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갑과 칠순이의 천생연분

 
 

그새 약속한 10년이 지났건만, 경상도 거창 땅의

백석지기 김영감은 열아홉 머슴총각 이석갑에게

이렇다 말 한마디 없었다.

다섯살 때 아버지가 죽고 일곱살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버리자 의지할 혈육 하나 없는 어린

고아 이석갑을 거둬준 사람은 김영감이었다.

김영감은 이웃집 노인이, 어머니 시신을 지게에

짊어지고 앞산에 묻고온 여름날 오후 울고 있는

이석갑의 손을 이끌고 옆 마을 한가운데 고래등

같은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실은 이웃집 노인이 전날밤에 김영감을 찾아가

딱한 이석갑의 사정을 이야기 하였고 김영감이

자기집 머슴살이로 거둬들였던 것이다.

그날 밤 김영감은 어린 이석갑에게 자기 집에서

10년만 머슴살이를 해주면 좋은 배필을 구하여

혼례를 올려서 먹고 살수 있도록 논을 떼어주고

살림을 차려주겠다고 약속의 말을 했다.

김영감 말을 들은 이석갑은 그날부터 소꼴베기

여물 쑤기, 마당 쓸기, 두엄 내기 등의 농사일을

거들었고 나이가 들수록 고된 일을 배워나갔다.

어린 나이에 일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두살 때는

소몰고 쟁기질과 같은 더욱 힘든 일들을 도맡아

했으며 그러기를 어언 10년이 되었다.

이석갑은 새경 한톨 받지 않고 김영감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머슴살이 했으며 약속한 십년이

지나도 주인 영감은 장가를 보내줄 생각도 논을

떼어 살림을 차려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 가득 의문이 들어찬 이석갑은 그해 가을

걷이가 끝난 어느날 오후에 새끼를 꼬고 있을때

마침 사랑방에 들어온 김영감에게 물었다.

"영감님, 제가 어릴 때 혼례식도 치러주고 논도

떼어준다고 하신 약속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석갑의 물음에 김영감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약속을 기억하고 이석갑을 장가들여 한살림을

차려주겠다고 고심하고 있던터에 마침 배필이

될 만한 처녀를 구했다고 하였다.

'그러면 그렇지 고아인 나를 거두어 준 마음씨

좋은 김영감이 설마 약속을 까먹었겠어.’

이석갑은 이제 자신과 혼인을 하게 될 여인이

과연 누구일까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선녀 같이 아름다운 고관대작 양반댁의 규수는

아닐지라도 비록 천한 집에서 태어나 자신처럼

가난하게 살아갈지언정

찔레꽃 송이처럼 참하고 향기로운 소박한 꿈을

가진 처녀를 은근히 마음 속으로 그려보았으며

생각해보면 참으로 서러운 인생이었다.

부모가 죽고 어려서 머슴살이 시작해 나이들어

좋은 여자를 만나서 살림차리고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기 위하여 이 악물고 살아온 날들이었다.

김영감의 아이들은 부모 잘만나 맛난것 먹으며

서책을 읽으며 할일없이 놀때 이석갑은 하루도

쉴틈없이 궂은 일을 마다않고 부지런히 일했다.

그때마다 이석갑은 김영감이 약속한 날이 하루

빨리 다가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순간 순간을

이겨냈던 것이다.

그런데 혼례식도 올려주고 살림을 차려준다니

이석갑은 김영감님의 말에 당장 휘파람이라도

불듯 기분이 좋아졌다.

두어달 후 어느 눈 내리는 겨울 밤에 김영감이

사랑방에 들려서 이석갑에게 느닷없이 다음달

초닷샛날로 혼례치를 날을 받았다면서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날을 셈해보니 앞으로 열흘이 남았으며 그런데

과연 신부는 누구인지 이석갑은 대뜸 궁금하던

것을 김영감에게 물어보았다.

김영감은 빙그레 웃으며 좋은 신부를 구했으니

그때가 되면 알게될 것이라고 했으며 이석갑은

일순 궁금증에 휩싸였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이석갑이 자신의 배필로 결정된 처녀가 누군지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닷새 뒤였으며 이석갑이

소여물 쑬 구정물을 가지러 옆집에 갔는데 마침

그집 늙은 아낙이 말을 걸어왔다.

"부모 죽고 고생스럽게 머슴살이 하더니만 혼례

치르게 돼서 잘되었네. 신부될 칠순이도 불쌍한

애니깐 서로 도와주며 잘 살게.”

그말을 들은 석갑은 순간 까무러칠 지경이었고

자신과 혼인하기로 정했다는 올해 열다섯 살의

칠순은 김영감집 부엌에서 밥하는 종이었다.

칠순은 자신보다도 더 불행했으며 부모도 없이

밥 얻어먹으러 이마을 저마을로 거지로 떠돌던

것을 김영감이 부엌데기로 거두었던 것이다.

그런데다 칠순은 지지리도 못생겼고 쓰러질듯

마당비처럼 비쩍마른 몸에다 동태눈처럼 멍한

눈빛이 마치 ‘나는 바보요’ 하는 그런 인상이다.

부엌에서 밥할 때나 설거지를 할때 샘에서 물을

퍼서 길어주던 이석갑은, 그런 칠순을 바보라고

윽박지르며 사정없이 발길로 걷어차곤 했다.

그럴 때마다, 칠순은 부지깽이 맞은 강아지처럼

꼬리를 내리고 곧 울음을 터트릴것 같은 얼굴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그 자리에 풀썩 웅크려 앉아

코를 훌쩍이는 것이었다.

얼굴 어느 한 곳이라도 곱상하게 생겨먹었다면

측은하게 여기고 정이라도 주었겠지만, 불행이

덕지덕지 엉겨붙은 그 모습에 정나미가 삼천리

밖으로 뚝 달아났던 것이다.

인간은 불행한 자신보다 더불행한 인간을 보면

자신의 처참한 모습을 발견해서 그런지 몰라도

따뜻한 마음으로 감싸주기 보다는 더욱 모질고

사납게 구박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석갑은 칠순과는 도저히

혼인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김영감 입장에서는 의지할곳 없는 칠순과

이석갑이 서로 처지가 비슷하여 좋은 배필이라

여겼고 또 그들을 맺어주면

별로 돈 들어갈 일도, 신경 쓸 일도 없어 좋았을

것이기에 선택한 것인지는 몰랐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날밤 이석갑은 고향마을로 향했다.

자신의 죽은 어머니를 지게에 지고 묻어주었던

이웃집 노인에게 탁주를 들고 찾아가 하소연할

양이었고 그러한 심경을 들어줄 사람은 그노인

밖에는 없었던 것이었다. 

“어르신, 어째 이놈은 복이라고는 없는 것이요!

신부감이 그런 거지에 바보 칠순이란 말이요.” 

껌벅거리는 등잔불 아래서 술이 취한 이석갑은

머리가 허연 주름투성이 노인을 바라보고 울며

말하자 노인은 조용히 이석갑을 타일렀다.

“몹쓸놈, 왜 우느냐? 칠순이가 너에게는 하늘이

짝지어 맺어준 천생연분이다. 엉덩이도 펑퍼짐

하니까 아이도 잘 낳을 거고, 밥도 잘 하고 일도

잘 하고 그러니 살림도 잘 할 것이야.” 

“어르신, 제가 악담 들으려고 온줄 아십니까!” 

이석갑은 노인에게 눈을 부라리고 소리쳤으며

가난한 시골집의 곱상한 처녀라도 기대하였던

꿈이 와르르 무너져버린 이석갑은 머리끝까지

피가 끓어올랐던 것이다.

노인은 그런 이석갑을 바라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놈아! 이야기 하나 들려주마. 옛날 함안땅에

소금장사가 소금을 팔러 다니다가 소금을 한짐

짊어지고 개울을 건너는데 마침 물살에 고추가

떠내려 오는 것이여.

그래서 얼른 통통하게 기다란 고추를 건져올려

붙잡고 썩었는가 하고 코끝에 대보니 싱싱하여

이놈이 자신의 그것보다 더 큰가하고

얼른 바지춤을 내리고 불알옆에 대고 맞춰보니

이놈의 고추가 딱 거기에 붙어버려서 소금장사

그것이 두 개가 된 것이여.” 

사람 답답해 죽겠는데 지금 무슨 실없는 소리냐

싶은 생각이 든 이석갑은 노인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악다구니를 쓰듯 소리쳤다. 

"소금장사의 그것이 두개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어르신!” 

“이 미친놈아! 계속 들어봐. 그래 이 소금장사가

그날밤 어느 마을 사랑방에 들어가 하룻밤 잠을

청하면서,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놀면서 그것이

두개가 된 기막힌 사연을 이야기 했지.

그러자 사람들이 마침 이집 주인 여자도 구멍이

두개라, 그것이 두개인 사내를 구하려고 이렇게

사랑방을 친다는 것이었어.

다음날 아침 소금장사가 주인 여자에게 그것이

두개가 된 사연을 말하고 서로 맞추어보았더니

딱 들어맞아서 부부가 되어 잘 살았지.

이게 바로 천생연분이라는 거다 이놈아! 여자는

인물도, 재산도, 가문도, 배움도, 볼것 없고 오직

부지런한 성품 하나만 보면 된다.

내가 보기에 칠순이는 사람으로나 여자로서나

결격사항이 전혀 없고, 난 이 말 밖에 들려줄게

없으니 어서 돌아가서 칠순이에게 장가들어서

살림 붙여 잘 살아라.” 

노인은 이석갑을 두번 다시는 상대못할 미친놈

취급하고 호통을 치며, 사정없이 내쫓아버렸고

혼인날은 다가왔고, 이석갑은 김영감의 결정을

딱히 무어라 거역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혼인을 아니 칠순을 도저히 아내로 받아

들일 수 없었던 이석갑은 끝내 일을 저질렀으며

끔찍한 일은 혼례식을 치른 그날 밤에 벌어졌다. 

도저히 칠순이가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없이 혼례식을 치른 이석갑은 첫날밤 신방에

들여온 술을 혼자 홀짝 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취기가 오른 이석갑은 저런 지지리도

못난 칠순을 만나 살려고, 뼈골이 빠지게 10년

머슴살이를 했냐 싶은 생각이 들었고, 급기야는

분이 치받쳐 올라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그리고 부엌으로 들어가 시퍼런 식칼을 들고와

첫날밤을 맞으려는 기분에 들떠 있는 칠순이의

배를 찔러버리고 그 길로 사정없이 도망갔으며

붙잡히면 살인범으로 죽을 것이었다.

이석갑은 울려 퍼지는 가련한 여인의 송곳같은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뒤로 하고서 피비린 손을

마구 휘저으며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면서 밤을

발길이 닿는 대로 달리고 달렸다. 

그로부터 십 수 년, 세월이 흘러가고 이석갑의

일은 경상도 거창 땅에서 까마득히 잊혀졌다.

이석갑은 강원도 두메산골 어디로 도망을 가서

그곳에서 다시 머슴살이를 하고 숨어살며 겨우

초가삼간 마련하고 그제야 늦은 장가를 들려고

이웃 할머니에게 중신을 부탁했다. 

며칠뒤 이웃집 할머니가 좋은 과부가 있다면서

선을 보라고 말하는 것이었고 이석갑이 과부를

만나보니 얼굴이 참 곱상하고 예뻤다.

날을 정해서 혼례식을 올린 이석갑은 그 여인과

함께 첫날밤을 맞았으며 이윽고 술을 몇잔 마신

이석갑은 등잔불을 눌러 꺼버리고, 신부의 옷을

벗기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떨리는 손으로 신부의 알몸을 더듬었고 봉긋한

가슴에서부터 살금살금 온 몸을 훑어서 아래로

내려가는데, 뱃살에 무엇인가 뭉뚝하니 잡히는

것이었고 그것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으음... 당신 배에 이건 무엇이요?” 

“예 서방님, 그것은 흉터이고 어려서 경상도에

살때 부잣집 부엌살이를 했지요.

그집 주인이 머슴 총각과 혼인을 시켜주었는데

저의 얼굴이 못생겼다고 첫날밤에 머슴이 칼로

배를 찔러버리고 달아난 흔적이며 다행히 그날

밤에 죽지 않고 살아난 거지요.” 

‘헉! 이럴 수가……. 이 여인이 정말 그 칠순이란

말인가! 그날밤 몇 백리, 몇 천리 깊은 골짜기로

달아나 이렇게 사는데도 서로 다시 만나다니,

십수년 만에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게 변하였고

정녕 하늘아래 피할수 없는 부부인연이란 것이

있단 말인가!’ 

순간 망치로 머리를 쿵하고 세차게 얻어맞은듯

불 번개가 번쩍인 이석갑의 머릿속에는 불현듯

먼옛날 이웃집 노인이 하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이었다. 

‘이 천하에 나쁜 놈아! 이제야 알겠냐? 그래서

부부인연은... 하늘이 맺어준 천생연분이라고

하느니라! 이제라도 소중히 여기고 살어!’

- 옮겨온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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