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을 거부한 과부의 기개

 
 
 

김삿갓이 전라도 어느 마을을 지날 무렵 날이

저물어서 하룻밤 묵을 곳을 찾던 중에 커다란

기와집이 눈에 띄었다.

"이리 오너라!"

김삿갓이 큰 소리로 주인을 불렀으나, 대문을

열고 나선 것은 주인이 아닌 계집 종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여종은 아직까지 어려 보였는데, 제법 예의를

갖추고 있는 듯했다.

"지나가는 과객인데 하룻밤 묵어갈 수 있는지

주인께 여쭈어 보거라."

잠시후, 안채에 다녀온 여종이 주인의 허락을

받았는지, 김삿갓을 방에 들이고 저녁을 지어

주겠다고 하였다.

"허어, 이집은 주인이 도데체 누구기에 사람이

찾아왔는데 내다 보지도 않는가? 고얀지고..."

주인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자, 삿갓은 자신이

무시당하는 것 같아 은근히 심술이 났다.

잠시 후에 여종이 밥상을 들고 왔으며 비교적

준수한 상차림이었다.

김삿갓이 여종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댁 주인 어른은 어떤 분이신가?"

그러나 여종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허둥대는

기색을 보이며 물러갔다.

그걸 보자, 김삿갓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집은 여우 귀신이 사람으로 둔갑해서 사는

집인가? 뭔가 으시시한 기분도 들었다.

생각을 해보니, 지금까지 이 집에서 본사람은

여종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밥을 다 먹은 뒤에 김삿갓은 궁금증을 참을수

없어 슬며시 안방에 다가가 방안을 엿보았다.

'아니,저건!'

방안에는 하얀 소복 입은 여인이 앉아 있었고

순간 정말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더럭 겁이 났다.

그렇지만 천하의 김삿갓이 그 정도로 움추려들

수야 없다는 생각에 방문을 열어젖히며 안으로

들어갔다.

가까이서 여인의 얼굴을 보니 대단한 미인이고

여인은 처음에는 깜짝 놀랐으나 김삿갓이 살살

어르며 이야기를 붙이자 순순이 말문을 열었다.

사연을 모두 듣고보니 그 여인은 독수공방하는

어린 과부였던 것이었다.

마침 오늘, 시부모님은 친척집에 볼일이 있어서

길을 떠났으며 여종과 둘이서 집을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여인의 방에서 나온 삿갓은 잠자리에 들었으나

영 마음이 싱숭생숭 하여 잠이 오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홀몸이 되었으니 이밤이 오죽이나

길게 느껴지랴 싶어서 은근히 동정심이 생겼다.

아니 동정심은 한낱 핑계에 지나지 않고 간만에

아름다운 여인을 보니 마음이 동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밤이 깊어지자 방문을 열고

여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여인은 잠이 들어있었고 삿갓은 천천히 다가가

이불을 들추고 누울 참이었다.

그때 여인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삿갓에게

단도를 겨누며 외치는 것이었다.

"웬 놈이냐!"

김삿갓은 너무 놀라서 뒤로 벌렁 나자빠 졌다.

"나, 나요. 아무짓도 하지 않을 테니 제발 칼을

치워주시오."

김삿갓은 손을 휘저으며 애원을 하였고 여인은

김삿갓의 얼굴을 확인하곤 다소 기세가 누그러

지는 것이었다.

"젊잖은 분인 것 같아 집에 들여 재워드렸는데

이게 무슨 망발 이십니까?

저는 일찍 지아비를 잃어서 아직까지 근신해야

할 몸이거늘 정녕 그것을 모르셨단 말입니까?"

여인은 생각보다 학문이 높은 것 같은 말투였고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김삿갓은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삿갓은 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거짓말을 둘러댔다.

"나는 지금.. 한양에 과거보러 가는 길인데 내가

잠시 무엇에 홀렸나 봅니다.

내가 죽을 죄를 지었으니 부디 용서하시고 칼을

거두어 주시오."

그러자, 여인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칼을

거두고 김삿갓을 쳐다보며 말했다.

"과거를 앞두고 있는 분이시라니 학문이 높은분

같아서 이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으나 일단은

제 시험에 붙어야 이방을 나가실 수 있습니다."

"시험이라니? 무슨 시험이오?"

"제가 운자를 불러드릴 테니 지금 이 자리에서

시를 한 수 지어 보십시오."

뜻밖의 일이었고 깊은 밤에 과부를 넘보려다가

시를 짓기는 난생 처음이거니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목숨이 오락가락 하는 일이기에 삿갓은

여인의 제안을 승낙했다.

운자가 주어지자 삿갓은 잠시 시상을 가다듬은

뒤에 시를 읊기 시작했다.

나그네 잠자리가 쓸쓸해 꿈자리도 좋지 못한데

하늘에 가득찬 차가운 달빛에 주위가 처량하네.

푸른 대와 푸른 솔은 천고의 절개를 자랑하고

붉은 복사꽃과 흰 오얏꽃은 한 해에 저버리는

춘색이로다.

왕소군의 아름다운 모습도 오랑캐 땅에 묻히고

양귀비의 꽃같은 얼굴도 마외의 티끌이 되었네.

사람의 성정이 본래 무정한 것은 아니니 오늘밤

그대 옷자락 풀기를 아까워 하지 않으면 좋겠네.

왕소군은 한나라 원제 때 후궁으로 미인이었고

화공이 초상화를 추녀로 그리는 바람에 흉노족

아내가 되어 거기서 죽은 비운의 여인이다.

그리고 마외(馬嵬)는 중국 장안의 서쪽 지방에

있는 도시로서 양귀비가 죽은 곳이다.

김삿갓은 그 와중에 이시를 통해 은근히 여인의

마음을 떠 보았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시짓는 솜씨가 과거에서 뜻을 이루실 분이군요.

하지만 마지막 구절은 안 본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제 방을 나가셔도 좋습니다."

삿갓은 여인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의 부질없는

욕정을 가라앉힐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동침하지 않아도 서로 마음만 통하면 이부

자리만 깔아놓아도 정을 통한 것과 진배 없다는

말을 떠 올리며 묵묵히 여인의 방을 빠져나왔다.

- 옮겨온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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