달이 뜨면 추렴을 걷고 섬돌에 내려앉아 그리운 님을 생각하며 깊은 상념에 빠지고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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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폭넓은 학문의 세계로 아마도 당(唐)의 이단(李端)의 '초승달에 절함'을 떠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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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렴을 걷고 초승달을 보고는/ 섬돌에 내려 다소곳이 절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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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이는 하소연은 아무도 못 듣는데/ 북쪽 바람이 치마 띠를 휘날린다.’의 분위기와 너무나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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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당나라 시를 그들의 수준만큼 이해하고 쓰는 소위 삼당시인(三唐詩人:백광훈·최경창·이달)을 존경의 시선으로 볼 정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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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문학이 차지하는 문화예술 수준이 어느 정도였다는 것이 짐작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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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왕조시대엔 규방(閨房) 문화는 기를 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으나 상대적으로 기방(妓房) 문화는 극소수이지만 힘차게 맥을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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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금은 보통 기생이 아니었고 요즘말로 하면 예술가였지만 그녀도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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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을 하고는 엄마가 될 준비에 들어갔고 황진사와 뼈를 녹인 애틋한 순간에 매몰되어 있을 시간이 없었으며 배는 하루가 다르게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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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야 할 음식을 경계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의남초(宜男草:허리에 차면 아들을 낳는다는 약초)를 허리에 차는 일도 빠뜨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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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는데 출산할 장소가 문제였지만 거문고를 타고 노래 부르는 것은 복대를 두르고도 출산 며칠 전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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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금의 옆에는 친정 동생과 의동생 옥섬이 그림자처럼 있었고 해산달이 다가오면서 걱정이 현실로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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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 며칠 전까지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른 것은 유수와 아전들에게 뇌물을 써 입을 막으려는 술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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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여 몇 주간의 출산휴가를 얻어 박연폭포를 거슬러 올라 실상암 관음굴로 숨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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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도 새도 모르게 출산을 하려는 의도였지만 아이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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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밤낮의 산통을 하면서도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고 양수도 터지지 않을 뿐 아니라 자궁은 오히려 체면을 지키려는 듯이 조개모양 더욱 오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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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금은 파죽음이 되어 갔으며 친정 동생과 의동생 옥섬을 본인보다 더 앉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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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도 현학금은 마음속으로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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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고달프나 곧 나올 새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출산의 고통으로 인해 잃지 않으려는 치열한 자기 체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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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이 환하고 환하여/ 얼굴이 능소화 같구나./ 운명이지 운명이로다./ 천시(天詩)를 만나 태어났건만/ 아무도 나를 아리땁다 하지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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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趙)나라 무령왕의 꿈에서 처녀가 거문고 타는 모습의 장면을 연상한 맹요의 '열녀전'을 애기하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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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지독한 산통으로 정신을 잃을 아찔한 찰나에까지 이르렀으나 중국의 신화 '산해경'의 애기들을 계속 떠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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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같이 극락과 연옥을 오가며 뱃속의 아기와 씨름을 하는데 새벽 종소리에 놀란 듯 놀랍게도 지궁이 열리며 툭하고 어미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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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폭포처럼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리며 세상에 신고를 하였고 진이의 탄생은 관음굴에서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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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현학금은 아이를 안고 동생을 따라 관가로 가지 않고 집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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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집은 사대부 가문은 아니었으나 중인(中人)의 악사집으로 체면을 중시하고 분수를 아는 집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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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때부터 대대로 이어지는 악사(樂士)집안으로 예인(藝人)의 DNA가 전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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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금이 비록 군왕(郡王)을 잘못 만나 비장의 결의로 장님이 되는 비극적인 운명이 되었으나 자존심은 어느 누구보다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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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금이 기녀신분이나 사대부 못지 않은 문화예술세계를 가졌으며 그 같은 시가(詩歌)의 재능은 진이한테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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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사는 출산 며칠 후 현학금 앞에 나타났고 진이를 데려다 조강지처가 낳은 딸로 키우려는 속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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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의 탄생을 본가 동생과 의동생, 그리고 유수와 몇몇 아전들만 알 뿐 세상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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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의 딸로 키우려는 것이냐? 내가 네가 원하는 딸 이상으로 데려다 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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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량 아진의 아버지 진정성에 현학금도 계속 버티지 못하고 진이를 품에서 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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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보쌈하듯 칠흑같은 어둠에 황진사 집으로 옮겨졌고 조강지처 신씨품에 안겨 친딸처럼 쑥쑥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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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를 황진사에게 넘긴 이튿날 현학금은 거문고를 메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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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듣던 금강산을 직접보고 몸소 체험하고 싶은 것이며 일만 이천봉 퍌만구암자 골짜기마다 거문고 소리에 맞춰 신명나는 유람을 하려는 속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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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야 핏덩이를 떼어놓고 떠나는 간장을 녹이는 어미 마음이 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며 금강산은 아름답고 실로 경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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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현학금의 생각대로 총명하고 아름답게 성장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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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른 동생 난(蘭)이도 “언니 언니”하며 잘 따랐고 두 살 위 오빠 경(敬)이 역시 배다른 동생 티 안내고 슬기롭게 처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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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의좋은 삼남매였고 황진사와 조강지처 신씨도 그같이 의좋은 삼남매 생활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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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이의 행복은 거기까지였고 키워준 어머니 신씨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진이의 신분이 사대부집 딸에서 서녀로 둔갑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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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 몸에서 출생했으나 범상치 않은 미색(美色)에 영리하기 까지 한 진이에게 천성이 착한 신씨는 배 아파 낳은 자식과 차별없이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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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와 난이와는 다르게 자고 깨면 아버지 서재에 들어가 책을 읽는 모습에 겉으론 드너내지 않으나 속으론 키운 보람이 있구나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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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도 철석같이 신씨가 친엄마로 알고 15년을 살아왔으며 그러던 어느 날 청천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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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실로 들어가라는 아버지 황진사의 권고를 뿌리치고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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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소녀 집을 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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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큰절을 넙죽하고 입던 차림 그대로 집을 나와 기생의 길로 들어갈 결심을 굳혔고 자유인이 되려하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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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황진이(제5화)

동쪽 동인문밖 물가에서 거문고를 타면 아득히 먼 중국의 장강(長江·양자강의 본명) 이남에서 흑학들이 떼 지어 날아와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 춤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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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악금(玄鶴琴)이 거문고를 타면 학들이 날아와 춤을 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진이의 모친인 진(陳) 현학금의 이름에 대한 유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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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금은 열한 살에 기적에 올라 비파와 가야금을 거쳐 거문고에 빼어난 기량을 보여 열다섯 살에 악사(樂士) 기생으로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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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금은 이때부터 어디를 가든 자신보다 훨씬 큰 거문고를 가로로 메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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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금의 열아홉 살 단풍이 풍악산(금강산 가을 山名)에 곱게 물든 가을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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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년 연산군(燕山君:1476~1506)의 집권 10년이 되는 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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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성군의 자질을 보였으나 친어머니(폐비 尹氏)의 참극을 안 후 그는 폭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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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은 팽개치고 원수 갚기와 계집질로 세월을 보냈으며 홍문관을 없애고 정치 논쟁을 금하기 위해 경연(經筵)을 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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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불교의 산실인 원각사(圓覺寺)는 장악원(掌樂院)으로 바꾸어 기생들의 교육장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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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에서 마음에 드는 미녀가 모자라자 전국으로 채홍준체찰사라는 대신과 채홍준사와 채청사라는 급조된 관리들이 송도에까지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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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송도 관아엔 현학금도 있었고 빼어난 미모의 현학금도 여러 미녀들과 새로 설치된 운평에 갇힌 채 자색을 평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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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금은 뛰어난 절색에 거문고의 기예까지 갖추어 최고 점수인 천과흥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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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과흥청과 지과흥청의 미녀는 대궐에 들어가 임금의 성은을 입으며 임금의 특명이었으므로 고을의 유수조차 미처 손 쓸 겨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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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금은 경악하였고 악사기녀로서 은밀하게 자존심을 지켜왔는데 그 자존심이 일순간에 무너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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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이 생각끝에 의동생 기생 옥섬에게 비상약을 짓게 하였고 단호한 현학금의 부탁에 옥섬도 거부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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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을 먹은 현학금은 하룻밤 사이에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으로 변하였고 채홍준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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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마음에 쏙 드는 미녀를 뽑아오면 특별진급이나 두둑한 상금이 걸려있어 현학금이 딱 마음에 들었는데 그만 낭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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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의원을 불러 검사를 해봤으나 장님이 틀림없다는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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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현학금의 두 눈을 뒤집어 보기까지 했으며 채홍준사는 현학금을 체념하고 기적에서 빼내주어 운평에서 나와 집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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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금은 채홍준사와 채청사들이 한양으로 올라간 후 금강산에 몸을 의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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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을 먹고 억지 장님이 되어 이 골짜기 저 골짜기 사찰로 다니며 걸식을 하면서도 거문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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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걸인 악사로 봄엔 금강산, 여름엔 봉래산, 가을엔 풍악산, 겨울엔 개골산 등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6년의 세월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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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금의 거문고 연주는 신기(神技)에 이르렀고 그녀는 장님 악사로 소문이 퍼져 관아의 연회 때마다 단골로 초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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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금이 초대되었다는 연회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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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여든 사람들은 현학금의 천상의 거문고 음률에 세상시름을 실어 보내 홧병을 앓던 사람이 낫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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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이 내려앉은 앉은뱅이는 걸어서 집으로 가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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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은 소문을 낳고 현학금의 거문고 기적은 송도의 일상사가 되었고 그러던 어느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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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금 언니, 집에 있으면 뭐해! 병부교에 나가서 바람이나 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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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금은 이웃 악가들의 성화에 못이겨 병부교 빨래터에 나갔고 그날도 현학금은 천상의 음률로 거문고를 탔으며 고단한 아낙들의 세상시름을 덜어주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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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금이 비록 앞을 보지 못할 뿐 마음속으로 천상의 음률에 서경덕이 평생 흠모한 송(宋)의 시인 소옹(邵雍)의 '수미음'(首尾吟)의 일부를 실어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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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하늘의 침묵을 대변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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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부는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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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요부가 사랑할 수 있을 때/ 이미 마음을 쓸 때는 마음을 쓰고/ 말을 가하지 않은 곳엔 말을 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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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엔 모두 이치가 있는데 나는 무엇인가/ 하늘이 말하지 않으니 사람이 그것을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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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조화의 무한한 말을 대신하는 것이니/ 요부는 시 읊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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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금은 눈만 보이지 않을 뿐 눈을 뜨고 삼라만상을 보는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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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눈으로 보지 못하는 세상사를 탁월한 감수성의 발달로 범인들의 수준을 뛰어 넘었고 게다가 천상의 음률을 타는 거문고의 명인에 절세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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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마침 이곳을 지나는 한량이 있었으며 황진사(黃進士)였고 그의 눈에 현학금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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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사는 이미 현학금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송도가 넓다고 하지만 저잣거리에서 나도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금방 전 송도로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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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부교(兵部橋) 아래의 빨래터 아낙들의 입방아에 올라오면 그 소문은 바로 송도의 화젯거리가 되었고현학금의 거문고 소문을 황진사가 모를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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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낙들의 성화에 현학금은 천상의 음률을 관아의 연회가 아니면 타지 않는 연주를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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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현학금은 아낙들의 성화에 떠밀려 병부교 빨래터에 나와 거문고를 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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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금의 천상의 거문고 음률에 빨려들었고 청춘남녀가 만나면 서로의 콤플렉스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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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사와 현학금도 그러했을 것이며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으라 했으니 그들도 예외없이 사랑의 만리장성을 쌓았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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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현학금은 사랑의 만리장성을 쌓고 임신하여 조선 제일의 여류시인이며 송도삼절의 하나인 황진이를 낳는 어머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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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 시(詩)를 떠올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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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리 가시리 잇고

버리고 가시리 잇고 위 증즐가 태평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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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러든 어이 살라하고

버리고 가시리 잇고 위 증즐가 태평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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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사와 두어리 마는

선하면 아니 올세라 위 증즐가 태평성대

​

설온님 보내옵나니

가시는 듯 돌아오소서 위 증즐가 태평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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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요 '가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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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사와 현학금이 뜨겁게 사랑을 나누고 헤어질 때 '가시리'의 내용과 별 온도차이가 없을 심정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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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황진이(제4화)

양곡은 젊은 시절에 여색에 빠진 자는 남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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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이 시재(詩才)와 미모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친구들과 약속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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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여자와 30일을 동숙(同宿)하고 이별을 못하고 하루라도 더 머물면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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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곡이 친구들과 약속을 하였으나 그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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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일언중천금이라 했는데 사대부의 나라에서 친구들에게 한 약속을 선비가 지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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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천재지변이나 연로한 부모의 갑작스런 병고나 몸담고 있는 벼슬길에서 왕명도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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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낱 노류장화(路柳墻花)인 기생으로 사내대장부가 친구들과 한 약속을 헌신짝처럼 팽개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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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벌어진 사건이고 동네 청년들이 이웃집 예쁜 아가씨를 놓고 한 약속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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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송도 명월의 소문이 한양에까지 퍼져 한량들의 마음이 온통 들떠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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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를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 넣고 조선을 세운 신흥 사대부들은 체면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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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교(國敎)로 대대로 이어오던 불교를 과감히 유교(儒敎)로 교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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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칠세부동석과 삼종지덕(三從之德)등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인격체로 규정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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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제약을 법적(종모법 從母法)으로 또는 도덕적 올가미를 씌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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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적으로도 여성의 사회활동은 상당히 제한적이었으나 조선은 그 정도가 특히 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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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역사 속에서 잘 나가는 사대부 양곡이 일개 기생인 명월에게 빠져 ‘남아일언중천금’이란 세상에서 일탈하여 약속을 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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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의 나라 조선도 허리 밑에는 별수 없이 약했을 터지만 지체높은 양곡이 진이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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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 밑도 봄꽃처럼 피어나는 즐거움도 기쁨이지만 바다같고 만리장성같은 문화예술 세계에 탄복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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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인 일본은 사무라이의 나라로서 허리 밑이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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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나라 조선에선 일본과 달리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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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내들이 여자를 찾는 것은 찰나적이나 마초(macho)의 본능에 충실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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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향(色鄕)으로 소문이 난 송도에 가려함은 허리 밑을 충족시키려는 목적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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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곡도 진이와 30일이란 기간을 정하고 소위 계약 동숙(결혼)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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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진이는 평소에 양곡이 생각했던 노류장화가 아니었고 계약결혼 마지막 날 시 한 수에 그의 영혼은 넋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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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어린 뜨락에 오동잎 다 지고/ 서리맞은 들국화 노랗게 피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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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각이 높아 하늘이 한 척 이요/ 사람이 취해 술이 천 잔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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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물은 거문고 가락에 맞춰 서늘하고/ 매화는 피리소리에 들어 향기롭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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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아침 서로 헤어지고 나면/ 그리는 정은 푸른 물결처럼 길게 뻗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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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곡은 진이의 이 시를 듣고 한양의 친구들에게 “나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할 용기가 생겼을 것이고 진이를 알게 됨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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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으로 떠도는 진이를 직접 만나 뜨거운 살을 섞고 보니 저잣거리에 나도는 풍문이 얼마나 잘못 알려졌음을 알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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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류장화나 말하는 꽃이 아닌 지식인 진이라는 것을 알게 됨에 스스로 그녀 앞에 겸손하여 졌음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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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진이가 한시, 시조에 능통한 자유인으로 남자로 태어났다면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남명 조식, 하서 김인후 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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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학자 위치에서 경륜(經綸)을 논하며 문화예술세계를 한층 더 풍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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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곡은 그후 두 번 더 진이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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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결혼이란 세기적 발상은 조선사회를 경천동지(驚天動地)케 했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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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과 문화의 나라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와 여성해방운동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1929)보다 378년 앞섰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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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문여송과 소설가 김이연과의 계약결혼보다는 무려 400여년이나 앞선 선구적 페미니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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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곡은 진이의 시·서·화의 삼절(三絶)을 넘어 춤·노래·거문고 등으로 당시 조선이 상국(上國)관계로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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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화에도 정통하였던 그녀에게 녹아든 것은 어쩌면 사내로서 자연스런 현상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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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진이는 옥섬(진현금 의동생)으로부터 잠자리 기술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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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싸늘하면 사내 역시 싸늘할 것이요. 네가 뜨거우면 사내도 뜨거워 질 것이고 네가 깊어지면 사내 또한 깊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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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되이 움직이거나 소리를 질러서 힘을 빼지 말고 깊이 숨을 마시며 음기를 몸 전체에 고루 모아 낮은 소리로 한없이 속으로 빨아들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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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란 겉으론 천하를 움직일 듯 하지만 알고보면 연약하느니라.”라고 꽃잠(첫날밤)의 기술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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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진이는 여자로서도 완벽하였으며 학자(지식인)로서까지 조선의 사대부 수준에 손색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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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담 서경덕의 수제자 허엽과 동문수학했으나 오히려 그의 학문 수준을 훌쩍 뛰어 넘었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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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엽의 딸 허난설헌이 역시 조선시대에 출생하여 남성사회에서 그녀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고 27년이란 짧은 삶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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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은 사대부집 고명딸로 태어나 엄격한 사회적 제약으로 기를 펴지 못했으나 진이는 달랐고 그녀는 과감히 자유를 선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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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가집 딸에서 어느 날 갑자기 얼녀(孼女)로 전략하여 소실의 길 정도를 선택할 수 있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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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과감히 자유인 기생의 길로 들어섰고 억압의 비단길보다 자유의 자갈밭을 선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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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기녀생활 3년 만에 기적(妓籍)에서 빠져 나와 자유인이 되어 지족선사·소세양·벽계수·이생 등을 품어 진이의 세상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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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의 경륜과 문화예술세계는 외숙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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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진현금의 DNA로부터 이어받은 천부적 예능의 자질은 외숙부가 원천(源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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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숙부는 비록 하급 악사였으나 사대부 못지않게 학문이 높았으며 그의 서재엔 만여 권의 책이 빼곡히 꽂혀 있었고 그런 가족사를 진이는 고스란히 이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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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같은 진이의 세상에 대보름달이 휘영청 뜬 분위기에 남녀칠세부동석과 삼종지덕의 사내들이 불을 본 부나비처럼 하나 둘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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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화에서 계속 -

풍류야화 황진이(제3화)

양곡과 명월의 말이 나란히 걷고 있으며 풍악산(금강산의 가을 山名) 유람 길에 올랐고 잠자리에서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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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곡은 말 위에서 꾸벅꾸벅 졸았으며 어젯밤에 명월과 서너 번의 방사로 기진맥진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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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도 사타구니가 얼얼해 걷기조차 힘들지만 추호도 내색이 없었고 사내에게 지기 싫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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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녀는 사내를 맞을 때마다 우리나라 최초 여왕 선덕여왕의 여근곡(女根谷)에서 백제군을 섬멸한 역사를 상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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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곡이 30일 동거후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렸다고 생각하여 특히 잠자리에 신경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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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은 양곡의 30일 동거는 허풍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토하고 "나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친구들한테 고백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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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에 온지 30일 후에 개선장군처럼 한양에 나타나 번듯한 요릿집에서 한턱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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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시 인간이었다.”라고 일갈 하려는 배포를 무참히 꺾으려는 속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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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금강산은 풍악산으로 불리고 늦 단풍이 붉게 타고 있으며 바람이 쌀쌀하다.

​

어젯밤에 태상주 술기운에 둘은 밤새는 줄 모르고 욕심껏 육체의 향락을 즐겼음이 지금은 과욕이었다는 것을 둘은 한 몸처럼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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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박연폭포에서 점심을 먹고 말고삐를 돌렸으며 명월이 먼저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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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엊저녁에 대감께서 너무 깊이 사랑해 주셔서 더는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

풍악산은 다음에 구경하시고 오늘은 이만 돌아감이 어떠하실 지요?”

​

“그래도 되겠느냐?”

​

양곡은 방금 본인이 하려는 말을 명월이 대신 해준 말이라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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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는 쇳소리가 나고 입에선 단내가 풀풀 풍겼으며 자칫하다가는 말 등에서 떨어질 뻔 아찔한 순간까지 있었다.

​

하지만 박연폭포까지 와서 그냥 바람처럼 떠나갈 명월이 아니었다.

​

하늘에서 떨어지는 한 줄기 물줄기가 골짜기를 갈 듯 뿜어내니/ 용추에 떨어지는 백 길 물소리 우렁차라./

​

솟아 내리는 물줄기 쏟아지는 은하수인가 싶고/ 노한듯 가로 드리운 물줄기 바로 흰 무지개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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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쿠라지는 물벼락 온 골짜기에 가득하고/ 물보라는 부서지는 옥인양 갠 하늘에 사무치네./

​

유람객이여 여산폭포가 낫다는 말은 하지마오./ 천마산의 박연폭포 우리나라의 으뜸이라오.​

​

황진이의 '박연폭포'다.

​

그들은 풍악산으로 가려다 천마산의 박연폭포 늦가을 단풍에 취하여 있다가 귀가했으며 그들의 온 몸에선 늦가을 단풍향이 향수처럼 풍겨 나왔다.

​

명월의 특이한 선향(仙香 )과 단풍향이 어우러진 향이 양곡의 가슴을 다시 뜨겁게 달구었고 방에 들어서자 양곡은 명월을 힘껏 쓸어안았다.

​

양곡은 내일 한양으로 갈 몸이고 명월은 양곡이 하는 대로 몸을 맡겼으며 뜨거운 입김엔 어젯밤 열정의 단내가 얼굴을 감쌌다.

​

“명월이 나하고 한양에 가지 않으련? 개성보다 한양이 명월에겐 더 어울릴 것 같은데...

​

장악원(掌樂院)에 들어가 예약연구를 더하여 이론을 만들어 놓으면 후세가 그것을 배우지 않겠느냐?”

​

“소녀를 소실(小室)이 되라는 말씀인가요?”

​

초롱초롱하면서도 가을 호수같이 평온하였고 표정이 먹이를 노리는 맹금류(猛禽類) 눈초리로 변하였다.

​

“그런 뜻이 아니고 개성도 좋은 고장이고 천하의 명산인 금강산이 있어 유명한 도시이긴 하지만 조선의 중심은 역시 대궐이 있는 한양이지.

​

그곳에 가서 명월의 명성을 더욱 높였으면 하는 생각이지. 내 다른 뜻이 있어 한 말은 아니네!”

​

“뜻은 고마우시나 소녀는 개성의 몸으로 태어나 고려여인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렵니다.”

​

명월의 진지함이 흡사 출사표를 던진 전장에 나가는 장수의 표정이다.

​

“내 알았느니라. 너의 미색과 학식이면 한양에 가면 이곳보다 더 뜨겁고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네 의향을 물어본 것 뿐이니라.”

​

명월은 양곡의 검은 마음을 첫마디에서 알아차렸다.

​

사내들은 마음에 드는 기생을 노류장화(路柳墻花) 쯤으로 보고 소실로 집에다 앉혀 놓으려는 심보를 명월은 숱한 사내들의 유혹을 단호히 뿌리쳤던 것이다.

​

명월의 싸늘한 표정을 등 뒤로 느끼면서 양곡이 지필묵을 주섬주섬 챙겼다.

​

“지금 떠나시려고요?”

​

“가려하느니라...”

​

양곡답지 않은 풀죽은 목소리였고 명월은 말 등에 실린 거문고를 연두(몸종)에게 가져오라 하여 자신이 만든 곡을 타며 창을 불렀다.

​

낙양성 동쪽에 핀/ 복사꽃 오얏꽃/ 꽃잎이 날아가면 뒤 집에 떨어지나!/

​

낙양에 사는 계집애들은/ 얼굴이 시들까봐/ 떨어지는 꽃잎만 봐도/ 긴 한숨을 내 쉰다네./

​

금년에 핀 꽃지고 나면/ 얼굴 다시 여위리니/ 그 누가 와서 보여주리.​

​

이백(李白)의 '늙음을 서러워하며'다.

​

명월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내려와 거문고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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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명월을 젖먹이가 어미를 바라보듯 바라본 양곡이 갑자기 지필묵이 싸인 보따리를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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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야! 나를 예성강까지 배웅을 해주면 어떠하겠느냐?”라는 말을 등 뒤로 하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

어느새 해는 지고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별들의 하늘엔 벌레 먹은 사과모양의 달이 기우뚱하게 떴다.

​

말 두 필이 준비되었고 양곡은 대명천지에 명월관을 나서고 싶지 않아 계획적으로 밤에 길을 나서는 것이다.

​

“대감! 왜 제 기명인 명월을 부르지 않으시고 본명인 진이를 부르셨습니까?”

​

“기명으로 부르지 않는 것이 궁금하더냐?”

​

“그러하옵니다.”

​

“진이는 기명으로 부르는 것 보다 진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려서 내 앞으로는 그리 부르기로 마음먹었느니라.

​

명월이란 기명은 너무 멋스럽고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워 쉽게 다다가기가 어려우니라.

​

하늘에 두둥실 떠 있으면서 인간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어떻게 명월을 품을 수 있겠느냐?

​

앞으론 네 본명을 부르고 내 주위의 친구들에게도 진이로 부르도록 입소문을 낼 것이니라.”

​

그 후 명월이란 기명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고 그들이 예성강에 도착하자 나룻배 한 척이 대기하고 있다.

​

“내 한양에 가 정무를 처리하고 곧 다시 올 것이니라.”

​

진이는 왼손 약지의 은가락지를 뽑아서 양곡에게 건넸다.

​

나룻배의 횃불이 강 건너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을 한 진이는 밤이 이슥해서야 명월관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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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화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