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의 역사를 살펴보면 슬픈 이 땅의 역사가 떠오른다.
슬픈 역사하면 임진왜란(1592~1598년) 선조와
병자호란 (1636년 12월 28일 ~ 1637년 2월 24일) 인조가 등장한다.
임진왜란 때 천주교 신자이자 반전론자인 상인 출신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불교신자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부대는 경쟁적으로 진격하여 가토 기요마사 부대는 남대문으로
고니시 유키나카 부대는 동대문으로 입성한다.
(이들이 처음 통과한 문이라는 상징성을 바탕으로 조선총독부는
남대문과 동대문을 조선고적 1.2호로 지정했으며
대한민국 국보 1호와 보물 1호가 되었다.)
한양에 들어 온 '가등청정'은 이태원에 주둔을 한다.
'가등청정‘ 부대 왜군은 여자들을 겁탈하기 시작하는데,
대부분의 여자들은 피난을 가버린 상황이라 그 대상은
피난을 가지 못한 여자와 이태원 황학골에 있는
운종사(雲鐘寺)의 비구니들이 주대상이었다.
가등청정은 여승들을 겁탈하고 운종사(雲鐘寺)까지 불살라 버린다.
가등청정은 경주 불국사에도 불을 질렀다.
가등청정의 만행은 경상도 민요 '쾌지나칭칭나네' 는
'가등청정' 이라는 설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강강수월래' 에서도 전해오고 있다.
문제는 이 비구니들과 여인들이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게 된다.
절이 사라진 상태에서 비구니들의 아이들과
왜놈에게 겁탈당한 부녀자등이 애를 낳고 기를 보육원을
지어 정착케 하였는데, 당시 왜병들의 피가 많이 섞인 곳
이라 하여 이태원異胎圓(다른 민족의 태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후, 임진왜란이 끝나자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온 조선여자와 왜란 중에 성폭행을 당한
여성과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사회적 문제로 등장한다.
선조는 이들과 그 자식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포로나
귀화한 일본인들을 한 곳에 몰아서 일종의
이방인 공동체 지역으로 만든 곳이 이태원이다.
17세기 인조 때 병자호란에 청나라로 끌려갔다
돌아온 여자들을 환향녀(還鄕女)라고 부르며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라는 뜻이었는데 이후
이 말은 '화냥년'이란 욕으로 변질된다.
오갈데 없는 환향녀들이 이태원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거기다 오랑캐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자가 낳은 아이는
호로(胡虜오랑캐의 포로) 자식이라 하여 후에
'후레자식'이란 욕으로 부르게 된다.
이후,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은 이태원(異胎院) 지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곳을 배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이름의 이태원(梨泰院)이라 고쳐 부르게 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이태원은 우리 역사에서 오랜 기간 '이방인의 땅'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조선시대부터 용산 일대는 군사 관련 시설이 많았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 군용지로 이용되면서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가 이곳에 머문 이후 이태원은 군사지역
으로서 본격적인 정체성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조선에 온 청나라 부대는
1882∼1984년 이태원에 주둔했고, 이후 일본군
조선사령부가 1910∼1945년에 주둔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근대식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데
광복 이후엔 미군이 이곳을 차지했다.
6.25전쟁이 끝나고 나서 이태원 상권은 사실상 미군이 주도했다.
1957년 미군의 외박과 외출이
허용되면서 기지촌까지 생겨났다.
1970년대 미군기지에서 나온 물품들로
상권이 형성된 이태원은 이후 미군을 위한 유흥가로
거듭나 기지촌과 미국식 클럽이 우후죽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