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사회는 급격히 좌경화 되어 가거나, 있는 자들을 시기 질투하고 빼앗아 먹는 공짜심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버린것 같습니다. 특히, 코로나 시절부터 더 심한듯 했습니다.
거기에, 노동조합을 배경으로 탄생한 야당 정권의 문대통렁 시절 임금 상승여파로 이제 물가는 그렇게 비싸다는일본 물가를 앞질렀습니다. 이것이 고스란히 국민들의 세금으로 되돌아 오는 것을 넘어 나라가 망한다고들 합니다.
그러다보니 70년, 80년 산업현장에서 땀흘리면서 오르지 조국 근대화는 선진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마음으로 땀흘려, 일구워 온 한국 사회가 조금씩 무너져 가는 느낌은 저만이 아닌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더욱이, 젊은시절 한때 독일의 탄광에서, 리비아의 대수로 건설 현장에서 "땀흘리면서 근면성실하면 어디서든 잘살수 있다"는 그런 한국인의 정신을 요즘은 어디어도 느낄수가 없습니다.
특히, 저도 함께 몸담았던 경기도의 재정만 보더라도 김문수, 남경필 지사님 시절 미래의 경기도를 생각하며 재정을 아끼고 절약하여 건전 재정을 유지했던 상황이었던 것이, 이재명 지사 부터는 막 퍼주기 정책으로 재정을 엄청난 적자 재정으로 만든 장본인 (다른 범법 행위는 차치하고 라도) 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민들이 그들을 지지하고 있다는 현실이 정말 가슴 아픈 아침입니다.
물론, 저희들이 그렇게 힘들게 살아왔다는 것을 젊은 세대들이 알아 달라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런 절약하는, 땀흘려 일하는 정신으로 아이들을 키웠을때 선진 한국의 미래도 보장되는 법 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제 할아버지가 되어 가끔 놀이터에 가보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형제가 없이 귀하게 외동으로 키우다보니 애들이 자기만 알고, 독선적으로 커가는 애들이 많기에 정말 이 점이 개선되어야 아이들의 미래도 밝고 힌국 사회의 미래도 기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성의학자 존슨과 마스터스의 보고서에 의하면 남녀가 가장 희열을 느끼는 성적인 환상의 제일 첫 번째는
‘새로운 파트너와의 섹스’라고 한다. 우리의 옛말에도 같은 뜻을 가진 말이 있다. ‘일도 이비 삼첩 사처(一盜 二婢 三妾 四妻)’ 섹스 중 최고 상대는 '임자 있는 남의 여자'요, 그 여자를 '훔쳐서 하는 섹스'가 섹스 중의 섹스라는 것이다. 두 번째가 하녀와의 '마음대로 시키기' 식의 섹스요, 세 번째는 첩과의 '야들야들한 섹스' 가장 덜 매력적인 섹스가 부인과의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섹스’라는 것이다. 일도(一盜). 남자들이 최고로 치는 ‘훔친 섹스’의 속뜻은 이렇다. 금기 중의 금기에 해당하는 여자와의 섹스일수록 성적 자극이 극에 달한다는 것이다. 남자들이 청소년기부터 즐겨 읽는 빨간 책의 소재로 등장하곤 하는 '여교사’ ‘수녀’ ‘비구니’ 등과 같은 성적 금기의 대상들이 바로 그들이다. 일도(一盜)의 의미는 ‘금기를 넘어서고자 하는 남자들의 적극적인 성적 충동’을 뜻하는 것이다. 이비(二婢). 하녀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여자의 상징이며, 이것은 사디즘적 욕구를 마음껏 발산하고 싶어 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보통 사디즘이라고 하면 가죽 혁대 같은 것으로 여자를 무자비하게 때리면서 쾌감을 느끼는 병적인 사람을 먼저 떠올리지만 남자들의 사디즘적 욕구는 일반적인 것이다. 그것은 ‘강하게 여자를 리드해 보고 싶어 하는 욕구’와의 동의어다. 여자를 조금 거칠게 다루면서 자신의 남자다움을 과시하며 쾌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그런 욕구의 상징적인 표현인 것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성적 자유를 만끽하는데 아무 거리낌 없이 동조해 줄 ‘하녀’ 같은 여자를 꿈꾼다. 그런 짓은 너무 수치스럽다거나 동물적이라는 비난 없이 남자의 욕구를 알아차리고 기꺼이 응하면서 그 안에서 자신의 만족도 챙길 줄 아는 그런 여자 말이다 그런데 어이할 거나. 첩은 금지돼 있고 하녀는 없으며 금기의 여자를 범하면 감옥에 가야 하는 이 사회에서 아내만으로 성적인 만족을 얻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방법은 있다. 부부가 다양한 심리적 역할을 구사할 수 있도록 성적 상상의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다. 영어 회화 강사를 하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늘 발랄하고 젊고 열정이 있었다. 그녀의 직장 후배들이 그 비결을 물었으며 그녀의 대답... "어젯밤 남편과 잠자리를 하는데 갑자기 남편이 나를 묶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남편에게 부탁했죠. 그랬더니 남편은 ‘좋았어!’라는 탄성과 동시에 내 옷을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어요. 그러고는 끈으로 침대 네 모퉁이와 내 사지를 묶었어요. 끔찍하게 행복했죠.” “!!!”(후배들) 당신의 아내가 갑자기 “나를 묶어주세요”라고 하면 당신은 뭐라고 할 것인가. “이 여자가 돌았나?” 아니면 “이 여편네 화냥기 있는 거 아냐?”라면서 아내의 전력을 의심할 것인가. 많은 남자들은 말한다. “그런 거 아내에게 가르쳐서 뭐 합니까? 술집 여자들이나 하는 짓이지,
여염집 여자가 될 말입니까? 그거 가르쳤다가 바람납니다.” 그런 보수적인 남자의 아내들은 아내 된 최상(?)의 대우로 경건하고 건조한 섹스만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 남자들도 어쩐지 채워지지 않는 성욕을 거리의 여자들에게 쏟아놓는 이중 구조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 통합되지 않은 두 행동 사이에서 남자와 여자 그 누구도 성적으로 만족할 수 없는 법이다. 밀어붙이기 식의 섹스보다는 전희(前戱)를 중요시하라는 말을 남자들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을 것이다. 여기까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한 번 더 버전업하자. ‘전희보다 더 강력한 자극은 성적 상상이다.’ 21세기가 간절히 원한다는 창의적인 인간도 바로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전혀 다른 차원을 살아가고 있다. 한 가족 안에서, 같은 집에서, 같은 수준의 경제력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세계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한 집에서, 한 이불 속에서 살고 있는 부부라 하더라도, 한 부모 아래에서 같은 교육을 받고, 같은 가정 형편에서 산 형제라 하더라도,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다를 수 있다. 아니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세상, 같은 나라, 같은 가정 안에서 살면서 서로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업이 다르기 때문이다. 신구의 3가지로 지은 업이 각자 다르기 때문이다. 그중에도 몸으로 지은 업과 입으로 지은 두 가지 업의 근본은 의업이다. 즉, 같은 세상을 살더라도 의업이 서로 다르므로 사는 세상도 달라진다. 그렇다면 의업은 무엇인가. 생각으로 짓는 모든 행위가 의업이다. 즉 사고, 판단, 견해, 가치관, 신념, 고정관념, 생각, 이 모든 것이 의업이다. 마음이, 생각이, 견해가, 신념이, 사고가 내가 사는 세상을 만들어 낸다. 내가 짓는 의업이 곧 내가 사는 세상이다. 내 생각, 신념, 견해 하나하나가 어떤 잠재적인 세력, 업력을 남기게 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업력은 절대로 그냥 없어지지 않은 채 어떤 형태로든
내 삶에 영향을 미치며 내 삶의 일부분을 만들어 낸다. 내 생각 하나는 곧 내 세상의 일부다. 내가 만들어 낸, 어쩌면 하찮게 느껴질지 모를 사소한 견해일지라도
그것은 어떤 세력을 가지고 내 앞에 펼쳐질 내 삶의 일부가 된다.
이처럼 함께 한 가족을 이루고 살지라도, 이 의업, 생각, 사고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세상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삶을 바꾸고 싶은가? 인생을 더욱 값지게 만들고 싶은가? 더 나은 삶,
더 행복한 삶을 꿈꾸고 싶은가?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내 생각, 내 견해, 내 가치관을 바꾸면 저절로 내 세상, 내 인생이 바뀐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법칙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삶을 바꾸고 싶다는 사람들이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란 이 세상을 바꾸고, 좀 더 좋은 조건, 좀 더 좋은 환경, 조금 더 좋은 연봉과 직장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잘못된 기대일 뿐이다. '내' 삶을 바꾸고자 하면서 어찌 '내 밖'에 있는 것들을 바꾸는 대서 그 실마리를 구하려고 하는가. 내 문제는 내 안으로 뛰어들었을 때만 바꾸는 것이 가능해진다. 내 삶을 바꾸고 싶다면 마땅히 내 업을 바꾸고, 내 의업, 내 생각, 내 사고, 내 견해를 바꾸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의업의 변화는 곧 신업과 구업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고, 그에 따라 내 삶에는 변화가 찾아올 것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순리를 따라, 흐름을 따라 절로, 절로 행복이 깃들 것이다. 사고, 생각, 가치관이 어둡고 부정적인 사람은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가지고도 세상을 괴롭게 살 것이지만, 밝고 긍정적인 사람은 그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세상을 행복하게 살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최고의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괴로움에 얽매여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반면 조건이 아무리 좋지 않더라도, 늘 행복하며 평화롭고 걸림 없는 삶을 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문제는 세상이 아니다. 세상이 변하면 내 삶도 변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는가? 조건이, 직장이, 연봉이 바뀌면 내 삶이 더욱 행복해질 것 같은가? 아니다. 전혀 잘못 짚었다. 세상이 변해도 생각이, 견해가, 사고가 변하지 않는 이상 그 사람의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다. 대 저택을 소유하게 되고, 수억 원의 연봉을 받게 되더라도 그 사람의 세상은 그대로다. 대 저택에 살며, 수억 원의 연봉을 받는 사람은 여전히 그이기 때문이다. 그가 바뀌지 않는 이상 세상의 변화, 조건과 환경의 변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집안 환경이 나쁘고, 아내가 혹은 남편이 문제가 있으며, 자식이 공부를 못해서 괴로운가? 아니다. 바로 당신이 당신의 세상을, 당신의 환경을, 당신의 가족을 만들어 낸 당사자일 뿐이다. 모든 문제는 바로 당신에게 있다. 당신 내면의 업이, 생각이, 사고가, 가치관이 당신의 세상을 창조해 내고 당신의 주변 환경을,
인연을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지금의 직장이 좋지 않다면 다른 더 좋은 직장으로 옮기면 된다고 생각하고, 지금의 친구들이 좋지 않다면 다른 더 좋은 친구를 사귀면 된다고 생각하며, 심지어 자신의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여인을 새로운 아내로 바꾸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만약 그런 식으로 세상을 바꾸려 든다면 여전히 당신의 세상은 똑같은 그대로가 될 것이다. 겉모습만 조금 바뀌었을 뿐 괴로움은 그대로일 것이다. 당신이 그대로인 이상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달라진 세계 속에서 당신은 또다시 똑같은, 아니면 겉모습만 조금 변화된 또 다른 동일한 세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외부적인 조건, 세상은 당신 마음의 비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떤 곳을 가더라도, 어떤 환경과 조건을 만나더라도, 늘 같은 일이 반복된다.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같은 종류의 만남이 이어진다. 어디로 가려고 애쓰지 말라. 어디로 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떤 직업, 어떤 위치, 진급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디를 가든, 어떤 직업, 위치, 계급에 있든 항상 같은 일, 동일한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든 같은 인연을 만나고, 같은 상황, 같은 일을 만나게 될 것이다.
상황은 어쨌든 내 업대로 세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직업을 바꾸려고, 진급을 하려고 혈안이 될 이유는 없다.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진급이 되던 되지 않던, 언제나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직장에서, 높은 자리에 진급을 했더라도, 복이 없는 사람은
여전히 그곳에서 가난한 삶, 불행한 삶을 살고야 만다. 애를 쓰고 욕심을 일으켜 복력과 업력을 뛰어넘는 좋은 직장과 연봉과 지위를 만나게 되었더라도 너무 기뻐할 일은 아니다. 분명히 또 다른 문제를 만날 것이다. 이를테면 빨리 직장을 잃게 될 수도 있고, 복력을 미리 당겨써버렸으니 노후가 비참해질 수도 있으며, 그것이 아니라면 혹독한 직장 상사를 만나 심한 마음고생을 할 수도 있고,
더 나은 직장을 얻은 대신 건강을 잃게 될 수도 있다. 물론 그 또한 자신의 또 다른 업의 틀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마다 그 결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전히 ‘같다’는 사실이다. 내가 만나는 세상은 어디를 가든 여전히 같은 세상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싶어 떠난 여행지에서조차 여전히 하던 일을 그대로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처럼. 심지어 이번 생의 인연이 다해 다음 세상으로 윤회를 떠나더라도 여전히 지금과 동일한 일들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물론 껍데기는 변한다. 부모도 변하고, 나라도 변하고, 생활환경도 바뀌었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의 업은 여전히 그대로다. 당신의 세상도 그대로다.
그렇기에 그곳에서도 같은 상황들을 맞을 것이다. 사업을 하던 사람은 여전히 사업 쪽으로 끌릴 것이고, 수행을 하던 자는 여전히 수행의 인연을 만나게 될 것이다. 당신이 지어놓은 업의 에너지는 계속해서 같은 인연을, 같은 상황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유유상종으로 같은 일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업을 바꾸지 않는 이상.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내지 짓는 의업이다. 지금 여기에서 내 생각, 사고, 견해를 바꾼다면 당장 당신의 세상은 차원을 달리할 것이다. 바깥의 상황을 바꾸지 않더라도 내 안의 상황만 바꾼다면 내 세상은 꿈처럼 달라질 것이다. 마음 하나 돌리는 것으로 지금 여기의 현실은 충분히 지옥에서 극락으로 바뀔 수 있다. 만족을 조금 더 늘리는 것으로 가난한 삶을 풍요로운 삶으로 바꿀 수 있으며, 비움을 조금 더 늘리는 것으로 앞만 보고 정신없이 내달리던 삶에서 유유자적한 평화를 꽃피울 수 있고, 나눔을 조금 더 늘리는 것으로 내 것만 정신없이 채우던 삶을 이웃과 함께 기뻐하는 삶으로 바꿀 수도 있다. 이런 것은 돈을 벌거나, 진급을 하거나, 부자가 되거나, 욕망을 채우는 것처럼
그리 어렵게 억지스러운 노력이나 집착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한 생각 바꾸는 것으로 아주 쉽게 이루어진다. 물론 이것을 어렵다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렇게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쌓아오고, 높여 온 자기 집착, 자기 욕망의 틀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생각 마음을 돌이켜 놓을 수만 있다면 이처럼 쉬운 것은 없다. 그간 행복을 위해 바깥세상을 바꾸려고, 조건을 바꾸려고, 막무가내로 내 달려온 삶에 잠시 제동을 걸어보자.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경이로운 시공 속에서 과거나 미래를 놓아버리고
욕망과 집착과 기대를 놓아버리고 조건을 바꾸려는, 바깥을 바꾸려는 생각을 놓아버리고 내면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차분한 발걸음을 내디뎌 보자. 바깥을 바꾸었을 때, 조건을 바꾸었을 때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내 생각을, 내 사고를 바꾸었을 때 본래 충만하게 있던 본연의 행복을 누리게 될 수 있다. 자신을 바꾸려 하지 않고 바깥세상과 조건만을 바꾸려고 애쓰는 이상 언제까지고
삶의 변화는 찾아오지 않고 항상 동일한 일들이 반복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내면으로 걸어 들어가 내면을 비춘다면 당장에 삶은 신명나는 한 판의 춤을 출 것이다. 행복이란 노력해서 찾거나 얻는 어떤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이미 우리에게 원만하게 구족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누리고 만끽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