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훈장(勳章) ]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고, 공조실의 벽을 의지한 채 잠시 눈을 감고 움직임을 멈췄다.
별난 우주론자에겐 우리 행성은 분명 자전(自轉)과 공전(空轉)하고 있었다...!
일정대로, 며칠 째 계속되는 야간작업의 분위기에 비로소 몸이 적응하는 고비의 진통과정이란 사실을 그 동안 경험으로서 익히 알고 있었다.
그 고비만 넘기면, 체력적으로도 힘든 작업의 과정들은 극복될 뿐만 아니라, 작업의 효율성과 속도도 급물살을 탈 것이란 희망적인 징후였기에 걱정보단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인생사(人生事)도 다를 바 없다.
시련도 알고 보면, 몇 걸음 앞에서 고심차게 기다리고 있는 희망의 징조일 뿐.
그런 즉, 늘 긍정적으로 살고 볼 일이다.
마누라가 머리의 염색을 권유했다.
늘 그랬듯, 손수 해주겠다는 의미였다.
하긴 귓밑머리의 세치가 눈에 거슬리기도 했지만, 난데없이 웬 선의(善意)를...?!
이유없는 무덤이 없듯, 이 하수상한 세대에 들어서 그것없는 마누라의 선의도 없었으니...
이미 처리했던 공사들의 대금이 조만간 입금될 예정이란 현실을 노회하게 감 잡은 모양이다.^^
아...!
한시적, 제한적, 상대적 행복이여...쩝
탄식하는 순간, 망령 수준의 기억력이 문득 되살아났다.
이종사촌 동생네의 경사스런 혼사(婚事)가 벌써 이틀 후 주말로 눈 앞에 성큼 다가왔다는 사실을...!
그리 깊은 뜻이 있는 줄도 모르고...
마누라에게 미안했다.
어머니 버금가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던 이모님의 영전(靈前)에서 약속을 드렸었다.
외롭게 성장하여 늘 애처로운 동생을 친 오래비처럼 잘 돌보겠노라고...
녀석의 가정에 축복스런 첫 혼사인 만큼, 현재 공사중인 작업일정도 하루 미루고 그 날을 기다렸다.
그 참에 오랫동안 소식 궁금하던 외가의 사촌들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더욱 기대되었다.
워낙 꾸밀 줄 모르고 사는 별종이라며, 지기들이 가끔 훈계도 하던데...
이 참에 제대로 때 빼고 광 내고 그 혼사에 참석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보니, 저절로 내 양 손의 손톱 끝으로 시선이 모아졌다.
손톱 밑의 까만 때.
생업의 흔적, 찌던 그 기름때는 아무리 열심히 문질러 씻어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공사를 마치고, 한 주 가량 지나야 말끔히 사라지므로, 그저 세월에 맡겨야 한다.
무공훈장(武功勳章)인 셈이다.
귀밑 세치머리는 열심히 살아 온 덕분에 보상받은 세월의 훈장이고...
그 자랑스런 훈장들을 주렁주렁 달고 축복스런 결혼식을 찾고 싶지만, 한번 때 빼고 광 내보고 싶다, 이번 만큼은...^^
-글쓴이 초등학교 동창생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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