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겨울에는 봄이 기다려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봄이 시작하는 입춘이 되면 예로부터 대궐문이나 사대부 집 대문에는 소망을 담은 입춘방을 써서 붙이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는 입춘서(立春書), 춘방(春榜), 춘첩자(春帖子)라고도 한다.
입춘방으로 가장 많이 쓰는 글이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국태민안(國泰民安)', '가급인족(家給人足)' 등이다. 입춘대길 하나만 대문에 붙이기도 하지만 위의 4개 가운데 2개를 대문 양쪽에 붙여 그 집안에서 바라는 바를 기원하였다. 이러한 풍속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나 입춘대길과 건양다경의 뜻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2001년 여름 어느 날이다. 문인(文人)들과 경북 안동에 있는 하회(河回)마을을 견학하였다. 나는 다행인지 나이가 비슷한 여성문인 몇 명과 함께 하회마을 골목을 거닐면서 어느 집 대문에 입춘대길과 건양다경의 입춘방을 보았다. 장난기도 동하고 해서 여류문인에게 입춘대길과 건양다경의 뜻을 물었더니 잘 모르기도 했지만 뜻풀이도 다양했다.
나는 그들에게 성희롱(性戱弄)이 아니라는 양해를 얻고서 이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입춘대길'은 '봄에 -남성의 거시기를- 세우면 -집안이나 부부에게는- 크게 길하다'는 뜻이고, '건양다경'도 그와 맥이 통하는데, '건양'의 '건(建)'은 세운다는 뜻이고, '양(陽)'은 '볕 양'으로 태양, 양지, 밝음의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남성의 거시기로 '양물(陽物)' 즉 '자지'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겨울에 감추어 두었던 양물을 봄에 세워 그 일을 한다면 '다경(多慶)' 즉 집안에 경사가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때나 지금이나 자손이 많이 번창하는 것이 가장 큰 경사가 아니겠는가! 경사 가운데 경사를 위해서는 남성의 거시기가 봄부터 시작하여 세워지기를 바라는 우리 조상들의 염원이 담긴 입춘방이라고 했더니 여류문인들은 탄복을 하며 박장대소(拍掌大笑)하였다.
다경(多慶)이란 기쁜 일이 많은 것이 아니겠는가! '자지'를 세우는 것은 남편의 기쁨이지만 그것을 누리는 것은 부인이 중심이 된 부부가 될 것이고, 그 결과 자식이 늘어나니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날 여류문인들은 탄복을 하며 박장대소하였지만, 일부는 속으로 그 순간 남편을 생각하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입춘대길은 '봄에 크게 길하기를 바라는 뜻'이 담긴 것이고, 건양다경은 '밝음이 가득해 집안에 경사가 많기를 염원'하는 조상들의 순수한 뜻임을 왜곡하고 싶지는 않다. 옛것을 그대로만 따른다면 무슨 발전과 변화와 재미가 있겠는가!
요즈음은 입춘방을 많이 볼 수가 없어 아쉽다. 입춘대길이라 써서 대문에 붙여도 잘 서지 않기 때문인지! 건양다경을 써서 붙여도 세울 수가 없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전통적인 풍속이 사라지는 것이 못내 아쉽다. 어쩌면 한글전용론자들 때문에 한자(漢字)로 써서 붙여도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읽지도 못하고, 읽어도 뜻을 모르기 때문에 입춘방이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
?속 터진 만두 이야기? 바쁘시더라도 끝까지 읽어 보십시오. 새해 벽두에 자신을 한 번쯤 되돌아볼 수 있는 감동 스토리입니다ᆢ
? ? ? 60년대 겨울 서울 인왕산 자락엔 세 칸 초가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 그날그날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빈촌 어귀에 길갓집 툇마루 앞에 찜솥을 걸어 놓고 만두 쪄서 파는 조그만 가게가 있었습니다. 쪄낸 만두는 솥뚜껑 위에 얹어 둡니다. 만두소 만들고 만두피 빚고 손님에게 만두 파는 모든 일을 혼자서 다 하는 만두가게 주인 이름은 순덕 아주머니였습니다 입동 지나자 날씨가 제법 싸늘해졌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어린 남매가 보따리 들고 만두가게 앞을 지나다. 추위에 곱은 손을 솥뚜껑 위에서 녹이고 가곤 했습니다. 어느 날 순덕 아주머니가 부엌에서 만두소와 피를 장만해 나갔더니 어린 남매는 이미 떠나서
골목길 끝자락 돌고 있었습니다. 얼핏 기억에 솥뚜껑 위에 만두 하나가 없어진 것 같았습니다, 남매가 가는 골목길을 이내 따라 올라갔습니다. 저 애들이 만두를 훔쳐 먹은 것 같아 혼을 내려고 했었습니다, 그때 꼬부랑 골목길을 막 쫓아 오르는데. 아이들 울음소리가 났습니다, 바로 그 남매였습니다, 흐느끼며 울던 누나가 목멘 소리로 말했습니다. 나는 도둑놈 동생을 둔 적 없어, 이제부터 누나라고 부르지도 말아라. 예닐곱 살쯤 되는 남동생이 울며 말했습니다. 누나야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담 옆에 몸을 숨긴 순덕 아주머니가 남매를 달랠까 하다가
더 무안해할 것 같아 가게로 돌아왔습니다. 이튿날도 보따리 든 남매가 골목을 내려와 만두가게 앞에서 걸음 멈추더니
누나가 동전 한 닢을 툇마루에 놓으며 중얼거렸습니다. 어제 아주머니가 안 계셔서 외상으로 만두 한 개 가지고 갔구먼요. 어느 날 저녁나절 보따리 들고 올라가던 남매가 손을 안 녹이고 지나 치길래. 순덕 아주머니가 남매를 불렀습니다.
얘들아 속 터진 만두는 팔 수가 없으니 우리 셋이서 먹자꾸나. 누나가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맙습니다만 집에 가서 저녁을 먹을래요. 하고는
남동생 손 끌고 올라가면서 얻어먹는 버릇 들면 진짜 거지가 되는 거야. 알았니? 하는 거였습니다. 어린 동생 달래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찬바람에 실려 순덕 아주머니 귀에 닿았습니다 어느 날 보따리를 또 들고 내려가는 남매에게 물었습니다.
그 보따리는 무엇이며 어디 가는 거냐? 누나 되는 여자 아이는 땅만 보고 걸으며 할머니 심부름 가는 거예요.
메마른 한마디뿐이었습니다. 더욱 궁금해진 순덕 아주머니는 이리저리 물어봐서 그 남매 집 사정을 알아냈습니다. 얼마 전 이곳 서촌으로 거의 봉사에 가까운 할머니와 어린 남매 이리 세 식구가
이곳으로 이사와 궁핍 속에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할머니 바느질 솜씨가 워낙 좋아 종로통 포목 점에서 바느질 거리를 맡기면
어린 남매가 타박타박 걸어서 자하문을 지나 종로 통까지 바느질 보따리를 들고 오간다는 것입니다. 남매의 아버지가 죽고 나서 바로 이듬해 어머니도 유복자인 동생 낳다가
그만 모두 이승을 갑자기 하직했다는 것입니다, 응달 진 인왕산 자락 빈촌에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남동생이 만두 하나 훔친 이후로도 남매는 여전히 만두가게 앞을 오가며 다니지만. 솥뚜껑에 손을 녹이기는 고사하고 아예 고개를 돌리며 외면하고 지나다니고 있었습니다 너희 엄마 이름 봉임이지 신봉임 맞지? 어느 날 순덕 아주머니가 가게 앞을 지나가는 남매를 잡고 물었습니다.
깜짝 놀란 남매가 발걸음 멈추고 쳐다봅니다. 아이고 봉임이 아들딸을 이렇게 만나다니 천지신명님 고맙습니다. 남매를 꼭 껴안은 아주머니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합니다, 너희 엄마와 나는 어릴 때 둘도 없는 친구였단다.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고. 너희 집은 잘 살아 인정 많은 너희 엄마는 우리 집에 쌀도 퍼담아 주고
콩도 한 자루씩 갖다 주었단다. 그날 이후 남매는 저녁나절 올라갈 때는 꼭 만두가게에 들러서 속 터진 만두를 먹고.
순덕 아주머니가 싸주는 만두를 들고 할머니께 가져다 드렸습니다. 순덕 아주머니는 동사무소에 가서 호적부 뒤져 남매의 죽은 어머니 이름이 신봉임이라는 것을 알아냈고. 그 이후로 만두를 빚을 때는 꼭 몇 개는 아예 만두피를 일부러 찢어 놓았습니다, 인왕산 달 동래 만두 솥에 속 터진 만두가 익어갈 때 만두 솥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30여 년 후 어느 날 만두가게 앞에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서고 중년 신사가 내렸습니다. 신사는 가게 안에 꾸부리고 만두 빚는 노파의 손을 덥석 잡습니다. 신사는 눈물을 흘리며 할머니를 쳐다봅니다, 누구 이신가요? 신사는 할머니 친구 봉임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만두집 노파는 그때서야 옛날 그 남매를 기억했습니다. 두 사람은 말없이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서울대 의대 졸업하고 명문 미국 대학 유학까지 다녀와
병원 원장이 된 봉임의 아들 최낙원 강남제일병원 원장입니다, 이 글을 읽고 오늘 아침도 감동의 눈물로 하루 출발합니다. 누나의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운 품격 있는 가치관, 그리고 만두가게 사장님 고상한 품격에 고개 숙여집니다. 화려한 학력과 경력이 과연 이들의 삶에 비교 우위에 있었을까요? 우리 주변에서 오늘날도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훗날 쓰일 수 있는 일들이 혹시나
나 자신이나 주위에 있는지 묻고 싶어 집니다. 그리고 이 세상 아이들도 모두 이런 아이들로 성장할 수 있을는지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또한 내 이웃은 누구인가? 내 친구는 누구인가? 사람이 60세 넘기면 살아온 나이를 세지 말고 내 주위에 술 한잔이나 싸구려 음식 하나라도
가끔 함께 먹을 친구나 이웃이 몇 명이나 되는지 세어 보아야 한답니다. 많을수록 인생 성공 아니지만 그래도 인생을 이기적으로 헛되이 살지 않은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세모에 내 도움이 필요한 가장 가까운 이웃이나 친구들을 혹시 모른 척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보게도 합니다,
2021년에도 늦지 않았으니 지금부터 동참합시다 가까운 친인척부터 지인들 교인들 등등 이 스토리에 콧등이 짠 해진 감동을 혼자 하긴 섭섭해서 공유합니다ᆢ <<강남제일병원장 최낙원 박사의 실화 눈물 어린 감동 이야기>> (원본 각색 : 안드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