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려나 봅니다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

자전거타기 딱인 계절이네요

저녁 자전거 라이딩중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와

금호강변 비춰진 야경의 모습을 찍어보았네요







제5회 달성 군수기 가족소원 풍등 별빛 걷기대회가 열린다고 해서

참여하여 건강도 챙기고 행사에도 참여하자고 아내를 꼬셔 참여 하기로 하고

걷기대회가 열린다는 8월 27일 오후6시반 시간 맞춰 강창교 밑 행사장에 도착햇다.

번호판을 등이나 배에 붙이고 많은 사람들이 접수를 마쳤나 보다.

얼른 접수를 하고 나도 등번호를 받아야지 해서 접수를 어디서 하나요 물었더니

이곳 접수처에서 하면 된다기에 쳐다보니 참가자 이름과연락처를 저는 장부도 없고

몇명이 접수했다고 써놓은 대장도 없다

얼마내면 됩니까 했더니 1인당 3천원 내고 접수하면 됩니다 해서 아내것 까지 육천원을 접수 한다고

만원을 줬더니 에게!!! 물한병과 야광 팔찌한게 배번 한장이 전부다 이게 무슨 3천원이람

근데 왜 참가자 이름이나 연락처 조차도 기록하는곳이 없누 약간 의아 스럽다.

가설무대에서는 지역 봉사자들이 악기를 들고 합주하며 노래를 부른다.

가수가 출연 하거나 하여 무대에 행사비용이 많이 들어간것은 아닌듯 하다.

내빈석을 보니 달성군 김문오 군수, 추경호 달성군 국회의원, 그외 시의회 의장 달성군 의회회장

그리고 시의원과 군의원 다수가 보인다 모두 예전 추경호 의원실에서 한번 보고 인사를 나눴던 인물들이다.

지루한 공연이 끝나고 내빈소개등 식순에 의한 행사를 진행하는데 너무 지루 하다.

가만 보아하니 곧 있을 지방 선거를 대비하여 얼굴을 알리러 나온것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자기들 생색낸다고 주민들 행사에 참여하고 사진이나 찍으러 나온듯 보인다.

분명 포스터에는 참가비 삼천원을 내면 풍등과 기념품 생수 및 간식, 행운권을 준다고 했는데

삼천원을 내고 받은건 아래의 사진이 다인듯 하다.

정말 너무 하다 이게 삼천원 어치가 된다는 말인가? 군에서 하는 행사라 군청 예산도 꽤 많이 지원 되었을텐데...

그러고 보니 빠진게 있네 오늘 바람 분다고 날리지 못한다는 풍등 한개

그리고 마치고 오는길에 행사 진행원이 내밀든 종이 밥그릇에 반쯤 담긴 수박 화채

이게 삼천원어치 이다 바가지도 이런 바가지가 있을수 없다. 군민들에게 찬조받은 용품들도 수없이 많을텐데

별빛 걷기대회를 격려하고 군민들의 호응을 얻기위한 공연은 모두 아마추어 자원봉사자들로 채워져 있었고

공연은 주최측의 기대만큼 호응도가 좋지못하여

사회자는 지루하지만 조금만 참아 달라는 애원을 할 만큼 이다

내빈석에는 김문오 달성군수 달성군 지역 국회의원인 추경호 국회의원 대구시의원 달서구 의회 구자학 의원

지역 인사들이 참여 하였고 지난번 달성군수로 출마하여 낙선한 인사도 보였다.

모두들 앞으로 다가올 지방 선거를 의식한 듯 얼굴을 내밀었고 걷기대회에 참석한 달성 군민의 불만섞인 투정을 이야길 빌자면

이런 공익 행사에 얼굴 내밀어 주민들을 사진 찍는 행사에 이용 한것 같다고 한다.

참가자 접수처 접수대를 보라 참가자 명단이나 접수 인원이 몇명인지 집계 할수 있는 그 아무것도 없다

일인당 삼천원이나 되는 돈을 거둬 얼마나 거둬 들였는지 어떻게 사용했는지 계산할수 있는 아무것도 없다.

동네 주민 체육 대회나 동창 회 체육 대횔 가도 몇명이 접수 되었는지 얼마나 수입이 잡혔는지

또 어떤 곳에 그 돈이 쓰였는지 계산하는 방명록이 놓여있기 마련 인데 그런 내용은 어디 하나 찾아 볼수 없다.

걷기대회에 참석한 아주머니들 투정들을 빌리자면 오늘 수익금으로

봉사한다고 참여한 진행 요원들 회식비로 다 쓰지 않겠느냐고 한다.

그렇게 착복하더라도 밝힐수 있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게 말이 안되는 소리지만 실상은 반박할 여지가 없기도 하다.

행사장은 축하공연이 펼쳐지고 있지만 참여 주민들은 무관심 하고 질서가 없다

진행요원들은 잘못 된 주최행사에 주민들의 관심이 없음을 알고 지루해도 곧 걷기대회가 시작되니 기다려 주시길 간청하고

빨리 행사를 진행하겠다는 이야기만 반복 할뿐 지루한 주민들은 출발선에서 출발 신호가 울리기전 각자 먼저 출발하고

행사 진행하는 사회자는 먼저출발해도 소용 없습니다. 먼저가도 풍등을 나눠 주지 않는다는 소리만 외칠뿐이다...






걷기대회를 진행 하는 동안 걷기로 예정된 코스는 어디가 반환점 인지 어디에서 풍등을 나눠주는지

안내 팻말이나 안내 쪽지가 하나도 없음을 분개하고 길가에 행사진행 요원이 경광봉을 들고 있으나

강정보 주변을 종횡하는 전동차량 통제는 되지 않고 있고 어디서 반환 해야 하는지 어다서 어떤 행사를 하는지도 모른채

경광봉만 들고 우두커니 서 있을뿐 날은 저물어 어두워 져도 길을 밝혀주는 유도등도 설치되지 않았다.


유도등 뿐만 아니라 가로등도 없고 어두운 좁은 길을 가는 사람 오는 사람 그리고 행사 목적외에 자전거를 타는 사람

평소 운동하느라 참여자 가 아닌 운동하러 나온 사람 과 전동 모터사이클, 왕발통, 전동 퀵보드를 타는사람들과 뒤엉켜

접촉하고가 날뻔한 위기의 순간도 있었고 실제로 내가 그런 위험에 쳐해 지기도 했었다.


풍등을 나눠 준다는 디아크 앞을 갔더니 반환 지점이 원래 디아크 앞 유람선 승선 장소로 알고 있었는데

진행 요원은이곳이 아니라 강정보까지 다녀 오십시요 라고 이야기하고 그곳에 가면 반환 스탬프를 찍어 드립니다라고 한다.

그래서 강정보 반환점 까지 간다고 갔었지만 이곳은 전동모터사이클과 전동 타는기구로 인해 더욱 더 위험하고

걷는 길은 좁고 인원통제,교통 통제가 전혀 되지 않아 너무 위험 하고 또한 어디가 반환점인지 안내 표지 하나 없음에 분개해야 했다.

참가비 3천원이나 받으면서 참여자에 대한 배려는 어디하나 만족할 만 한게 없었다.


강정보 반환점을 돌아 다시 디아크부근 유람선 승선장으로 가니 사람들이 풍등을 받기 위해 풍등 나눠주는 곳으로 가는데

무질서의 극치를 이룬다 진행 요원이라는 사람은 손만 내밀면 모두 풍등 하나씩을 주는데 정작 풍등을 받기는 했지만

풍등을 날릴수가 없다 바람도 불거니와 잘못 풍등을 띄우면 화재의 위험도 있고 해서 풍등을 날리지 못하게 하는 까닭도 있었지만

그야말로 무질서의 극치를 이뤄 풍등을 날릴수가 없었다.


풍등을 받아가는 도중 참여한 주민들은 행사 진행 요원에게 저마다 불평 불만을 쏟아낸다.

참가비는 왜 받냐고 그리고 진행은 왜 이 모양들 이냐고 선물하나 변변한거 주지도 않고 행사장에 등불도 없이

안전도 보장 받지 못하는데 뭐한데 돈은 거뒀냐고 행사내내 마칠때 까지 한심 스럽고 무질서하고

관리되지 못한 행사에 참여한 달성군수부터 의원들 지역인사까지 싸잡아 욕을하며

다른 곳의 행사에 참여했던 경험들을 이야기하는 주민들도 있었고

모두들 내일 달성군 홈페이지에 항의글을 올려야 겠다는 주민들 까지 그야말로 개판이다.

걷기행사의 종점이자 시작점이였던 강창교 다리밑으로 가니 어느업체에서 어떤 선물을 찬조하여 주었고

누가 무엇을 기부하였다고 마이크로 방송을 하였지만 참여 주민들은 모두들 시큰둥 하다

행사요원이 내미는 수박 화채 한그릇도 부실하긴 마찬 가지다.

한그릇 먹는둥 마는둥 하고 자리를 빠져 나와 집으로 향 했지만 좋은 마음으로 건강 챙기러 왔다가

스트레스만 쌓인채 돌아간다는 아주머니들의 이야기가 여운으로 남는다.

정말 이런 행사에 왜 참여 했을까 오는 사문진 송해공원 달빛 걷기 축제도 참석하려고 했는데

이런 행사라면 참여해서는 안될것 같다 차라리 이런 행사라면 아파트 주변을 한바퀴 도는게 나을듯 싶으다








내일 배움 카드로 재직자 직업 교육인 용접 실무 과정을  수료 헀습니다.

아직 용접이 미숙한 터라 재 수강 요청 하여 용접기능사 자격증 취득을 목표로 매진 하고 있습니다.


자동차를 아내거 내꺼 딸아이것 이렇게 3대를 가지고 있다.

작은 녀석도 불편 해서 차를 사야 겠다고 한다.

모두 성인이고 직장이있고 사는곳이 외진곳이라 차가 없으면 불편하여

차를 가지고 다니는게 오히려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것보다 수월하여 식구 수 대로 차를 보유 하여야 할까 보다.

보험을 각기 관리 하는것 보다 할인율이 많은 곳으로 몰아 함께 하나의 증권으로 계약 관리 하면 쉬울것 같아

모두 한 사람의 이름으로 등록 하였다.

그러다 보니 보험 만기가 되기전 세대분을 함께 계약 갱신 해야 하는터라

그래도 할인이 많이 된다는 다이랙트 보험으로 알아 보기로 했다.

말이 다이렉트지 3대를 모두 비교 견적 하기에는 너무 짜증 스럽다.

XX 다이렉트 보험사에서 비교 견적 해준다 하여 문의 하였지만 XX다이렉트사는 말만 다이렉트지

다이렉트 보험사가 아닌 대행사 였다

다이렉트 비교 견적이라는 업체가 몇몇 있지만 모두 대행사이다.

실제 다이렉트로 비교하기 위해서는 각 보험사의 다이렉트 창구를 방문하여 차량을 하나 하나 비교 견적 할수 밖에 없다.

모 보험사에서는 3대 모두 같이 견적 진행 할수 있도록 해두긴 했지만 그곳도 마찬가지로 개별 견적을 진행 할 수 밖에 없엇다.

운전자가 다 다르고 연령대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각자 주행하는 주행거리며 조건들이 일률적으로 같을 순 없기때문에

운행 조건에 따라 특약을 하거나 보험 담보를 각기 정할수 밖에 없는터라 개별로 보험료를 알아보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보험 담보가 바뀔때 마다 처음 부터 새로 입력하여 진행 햬야 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매번 공인 인증서 확인이나 핸드폰으로 본인 확인을 행해야 한다.)

한번 본인 인증을 하고 나면 계속 유효하여 본인 확인 없이도 보험료 산출이 가능한 곳도 있다.

하지만 이런 곳도 페이지가 넘어가고 나면 일일이 본인 인증을 하여야 보험료가 제대로 산출 된다.

보험의 담보별로 조건별로 각 사 마다 보험료를 비교 산출 하자니 정말 성가시고 불편 하다.

그래서 모두들 XX 다이렉트 보험이라는 대행사 들을 이용하나 보다 싶으리 만큼 성가시고 귀찮다.

그런다고 보험 설계사를 이용하면 쉽게 해결 될일이지만 설계사의 수당이 빠져나가는 만큼 보험료도 조금 더 내야 할듯 하고

실제 인터넷으로 다이렉트 보험 체결시 약정 할인 되는 금액이 있으니 이도 무시 못할 정도이다)

그렇게 4~5개사의 보험료를 같은 담보 조건으로 산출하여 가장 적은 금액이 드는 곳으로 보험사를 선정하여 계약하여

나름 돈을 좀 아꼈다고 생각 했는데 그게 아니다 같은 담보조건이라도 이렇게 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 보았는데

같은 담보 임에도 가격 변동이 꽤나 있는듯 하다.

결과적으로 나름 최적의 조건이라고 보험료를 산출하여 계약 하고 보니 그래도 더 아낄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보험사에서 제시하는 조건은(?) 보험료 산출은 눈에 띄기 쉽도록 나열하여 조건이나 담보를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호갱이 되도록 홈 페이지를 꾸며 놓은듯 하다.

일단 같은 담보로 보험료를 뽑아 보았다.



일단 이 조건에서는 AXA 다이렉트가 가장 작게 나왔지만 차량이나 여러 조건들을 나눠 조회해 보니 때로는 현대해상이

때론 KB 보험사가 적게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다른 차량을 다시 견적 하여 보았다


H사는 ECO특약이 있고 특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환급을 해준다고 하지만 1만키로 미만 운행하는 차에 한하여

특약이 되므로 가만히 세워두는 차가 아니면 환급을 돌려 받을수 있을까 싶다.


S사는 1만5천Km 이하 ECO특약이 가능 하다 실제 일반인의 승용차 주행 거리면 1만5천Km 이상 운행 한다.

이 또한 그다지 많이 주행 하지 않는 차량이여야만 혜택을 볼수 있지만 그래도 H사 보다는 현실적이란 생각이 든다


아무리 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A사의 마일리지 특약이다

A사는 후할인시 보험료가 가장 적다 마일리지 특약으로 환급을 해주는 특약인데

특약을 맺지 않으면 오히려 금액이 더 비싸다 하긴 다른 회사도 마찬가지로 환급을 해주지 않는 특약 미가입자가

오히려 더 많은 보험료를 내야 한다 뭔가 불합리 하다고 밖에 볼 수없는 장치이다



A사의 마일리지 특약은 이상하다 선활인 제도가 있어 3천Km미만 특약을 맺으면 가격이 싸진다 할인이 많이된다.

하지만 주행거리가 많아 지면 보험료는 높아진다.  선할인 하여 주고 보험 만기가 되면 환급을 해 주겠다는 건지?

보험 만기가 끝이나면 이미 받은 보험료를 더 내라고 하진 않을테고 이게 뭐지 ?

고개를 갸웃 거리게 하는 마일리지 제도이다.

다이렉트보험 상담원에게 물어 보았더니 미래 선 할인 해주고 나중에 만기가 되면 할인받은 금액보다 더 많이 주행을 하고나면

주행 거리만큼 해당하는 금액을 보험사에서 돌려 받는 제도 라는데 그럼 모르겟다하고 다른 보험사로 갈아 타면 어떻하냐고 물었더니

믿고 거래 하는거라고 하네 그러면 후할인 제도가 더 좋지 않느냐고 되물었더니 후할인의 경우 비용이 더 높게 나온다고 하는데

다시 계산을 해보니 후할인이 오히려 더 싸다 그럼에도 상담원은 그렇지 않다고 우기는데 과연 그런 건지?

후할인 보험 가입이면 나중에 보험 만기시 환급을 해주겠지 싶기도 하지만 그것도 가입시 사진을 제출하는 방법과

계약후 사진을 제출하는 방식에 따라서도 금액이 다르다 (아주 소액이지만)

그리고 주행 거리별 할인율을 보게되면 3천Km이하, 5천Km이하 , 9천Km이하로 구분 되어 있다 .

정말 실효성이 없는 마일리지 할인 제도 이다. 금융 감독원에서는 뭣들 하는지 이런 생색만 내는 할인제도를 만들어 두고

소비자의 호주머니를 터는 보험사의 할인제도와 보험료를 승인 해주고

매년 보험료를 인상 시켜 주고 하는 것이 과연 금융 감독원이 제대로 일을 하는것인지 한심 스럽다.

이런 보험사의 보험견적을 받는일 부터 너무나 어렵고 불합리한 보험 숫가 체계를 보고 있노라니 알면서도 호갱이 되어야 하는

서민의 처지가 참 한탄 스럽다.






이종훈 전 한전 사장의 한탄, “세계 원전시장 석권이 코앞인데…”

글 | 정장열 주간조선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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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를 결정할 공론화위원회가 구성된 지난 7월 24일 이종훈 전 한국전력공사(이하 한 전) 사장을 만났다. 1993년부터 1998년까지 한전 사장을 지낸 그는 한국 원자력 발전의 산증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1976년 고리 원전 1호기 건설 부소장을 시작으로 20여년간 원전 건설 현장을 누비면서 국산 원전 개발을 이끌었다. 한전 부사장 시절 한국 최초의 표준형 원전인 영광 3·4호기(OPR-1000) 개발 책임자로 뛰면서 원전 기술 자립 기반을 닦았고, 한전 사장 재임 5년간 3세대 국산 원전인 APR-1400 개발에 과감한 투자를 했다. 그가 한전 사장을 그만둘 때 기본 설계만 마쳤던 ARP-1400은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에 4기가 47조원에 수출되는 쾌거를 이뤘다.
   
   서울 선릉역 인근 개인 사무실에서 만난 이 전 사장은 80대로 보이지 않았다. 자세도 꼿꼿했고 마주 잡은 두툼한 손에서 힘이 느껴졌다. 특히 그는 전력, 원자력 산업과 관련해서는 각종 수치와 연도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1935년 경북 안동 태생인 그는 서울대 공대를 나온 뒤 1961년 한전의 전신인 조선전업주식회사에 공채 5기로 입사해 평생 한 우물을 팠다. 그는 한전 근무 시절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던 메모를 바탕으로 2012년 ‘한국은 어떻게 원자력 강국이 되었나’라는 ‘CEO 경영수기’를 펴내기도 했다.
   
   세계가 주목한 한국의 원전 신화를 이끌어온 장본인으로서 그는 인터뷰 내내 우려와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새로운 블루오션과 기술에 다가서고 있는 한국의 원자력계가 현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으로 한순간에 무너질지 모른다는 걱정을 했다. 그는 “현 정부의 탈원전 정책 때문에 요즘 골치가 아프다”며 “대통령이 어떤 결정을 할 때는 여러 정보를 심도 있게 검토한 후 판단해야 하는데 지금 문재인 대통령은 여전히 운동권 시각으로 원전을 바라보는 것 같다”고 했다. “프랑스 사회당 좌파 정부를 이끈 미테랑 대통령도 탈원전을 내걸고 집권했지만 집권 후에는 오히려 원전을 발전시켰다. 그 결과 프랑스는 지금 70% 이상의 전력을 원전에서 공급받는다. 이웃 독일도 급할 때는 프랑스로부터 전기를 갖다 쓸 수 있기 때문에 탈원전을 하는 것이다.”
   
   - 문 대통령은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를 오늘 구성된 공론화위원회에 맡기겠다고 했는데. “대통령 스스로는 중립이라고 하면서도 월성1호기도 중단 가능성을 언급하는 등 계속 탈원전 메시지를 주고 있지 않나. 대통령이 그러는데 밑에서 거부할 수 있겠나.”
   
   
   “국산 3세대 원전 내년 9월 미국 인증”
   
   - 왜 탈원전에 반대하나. “가장 큰 이유는 안보다. 탈원전하면서 액화천연가스(LNG) 발전 비중을 70%로 늘린다고 하는데 가스는 석유랑 똑같다. 가스 발전을 그 정도 비율로 유지하려면 외국에서 배로 계속 가스를 수입해야 한다. 지금 가스는 인도네시아에서 들여오는데 그 루트가 국제정세가 복잡한 남중국해 아닌가. 무슨 일이 터져 일주일만 배가 안 들어오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러시아에서 파이프로 가스를 끌어오겠다고도 하는데 유럽의 경우 우크라이나에서 문제가 생겨 러시아가 가스관을 잠근다고 위협하니까 전부 벌벌 떨었다. 에너지 문제는 국가 안보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
   
   - 우리가 탈원전을 추구하면 원전 수출에도 지장을 받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신고리 5·6기 건설을 중단하면 이미 쏟아부은 1조6000억원을 날린다고 걱정들 하는데 사실 1조~2조원은 문제가 아니다. 향후 30년간 600조원으로 예상되는 원전 시장을 놓치는 게 더 큰 문제다. 우리 원전을 수입한 UAE부터 걱정이다. 원전은 건설 후에도 계속 부품을 공급받아야 한다. 우리는 부품을 국산화해 지금 600여개 중소기업이 부품을 생산한다. 그런데 우리가 원전 건설을 중단하면 다품종 소량생산하는 부품업체들이 버틸 수 있겠나. 당연히 UAE도 부품 공급을 받을 수 있을지 걱정할 테고 그 틈을 다른 나라 경쟁업체들이 파고들 게 뻔하다. UAE는 자체 부품 생산 능력이 없다.”
   
   그는 현재 세계 최고 수준인 APR -1400의 경쟁력이 사장(死藏)될 수 있다는 우려도 했다. “특히 안타까운 건 내년 9월이면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가 APR-1400에 대해 설계인증서(Design Certificat)를 발부할 예정이라는 점이다. NRC가 얼마나 꼼꼼한 기관이냐. 여기서 인증한다는 건 세계적으로 안전성을 인증받는다는 걸 의미한다. 우리 APR-1400은 이미 예비검사를 통과했다. 일본 미쓰비시랑 프랑스 업체도 3세대 원전을 개발했는데 NRC 예비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3세대 원전 중 NRC가 안전성을 인정한 건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AP1000이랑 우리밖에 없다. 그런데 AP1000은 미국 조지아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그리고 중국에
   
   4기가 건설 중이지만 계속 문제가 생기면서 잘 안 되고 있다. 반면 APR-1400은 UAE에서 순조롭게 건설 중이어서 연말이면 첫 가동을 시작할 전망이다. 이미 국내에서도 APR-1400 모델인 신고리 3호기가 작년 연말 세계 최초로 상업운전을 시작했다. 우리가 세계 원전시장을 석권할 유리한 위치에 있는 셈이다.”
   
   - APR-1400과는 인연이 깊다고 들었다. “내가 한전 자회사인 한국전력기술(KOPEC) 사장으로 있을 때 정부에서 미래 먹거리를 발굴한다면서 G7사업을 시작했다. 내가 그중 하나로 차세대 원전을 개발하자고 했는데 연구비 조달이 힘들었다. 윗선에서 ‘한 프로젝트에 어떻게 2000억원씩 들이느냐’며 난감해했다. 그래서 내가 담당하던 영광 3·4호기 프로젝트의 예산 일부를 떼어내 일단 쓰겠다고 해서 시작했다. 한전 사장으로 가서는 APR-1400에 집중 투자했는데 5년간 2300억원을 썼다. 1998년 3월 기본설계 안전분석보고서까지 완성된 상태에서 퇴임했다.”
   
   
▲ 1987년 4월 영광원전 3·4호기 원자로 공급 및 기술도입 계약에 서명하는 이종훈 한전 부사장(오른쪽 두번째).

   “원전산업은 한번 중단되면 시스템이 깨진다”
   
   - 국내에서는 탈원전을 하더라도 원전 수출은 지속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최근 한국수력원자력 임원을 만나니까 정부에서도 원전 수출은 계속하라는 시그널이 온다고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원전산업은 한번 멎어버리면 시스템이 깨져버린다. 왜 원전 후진국이던 우리가 세계 1등이 된 줄 아나? 1979년 미국의 스리마일(Three Mile) 아일랜드 원전사고와 1986년 체르노빌 사고가 터지면서 전 세계 원전 엔지니어들은 다 직장을 잃었고 네트워크가 깨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공백기를 파고들어 기술 전수를 받았다. 체르노빌 사고가 터지던 해 우리가 영광 3·4호기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미국 CE사와 기술전수 협상을 벌이고 있었는데 체르노빌 사고로 협상이 유리해졌다. 회사가 망할까봐 몸이 단 미국 회사로부터 많이 받아냈다. 지금 우리가 몇 년간 원전 건설을 중단하면 설계회사인 KOPEC부터 할 일이 없어진다. 이 회사에 원전 설계 인력이 2000명이나 있는데 현재 2세대 원전에 머물러 있는 중국에서 아마 이들 인력을 빼갈 것이다.”
   
   - 탈원전을 찬성하는 전문가들은 경제성장이 둔화되면서 전력 수요도 줄어들어 원전을 더 이상 짓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얼마 전 8차 전력수급계획 초안에서 2030년 전력수요를 2년 전보다 10%나 줄여서 전망했는데. “나도 전력수요가 앞으로는 그렇게 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전력수요는 무작정 늘어나는 게 아니다. 전문 용어로 ‘피크 경신’이 더 이상 없는 포화상태가 온다. 지금 우리의 전력 씀씀이를 보면 오히려 줄이는 게 맞다. 자원이 풍부해 본래 전기를 많이 쓰는 미국, 캐나다를 제외하면 유럽 선진국은 우리보다 전기를 적게 쓴다. 프랑스, 독일 등은
   
   1인당 6000~8000㎾h 정도 쓰는데 우리는 1만㎾h가 넘는다. GDP를 비교하면 우리가 과소비를 하는 셈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원전 덕분 아닌가. 원전 덕분에 전기요금이 싸니까 많이 쓰는 것이다. 전기료가 싸서 많이 쓰니까 지금 원전을 없애도 된다? 논리가 거꾸로 돼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원전을 없애면 기본이 무너진다.”
   
   - 기본이 무너진다니? “전력 과소비를 줄이는 건 맞지만 원전은 전력 공급의 베이스가 되어야 한다. 원전은 고정비에 대한 감가상각비가 원가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생산 단가가 저렴하다. 원전을 가스발전으로 대치하면 연료비 3원 들이면 될 것을 130원 들여서 생산해야 한다. 나는 원전으로 생산하는 전기를 전체의 30~40% 선에서 유지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파리협약으로 이산화탄소를 줄이려면 원전을 없애서는 안 된다. 왜 원전만 짓지 않겠다는 건가.”
   
   그는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 전력수급의 예측 불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내가 한전 사장에 취임했을 때 전체 전기 생산 설비용량이 3000만㎾ 정도였다. 그때 예상하기를 설비용량 7000만㎾, 1인당 소비량 7000㎾h 정도가 되면 피크 경신이 더 이상 없을 것으로 봤다. 하지만 그후 의외로 전기 수요가 계속 늘었다. 작년 최대 수요가 8520만㎾였다. 지금 설비용량이 1억㎾가 넘고 전력예비율이 20%대이지만 우리 산업이 위축돼 전력수요가 많이 줄었다고 본다. 내가 저서 ‘한국은 어떻게 원자력 강국이 되었나’에서도 강조했지만 에너지를 풍부하게 이용할 수 있는 사회라야 경제발전 기회가 그만큼 많아지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가 오래전부터 잊고 살았지만 풍부한 전기의 혜택 없이는 빈곤에서 탈출할 수 없었다. 이건 북한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지 않나.”
   
   - 저서를 보니까 한전 사장 취임 후 겪었던 블랙아웃(대규모 정전사태) 위기 얘기도 있던데. “1994년 전력예비율이 2%대로 떨어지는 일이 벌어졌었는데 그때도 변수가 있었다. 그해 이상고온에 더해 월드컵 축구경기 중계방송까지 피크 시간과 겹쳤다. 나는 영월 화력발전소에서부터 잔뼈가 굵었기 때문에 2%대 예비율에도 발전소가 전부 멈춰서는 큰일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지만 당시 동력자원부는 제한송전을 권하기까지 했었다.”
   
   - 블랙아웃은 쉽게 발생하지 않나. “무제한 송전을 시작한 1968년 이전에는 말이 필요 없을 만큼 사정이 열악했지만 그 이후에는 1972년 딱 한 번 블랙아웃이 있었다. 블랙아웃은 예비율이 바닥까지 떨어지면서 발전소들이 전부 허덕허덕하다 전 계통이 무너지는 것인데 잘 일어나지는 않는다. 2%대 예비율도 발전소 두세 개는 여유가 있다는 말이다. 특히 변전소에는 저주파계전기라는 게 있는데 발전소가 견디지 못할 정도가 되면 이것이 작동해 변전소로부터 전기가 인출되는 ‘피더’를 알아서 끈다.”
   
   - 탈원전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무엇보다 원전의 안전성을 문제 삼는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재난 영화 ‘판도라’를 혹시 봤나. “안 봤다. 내가 고리 3·4호기 건설 당시 본부장을 지내면서 원자로 구석구석을 다 살폈는데 영화의 설정은 거짓이다. 원자로 뚜껑은 1m20㎝ 두께의 콘크리트다. 비행기가 와서 들이받아도 안 깨진다. 그런데 이게 뻥 터진다니 말이 되나.”
   
   - 후쿠시마 원자로 건물은 폭발했는데. “후쿠시마 사고는 쓰나미로 전력 계통이 망가지면서 냉각수 공급이 안 된 것이 문제였다. 보통 원전은 하나의 송전선이 망가져도 전기 공급에 문제가 없도록 두 개의 독립적인 송전선으로부터 전기를 공급받도록 돼 있는데 평지에 건설된 후쿠시마 원전은 쓰나미가 오면서 두 개의 송전탑이 다 무너졌다. 특히 후쿠시마 원전은 도쿄전력 관할이라 도쿄와 직접 송전선이 연결돼 있었다. 관내의 도호쿠 전력으로부터 전기를 공급받았으면 빨리 전력 공급을 재개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원전은 대부분 산을 끼고 있고 산 위의 송전탑으로부터 전기를 공급받는다. 전기가 끊길 일이 없다.”
   
   - 탈핵 찬성 측은 고리 원전이 지진에 취약한 단층대에 밀집해 있어 지진이 나면 대재앙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한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베이브리지가 무너질 정도로 큰 지진이 난 적이 있었다. 이때 미국은 인근 디아블로 캐니언 원전을 일단 셧다운시켰지만 지진이 멈춘 후 다시 가동을 재개했다. 원전의 안전성은 사실 지진과 큰 상관이 없다. 특히 우리 원전들은 미국 스리마일 사고 이후 강화된 NRC 기준에 맞춰 건설돼 트랜스뮤테이션 강화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후쿠시마 원전보다 훨씬 안전하다. 더욱이 원전의 안전성 논란을 원천적으로 불식할 기술도 지금 개발되고 있다.”
   
   - 그런 기술이 뭔가. “서울대에서 4세대 원전을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 3세대까지는 노심(爐心)이 녹아내리지 않도록 기계적으로 전기를 돌려서 계속 냉각수를 공급해줘야 하고 여기서 사고가 자주 발생한다. 하지만 스몰모듈러리액터(SMR)라는 10만~30만㎾급 소형 원전인 4세대는 원자로 안에서 모든 것이 자체순환돼 외부 냉각수가 공급될 필요가 없다. 이런 원전이 상용화되면 안전성 문제가 원천적으로 해결되기 때문에 도시 가까이에 원전을 짓는 이른바 어번 리액터(Urban Reactor)가 가능해진다.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 것이다. 우리가 탈원전으로 가면 4세대 원전 연구진들이 제일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 반핵론자들은 사용후핵연료 보관시설 등 처리비용도 문제 삼고 있다. 사실 우리는 사용후핵연료가 쌓여가고 있지만 고준위방폐장은 지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실정인데. “그것도 새로운 기술로 해결될 전망이다. 트랜스뮤테이션이라는 기술인데, 핵분열 때 생기는 동위원소들의 반감기(半減期)를 줄이는 기술이다. 트랜스뮤테이션 기술로 핵종(核種)을 변환하면 수십만 년인 반감기를 100년 이하로 줄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중준위 폐기물 보관시설만 있으면 된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이런 신기술들이 개발 중에 있는데 우리는 원자력에 대한 잘못된 정보와 선입견만 갖고 지레 무서워하고 있다.”
   
   - 우리나라 최초의 원전인 고리 1호기 건설 부소장으로 원전과 인연을 맺었는데 지난 6월 고리 1호기가 영구 정지됐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 “전에 같이 일했던 동료가 한 인터뷰에서 ‘자식 일찍 보낸 기분’이라고 했던데 사실 섭섭했다. 다른 나라는 고리 1호기랑 똑같은 모델의 원전 설계 수명이 다한 후 20년 연장 허가를 내줬다. 그런데 우리는 10년 연장 끝에 영구 정지했다. 전에는 10년 연장받으면 추가로 10년 연장받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반핵 여론이 커질 줄 몰랐다.”
   
   그는 “작년 연말 신고리 3호기가 가동을 시작했을 때도 우리가 어렵게 만들어낸 APR-1400 모델의 세계 최초 상업운전이라는 의미가 컸지만 촛불시위 때문인지 신문에 우표 딱지만 한 기사도 나지 않았다”며 “우리 스스로 세계를 상대로 한 절호의 홍보 기회를 걷어찬 셈이다. 그때 주변에 화를 많이 냈다”고 했다.
   
   - 왜 우리 사회에 반핵 여론이 커졌다고 보나. “1980년대 중반 내가 고리 3·4호기 건설 본부장을 맡았을 때만 해도 원전은 최고의 국가기밀이었다. 안기부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내려와 보안 통제를 할 정도로 국민에게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았다. 1984년 서울신문 사장을 지낸 문태갑 당시 신문협회 회장이 이사들을 이끌고 견학을 온 것을 계기로 내가 위에다가 건의를 했다. 우리도 이제 원전을 제대로 알리자, 이러다가 원전 다 지었는데 국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했다. 나는 그때부터 ‘퍼블릭 억셉턴스(public acceptance)’, 이른바 원전에 대한 국민 수용을 우려했다. 그래서인지 그해 4월 안기부에서 ‘잘 홍보해 보라’는 오더가 내려왔다. 이후 한전이 전국 지점을 동원해 지역유지, 여론주도층을 초청해 원전 견학을 시키고 교육을 했다. 1984년 후반기부터 1986년까지 한 번에 40명씩 매주 두 팀씩 초청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그때도 물론 반핵단체들은 있었다. 이 사람들은 견학 후 토론회 때는 우리 말이 맞다고 하다가 돌아갈 때는 다시 반핵 노래를 부르곤 했다. 반핵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니 그려러니 했다. 어쨌든 어렵게 쌓아올린 원전에 대한 국민 수용이 무너져내린 게 가장 안타깝다.”
   
   
   “한국 원자력 발전에 끼친 DJ의 공로”
   
   - 원전마피아로 상징되는 원자력 업계의 내부 비리도 반핵 여론을 키운 것 아닌가. “사실 1980년대 원전 업계에 위기가 있었다. 당시 영광 프로젝트에 대한 비판 여론이 강했다. 특히 한전 실무진들이 뒷돈을 받았다는 혐의가 일면서 대대적으로 조사를 받았다. 당시 내가 사실상 최고책임자였는데 나는 조사를 받지 않았지만 내 부하직원들 150명이 샅샅이 조사를 받았다. 그때 조사 책임자가 나중에 검찰총장이 된 정상명씨였다. 당시 정 검사가 조사 후 무혐의 처리를 한 후 보자고 해서 만났는데 ‘지금부터 원자력에 대해서는 이 부사장이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새로 비리가 나오면 자기도 끝이라는 의미가 내포된 말이었다. 그러면서 정 검사가 ‘이렇게 깨끗한 조직인지 몰랐다’는 말도 했다.”
   
   - 그런 조직이 왜 비리의 온상이 됐다고 보나. “한전이 쪼개져 한국수력원자력으로 분리돼 나가기 전만 해도 직원들이 엘리트의식이 있었다. 조금만 허튼짓을 해도 원전에 문제가 생긴다면서 사명감을 갖고 일했다. 당시 한전은 여러 분야 사람들이 모인 조직인 만큼 인적 네트워크도 대단했고 감사 기능도 강했다. 아마 한전 조직이 그대로 유지됐으면 후쿠시마 사고 때도 발벗고 나서서 원전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막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한전이 쪼개지면서 문제가 생겼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기계를 상대하는 기술자들끼리 모여 일하다 보니 사명감도 약해졌고 감사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나는 지금도 쪼개진 한전 조직을 다시 합쳐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그는 이 대목에서 1987년 민주화 바람과 함께 일기 시작한 원전 반대 움직임을 가라앉히고 원전의 지속적인 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한 사람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는 얘기를 꺼냈다. “당초 DJ와 평민당은 탈원전 입장이었다. 특히 원전 소관 상임위 소속이었던 조희철 의원이 원전에 극렬하게 반대했다. 내가 조 의원과 친해지려고 연탄불 때는 조 의원의 잠실 아파트를 방문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조 의원의 입장이 달라지는 반전이 있었다.”
   
   - 어떤 반전이었나. “조 의원이 우리가 기술전수를 받던 미국 CE사 현장 실태 조사를 위해 미국을 방문했는데 워싱턴에서 야당 당수를 지냈던 유진오 박사의 아들을 만난 것이 계기였다. 당시 재미 물리학자였던 이분이 조 의원에게 원자력의 긍정적인 면을 얘기해준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기술 전수를 받던 우리 기술진도 만나면서 조 의원의 생각이 달라졌다. 조 의원은 귀국길에 일본에서 오히려 찬핵(贊核) 전문서적들을 잔뜩 사왔는데 그중 하나가 ‘원자력은 악마의 앞잡이인가’라는 책이었다. 일본 사회당 소속 참의원이었던 후쿠마 도모유키 21세기종합연구소장이 쓴 책인데 이 사람도 반핵에서 찬핵으로 입장이 바뀐 사람이었다. 조 의원은 ‘한국에 원전을 이해시키겠다’며 이 책을 번역까지 했다.”
   
   - 조 의원 때문에 DJ 입장이 달라졌나. “DJ는 조 의원 말만 듣지 않았다. 홍기훈 의원에게 다시 원자력에 대한 조사를 시켜 홍 의원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왔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입장이 달라졌다. DJ가 1989년 목포대학 종합대학 승격 축하연에서 ‘원자력에너지의 개발은 불가피하다’고 이른바 ‘목포선언’을 한 것이 우리나라 원자력 정책의 국민수용에 중요한 분기점을 이뤘다. 배신자라며 조 의원을 공격하던 반핵론자들이 DJ의 목포선언 후 잠잠해졌다. 만약 그때 DJ가 반원전 입장을 유지했으면 YS도 비슷하게 따라갔을 것으로 본다. DJ 덕분에 영광 프로젝트도 계속됐고 1998년 정권 교체 이후에도 원자력 정책이 지속될 수 있었다. 야당을 하면서도 국가 대사는 신중하게 결정하고 정부에 협조할 건 협조한 걸 보면 DJ는 역시 거물이었다. 그런데 DJ 정신을 계승한다는 지금 민주당은 그런 덕목이 별로 안 보인다.”
   
   원전과 평생을 같이한 80대 엔지니어의 말은 경험과 사실에 기반해 있었고 그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앞으로 신고리 5·6호기의 운명이 담긴 ‘공론’을 받아들 문재인 대통령이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 만나 보면 좋을 사람으로 보였다.



새로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의 한마디로 그 동안 쌓아온 금자탑이 와르르 무너지는것이 아닌가 한다.

그 동안 원자력 기술을 연구하여 세계적으로 우리나라 만큼 원자력 기술이 축척된 나라가 몇 안 된다고 알고 있는데

그래서 해외 원자력 발전소를 짓고 원자력 발전소를 수출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데

이제와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탈 원전 이라니...

그 동안 원자력을 공부하고 그 일에 종사하기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데

탈 원전 이라니 정말 이게 제대로 된 나라인지 가치관이 정립이 되질 않는다.

달성군 하빈면 묘동은 사육신 중 하나인 충정공 박팽년(1417∼1456) 후손이 모여 사는 순천 박씨 집성촌이다.

삼가헌은 박씨 집성촌과는 낮은 산을 경계로 하고 있다.

삼가헌은 박팽년의 11대 손인 성수(聖洙)가 1769년에 이곳에 초가를 짓고 자기의 호를 따라 삼가헌이라 한 것에서 시작한다.

그 뒤 그의 아들 광석(光錫)이 1783년 이웃 묘골에서 현재 위치로 분가한 다음 1826년 초가를 헐고 안채와 사랑채를 지었다.

별당인 하엽정(荷葉亭)은 연꽃잎의 정자라는 뜻으로 1826년 집을 지을 당시 많은 흙을 파낸 자리에

박광석의 손자 규현이 1874년에 연못으로 꾸며 연을 심고 파산서당을 앞으로 옮겨 지으면서 하엽정이라 당호를 붙였다.

삼가헌(三加軒)이라는 이름은 중용에서 나왔다.

중용 제 9장에는 '子曰 天下國家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자왈 천하국가가균야, 작록가사야, 백도가답야, 중요불가능야)' 라는 문구가 있다.

이 글은 "천하와 국가는 다스릴 수 있고, 관직과 녹봉도 사양할 수 있고, 날카로운 칼날 위를 밟을 수도 있지만 중용은 불가능하다."라는 뜻이다.

이는 천하를 다스림은 知이고, 작록을 거부하는 것은 인(仁)이며. 칼날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은 용(勇)에 해당한고 한다.

즉 선비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모두 갖추었다는 것이다.

하엽정은 원래 4칸 규모의 1자형 건물이었는데 앞에 누마루를 한 칸을 늘여 붙였다고 한다.

연못은 앞쪽으로 길게 뻗은 직사각형이고 가운데 원형 섬이 있고 섬까지는 외나무다리가 있어다.

이 별당은 원래 서당으로 쓰던 곳으로 앞에는 <하엽정>이라는 당호와 함께 <파산서당 巴山書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안채는 전면 6칸 전퇴집으로 3평주 삼량집으로 2009년 4월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지었다.

전체적으로 볼때, 조선 중기에 건축된 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남긴 대표적인 주택이다

위키 백과에는 달성 삼가헌을 이렇게 소개 하고 있습니다.


몇차례 하엽정을 찾으러 방문을 했지만 갈때 마다 문이 굳게 닫혀 달성 삼가헌을 구경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오늘 다시 달성 삼가헌을 찾았습니다. 참 다행 스럽게 문이 열려 있네요

하엽정 연못이 있는 큰집과 그 옆 작은집을 찾게 되었습니다.

박팽년의 후손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집을 짓고 난후 6대손이 이곳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작은집에는 마침 주인과 아내가 마당에 나와 있엇고 바같 어른의 학교 동창이라는 친구분도 같이 담소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달성 삼가헌이란 고택을 구경좀 해도 되겠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아내분이 옆에서 조곤 조곤 안내를 해주시고 구경을 해도 좋다고 하십니다.

큰댁 안집 어른은 오늘 인근 다사읍으로 볼 일  보러 가셨는데 함께 있었으면 문화해설사 마냥 더 자세한 안내를 할수 있을텐데 하며

구경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고 안채를 들여다 보게 되었습니다.

작은집에는 1자형 고택이며 정원에 예쁜꽃을 심어두었고 원목 으로 만든 그네와 정우너에 응접셋트를 만들어두어 정원에서도

편히 앉아 담소를 나누고 소풍 나온듯 식사도 할수 있는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져 있습니다만 사진으로 남기진 못했습니다.

그리고 하엽정이 있는 큰집을 들러 구경을 하고 몇장의 사진을 찍어 보았습니다.


달성 삼가헌(큰집)의 정문 모습입니다

사랑채의 모습입니다

사랑채 정면 모습입니다

사랑채옆 창고(헛간)인듯 싶네요

사랑채옆 뜨락 입니다

하엽정으로 통하는 쪽문입니다

사랑채를 비문이고요

사랑채에 걸린 서각이 이채 롭습니다

안채에서본 대문의 모습이구요

뒤뜰의 장독대입니다

이곳이 하엽정이 있는 별당 이구요 현판에 <하엽정>이라는 당호와 함께 <파산서당 巴山書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네요

하엽정을 소개하는 비문 입니다

이곳이 하엽정 앞 연꽃이 핀다는 연밭이기도 한 연못 입니다. 두꺼비 같은 동물이 살고 있나 봅니다. 인기척인 들리자 소리지르며 연못으로 뛰어 듭니다.



이상 중요민속자료 제104호 인 삼가헌의 모습과 하엽정을 사진으로 남겨 봅니다.



대구 달성군에 있는 하엽정(荷葉亭)은 삼가헌 박성수의 별당이다.

삼가헌을 지은 그 이듬해인 1770년 택지의 서쪽에 네 칸짜리 파산서당(巴山書堂)을 지은 것이 그 처음이다.

가르치기 위한 집이라기에는 강학공간이랄 것 없이 대청마루가 너무 협소하다.

아마도 스스로의 공부를 위해 지은 집일 것이다.

조선 집은 일단 집을 앉히기 위한 기단을 쌓아야 한다.

이 기단에 쓸 흙을 다른 데서 가져올 수도 있지만 이 집에서는 마당을 파서 기단을 쌓았다.

그리고 그 파낸 자리에 물을 담아 연못을 꾸미고 연꽃을 심었다.

연못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전통적인 세계관을 그대로 답습해 가로 15m, 세로 21m의 네모난 못을 만들고 가운데 동그란 섬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수미산이다. 

파산서당이라는 이름은 이 건물이 지금의 계명대가 있는 자리의 파산을 조산(祖山)으로 바라보게끔 자리 잡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금호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자리에 솟은 파산을 조산으로 삼고 그 먼 거리의 상징을 당호로 삼은 옛사람들의 치밀함과 넓음에 감탄한다.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에도 나오듯이 향기는 멀수록 맑은 법이다.

한여름의 연못에는 연꽃이 그득하고 그 향기는 이 집의 곳곳에 스몄을 것이다.

그래서 하엽정의 방 이름은 영향(迎香)이다. 향기를 맞아들이는 방이다.

연꽃은 여름 내내 피는 꽃이다. 바다에 있는 어떤 섬들은 파고에 의해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하고 운해에 의해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하지만,

하엽정 연못의 수미산은 한여름 연꽃이 피면 사라졌다가 연꽃이 지면 나타난다.

그만큼 무성한 연꽃들이 여름 내내 피어 있다.

하엽정의 서쪽은 낮은 산으로 그 산 하나만 넘으면 유장한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

박성수의 후손들은 아마도 이 물자리를 경계해 우백호를 좀 보강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1874년 파산서당의 서쪽 끝 칸에 누마루를 내어 달고 이름을 하엽정이라고 붙였다.

원래 방의 높이 보다 한 자 이상이 높게 계획되어 연못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비로소 백호가 보강되고 연못과 집이 하나가 되었다.


네모난 연못은 땅을 상징하고 동그란 섬은 천상계를 상징한다.

그 연못에 집이 비치니 이 집은 현실계에 있으면서도 천상에 존재하는 집이다.

아직 연꽃이 피지 않을 때는 붉은 배롱나무 꽃잎이, 가을의 문지방 너머에는 단풍나무 잎들이 이 천상의 집 수면을 떠다닌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20404/45269071/1#csidxb5ee75c203d2ccca3717a38fb4d1c13


대구 쓰레기를 모두 모아 서재에 있는 방천리에 매립을 했었지요

와룡산 뒷편 기슭에 대구시 쓰레기를 모두 모아 매립을 하다보니 악취가 가시질 않았는데

지금엔 매립한 땅위에 에너지 시설을 만들어 두고 쓰레기 소각장을 만들어

방천리 일대가 많이 변했네요

이곳에 모여 살던 문화 류씨들은 고향을 버리고 떠나게 되었고

이곳에 망향비를 세우게 됩니다.

방천리 주변에는 공원이 들어 서고 서재 문화체육센터가 생겨

문화 공간으로 또 스포츠 센타로 변해 주민들의 건강을 증진하는 장소 탈바꿈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변은 체육 공원으로 조성되어 파크골프장과 인라인 스케이트장 산책로

자전거길 다양한 체육 문화 시설이 생겨나고 많은 수종의 나무를 심어

걷기 쉬운 숲길이 조성 되어 있답니다






다사읍 방천리에 위치한 서재 문화 체육 센터

다사읍 방천리에 위치한 서재 문화 체육 센터

다사읍 방천리에 위치한 서재 문화 체육 센터 주차장 시살

서재 쓰레기 매립장으로 들어가는 길이 단장되고 쓰레기  매립장은 환경 자원사업소로 탈바꿈 하였다

환경 자원 사업소 정문

쓰레기 소각장

쓰레기 소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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