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군 하빈면 묘동은 사육신 중 하나인 충정공 박팽년(1417∼1456) 후손이 모여 사는 순천 박씨 집성촌이다.

삼가헌은 박씨 집성촌과는 낮은 산을 경계로 하고 있다.

삼가헌은 박팽년의 11대 손인 성수(聖洙)가 1769년에 이곳에 초가를 짓고 자기의 호를 따라 삼가헌이라 한 것에서 시작한다.

그 뒤 그의 아들 광석(光錫)이 1783년 이웃 묘골에서 현재 위치로 분가한 다음 1826년 초가를 헐고 안채와 사랑채를 지었다.

별당인 하엽정(荷葉亭)은 연꽃잎의 정자라는 뜻으로 1826년 집을 지을 당시 많은 흙을 파낸 자리에

박광석의 손자 규현이 1874년에 연못으로 꾸며 연을 심고 파산서당을 앞으로 옮겨 지으면서 하엽정이라 당호를 붙였다.

삼가헌(三加軒)이라는 이름은 중용에서 나왔다.

중용 제 9장에는 '子曰 天下國家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자왈 천하국가가균야, 작록가사야, 백도가답야, 중요불가능야)' 라는 문구가 있다.

이 글은 "천하와 국가는 다스릴 수 있고, 관직과 녹봉도 사양할 수 있고, 날카로운 칼날 위를 밟을 수도 있지만 중용은 불가능하다."라는 뜻이다.

이는 천하를 다스림은 知이고, 작록을 거부하는 것은 인(仁)이며. 칼날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은 용(勇)에 해당한고 한다.

즉 선비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모두 갖추었다는 것이다.

하엽정은 원래 4칸 규모의 1자형 건물이었는데 앞에 누마루를 한 칸을 늘여 붙였다고 한다.

연못은 앞쪽으로 길게 뻗은 직사각형이고 가운데 원형 섬이 있고 섬까지는 외나무다리가 있어다.

이 별당은 원래 서당으로 쓰던 곳으로 앞에는 <하엽정>이라는 당호와 함께 <파산서당 巴山書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안채는 전면 6칸 전퇴집으로 3평주 삼량집으로 2009년 4월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지었다.

전체적으로 볼때, 조선 중기에 건축된 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남긴 대표적인 주택이다

위키 백과에는 달성 삼가헌을 이렇게 소개 하고 있습니다.


몇차례 하엽정을 찾으러 방문을 했지만 갈때 마다 문이 굳게 닫혀 달성 삼가헌을 구경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오늘 다시 달성 삼가헌을 찾았습니다. 참 다행 스럽게 문이 열려 있네요

하엽정 연못이 있는 큰집과 그 옆 작은집을 찾게 되었습니다.

박팽년의 후손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집을 짓고 난후 6대손이 이곳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작은집에는 마침 주인과 아내가 마당에 나와 있엇고 바같 어른의 학교 동창이라는 친구분도 같이 담소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달성 삼가헌이란 고택을 구경좀 해도 되겠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아내분이 옆에서 조곤 조곤 안내를 해주시고 구경을 해도 좋다고 하십니다.

큰댁 안집 어른은 오늘 인근 다사읍으로 볼 일  보러 가셨는데 함께 있었으면 문화해설사 마냥 더 자세한 안내를 할수 있을텐데 하며

구경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고 안채를 들여다 보게 되었습니다.

작은집에는 1자형 고택이며 정원에 예쁜꽃을 심어두었고 원목 으로 만든 그네와 정우너에 응접셋트를 만들어두어 정원에서도

편히 앉아 담소를 나누고 소풍 나온듯 식사도 할수 있는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져 있습니다만 사진으로 남기진 못했습니다.

그리고 하엽정이 있는 큰집을 들러 구경을 하고 몇장의 사진을 찍어 보았습니다.


달성 삼가헌(큰집)의 정문 모습입니다

사랑채의 모습입니다

사랑채 정면 모습입니다

사랑채옆 창고(헛간)인듯 싶네요

사랑채옆 뜨락 입니다

하엽정으로 통하는 쪽문입니다

사랑채를 비문이고요

사랑채에 걸린 서각이 이채 롭습니다

안채에서본 대문의 모습이구요

뒤뜰의 장독대입니다

이곳이 하엽정이 있는 별당 이구요 현판에 <하엽정>이라는 당호와 함께 <파산서당 巴山書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네요

하엽정을 소개하는 비문 입니다

이곳이 하엽정 앞 연꽃이 핀다는 연밭이기도 한 연못 입니다. 두꺼비 같은 동물이 살고 있나 봅니다. 인기척인 들리자 소리지르며 연못으로 뛰어 듭니다.



이상 중요민속자료 제104호 인 삼가헌의 모습과 하엽정을 사진으로 남겨 봅니다.



대구 달성군에 있는 하엽정(荷葉亭)은 삼가헌 박성수의 별당이다.

삼가헌을 지은 그 이듬해인 1770년 택지의 서쪽에 네 칸짜리 파산서당(巴山書堂)을 지은 것이 그 처음이다.

가르치기 위한 집이라기에는 강학공간이랄 것 없이 대청마루가 너무 협소하다.

아마도 스스로의 공부를 위해 지은 집일 것이다.

조선 집은 일단 집을 앉히기 위한 기단을 쌓아야 한다.

이 기단에 쓸 흙을 다른 데서 가져올 수도 있지만 이 집에서는 마당을 파서 기단을 쌓았다.

그리고 그 파낸 자리에 물을 담아 연못을 꾸미고 연꽃을 심었다.

연못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전통적인 세계관을 그대로 답습해 가로 15m, 세로 21m의 네모난 못을 만들고 가운데 동그란 섬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수미산이다. 

파산서당이라는 이름은 이 건물이 지금의 계명대가 있는 자리의 파산을 조산(祖山)으로 바라보게끔 자리 잡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금호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자리에 솟은 파산을 조산으로 삼고 그 먼 거리의 상징을 당호로 삼은 옛사람들의 치밀함과 넓음에 감탄한다.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에도 나오듯이 향기는 멀수록 맑은 법이다.

한여름의 연못에는 연꽃이 그득하고 그 향기는 이 집의 곳곳에 스몄을 것이다.

그래서 하엽정의 방 이름은 영향(迎香)이다. 향기를 맞아들이는 방이다.

연꽃은 여름 내내 피는 꽃이다. 바다에 있는 어떤 섬들은 파고에 의해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하고 운해에 의해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하지만,

하엽정 연못의 수미산은 한여름 연꽃이 피면 사라졌다가 연꽃이 지면 나타난다.

그만큼 무성한 연꽃들이 여름 내내 피어 있다.

하엽정의 서쪽은 낮은 산으로 그 산 하나만 넘으면 유장한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

박성수의 후손들은 아마도 이 물자리를 경계해 우백호를 좀 보강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1874년 파산서당의 서쪽 끝 칸에 누마루를 내어 달고 이름을 하엽정이라고 붙였다.

원래 방의 높이 보다 한 자 이상이 높게 계획되어 연못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비로소 백호가 보강되고 연못과 집이 하나가 되었다.


네모난 연못은 땅을 상징하고 동그란 섬은 천상계를 상징한다.

그 연못에 집이 비치니 이 집은 현실계에 있으면서도 천상에 존재하는 집이다.

아직 연꽃이 피지 않을 때는 붉은 배롱나무 꽃잎이, 가을의 문지방 너머에는 단풍나무 잎들이 이 천상의 집 수면을 떠다닌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20404/45269071/1#csidxb5ee75c203d2ccca3717a38fb4d1c13


대구 쓰레기를 모두 모아 서재에 있는 방천리에 매립을 했었지요

와룡산 뒷편 기슭에 대구시 쓰레기를 모두 모아 매립을 하다보니 악취가 가시질 않았는데

지금엔 매립한 땅위에 에너지 시설을 만들어 두고 쓰레기 소각장을 만들어

방천리 일대가 많이 변했네요

이곳에 모여 살던 문화 류씨들은 고향을 버리고 떠나게 되었고

이곳에 망향비를 세우게 됩니다.

방천리 주변에는 공원이 들어 서고 서재 문화체육센터가 생겨

문화 공간으로 또 스포츠 센타로 변해 주민들의 건강을 증진하는 장소 탈바꿈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변은 체육 공원으로 조성되어 파크골프장과 인라인 스케이트장 산책로

자전거길 다양한 체육 문화 시설이 생겨나고 많은 수종의 나무를 심어

걷기 쉬운 숲길이 조성 되어 있답니다






다사읍 방천리에 위치한 서재 문화 체육 센터

다사읍 방천리에 위치한 서재 문화 체육 센터

다사읍 방천리에 위치한 서재 문화 체육 센터 주차장 시살

서재 쓰레기 매립장으로 들어가는 길이 단장되고 쓰레기  매립장은 환경 자원사업소로 탈바꿈 하였다

환경 자원 사업소 정문

쓰레기 소각장

쓰레기 소각장






























달성군 다사읍 방천리 서재 쓰레기 매립장 주변에는  문화류씨 세거지가 있다.

문화 류씨는 문화류씨(文化柳氏)의 가장 윗 조상(祖上)으로서 기록(記錄)에 나타난 이가 바로 시조(始祖)로 받들어지고 있는 류차달(柳車達)이다.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 고려(高麗) 명종(明宗) 때 활약(活躍)하신 류공권의 항목(項目)에 보면

"그의 6대조는 대승(大丞) 류차달(柳車達)인데 태조(太祖)를 도와서 공신(功臣)이 되었다"고 나온다.

또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태종(太宗) 16년에 류양(柳亮)의 전기가 나오는데

이 분은 고려말(高麗末)에서 조선초(朝鮮初)에 이르는 동안 우의정(右議政)에 이른 분이다.

여기에 "그 선대(先代)에 류차달(柳車達)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고려 태조(高麗太祖)에게 공이 있었으므로,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할 때

호(號)를 '삼한공신(三韓功臣)'이라 내렸다"고 나온다.

1565년에 완성(完成)된 "가정보"에는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남정(南征: 남쪽지방을 공격함)할 때 많은

수레를 내어 양식(糧食)을 보급했기에 대승(大丞)이라는 관직(官職)을 내렸다고

조금 더 보충(補充) 설명(說明)이 되어 있다. 류차달(柳車達)은 또한 아들 류효금(柳孝金) 한 분만 낳으셨다.

 시조(始祖) 류차달(柳車達)은 원래(原來) 차(車)씨이며 차무일(車無一)의 38세손(世孫)이다.

류차달(柳車達)의 5대(代) 조상(祖上)인 차승색(車承穡)은 신라(新羅) 애장왕(哀莊王) 때 벼슬이 좌승상(左丞相)이었는데

809년(신라 애장왕 10년) 애장왕(哀莊王)의 숙부(叔父) 김언승(金彦昇, 41대 헌덕왕(憲德王))이 애장왕(哀莊王)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王位)에 올랐다.

차승색(車承穡)은 애장왕(哀莊王)의 복수를 위해 좌승상(左丞相)의 벼슬을 버리고 아들 차공숙(車恭叔)과 함께 헌덕왕(憲德王)을 죽이려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發覺)되어 체포(逮捕) 령(令)이 내려지자 차공숙(車恭叔)을 데리고 도피하여

유주(문화의 당시 지명) 구월산(九月山) 목방동에 들어가 숨어 살면서 할머니의 성(性)인 양(楊)씨를 모방(模倣)하여

유씨로 성을 바꾸고 이름도 색으로 고쳤으며, 아들 차공숙(車恭叔)도 숙(淑)으로 이름을 바꾸어 정착(定着)하여 살았다.

그 후 류차달(柳車達)에 이르러 그 지방(地方)의 호부가 되었다.

 

류차달(柳車達)은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견훤(甄萱)을 정벌할 때 군량보급이 어려움을 알고 재산(財産)을 털어

차 천량을 제작(製作)하고 군량을 보급해준 공으로 익찬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서훈되고 벼슬이 대승에 올랐다.

그의 조상(祖上)에서 성을 바꾼 사실을 안 태조(太祖)가 "차씨(車氏)의 공을 잊을 수 없고

유씨로 성을 바꾼지 6세가 지났으니 유씨도 없앨 수 없다."하며

류차달(柳車達)의 첫째 아들 효전에게 차씨(車氏)를 계승(繼承)하게 하여

연안차씨(延安車氏)의 시조(始祖)가 되었으며, 둘째 아들인 효금에게는 유주에 살면서 유씨를 계승(繼承)하게 하였다.

유주가 문화로 지명이 바뀌면서 본관을 문화로 하였다.

 

류차달()을 시조로 하는 문화 류씨는 류희상()이 대구광역시 달성군에 입향한 이래

얼마 전까지 그 후손들이 다사읍 방천리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인근에 대구광역시 환경 자원 사업소가 건립됨에 따라 현재는 대부분 다른 곳으로 이거해 간 것으로 보인다.

1998년 달성 마을지 편찬 위원회가 편찬하고 달성 문화원에서 간행한 『달성 마을지』에 따르면,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방천리에는 총 81가구가 거주 중인데,

그중 59가구가 문화 류씨이다. 현풍면 지 2리에도 3가구가 확인된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00년 달성군에 거주하는 문화 류씨는 626명이다.

다사읍 방천리 박실원 마을 문화 류씨 집성촌 인근에 대구광역시 환경 자원 사업소가 건립되자

대부분의 문화 류씨 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이거했다.

현재는 재실인 여호재가 남은 듯 하다

 대구광역시 환경 자원 사업소 쓰레기 소각장 그옆에 문화 류씨 세거지이고  재실이 조성되어 잇다.

문화류씨 재실 이다

문화류씨 재실 앞 비석


문화 류씨세거지 임을 알리는 비석과 묘지

방천리 문화 류씨 망향비








여행중 쇼핑 이며 다른 먹걸이를 먹고 마시고 놀다 이윽고 되돌아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짐을 싸 짊어지고 부두가는 버스를 탓다 하카타역에서 후쿠오카항 까지 버스요금 230엔

후쿠오카 항에 내렷다 그리고 승선 티켓팅을 하고 승선을 기다리는 동안

주변에 나서 또 다른 볼거린 없을까 눈을 굴렷다


부두 주차장에 세워진 조그만 일인승 승용차가 눈에 띈다

깜직 스럽다 이게 운행이 될수 있는건가 싶을 정도로

앞모습 뒷모습 돌아가며 사진을 찍어 보았다 이건 대체 얼마나 하려나 거의 장남감 수준이다 그래도 주행 가능한 차인듯 하다

출국 심사는 비교적 수월했다 여권만 내밀고 본인 여부만 확인 하면 통과 되는듯 햇다

한국에서의 출국과 마찬가지로 출국장을 들어서니 면세점이다.

약간의 아이쇼핑 후 승선차례가되어 승선 하니 바다는 아주 잔잔 하다

일본에 올때와는 달리 빈좌석이 많이 남는다 하지만 매표소에서는 창가에 자리가 없다던데 싶었더니

이배는 대마도를 경유한다고 한다

대마도에 다다라 승객을 태우는데 승객이 제법 많다

대마도 섬을 쳐다보니 부두 근처에 있는 가옥들은 모두 일본의 영향을 받은듯 왜 풍이다

아니 이곳은 예전 우리나라 땅이 였는데 약소한 나라이고 왜침을 많이 받아 우리의 강토가 일본에 점령당하고

그렇게 이 대마도를 내 준게 아닌가 싶으다 이젠 우리 땅이다 라고 이야기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나보다

대마도가 일본땅임을 인정 하기가 싫어진다 부산서 75Km밖에 되 않는 거린데 왜 우리의 소유권을 제기하지는 못하는 걸까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 간다 대마도는 생각보다 꽤나 큰 섬 같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배는 부산항에 도착 입국 수속을 하고 부산여객 터미널을 빠져 나왔다 이로서 이번 일본 후쿠오카 여행도 끝이났다

좋은 추억거리를 만든 듯 하다

하카타역에는 한센 백화점과 역사 4층에 위치한 100엔 샆이 굉장한 쇼핑 장소이자 좋은 먹거리를 가진 장소이다.

100엔샾에서 참으로 많은 물건들을 줏어 담아 왔다

지금의 주제는 100엔 샾에서의쇼핑이 아니라 맛집 이야기로

하카타역 복합터미널에 지하도에 위치한 키야미아라는 식당에 대하여 이야길 할까 한다.

길게 늘어선 줄 내앞의 손님들은 언제 부터 와 있는지 메뉴판을 들고 있다

한참을 지나 식당 종업원인듯 한 사람이 식사 주문을 받는다.

식사 주문은 내앞에서 멈춰진다 나는 식사 주문을 하려해도 주문을 받지 않는다.

조금후 앞사람에게서 회수한 메뉴 책자를 내게 내민다.

식사주문전 메뉴를 보고 식사 주문을 할 수 있도록 미리 결정을 하라는 의미인것 같다

메뉴판을 받아 들었다 맨 먼저 나오는 이야기가 키와미아 오사카 진출 결정 오사카 난바점이 9월13일 개점 된다고 한다







무슨 메뉴를 주문 할건지 심사숙고 하여 메뉴를 결정 했다

키야미야 햄버그 스테이크 콤비 철판구이 두개 와 된장국과 밥 한개를 주문했다

주문을 받자 마자 메뉴판을 받아 뒷사람에게 전달 한다 그리고 또 한참을 기다린다

근 한시간 이상을 서서 기다린듯 하다 내앞의 일행은 네명 네명이 같이 앉을 공간이 나지 않는듯 양해를 구하고 먼저 들어 오라고 한다

들어가 착석하여 둘러보니 가게가 아주 협소하다 착석 하기전 물휴지와 식수 그리고 종이 앞치마 그리고 나무 젓가락 한쌍 나무 젓가락 한쌍이 셋팅되어 있다

종이로 만들어진 앞치마를 두러고 나니 된장국과 셀러드 밥이 들어 온다 이메뉴는 리필이 가능 하다고 한다

그리고 스테이크가 들어오고 스테이크를 담아오는 철판 그릇에 동그랗게 생겨 주먹보다 조금 작은듯한 쇳덩이가 놓여 있다 이곳에 스테이크를 구워 먹는 단다

고기를 구울땐 쇠 젓가락으로 굽고 먹을땐 나무 젓가락을 사용 하라고 씌여져 있다.

고기가 익지 않아 나무젓가락으로 뒤적거리면 혹시 모를 병균에 노출 될 수 있어

예방 차원에서 쇠젓가락으로 고기를 구워 먹으라는 듯 하다

조금은 작은 듯한 스테이크를 철판위에 올려 놓으니 고기가 챠르르소리를 내면서 익는다

익은 고기를 나무젓가락으로 집어 한점 한점 소스에 찍어 먹으니 꽤나 먹음직 스럽고 맛도 일품이다

고기를 구워 먹고 조금 남긴상태에서 밥을 먹고 반찬삼아 고기를 먹다보니 어느새 밥을 다 비웠다

종업원을 불러 밥을 리필 하여 주십사했더니 양이 얼마나 되느냐 묻는다

조금 만 주면 된다고 했더니 먹던 그릇에 밥을 조금 들어 갖다 준다

된장국과 샐러드를 모두 비우고 일어 서려니 디저트는 어떻게 하겠냐고 묻는다 아이스크림 테이크 아웃

이렇게 외치니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아이스 크림을 손에 들려 준다

한끼에 1680엔과 300엔 거의 인당 2만원상당 이다 그래도 맛있다

이번 여행은 먹거리 먹방 투어가 되 버린듯 하다

유토우 버스를 타고 유후인을 향하는 중 가이드가 과자를 한봉지 줍니다.

온갖 간식거리가 담겨져 있는 그리고는 벳부 가마도 지옥 입장료를 걷으러 다닙니다.

600엔이나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린 예약 당시 유후인에만 가기로 했던터라 가마도 지옥 온천은 가지 않겠노라 하였습니다.

이미 가마도 지옥은 가본 터라 크게 변함이 없을 관광지를 무의미 하게 다니는 것 보다

유후인에 더 머물렀으면 하는 바램으로 가이드가 본사에 연락을 취해보겠다고 하며

계약 당시 주고받았던 카톡 문자들과 예약 사항을 사진으로 찍어 전송 하고 나더니

확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유후인에 오전 11시30분경 도착후 자유 관광 시간을 오후2시30분까지로 제한 하고

오후30분에는 모두 벳부로 가기로 하였지만 우리는 유후인에 남기로 하였습니다.

오후 4시경 유토우 버스에서 마련 해주는 택시를 탑승하여 벳부로 가면 벳부에서 합류하여

원래 출발지인 하카타역으로 데려다 주기로 하였답니다.

그럼 혹시 택시비는 우리가 부담해야 하는건 아닌지? 그럴리 없을거야

걱정은 나중에 하고 유후인 민예촌을 돌며 실컿 구경하고 4시에 택시와 만나기로한 순사이로만 가게로 도착하니

순사이로만 가게 앞에 제일교통 택시와 기사가 기다리고 있네요

택시기사는 무척이나 친절하고 안전 하게 탑승 할수 있도록 안내해주고 탑승이 끝나자

유후 다케아마를 거슬러 올라 산을 넘어 넘어 내 달립니다.

산 허리를 돌아 가며 초지가 보이고 한참을 지나니 우거진 나무 숲이 보이고

경치가 보통 좋은게 아닙니다 그래서 똑닥이 카메라를 꺼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아름 다운 산야는 담을수가 없어 안타까울 뿐이 였답니다.

우거진 나무 숲을 지날 땐 제주도 샤르니 숲길을 달리는듯 하다가 도

나무가 하나도 없는 풀만 무성한 초지를 달리기도 하고 꽤 먼거리를 달린 듯 합니다.

꺽어진 메타기를 보니 이천엔  삼천엔  자꾸 올라 갑니다



택시를 타고 산길을 달리며 아름다운 산야를 찍어보려 똑닥이 사진기를 들이대고 찍었지만 몇 컷트 찍질 못했답니다.

정말 아쉬웁네요 현장 감 있게 아름 다운 산야를 몇 컷트 찍어 올려야 하는건데 너무 아쉽네요



30분을 넘게 달려 벳부 가마도 지옥에 도착하니 하카타역에서 탑승한 유토우 버스가 기다리고 있네요

친절한 택시기사는 버스를 확인하고 안전 하게 내려주고 자기 갈길로 가버립니다.

내리며 택시요금 메타를 잠시 확인 하였더니 교통비가 6천엔도 더 됩니다.

내가 유토우 버스에 지불한 금액이 8만8천원인데 택시비가 6만원 정도이면 도대체 이건 완전 밑가는 장사인데

그럼에도 내색않고 친절히 맞아 주는 가이드가 고맙게 생각 듭니다.

아직 다른 승객은 탑승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승객들은 아직 가마도 지옥을 구경 중 인가 봅니다

조금을 기다리니 다른 승객이 탑승을 합니다 .

그렇게 버스를 타고 하카타역으로 되돌아 왔습니다만

예상 하지 못했던 택시 여행 잊혀지질 않을 추억 거리가 된 듯 합니다



유후인에 가면 민예촌 거리가 있습니다

긴린코 호수로 가는 길에서 유후인 역 까지 이어진 아기 자기 핸드 메이드 가게와 이색적인 먹거리를 파는 특색 있는 가게들이

길 양편으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오이타현 관광정보 사이트에는 유후인 민예촌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에도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의 민예품을 소장하고 있는 민예 민구관, 수제 일본 종이 공방,

민속 유리 공방에서는 시연을 있어 도예와 염색의 체험을 있습니다. (유료)
식당과 찻집을 병설하고 있어 견학 휴식처로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관광버스 "스카보로" 정류장이며 유후인의 관광명소 하나입니다.


순사이로만 이라는 가게로 유토우버스의 도착및 출발 장소로 이용 되고 오이타현의 특산물과 가종 선물용 품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순사이로만 가게의 내부 모습입니다

유노츠보 거리의 상가 모습입니다

스누피 차야 상점인데 녹차로 만든 떡과 아이스크림을 판매 합니다


갤러리소라에서는 정말 예쁜 수공에 제품들을 전시하고 판매하지요

수년전 이곳에 왔을때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있네요 노란 자그마한 차가 이뻐 차옆에서 기념 사진도 찍고 했었는데 아직도 있네요

맞은편엔 예전엔 보지 못했던 인력거 꾼들이 관광객을 태우고 거릴 다닙니다

유노츠보 거리의 상가 모습입니다

이곳은 긴린코 호수 주변 텐쇼 신사 입니다.













유후인역방향 으로 가는 유노츠보 거리 입니다

오래 되어 부서진 열차가 멈춰 있기도 합니다

멀리 보이는 산이 유후다케야마인데 휴화산 이라고 합니다 2000년도 이전에 화산이 활동한 적이 있다는 군요

긴린코호수에 흐르는 물은 휴화산인 유후다케야마에서 흘러 내린 물이 내를 이루어 흘르기 때문에 수온이 따스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겨울 아침이면 따스한 수증기가 피어 올라 물안개가 낀 듯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유후인 관광지를 대표하는 긴린코
물고기의 비늘이 석양에 비추어져, 금색으로 빛나는 모습을 본 학자들에 의해, "금 비늘의 호수"라는 이름이 지어졌으며
긴린코 호수 밑에서 온천물이 나와   수온이 높기 때문에 겨울의 추운 시기에는 호수 면에서 안개가 떠오르는 환상적인 풍경을
즐길 수가 있는 곳으로 사진작가들에게는 성지와 같은 곳으로 유명한 호수다.
긴린코 호수 사진에 나오는 전형적인 호수 풍경
수심은 2m 정도이지만 온천수와 찬물이 만나 겨울철에도 따뜻한 수온을 유지해 안개가 멋지게 피어오르는 곳이다.
여름이라 아쉽게도 안개 구경은... 가을과 겨울에 많이 보인다고 한다.
둘레가 400m 정도 되기 때문에 20분 정도면 한 바퀴를 다 둘러볼 수 있다.
하루에 23,300㎥의 온천수와 샘물이 어우러져 호수를 가득 채우고 있다고 한다.
호수 중앙에 떠 있는듯한 건물.
조그만 호텔로 총 객실 수 8개밖에 되지 않는 호텔이다.
호텔 바로 앞에 조그만 텐쇼 신사가 있고 물속에  잠겨 있는 도리이가 눈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근처에 사찰이 있었는데 정책에 의하여 옮겨오면서 여기에 자리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옛날에 긴린코 호수가 엄청나게 큰 호수여서 거기에는 큰 용이 살았는데 갈수록 호수가 줄어들어 용은 신통력을 잃고
몸부림치며 찾아온 곳이 이곳이었다고 한다. 용은 하늘 조신에게 "나는 오랜 세월 이 호수에 살던 용입니다.
저에게 조그만 땅을 주시면 호수의 모든 맑은 물을 솟게 하고 오랫동안 이곳을 지켜주겠습니다“하고 부탁을 해서
하늘의 조신이 용의 소원을 들어주어 지금처럼 아름다운 호수가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신사 앞 벤치에서 보는 긴린코 전경이 정말 명당이다.
가을 단풍이 들면 정말 환상적인 풍경이 연출될 듯...
가을 단풍과 도리이 그리고 호수의 풍경이 그려진다.
러시아 화가 마르크 샤갈의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샤갈의 작품과
유후인에 거주하는 다른 아티스트들의 작품도 볼 수 있고 1층 카페에서는
런치와 디저트를 즐길 수 있는데 야외 테라스에서 호수를 보면서 식사를 하는
풍경이 정말 일품이라고 한다.








몇 년전 친구들과 패케지 여행으로 이 호수를 찾아서 아내랑 같이 찍은 사진이 있다.

이번에 올땐 그 사진을 들고 수년이 지났지만 그 모습 그대로

예전과 꼭같은 포즈로 재현된 사진을 찍기로 하였다

하지만 호수는 예전의 호수가 아니다.

제법 크게 보였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긴린코호수는

호수가 아닌 연못과도 같다.

그리고 호수가에 설치 해두었던 벤치는 자취를 감췄다.

벤치위에 앉아 아내랑 둘이서 사진을 찍었는데

그러면서 사진을 보고 어느 각도에서 찍었는지 맞춰 보았다

포인트를 찾는데 그렇게 어렵진 않았지만 카메라 앵글과 포인트 모두 찾았지만

같이 앉아 찍을 벤치가 없어 재현은 할수 가 없었다.

괜한 섭섭함이 밀려 온다.

어쩌누 할수 없지 그냥 다시 둘러 본것으로 만족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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