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의 땀을 생각하십시오



조선시대 대표적 청백리 중 한 명인
맹사성은 76살의 나이로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인 온양에 내려가 초야에
묻혀 살았습니다.

당대 최고의 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그였기에
그 고을에 신임 사또가 부임하면 맹사성을 찾아가서
인사를 올리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습니다.

어느 날 새롭게 부임한 사또가
인사를 하기 위해 관아의 관리들을 거느리고
맹사성을 찾아갔습니다.

마침 밭에 나가 김을 매고 있던 맹사성은
사또가 온 것을 알았지만, 그를 밭에 세워둔 체
김만 계속 매고 있었습니다.
돌아갈 수도 그냥 서 있을 수만도 없던 사또는
팔을 걷어붙이고 밭에 들어가 함께 김을 맸습니다.
사또가 움직이자, 관아의 관리들도 서로 질세라
열심히 김을 맸고, 해가 질 무렵이 돼서야
맹사성은 허리를 펴고 일어섰습니다.

"그만들 하시고 나오시게!"

맹사성은 그제야 신임 사또의 인사를
정중히 받으며 말했습니다.

"사또로 오셨으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뙤약볕에서 땀 흘려 일해 보면 백성들의 노고가
어느 정도인지 아셨을 것입니다.
아침저녁 밥상을 대할 때마다 밥알 하나하나에
맺혀있는 백성들의 땀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하여 부디 모든 이에게 존경받는
목민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책임 있는 자리에 올라서면
그만큼의 책임감과 중압감으로 성장하게 되고
자리에 맞는 인물로 거듭난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리는 누리는 것이 아닌 희생하는 것이며
그 자리의 주인공이 '나'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 오늘의 명언
하나의 모범은 천 마디의 논쟁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다.
– 토마스 칼라일 –

현명한 부부싸움



칼 필레머(Karl Pillemer)는
미국 코넬대학교의 교수이자, 인간생태학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입니다.

그는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받는 것보다는 더 많이 베푸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며
현명한 부부 싸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조언하였습니다.

'논쟁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함께 밖으로 나가라.'
의견이 맞지 않을 때 장소를 바꾸면
소통하는 데 도움이 된다.

'먼저, 화를 풀 방법을 찾고 나서 이야기하라.'
화가 났을 때 충동적으로 대처하는 것보다는
일단 한걸음 물러서는 것이 좋다.

'주변에 위험 요소를 없애라.'
이것은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을
예방할 수 있다.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
먼저 상대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도록 해준 다음
말을 끝내면 '그러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어떤 게 옳은 방법이야'라고 되물어
봐야 한다.

'화난 채로 잠자리에 들지 말라.'
화가 잠재된 상태는 건강에 치명적이다.





언제나 대화를 통해 갈등 요인을 찾아야 하며,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누구라도 화목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행복한 결혼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얼마나 잘 맞는가 보다 다른 점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이다.
– 톨스토이 –

상상하던 미래



한국영화 '써니'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때는 1986년. 두 여고생이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대화를 나눕니다.

"미래에는 전화를 가지고 다니며 서로
얼굴을 보면서 통화를 할 수 있대."

"웃긴다. 그럼 물도 사 먹는 시대가 오겠다."

그렇게 소녀들은 웃음을 터뜨립니다.
자신들의 상상이 허황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생수를 사 먹고
세계 어디서든 영상통화를 합니다.





과거의 어떤 상상이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상상은 아직도 상상 속에서나 이루어지는
비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살면서 꿈꾸는 수많은 상상은 불확실성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를 살면서 희망을 만들어가고
오늘을 살면서 내일이라는 미래를 상상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 오늘의 명언
미래를 예측하려고 하는 것은 밤중에 시골길을
전조등도 켜지 않고 달리면서 뒷 창문으로
밖을 보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 피터 드러커 –

멋진 시 "치마"
이런 시를 읽은적이 있으신가요?

♡ 문정희 ♡
1947년생 보성출신 여류시인, 동국대 석좌교수

"제목 : 치마"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

치마 속에는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하다.

가만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
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것

대리석 두 기둥으로
받쳐든 신전에

어쩌면 신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흥망의 비밀이 궁금하여

남자들은 평생 신전 주위를
맴도는 관광객이다.

굳이 아니라면
신의 후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
족보를 확인하고
후계자를 만드려고 애를 쓴다.

치마 속에 무언가 확실히 있다.

여자들이 감춘
바다가 있을지도 모른다.

참혹하게 아름다운
갯벌이 있고

꿈꾸는 조개들이
살고 있는 바다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죽는
허무한 동굴?

놀라운 것은
그 힘은 벗었을 때
더욱 눈부시다는 것이다.

~~~*~~~*~~~*

- 임 보 -
본명은 강홍기 1940년생 순천출신으로 전 충북대 교수

이 시는 "치마"에 대한 답시

그렇구나
여자들의 치마 속에 감춰진
대리석 기둥의
그 은밀한 신전

남자들은 황홀한
밀교의 광신도들처럼

그 주변을 맴돌며
한평생 참배의 기회를 엿본다.

여자들이 가꾸는
풍요한 갯벌의 궁전

그 남성 금지구역에
함부로 들어갔다가 붙들리면

옷이 다 벗겨진 채
무릎이 꿇려
천 번의 경배를 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곤욕이 무슨 소용이리

때가 되면 목숨을 걸고
모천으로 기어오르는 연어들처럼

남자들도 그들이 태어났던
모천의 성지를 찾아
때가 되면 밤마다
깃발을 세우고 순교를 꿈꾼다.

그러나, 여자들이여,
상상해 보라

참배객이 끊긴, 닫힌 신전의
문은 얼마나 적막한가!

그 깊고도 오묘한 문을 여는
신비의 열쇠를
남자들이 지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보라
그 소중한 열쇠를 혹 잃어버릴까봐
단단히 감싸고 있는 저 탱탱한
남자들의 팬티를!

~~~*~~~*~~~*

정말 멋진 시 !
환상의 짝꿍시 !
살며시 웃고 또 웃고 ~~~

친구들아!
피식 웃지말고 소리내어 웃어보세!

감동 이야기

그는 흑인 이었고, 뉴욕 브루클린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두 명의 형과 한 명의 누나 그리고 여동생 한 명이 있었다.
아버지의 보잘것 없는 월급으로는 도저히 생계가 어려웠다.

그는 가난과 멸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미래에 대해서 그는 아무런 희망도 품을 수 없었으며,일이 없을 때면 그는
낮은 처마 밑에 앉아
조용히 먼 산 위의
석양을 바라봤다.

조용하고 우울한 모습으로~
열세 살이 된 어느날,
아버지가 갑자기
그에게 낡은 옷 한벌을 건넸다.
"이 옷이 얼마나 할 것 같니?"
"1달러 정도요."라고 그는 대답했다.

"너는
이 옷을 2달러에 팔 수 있겠니?"
아버지는 호기심의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멍청이나 그 돈을 주고 사겠지요."
그는 볼멘 소리로 대답했다.

아버지의 눈빛은
진실하고 간절했다.
"너는 왜 시도해 보려고 하지 않니?
너도 알다시피
우리집은 형편이 어렵단다.

만약 네가 이 옷을 팔면 나와 네 엄마에게 큰 도움이 될거야."
그제야 그는 고개를 끄떡였다.

"한번 해 볼께요.
하지만 못 팔 수도 있어요."

그는 정성껏 옷을 빨았다.
다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손으로 옷의 주름을 펴고 바닥에 펼쳐 그늘에 말렸고,이튿날 그는 이 옷을 들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지하철역으로 갔다.

그는 6시간 동안 물건을 사라고 외친 후에야 옷을 팔 수 있었다.
그는 2달러를 움켜쥐고
집을 향해 달려갔다.

그 후로 그는 매일 쓰레기 더미 속에서 열심히 낡은 옷을 찾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깨끗이 손질해서 번화가에 내다 팔았다.

이렇게 열흘정도 지났을 또 아버지가 또 다시

그에게 낡은 옷 한벌을 건넸다.
"한번 생각해 보렴, 어떻게 하면 이 옷을 20달러에 팔 수 있겠니?"
어떻게 이렇게나 낡은 옷을 20달러에 팔 수 있겠는가?

그 옷은 기껏해야 2달러의
값어치 밖에 없어 보였다.

"너는 왜 시도해 보려고 하지않니?"
아버지는 그를 격려했다.
"잘 생각해 보면 방법이 있을거야."
고민 끝에 그는 또 한번
좋은 방법을 하나 생각해 냈다.

그는 그림을 공부하는
사촌 형에게 옷에다
귀여운 도널드 덕과
미키 마우스를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부유층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 입구로 가서
물건을 사라고 외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잣집 도련님을
데리러 온 집사가 자신의
도련님을 위해 이 옷을 구입했다.

그 열 살 남짓한 아이는 옷에 그려진 그림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했다.
그래서 추가로 5달러의 팁을 주었다.

25달러! 이것은
그야말로 거액의 돈이었다.

그의 아버지 한 달 월급과
맞먹었으며,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또 다시
그에게 낡은 웃을 한 벌 건넸다.

"너는 이 옷을 200달러에
팔 수 있겠니?"
아버지의 깊은 눈은
오래된 우물처럼 그윽하게 빛났다.
이번에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옷을 받아들고 생각에 잠겼다.
두달 뒤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인기 텔레비전 시리즈 미녀 삼총사의 여 주인공 '파라 포셋' 이 홍보차 뉴욕을 방문한 것이다.

기자 회견이 끝나자 그는 곁에 있던 보안 요원을 밀쳐내고 '파라 포셋'
에게 뛰어 들어 낡은 옷을
들이밀며 싸인을 부탁했다.

'파라 포셋'은 어리둥절 하다가 곧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순수한 소년의 요청을 거절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파라 포셋'은 거침없이 싸인했다.
소년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파라 포셋 여사님!
이 옷을 팔아도 될까요?"
"당연하지! 이건 네 옷인걸,어떻게 하던 네 자유란다."
소년은 "우와"하고 즐겁게 외쳤다.

파라 포셋의 친필 싸인이 있는 티셔츠를 200달러에 팔려고 내 놓았는데 치열한 가격 경쟁끝에
한 석유 상인이 1,200달러의 비싼 값을 주고 티셔츠를 구매했고,
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와 온 가족은
기뻐서 어쩔줄 몰라했다.

아버지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쉴 새 없이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사실 난 네가 그 옷을 못 팔면 다른 사람에게
팔아 버릴 계획이었단다.
그런데 네가 정말로 해낼 줄이야.
정말 대단하구나.
내 아들 정말 대단해~
밝은 달이 밤하늘에 떠올라 창문을 통해 부드러운 빛을 비추었다.

이날 밤 아버지와 아들은 한 침대에 누웠다.

아버지가 물었다.
"얘야 세 벌의 옷을 팔면서
깨달은 게 있니?"
"저는 이제 깨달았어요.
아버지는 제게 큰 가르침을 주신 거예요."
그는 감동해서 말했다.

"머리를 굴리면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예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또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말이 맞다. 하지만 그건 나의 맨 처음 의도가 아니었단다.
나는 그저 네게 알려주고 싶었어.
1달러의 값어치 밖에 없는 낡은 옷조차 가치가 높아질 수 있는데 하물며 우리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어떻겠니!
우리가 삶에 믿음을 잃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단다.

우리는 조금 까맣고
조금 가난할 뿐이야.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니~^"
바로 그 순간 그의 마음속에 찬란한 태양이 떠올라 그의 몸과 눈앞의 세상을 환하게 밝혔으며,
"낡은 옷조차
가치가 높아질 수 있는데,
내가 날 업신여길
이유가 없지"

그때부터 그는 열심히 공부하고 운동하며 자신을
단련하기 시작했고,
20년 후 그의 이름은
전 세계 구석구석까지 널리 퍼졌다.

그의 이름은 바로
'마이클 조던' 이다.
'농구의 황제', 아니 '농구의 신' '마이클 조던(Michael Jorden,
1963~ ) 이다.

인생은 모두가
함께하는 여행이다.

매일 매일 사는 동안
우리가 할 수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 이 멋진 여행을 만끽하는 것이다.

2살 때는 똥, 오줌
가리는게 자랑거리고,
50살 때는
돈 잘 버는게 자랑거리고,
70살 때는
운전할 수 있는게 자랑거리고,
85살 때는
똥, 오줌 가리는게 자랑거리다.

인생이란?
모두가 똥, 오줌 가리는 것 배워서 자랑스러워 하다가,사는 날 동안 똥, 오줌 내 손으로 가리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다 마감하는게 인생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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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소

어머님께서 암으로 3개월밖에 못 사신다는 의사의 통보를 받고, 어머님을 병원에서 구급차로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같이 타신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63세의 나이가 630 정도나 들어 보이는 농부의 슬픈 얼굴, 내 아버지 이기진님은 하얀 시트에 누워 눈만 둥그러니 떠 바라보시는 어머니 남기순님의 손을 잡고 천둥 같은 한숨을 토해내며 울음을 삼키고 계십니다.

다음 날, 아버지와 아들이 소를 팔기 위해 새벽길을 나섭니다.
그 병원에서는 3개월이라 하지만, 서울 큰 병원에 한 번 더 가보자는 아버지의 말씀에, 집에서 기르던 소를 팔기 위해 아버지는 어미 소, 나는 송아지를 잡고 새벽의 성황당 길을 오릅니다.
아버지는 저만큼 앞에서 어미 소를 끌고 앞서 가시고 나는 뒤에서 송아지를 끌고 뒤를 따르는데,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뚫고 이상한 흐느낌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새벽의 산새 소리 같기도 하고, 새벽바람에 스치는 갈대 소리같기도 하고….

내가 그 소리의 정체를 알아낸 것은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아버지가 연신 팔뚝으로 얼굴을 닦으시는 모습을 보고난 뒤였습니다.

아버지가 소의 고삐를 잡고 우시는 것이었습니다.
소의 고삐를 움켜쥐고 흐느끼며 우시는 늙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나도 송아지를 잡고 얼마나 울었는지....
처음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고, 아버지가 우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일본강점기와 6·25 피란 시절에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으셨다는 아버지가 이 새벽 장터로 가는 성황당고갯길에서 새벽을 깨우며 흐느끼십니다.
아버지는 울음을 자식에게 보이기 싫으셨던지 연신 "이랴!" 소리로 울음을 숨기시며 길을 재촉하십니다.

내가 해병대 훈련소 수료식 날, 청자 담배 두 보루를 들고 인천에서 머나먼 진해까지 밤새 기차를 타고 면회오시어 멋쩍은 듯 자식에게 담배를 주시며 "이거 네 엄마가 사준 거니까 조금씩 피워!" 하시던 나의 고마운 아버지.

너무 마른 나의 모습을 보고 “이놈아, 힘들면 높은 사람에게 힘들다고 얘기해” 하시며 근심 어린 모습으로 내 손을 잡아주던 아버지.
아! 그때 처음 아버지의 손을 잡아보았고, 그때처음 아버지의 슬픈 눈망울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걸었을까, 안개가 걷히고 우시장이 나타납니다.
소를 팔고 시장의 순댓국집에 아버지와 앉았습니다.
순대한 접시를 시켜놓고 소주 한 병을 주문했습니다.

"송아지 끌고 오느라 애썼다. 참 정이 많이 든 소인데 이 소들이 네 엄마를 살릴지 모르겠다.”

아버지께서 소주잔을 나에게 주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강민아! 네 엄마 소원이 뭔 줄 아느냐?"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엄마와 28년을 살면서 아직 엄마 소원을 들어본 적도 없었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조금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한참을 망설인 후 입을 여셨습니다.

“너 장가가는 거 보고 눈감는 거야."

아! 어머니 소원이 내가 장가가는거라니....

아버지에게 몇 잔의 소주를 더 청해 마시며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그래, 어머니의 소원을 한번 들어드리자.
하지만 결혼은 여건이나 현실로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우선 결혼할 상대여자가 없고, 가진 돈과 직업도 없으며, 인물도 변변치 못해 약속은 그저 약속에 그칠 수밖에 없는 씁쓸한 현실이었습니다.

소를 팔아 치료한 보람도 없이 어머니는 큰 병원에서도 가망이 없어 다시 퇴원하여 집에서 쉬시며 이제 병원에서 제시한 3개월에서 한 달이 남은 상태입니다.
그런 와중에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라는 하나님의 도우심인지 형님이 다니는 교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여자가 있으니 선을 한번 보라고.

어두컴컴한 부천역 지하 다방에서 딱 한 번 얼굴을 보았습니다.

나는 사실 그때 무엇을 따지고 무엇을 내세울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여자의 얼굴을 쳐다볼 용기도 없었습니다.

다음 날 빠른 엽서 한 장을 보냈습니다.

“우리 어머님께서 앞으로 한 달밖에 못 사십니다. 그래서 나는 한 달 안으로 결혼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머님 소원이며 유언이기 때문입니다. 싱거운 얘기지만 열흘 안으로 결혼해주실 수있나요?"

그리고 답신이 왔고, 우린 결혼을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예식을 하는데 어머님께서 병원차를 타고 오셨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앉으신 어머님께서 웁니다.
아버지도 울고, 나도 울고, 내아내도 울고…

사정을 아시는 하객들과 주례 목사님도 울었습니다.

신혼여행을 뒤로 미루고, 인천 연안부두에 가서 김소월 시인의 시 '엄마야누나야'를 부르며 친구들과 어울렸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어머님은 보름 후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그해 가을 어머니를 그리다 어머니 곁으로 가셨습니다.

동갑 나이에 한동네에서 태어나시어 63세의 같은 해 봄과 가을에 돌아가신 두 분.
남들은 복받은 분이라 얘기하지만 허울 좋은 이야기요. 그 힘들고 아프게 살아온 삶 하늘밖에 누가 알리오.

부모님의 산소를 양지바른 곳에 모시고 비석에 "하나님 아버지, 불쌍한 우리 부모님의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이렇게 새겨놓고, 그래도 이제라도 효도하는 것은 형제들끼리 잘 지내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작은 책임 아닌가 하며 다짐하며 살고 있습니다.

나는 결혼 후 장모님을 어머니처럼 생각하며 30년을 함께 한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젠 장모님과도 함께 늙어갑니다.
그리고 신혼여행도 못 가고 결혼 첫날부터 어머님 곁에서 정성을 다한 아내를 위하여 10여 년 전부터 해마다 해외 신혼여행을 다녀오곤 합니다.

아버님! 이제 낙엽이 지고, 그 낙엽이 아버지 산소에 눈처럼 쌓이는 겨울이 오면 아버님의 산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이강민의 수필집
«아버지와 소»에서

추석 실화

웃픈 추석에 일어난 이야기 입니다.

시가에서 추석명절 차례 잘 모시고 좋은 며느리로 칭찬받으며 마무리까지 잘 하였답니다.

그런데 어찌 기분좋은 일만 있었겠습니까?

종가의 종부로 참으며 평소와 같이 남은 음식을 시어머님이 싸주는 대로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작은 며느리는 안가져 간다고 미리 이야기하니 주지않고 수고했다고 큰 며느리에게 검은 봉투에 바리바리 싸주었습니다.

큰 며느리는 아무말 없이 조용히 인사하고 돌아가던 중 휴게소에 들러 쓰레기통에 모두 버리고 귀가했다네요.

집에 막 도착하니 시어머니께서 전화가 걸려와

"얘야 수고 많았다.
작은 며느리 눈치챌까 봐 검은 봉투에 300만원 넣었다.
너희 먹고 싶은 것 사먹고
옷도 하나 사고 해라 손자들도 좋은 것 하나씩 사줘라...

에미가 날일하여 품삯으로 받은 돈인데 만원 짜리도 있고
5만원 짜리도 있고 오천원 짜리도 있다. 담에 벌면 또 줄께......"

하늘이 노래지며 허겁지겁 휴게소를 달려가 가득 쌓인 쓰레기 통을 뒤졌는데 어찌 찾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 며느리는 몇일을 식음전폐하고 생병이 났습니다.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뭐 한 가지라도 사면 어머니한테 그 돈입니다 하고 평생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처지가 되었답니다.

과연 이 며느리에게 3백만원은 잃었지만 3천만원의 뉘우침이나 가르침과 부모의 사랑에 대한 의미는 어떨까요.....!

전국적으로 이런 일이 하도 많아
쓰레기를 그냥 처리하지 않고
내용물을 확인한다고 합니다.

씁쓸한 이야기지만
멋진 교훈이라 생각이 되네요.

웃지못 할 이야기
혹시 길거리 쓰레기 봉투 잘 살펴들 보세요.

♬고향역/나훈아♬
https://www.youtube.com/watch?v=BP2riUBEZU0

 

불안한 감정



내 직업은 대리운전기사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내 일은 시작됩니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호출을 기다리면서 서성입니다.
하루 평균 다섯 시간은 뛰거나 걸어야 하는데
이제는 힘에 부치기 시작합니다.

그런 나에게도 빛나는 시절은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했고 가정도 꾸렸습니다.
곧 아들 둘이 태어났고, 아이들의 재롱을 보며
행복했습니다.

성실하게 일하면 안정된 삶은 계속될 거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회사의 부도로 내 기대는 무너졌습니다.
가족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했습니다.

대리운전 손님으로 아들 또래를
만날 때마다 아들 생각이 납니다.
변변히 뒷바라지도 못 했는데 혼자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 대학에 합격한 자랑스러운 아들입니다.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지만,
노후 준비도 시작조차 하지 못한 내가
아들에게 혹여나 짐이 되지는 않을까
불안하기만 합니다.





저는 모두가 선망하는 명문대에 다닙니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학원을 다니는 것도
집에 부담을 주는 것 같아 혼자 독하게
공부했어요.

TV에서나 보던 거대한 학교 정문을 들어서던 날,
제 꿈이 이뤄졌다는 생각보다는 앞으로는
집에 부담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희망은 사라지고 녹록지 않은 현실이 보였습니다.
근로 장학생부터 학교 앞 편의점 아르바이트까지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일해야만 했어요.
그런데도 학비에 생활비까지 큰 빚이 생겼고
인생을 마이너스로 시작하게 되었죠.

언제부터였을까요?
'이보다 더할 수 없겠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사는데도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불안했어요.

어린 나이에 영문도 모른 채 집안 환경이 달라졌고
그때 기억이 제 몸과 마음에 또렷이 새겨진 것 같습니다.
가정을 이룬다면, 책임감이 더해질 텐데
제가 잘할 수 있을지 두렵고 불안하기만 해요.

얼마나 더 열심히 살아야 불안하지 않게 될까요?
그냥 다 포기하고 살아가는 편이 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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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불안한 감정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런 감정들은 개인적인 것이니 숨기는 편이
미덕이라고도 배워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감정을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함께 진단해야 할 때입니다.


# 오늘의 명언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사소한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큰 불행으로 발전하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 알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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