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 좋은글----------

[사람의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다]

자기가 힘들 땐 어디든 털어놓고 싶어 찾아오고, 막상 도와주고 나면 금세 잊어버린다.

이제 좀 살 만하다 싶으면 차갑게 돌변한다.
'감사함'이 '간사함'으로 바뀔 때 사람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된다.

『내가 얼마나 만만해 보였으면』 중에서..

열대림에서 특이한 방법으로 원숭이를 잡는다.
작은 나무상자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견과류를 넣은 뒤 위쪽에 손을 넣을 정도의 작은 구멍을 뚫어 놓고
원숭이가 견과를 움켜쥔 구멍에서 손을 빼지못하면 그때 사냥꾼들은 원숭이를 잡는다.
손에 들어온 것을 놓지 않으려는 원숭이의 습성을 이용한 사냥, 우리도 때때로 원숭이처럼 어리석음을 저지른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움켜쥔 채 손을 펴지 않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를 많이 목격하곤 한다.
감사함이 간사함으로 변하지 않고 내려놓는 평안한 하루.

생각하렴^^

무언가를
잃어 버렸을 땐 생각 하렴
원래부터 내 것은 아니었다는 걸

일이
잘 안 풀릴 땐 생각 하렴
잘 되는 날도 분명히 온다는 걸

역경을
겪고 있을 땐 생각 하렴
나만 겪고 있는 고통이 아니라는 걸

삶이
힘들 땐 생각 하렴
모든 것은 지나가게 된다는 걸

절망에
빠졌을 땐 기억 하렴
하늘은 네 편이라는 것을..

이제 웃는날이 오고 있다는 것을^^

삶이 더 나아지지 않더라도
손톱만한 희망도 없다고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사는 것이야말로
삶의 기술중에서 가장 높은 기술이다.

견디는 것은 잘 살기 위해
기울이는 어떤 노력보다 진지하고 가치 있다

내가 가진 단점과 불행과
열등감은 남에게 없는 나만의 재산이다.

내가 가진
인생의 조건들로 최선의 맛을 내는 것

최고의 사람이란 결국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 슬픈 이태원의 역사♡

이태원(梨泰院)은 한자가 다른 이태원(李泰院),

이태원(異胎院) 등의 다른 이름이 있었다.

지명이 세 번이나 바뀐 슬픈 이태원의

유래가 청춘 창업드라마 '이태원 클라스', ‘할로윈 참사’로 인해 새삼 떠오른다.

<2022년 10월 29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 이태원 세계음식거리

해밀톤호텔 서편 골목에서 할로윈 축제로 수많은 인파가 몰린 와중에 발

생한 압사 사고. 이 사고로 인해 159명이 사망하고 195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태원은 조선 초에는 '오얏나무 李'를 써서 '李泰院',

임진왜란 이후에 '異胎院', 효종 이후에는 '梨泰院'으로 글자와 의미가 변한다.

 

조선 초기에는 ‘李泰院(이태원)’으로 한문표기가 달랐는데,

산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 도성 안의 부녀자들이 빨래터로

이용하였고 소나무숲이 우거져 있었다고 한다.

 

원래 이태원은 서울을 벗어나 영남로(嶺南路)로 향하는 첫번째 원이었다.

서쪽의 홍제원. 동쪽의 보제원. 남쪽의 이태원과 인덕원은 서울 부근의

중요한 첫 번째 원이었다.

 

이태원의 역사를 살펴보면 슬픈 이 땅의 역사가 떠오른다.

슬픈 역사하면 임진왜란(1592~1598년) 선조와

병자호란 (1636년 12월 28일 ~ 1637년 2월 24일) 인조가 등장한다.

 

임진왜란 때 천주교 신자이자 반전론자인 상인 출신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불교신자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부대는 경쟁적으로 진격하여 가토 기요마사 부대는 남대문으로

고니시 유키나카 부대는 동대문으로 입성한다.

(이들이 처음 통과한 문이라는 상징성을 바탕으로 조선총독부는

남대문과 동대문을 조선고적 1.2호로 지정했으며

대한민국 국보 1호와 보물 1호가 되었다.)

 

한양에 들어 온 '가등청정'은 이태원에 주둔을 한다.

'가등청정‘ 부대 왜군은 여자들을 겁탈하기 시작하는데,

대부분의 여자들은 피난을 가버린 상황이라 그 대상은

피난을 가지 못한 여자와 이태원 황학골에 있는

운종사(雲鐘寺)의 비구니들이 주대상이었다.

 

가등청정은 여승들을 겁탈하고 운종사(雲鐘寺)까지 불살라 버린다.

가등청정은 경주 불국사에도 불을 질렀다.

가등청정의 만행은 경상도 민요 '쾌지나칭칭나네' 는

'가등청정' 이라는 설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강강수월래' 에서도 전해오고 있다.

 

문제는 이 비구니들과 여인들이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게 된다.

절이 사라진 상태에서 비구니들의 아이들과

왜놈에게 겁탈당한 부녀자등이 애를 낳고 기를 보육원을

지어 정착케 하였는데, 당시 왜병들의 피가 많이 섞인 곳

이라 하여 이태원異胎圓(다른 민족의 태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후, 임진왜란이 끝나자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온 조선여자와 왜란 중에 성폭행을 당한

여성과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사회적 문제로 등장한다.

 

선조는 이들과 그 자식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포로나

귀화한 일본인들을 한 곳에 몰아서 일종의

이방인 공동체 지역으로 만든 곳이 이태원이다.

 

17세기 인조 때 병자호란에 청나라로 끌려갔다

돌아온 여자들을 환향녀(還鄕女)라고 부르며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라는 뜻이었는데 이후

이 말은 '화냥년'이란 욕으로 변질된다.

오갈데 없는 환향녀들이 이태원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거기다 오랑캐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자가 낳은 아이는

호로(胡虜오랑캐의 포로) 자식이라 하여 후에

'후레자식'이란 욕으로 부르게 된다.

 

이후,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은 이태원(異胎院) 지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곳을 배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이름의 이태원(梨泰院)이라 고쳐 부르게 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이태원은 우리 역사에서 오랜 기간 '이방인의 땅'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조선시대부터 용산 일대는 군사 관련 시설이 많았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 군용지로 이용되면서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가 이곳에 머문 이후 이태원은 군사지역

으로서 본격적인 정체성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조선에 온 청나라 부대는

1882∼1984년 이태원에 주둔했고, 이후 일본군

조선사령부가 1910∼1945년에 주둔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근대식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데

광복 이후엔 미군이 이곳을 차지했다.

6.25전쟁이 끝나고 나서 이태원 상권은 사실상 미군이 주도했다.

 

1957년 미군의 외박과 외출이

허용되면서 기지촌까지 생겨났다.

1970년대 미군기지에서 나온 물품들로

상권이 형성된 이태원은 이후 미군을 위한 유흥가로

거듭나 기지촌과 미국식 클럽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정부는 이태원 미군기지 중심으로 서빙고동,

한남동, 동부 이촌동 일대에 외국인 전용주택과

아파트는 물론 고급 외국인 주택단지까지 건설한다.

 

그러자 1960년대 이후 한국에 들어온

각국의 대사관이 이태원 지역에 대거 입주했고,

그 영향으로 19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고급주택단지도 조성됐다.

 

이태원은 1990년대 이후 아프리카인의 유입이

늘면서 현재는 판잣집과 대저택이 공존하는 독특한 경관을 연출한다.

 

기지촌 단속으로 퇴폐업소가 사라지면서 경리단길과

더불어 한국 속의 외국으로 변화하는 '이태원'은 이방인의 느낌이 드는 아픈 역사가 있다.

이태원동 - 나무위키 - https://namu.wiki/w/%EC%9D%B4%ED%83%9C%EC%9B%90%EB%8F%99

소금을 받아오세요



어느 마을에 갑작스러운 사고로
외아들을 잃은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슬픔으로 식음을 전폐하던 그녀는 장례가 끝났음에도
아들을 땅에 묻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자식을 다시 살릴 방법은 없는지
마을의 현자를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아들을 떠나보낸 후로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살 수가 없어요.
선생님이라면 제 자식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발 방법이 없을까요?"

"방법이라면 하나 있소.
그러기 위해서 소금을 가져오십시오.
단, 세상을 떠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집의 소금이어야 합니다."

여인은 아들을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서둘러 소금을 얻으러 첫 번째 집에 찾아갔습니다.
다행히 바로 소금을 얻을 수 있었지만,
물어보니 얼마 전에 그의 아버지가 지병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다음 집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그 집주인은 부인과 사별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다시 옆집, 그리고 옆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녀는 마을의 모든 집을 돌아다니면서
소금은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가족 중에 세상을 떠나지 않은 사람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그녀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겪는 이별의 순간을
후회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누군가의 마지막을 겪습니다.
사랑하는 가족, 친구, 그리고 나의 죽음까지도요.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이기에
누구나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꽃이 져야 열매를 맺고
열매가 썩어져야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게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죽음도
삶의 일부입니다.

그 누구도 삶의 마지막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매 순간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 오늘의 명언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하늘로 돌아갈 시간이 되면 최선을 다해 잘 이별하는 것.
그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아닐까.
- 작가 송정림 -

인생의 결행도(決行道)



삶은 저마다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낯선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초등학교 입학생이나,
첫 출근길이 두근거리는 사회 초년생이나
누구든 미지의 인생길을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은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항상 선택을 해야 합니다.

어떤 길을 갈 것인지, 어떻게 그 길을 갈 것인지,
누구와 함께 갈 것인지를 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생을 결행도(決行道)라
말하기도 합니다.





수많은 선택이 계속되는 인생의 중요한 순간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되는 것입니다.
각 선택의 의미를 현명하게 파악하며 살아간다면,
훗날 인생을 복기할 때 아름답게 생을
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인간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간다.
– 사르트르 –

혼잣말



어머니께서는 유독 혼잣말을 자주 하십니다.
내가 집에서 쉬기라도 하는 날이면
어머니의 이런저런 혼잣말이 집안 곳곳에서
들려왔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어떨 때는 나도 모르게 대답도 해드리긴 했지만,
답하기 모호한 말들도 있어 침묵할
때가 더 많았습니다.

누가 맞장구쳐주는 것도 아니고,
의미 없이 혼잣말을 뭣 하려 하실까 싶지만,
어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그렇게
혼잣말을 하십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혼잣말하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우울한 것은 아니지만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누군가가 있지만 의사소통하고 있지 않을 때,
나도 모르게 무심결에 허공에다 이런저런
말을 건네는 것이었습니다.

– 도서 '방구석 라디오' 중에서 –





우리들도 혼자 있을 때,
종종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감정과 생각을
소리 내어 말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혼잣말하는 어머니는
제 자식, 아니 식구 중 어느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셨던 건
아니었을까요?


# 오늘의 명언
가족이 지니는 의미는 그냥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지켜봐 주는 누군가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 미치 앨봄 –

아름다운 사람이 세상에 남기는 것



'위 세 사람(최완택 목사, 정호경 신부, 박연철 변호사)은
내가 쓴 모든 저작물을 함께 잘 관리해 주기를 바란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강아지 똥, 몽실언니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아동문학이자 베스트셀러를, 집필하신 권정생 선생님의
유언 중 일부입니다.

선생님은 1937년 도쿄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조국의 해방을 맞아 가족들과 돌아왔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19살에 가슴막염과 폐결핵에 걸렸는데
더 이상 집안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집을 나왔고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빌어먹으며 살았습니다.
때로는 깡통에 밥을 꾹꾹 눌러 담아주던 아주머니도
길바닥에 쓰러져 있을 때 물을 길어다 준
할머니도 있었습니다.

자신은 죽을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에게 어떻게든 살라고 다독여 주었습니다.
그렇게 평생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따뜻하고 가슴 시린 기적 같은 동화를
쓰신 작가였습니다.

특히 그가 쓴 동화 중에 '강아지 똥'은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것,
냄새난다고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것,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것 같은 것,
이름도 없는 흰둥이 개가 싸질러 놓고 간 똥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강아지 똥'에서 말하고자 했던 내용은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 별 볼 일 없는 사람,
버려진 사람, 고통과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이었습니다.

한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선생님이
몹시 가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평생을 산골의 단칸방 흙집에서 단벌 신사로,
일생을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2007년 5월 세상을 떠났는데
선생님의 장례를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혼자 사는 노인으로 생각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조문하며 눈물 흘리는 걸 보고 놀랐고,
10억 원이 넘는 재산과 해마다 수천만 원의
인세 수입이 있는 작가라는 사실에
또 놀랐다고 합니다.

선생님의 유산은 현재, 유언에 따라
권정생 어린이 문화재단에서 관리하며
남북한과 분쟁지역 어린이 등을 돕는 활동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아픔보다 타인의 아픔을 생각하는 사람
자신의 궁핍보다 어린아이의 굶주림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아름다운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남기는 것마저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 오늘의 명언
새벽 종소리는 가난하고 소외받고 아픈 이가 듣고,
벌레며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도 듣는데
어떻게 따뜻한 손으로 칠 수 있어.
– 권정생 선생님 –

그림자를 판 사나이



'그림자를 판 사나이'라는 소설은
시대를 초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프랑스 출신의 독일 작가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작품입니다.

가난하게 살던 소설 속 주인공 페터 슐레밀은
어떤 부유한 상인의 사교장에 나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회색빛 옷을 걸친 한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금화를 쏟아내는 마법 주머니와
슐레밀의 그림자를 바꾸자고 제안합니다.

가난한 삶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슐레밀이 얼떨결에 그의 제안을 승낙하자
남자는 마법 주머니를 건네주고
슐레밀의 그림자를 돌돌 말아 자루에 넣고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마법 주머니를 소유한 슐레밀은
그토록 갈망했던 물질적인 부와 외적인 성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림자가 없다며 놀렸고
심지어 유령이라고 두려워 피했습니다.

그림자를 잃어버린 슐레밀은
낮에도 밖으로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고립된 채 살아가다
사랑하는 약혼자마저 떠나게 되었습니다.

슐레밀은 부와 외적인 성공은 얻었지만
진정한 행복을 잃어버린 후에 그림자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하찮은 것은 없습니다.
사소한 것 역시 없습니다.
나름대로 다 존재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작고 하찮은 일도 없습니다.

지금은 알 수 없겠지만
그 작고 하찮은 것들이 위대한 성취와 행복으로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언제나 햇빛을 향해 서라.
그러면 그림자는 언제나 당신의 뒤에 있을 것이다.
– 윌트 휘트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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