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리조트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 6시 전 눈을 떴나 보다 온천기가 뿌옇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침 7시가 지나서야 겨우 이런 모습을 볼수 가 있었다


무엇이 하늘이고 무엇이 산인지 무엇이 구름인지 분간 이 가질 않는다






금호 리조트에서 운영하는 아쿠아나 이곳에는 투숙객에 한하여 30% 할인이 적용 된다

하지만 저녁 8시 면 폐장을 함으로 늦게까지 온천이고 워터 파크고 즐길수가 없다


촬영 하면서 색온도를 낮춰 촬영해보니 파란 색감이 묻어나 더욱 청량해 보여 아쿠아나의 모습을 더욱 더 잘 나타난것 같다.

아쿠아나를 즐기기 위해 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공용 주차장의 울타리다

금호 리조트 주변을 걷다보니 금호 리조트 주변에 흐르는 개천이 있어 찍어 보았다

전시행정의 일환인가 풀숲 가운데 벤치를 만들어 사람들이 근접 할수 없었다.

뙤약빛이 내리 쬐는곳이고 풀숲에 풀이 무릎보다 더 높게 올라와 있어 누가 의자에 앚아 쉴수 있을런지

요즘처럼 진드기에 생명을 잃는 사람이 많은 데

길가 풀숲의 벤치(의자)는 사진으로 남기징 않았지만 정말 전시 행정의 결과 라고 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쿠아나를 즐기기 위해 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공용 주차장의 울타리다




금호 리조트 주변을 조금 걷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보았다

금호 리조트가 운영하는 아쿠아나 워터파크 와 온천을 즐길 수있다

금호 리조트에서 내려다본 워터파크 공영 주차장 모습 멀리 안개로 가득한 산등성이의 운무가 멋져 보인다

화순 북면에 위치한 금호 리조트 이곳에서 온천과 아쿠아나 워터파크를 즐길수 있다


통천문 이곳을 지나야 망향정과 망미정 전망대를 갈수 있다

화순 적벽 안애도




옛 주민들의 우물터











망미정()은 정지준()[1592~1663]이 건립하였는데, 적벽 앞에서 적벽을 마주보고 있던 정자였기에

소식()의 「적벽부()」에 우의()하여 지었다고 전해진다.
정지준의 본관은 창원(
)으로, 호는 적송()이라 한다. 창랑() 정암수()[1534~?]의 손자이며,

우암 송시열의 제자이기도 하다. 인조 시대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하윤구, 김종지, 정호민과 함께 창의하여 청주성에 이르렀는데,

이때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며 귀향하여 이 누정을 짓고 은거하였다.

1983년 동복댐 수몰로 인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망미정 [望美亭]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김병연이 1807년(순조 7년) 3월 13일 경기도 양주군 회동면에서 출생하여 전국을 떠돌다가

이곳 적벽에 매료되어 1863년 4월 29일 작고할 때까지 살았던 김삿갓의 초분지(初墳地

- 3년 후 차남이 고향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에 모심)가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가 생전 동복에서 고향 영월을 바라보며 그리워하였을 자리에 망향정(望鄕亭)을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동복천 상류인 창랑천에는 약 7km에 걸쳐 크고 작은 수많은 수려한 절벽경관이 발달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동복댐 상류에 있는 적벽(노루목 적벽)과 보산리, 창랑리, 물염적벽 등 4개의 군으로 나뉘어 있다.

적벽(노루목 적벽)은 수려한 자연경관이라든가 웅장함 그리고 위락공간으로서 주변의 적절한 자연조건 때문에

동복댐이 만들어지기 직전까지 옛날부터 널리 알려진 명승지이다.

1519년 기묘사화후 동복에 유배중이던 신재 최산두가 이곳의 절경을 보고 중국의 적벽에 버금간다하여 적벽이라 명명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물염적벽은 규모나 풍치면에서 노루목 적벽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 건너편 언덕위에 송정순이 건립한 물염정이 있어 위락공간으로 이름이 높다.

보산적벽은 노루목에서 서쪽으로 600여m 거리에 있는 보산리의 북쪽 계류가에 형성되어 있으며 규모는 작으나 수량이 풍부했다.

창랑적벽은 창랑리에 있는데 높이 40여m에 길이가 100여m가량 이어진 절벽군으로 웅장한 느낌을 주고 있다.

현재 노루목 적벽과 보산리 적벽은 동복댐 보호구역으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으나 임도개설(1996.12)로 한결 쉽게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적벽앞에는 망미정, 보안사지석탑, 망향정등이 있다.



























































































































화순 금호 리조트를 에약 했다

가족과 함께 여행을 하였으면 하여

강원도로 가고 싶었지만 장시간 운전을 해야 하는 탓에

전라도로 정했다 그리고 근로복지공단 근로 복지 서비스에서

근로자 휴양시설을 검색하여 화순 금호 리조트를 예약 하였다.

화순에 가면 무엇을 할수 있을까 검색 하여 보니

콩닥 콩닥 설렘 화순. 화순 적벽 버스 투어 라는게 있다

화순 군청에 화순 여행에 필요한 홍보물을 요청 하였더니

화순에 관한 홍보물이 한 보따리다.

화순 적벽은 꼭 버스를 타고 가야 하나? 승용차로 가면 되지 않을까

자세히 알아 보았더니 화순 적벽은

중국의 적벽과도 같은 그런 풍경을 가진곳으로

화순, 광주의 식수원으로 상수도 보호구역이라서 30년동안 사람 발길이 닿지 않고

출입 통제 되다가 최근 화순에서 광주로 요청 하여 수토일 주중 삼일만

버스 탑승 승객만 관광 할 수 있도록 하였고 상수원 보호구역이다 보니

음식물 반입도 안되고 인터넷으로 만 탑승 예약을 할수 있고

탑승 하여서도 자연보호라던가 상수원 보호를 위한 엄격한 통제를 따라야 한단다.

화순 적벽 버스투어는 화순군 문화관광과에서 주관하고 콩닥 콩닥 설렘 화순 적벽 버스투어

사이트에서만 인터넷 예약을 할 수 있다.

하루 종일 운행하는 적벽 투어버스는 2만원이고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 운행하는 버스는 1만원 인데

하루 종일 운행하는 적벽 투어 버스는 화순군의 명소인 운주사라던가 다른 화순의 볼거리를 둘러

화순 적벽투어를 하며 점심 식사비와 입장료는 운임에 포함 되어 있다고 한다.

예약을 일요일 2시에 출발 하는 버스를 타기로 하고 대구서 9시에 출발 했다

약 한시간 전 버스투어 탑승지인 이용대 체육회관에 도착하여 주변을 구경하다

버스를 탑승 하였다


화순 적벽 버스투어 탑승권이다 이 탑승권으로 금호 리조트 숙박료 30% 할인 온천 20% 할인을 받을수 있다고 한다

화순 적벽 버스 투어 탑승지는 이용대 체육관 과 이서면 커뮤니티센터 두곳서 탑승을 할수 있다


버스 투어 탑승지인 이용대 체육관 이다 한쪽 귀퉁이에 노란 버스가 오늘 여객을 싣고 투어할 버스다 버스는 총 여섯대 1호차 부터 6호차 까지

2시에 탑승하기로 되어 있어 1시45분에 대기소에 앉아 예약 사항을 확인하고 안내원의 주의 사항을 들은후 탑승 두시정각에 1호차 부터출발 하였다

이용대 체육관은 화순 공설 운동장과 하니움 문화스포츠센타와 같은 공간에 마련되어 있으며 사진은 화순 공설 운동장이다

운동장 뒷편은 하니움 문화 스포츠센타로 분수대와 더 넓은 잔디밭 그리고 한옥을 닮은 넓은 테라스와 잔디공원으로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더 없이 좋을듯 하다


이용대 체육관

화순 공설 운동장 뒤에 아취형 다리는 화순천을 건너는 다리

적벽의 유래

‘적벽’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로 동복에 유배된 최산두()[1483~1537]가 처음 사용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최산두는 동복 지역에서 14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는데 어느 날 동복천을 거슬러 오르다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 밑으로 파란물이 흐르는 선경을 발견하였고 창랑을 거쳐 물염()에 이르게 된다. ‘물염’은 세속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세계를 말한다. 최산두의 『신재집()』에는 이때 쓴 시가 전한다. “백로 고기 엿는 모습 강물이 백옥을 품은 듯하고, 노란 꾀꼬리 나비 쫓는 모양은 산이 황금을 토함 같네.”

중국의 후베이[] 지역에는 ‘적벽()’이라 불리는 네 곳이 있다. 하나는 양쯔강 변에 있는데 이곳이 삼국 시대 주유()가 조조()를 대파한 적벽 대전의 장소이며, 나머지는 무창()과 한양(), 그리고 소동파가 「적벽부()」라는 유명한 글을 남긴 황강()이다. 화순 지역의 적벽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이다. 『화순 군지』에서는 노루목 적벽·보산 적벽·창랑 적벽·물염 적벽으로 분류해 놓았으나 화순 적벽이라고 하면 보통 노루목 적벽을 일컬어 왔다.

정지준()[1592~1663]은 정암수()[1534~1594]의 손자로 창원 정씨이다. 정지준의 선조는 정인예()로 조선 건국 초 벼슬을 버리고 돌연 낙향하여 북면 남치·노기 일원에 세거지를 마련하고 백아산에서 발원한 쪽빛 여울[]가에 월영정()을 짓고 은거하였다. 월영정은 무등산 원효 계곡에 최초로 건립된 독수정()과 때를 같이 한다. 월영정 이후 남천과 만덕산에서 발원한 대덕천()이 만나는 지점에 물염정()이 들어섰다. 물염정은 동복 현감을 지낸 송구()[1483~1550]가 퇴휴하면서 지은 것이다. 정자를 물려받은 그의 아들 송정순()[1521~1584]이 아호()를 ‘물염’으로 사용하였다. 지류를 따라 내려 가다보면 백아산과 옹성산 수계가 만나는 곳이 창랑()이다. 마을 어귀에 창랑정()[1589]이 있었는데 선조 때 사람인 정암수의 정자이다.

문화 공간으로서의 적벽

적벽을 문화 공간으로 일군 사람은 조선 인조 때의 정지준이다. 1636년(인조 14)[병자년]에 남한산성이 포위되어 급박해지자 임금이 조칙()을 내렸는데 정지준은 이를 받들어 의병을 발의하여 남한산성으로 갔다. 당시 옥과 현감 이흥발(), 순창 현감 최온(), 한림() 양만용()과 동지 김종지()·하윤구(), 진사 정호민() 등이 뜻을 같이 하여 정예 106명을 이끌고 갔으나 성하지맹()의 소식이 전해지자 북쪽을 향해 통곡하고 돌아와 적벽에 숨었다.

1646년(인조 23) 무이구곡()의 뜻을 취해 창랑과 적벽 사이 강가에 정자를 짓고 망미정()이라 하였다. 소동파가 지은 「적벽부()」의 “묘묘혜여회 망미인혜천일방( )[넓고 아득한 나의 마음이여 하늘 저 끝에 있는 임을 그리도다]”에서 취한 것이다. 망미정에는 청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 세자, 봉림 대군, 그리고 삼학사()에 대한 애틋함과 우국충정이 담겨 있다. 정지준은 화공()에게 명하여 동쪽 벽에는 노중연()이 바다를 건너고, 남에는 문천상()이 하늘을 쳐들며, 서에는 형가()의 소매 속을 더듬고, 북에는 도정절()이 취해서 누워 있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 또한 정지준은 적송자()라 자호()하였는데 소나무의 절개를 사랑하여 옛 신선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최산두와 문인 김인후()[1510~1560]는 적벽에 대한 시를 짓고, 고을 현감 임억령()[1496~1568]은 ‘적벽동천()’이라 명하였다. 조선 초기 월영정이 세워진 이래 물염정·창랑정·망미정은 독수정·환벽당·식영정·송강정과 함께 계산 풍류의 양대 흐름을 형성하면서 조선 후기 문학의 산실이 되어 당대 문사들의 출입이 잦았다. 실학자 홍대용()[1731~1783]은 나주 목사(使)인 아버지를 따라와 물염정 구경에 나섰다가 뜻밖에 실학의 대가인 나경적()[1690~1762]을 만났으며 정약용()[1762~1836]은 화순 현감을 지낸 정재원()[1730~1792]의 아들로 물염정에서 시를 읊은 바 있다. 바로 『다산 시문집』에 실려 있는 「유적벽정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천하절경 화순 적벽 [天下絶景和順赤壁]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화순 적벽은 동복호 상류 7㎞ 구간에 형성된 절벽이다.

 몰염적벽, 창랑적벽, 보산적벽, 장항적벽(일명 노루목 적벽) 등 4개의 군으로 나뉘어 있다.

이중 노루목 적벽은 높이 90m 직각으로 깎아지른 듯 솟아 장관이다.

1519년 기묘사화 후 화순 동복으로 유배를 왔던 신재 최산두가 이곳의 절경을 보고 중국의 적벽보다 아름답다하여 ‘적벽’이라 명명했다. 

화순 적벽은 안동 저수지가 만들어 질때 쯤 같이 댐이 만들어 졌다고 한다. 안동 댐의 경우 수몰지역에 거주하는 거주민을 이주 시키기 위해

선 보상 후 이주를 실시하였으나 화순 적벽 수몰지역 부근에  살던 거주민들은 선 이주 후 보상을 하기로 하였고 이주가 되지 않고 거주민이 남아 있는상태에서

큰 비가 내려 물이 갇혀 물이 빠지지 않은 때문에 어쩔수 없이 이주를 하게 되었고 그에 따른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 3천5백원 하던 땅값을 6백5십원으로 땅값이 책정 되어 거주민들이 소송을 벌여 뒤늦게 재산권을 인정 받아 보상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 지역에 사는 거주민들이 두고온 고향 땅을 그리워하고 두고온 선조들의 묘지를 이장 하지 못해

수몰된 이곳에서 제사라도 받들수 있도록 하여 달라는 청원에 망향정을 세웠다고 한다.

올해 5월 중순 부터 화순적벽을 더 자세히 볼수 있도록 망미정 까지 개방 했다고 한다.





적벽투어의 마지막 투어 장소인 이서면 커뮤니티센타 부근 은행 나무 를 마지막으로 투어 하고

버스에 탑승하여 출발지인 이용대 체육관으로 복귀 하는것으로 버스 투어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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