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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천변을 산책하는 사람들

 

2021/04/04 진천천변

 

 

[오늘의 시]


뒤란의 봄 / 박후기

그 해 가을,
지구를 떠난 보이저 2호가
해왕성을 스쳐 지나갈 무렵
아버지가 죽었다

이제 우리 집에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 힘센 것은 모두
우리 집의 밖에 있다

함석을 두드리는 굵은 빗줄기처럼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미군부대 격납고 지붕에서
땅으로 내리꽂힌 아버지가
멀어져 가는 보이저 2호와
나와의 거리만큼이나
아득하게 느껴질 무렵,

겨울이 왔고
뒤란에 눈이 내렸다

봉분처럼
깨진 바가지 위로
소복하게 눈이 쌓였다
주인 잃은 삽 한 자루
울타리에 기대어 녹슨 제 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고
처마 밑 구석진 응달엔
깨진 사발이며 허리 구부러진 숟가락
토성(土星)의 고리를 닮은
둥근 석유곤로 받침대가
눈발을 피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 겨울의 뒤란에는
버려진 것들이 군락을 이루며
추억의 힘으로 자생하고 있었으니
뒤란은
낡거나 상처받은 것들의
아늑한 정원이었다

눈물이 담겨 얼어붙은 빈 술병 위로
힘없이 굴뚝이 쓰러졌고
때늦은 징집 영장과 함께
뒤란에도 봄이 찾아왔다

울타리 아래 버려진 자루 속에서
썪은 감자들은 싹을 틔웠고
나는 캄캄한 굴뚝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 ㅇ 1~ 3연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사실관계 기술인데
보이저 2호가 해왕성을 스쳐 지나갔을 때는
아마 1989년도의 일일 겁니다
1968년생인 박후기 시인의 나이 21세 때죠
대충 추측해보면 아버님은 50전후 였겠네요
우리 집에 힘센 것은 없다 힘센 것은 집 밖에 있다
참 아픈 얘기입니다
미군부대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가계의 절대적인 중추였는데 갑자기~~

ㅇ 뒤란, 즉 뒤뜰에는 아버지가 평소 쓰시던
농기구며 석유곤로며 깨진 술병이며 쓰러진 굴뚝 등
아버지와의 추억을 간직한 물건들이 쌓여 있죠
21살 이후의 시인에게 징집 영장이 날아 오고
때마침 뒤란에도 봄은 옵니다

ㅇ 봄이 왔다는 것은 희망입니다
하지만 뒤란의 봄입니다
아직 가계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힘든 시기,
어머니에게 가계를 맡기고 군대에 간다는 것은
뭔가 찜찜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캄캄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대를 하면 썩은 감자가 싹을 틔우듯
봄은 오고 또 살 길이 생길 것입니다
어두운 뒤뜰에도 봄은 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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