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주의 안팎 ]


급한 A/S 요청이 들어왔다.

공교롭게도 동업자 막내아들은 선약일정을 양보할 뜻이 없었다.

예측되는 A/S의 사안이 간단한 만큼, 별수없이 바깥일로 온통 바쁜 마누라에게 부탁했더니, 저녁에도 약속이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다들 생업보다도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개인사정들뿐인갑다...쩝

여지껏 끼니를 굶겨 본 적 없었던 가부장만 여전히 배가 고픈 모양이다.

구차스럽지만, 고객에게 지원을 요청할 요량으로 혼자서 출발하려는데, 철없는 모자(母子)가 우리집 생업용 차량에 슬그머니 함께 동승했다....?

아들놈은 근처 지하철 역에 내려주고, 결국 부부 갼에 모처럼 고객현장을 찾는데, 서울도심을 가로지르는 퇴근길은 여지없이 정체로 붐볐다.

더구나 금요일 저녁이었다.

고작 반시간 정도의 작업을 위해서 무려 2시간을 혼잡스런 길 위에서 진을 다 뺐다.

우주의 지름길, <웜홀(Wormhole)>을 문득 생각했다.

말 그대로 <벌레 먹은 구멍>인데, 용어를 갖다 붙이는 과학자들의 풍류와 낭만도 쾌 멋스럽다.

상상조차 못할 만큼 방대한 우주의 공간을 거리의 단위로 표현하기엔 한계가 있어서, 빛의 속도를 척도 삼아서 시간까지 가세하여 <광년(光年)>이란 단위를 사용한다.

1 광년은 빛의 속도(초당 약 400,000 km)로 1년간 달리는 거리를 의미한다.

못내 궁금해서 계산해 보면, 400,000 * 60 * 60 * 24 * 365...

대략 12,614,400,000,000 km.

지구에서 가장 근접한 이웃의 항성은 약 4.3 광년의 거리에 있는 <프록시마 센타우리(Proxima Centauri)>.

우리 태양보다 적은 질량의 어두운 <적색 왜성>이라서 맨 눈으로 볼 수는 없고 고성능 천체망원경으로 확인 가능하단다.

고작 그 거리의 이웃 항상이지만, 현대의 로켓기술로도 어마어마한 세월(1만년 이상)이 걸리는 아득히 머나먼 거리라고 한다.

47년전, 1977년 발사한 보이저 1 호가 현재 지구로부터 240억 km 거리를 초속 15 km로 성간공간(항성들 사이)을 날고 있으며, 300년 후에는 혜성들의 오르트 구름(Oort cloud)대를 지나고, 16,000년 후에 우리의 가장 이웃 항성(프록시마 켄타우리)계에 도달한단다.


고작 2시간 정쳇 길위에서 진득하게 기다리지 못하고, 조수석의 마누라와 지름길을 아무리 구상해봐도 <웜홀>은 없어 보였다.

진이 다 빠질 즈음,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급히 화장실부터 다녀온 후, 차량의 화물칸에서 간단한 공구들부터 챙겼는데, 새 장갑들은 화물 속에 숨겨져서 보이질 않았다.

할수없이, 사용했던 장갑 한 컬레가 그 속에서 눈에 띄길래, 그 놈을 챙겨서 장비의 현장으로 이동했다.

그 장갑은 마누라에게 착용ㅎ도록 건내주었더니, 사양하며 먼지와 기름때 찌든 장비를 다뤄야 하는 지아비에게 도로 건낸다.

" 여긴 병원시설이야...! "

실랑이 벌이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도로 건내주었다.

가족들 앞에 떨어진 불발수류탄을 향해서 초개와 같이 몸을 덮치겠다는 각오로 사는 가부장인데, 동상 세워주든, 말든 상관없이....!

마지 못해서 조수(?)는 장갑을 착용했다.

중앙감시반의 야간당직자에게 전화상으로 제어신호의 투입을 지시한 후, 장비(fan)의 운전반 앞에서 유경험자 조수에게 한번 더 관찰사항과 운전버턴 조작방법 그리고 휴대폰으로 문자메세지의 통신방법을 숙지시켰다.

결연한 표정으로 공구들 챙겨들고 공조기의 fan section(공간) 속으로 들어가려다 보니, 귀마개와 휴대용 전등을 차량에서 챙기지 못한 사실을 그제사 눈치챘다.

백전노장의 명성을 무색ㅎ게 만드는 그 놈의 건망증....ㅜㅜ

지하주차장까지 수고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강행하기로 했다.

이미 노안은 왔고, 직업병의 청력에도 노출된 마당에....

분연히 강아무개 소령처럼 살다가겠다는데...

조명등조차 어두운 공조기 안으로 들어가면서 점검구를 힘차게 닫고 걸어 잠궜다.

이 쪽 우주와 저 쪽 우주는 그리 분리와 차단되었다.

전생에 우리의 우주가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시원(始原)으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빅뱅처럼, 무(無)에서 시작하여 여기까지 참으로 사연맗은 반평생을 함께 이뤄왔었다.


' 가동, 둘 다 모두! '

저 쪽 우주를 향해 휴대폰의 문자메세지를 날렸다.

위이잉~! 위이잉~!

대형 송풍기(fan) 2 대가 차례대로 힘차게 기동하더니, 이내 더 요란한 소음으로 가동회로로 전환되었다.

조심스럽게 제어공압의 개폐기와 제어기(positioner)를 조정한 후,

' A '

사전 약속된 둘만의 암호를 날렸다.

' 38 / 56 '

운전전류[A]의 측정표시값(digital)들을 보내왔다.

다시 제어장치들을 익숙한 손놀림과 감각으로 조정을 반복하면서, 암호(A)들을 서너차례 주고 받은 끝에,

' 71 / 71 '

목표값에 정확히 도달했다.

' 오케이~! 푸른 버턴 둘 다 작동 '

저 쪽 우주의 그녀는 정확히 송풍기를 정지시켰다.

색맹도, 나쁜 머리도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열어 둔 제어기의 뚜껑을 원상복구하는 사이, 차단된 우주의 경계문(점검구)이 활짝 열렸다.

저 쪽 우주인(?)의 소행이었다.

그 문을 통해서 공조기를 나서며, 비로소 <웜홀>을 발견했다.

눈 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그토록 찾아헤맸네...쩝

웜홀이 있으면, 우주는 안팎이 따로 없다.


허기 진 귀갓길, 동네의 단골 감자탕집에서 함께 늦은 저녁식사를 했다.

마누라는 노모님의 몫으로 한 그릇 별도로 포장도 하고...

 

- 글쓴이 초등학교 동창생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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