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닻을 올릴 때 / 이가림

두 팔 벌려

한아름 껴안아야 할 햇덩어리가

어둠을 사르고

다시 한번 태어나는데,

어찌 어제의 사슬에 묶여

피곤한 닻을 내리고만 있으랴

이 썩어가는 욕망의 도시로부터

이 믿을 수 없는 거짓의 웃음으로부터

이 엉큼한 음모의 손아귀로부터

우리 모두 떠나자,

새날의 닻을 함께 올려

아침놀 빨갛게 이글거리는

수평선을 향해 벌거벗은

마음으로 떠나자

피투성이 삶의 시장터에서

빵 부스러기에 눈이 멀어 다투던 자여,

지금 먼 바다에서 온 싱그런 바람이

그대의 일그러진 이마를 어루만지고 있음을

알지 못하느냐

그 바람은 여늬 바람이 아니라

그대의 언 가슴을 녹일

사랑의 입김이다

속임수가 속임수를 낳는 컴컴한 골목에서

사시사철 때묻은 골패짝을 뒤집던 자여,

지금 열린 문 틈새로 스며드는 빛줄기가

그대의 안개 낀 눈앞을 밝혀주고 있음을

보지 못하느냐

그 빛은 여늬 빛이 아니라

그대의 끝없는 잠을 깨울

정의의 칼날이다

큰 소리가 작은 소리를 죽이는 광장에서

목쉰 확성기로 울부짖던 자여,

지금 아우성의 벽을 뚫고 달려오는 푸른 목소리가

그대의 귓전을 울리고 있음을

듣지 못하느냐

그 목소리는 여늬 목소리가 아니라

그대의 찢겨진 상처를 덮어줄

자유의 꽃잎이다

비둘기떼처럼

수천 수만의 날갯짓으로 피어오르는 새벽

말갛게 얼굴 씻은 해를 마주하며

우리들 동시대의 배는 마침내

새로운 미지의 바다로 나아간다

그 어떤 압제의 손으로도

다시는 이 평화의 뱃머리를

거꾸로 돌릴 수 없으리라

선장은 선장의 자리에서

선장다웁게

키잡이는 키잡이의 자리에서

키잡이다웁게

갑판원은 갑판원의 자리에서

갑판원다웁게

화부는 화부의 자리에서

일하며 노래할 때

이 세기의 마지막 페이지가

닫히기 전에 우리들의 배는

흩어진 사람들 어우러져

둥그렇게 둥그렇게 춤추는 나라

그리운 세상에 기어이 닿으리라

기어이 닿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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