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작 수작 그리고 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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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당이라 일컬어짐에 자타의 이견이 없고, 허구헌날 술 먹는 자랑이 하늘을 찌르다 못해 ‘술’을 주제로 한 작품전까지 연 권도경 작가로부터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들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세 가지가 술자리에서 유래됐다는 것이다. ‘짐작’(斟酌), 수작(酬酌), 참작(參酌)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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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짐작’의 짐(斟)에는 오늘날 빼갈잔같이 불투명한 잔의 뜻이 있다고 한다. 그런 잔에 술을 치려면 당최 얼마만큼 따랐는지 알 수 없으니 미루어 ‘짐작’하여 따를(酌) 수 밖에 없다. ‘수작’은 말 그래도 권커니잣커니다. 술 갚을 수(酬)에 술 따를 작(酌)이니 보탤 말이 무엇이랴. 끝으로 참작(參酌)은 “이리저리 비추어 보아서 알맞게 고려한다.”는 뜻이다. 실수나 범죄를 저지른 뒤에 그 “정상을 참작하여” 운운의 표현의 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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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에서 나온 것이 분명한 이 세 단어를 곱씹으면서 새삼 경탄을 했다. 술자리에서의 도리와 예의가 이 세 단어들에 담겨 있는 것이다. 얼치기 주당의 멋대로 해석을 곁들이자면 짐작은 미래의 일을 헤아리는 일이요, 수작은 바로 이 자리에서 상대를 이해하고 맞춰 주는 행동이며, 참작은 일단 벌어진 일에 대한 관대함과 포용의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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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를 갖고자 할 때 상대가 누구이며, 어떤 자리인지, 무슨 술을 어디쯤 되는 자리에서 베푸는 게 좋은지, 얻어먹는 자리라면 어느 정도로 얻어먹어도 무방한지, 누구를 추가로 부르면 자리에 흥을 더할 수 있으며, 또 누굴 호출했다가 초를 칠 지, 시원한 생맥에 치킨을 뜯으며 건배를 외칠 자리인지 깡소주에 조개탕 정도 먹으며 등을 두드려주는 자리인지를 ‘미루어 짐작’해야 즐거운 자리를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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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몇 놈 부르지 뭐.”라고 해서 친구들 왕창 불러서 기왕 얻어먹는 것 잘 얻어먹자고 한우등심집으로 향했다가는 의절당하기 십상이다. 긴한 얘기 하자고 친구가 불렀는데 젊은 애들 분위기 즐기자며 뭔 클럽 비슷한 고막 찢어지는 집에 간다면 최소한 3년은 눈치바보라고 욕먹지 않으랴. 짐작의 실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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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은 수작이다. 예측하는 것은 짐작이지만 눈앞의 상대를 고려하고 배려하고 술잔을 독려하는 것은 수작이다. 술은 즐겁게 마시는 게 ‘국룰’이라지만 자식 새끼 속썩여서 가슴에서 피눈물나는 친구 앞에서 “무자식이 상팔자” 건배를 외치는 노총각 홀애비가 있다면 이 무슨 “개수작”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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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회사에서 잘리게 됐는데 그 칼을 휘두르는 임원을 두고 “자주성가한 멋진 사람” 이라고 칭찬한다면, 그게 아무리 사실이라 해도 맥주병으로 맞지 않으면 다행인 헛수작이 된다. ‘ 술을 함께 하는 상대의 분위기와 상황에 최대한 맞춰 주고, 축하와 위로와 공분과 슬픔을 나누는 것, 그것이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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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를 파했다. 그런데 정작 낸다고 하던 놈이 도망을 갔다. 남은 자들이 멍하니 서서 더치 페이를 위해 1/n을 계산하는 가운데 한 친구가 “이 자식하고 내 다시 술을 먹으면 성을 간다.”고 분노할 때 “걔 오늘 너무 취했잖아. 원래 그런 놈 아니야.”라며 감싸 줄 줄 아는 것이 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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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고주망태가 된 사람이 술 내놓으라고 발악질을 하면 허허 이 자식 취했네 하면서 카카오택시 불러 냅다 던져 버리고 기사님 잘 부탁합니다 외치는 친구가 참작을 잘하는 친구다. 술 먹다가 꼬장부린 친구가 다음날 전화 와서 죽는 소리로 미안하다고 할 때 “너 어제 김이사한테 깨지는 걸 내가 봐서 참는다. 오늘 해장국이나 사.” 하며 형량(?)을 줄여 주는 행위가 ‘참작’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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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두고 보면 짐작과 수작과 참작의 도(道)는 술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사람을 대할 때 우리가 ‘미루어 짐작’하다가 낭패를 보는 일이 얼마나 흔한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그 속사정을 헤아리지도 않고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로 평가하고 규정짓고 제멋대로 쏟아붓다가 사람 잃고 유익도 없애고, 상처만 늘리는 일이 어디 한 두 번이었는가. 최소한 우리가 ‘빼갈잔에 옌타이 따를 때’의 신중함만 갖춘다면 우리의 오해와 적의는 반 가까이 줄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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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의 기본은 권커니잣커니, 즉 수작이지만 술자리에서 오가는 것은 어찌 술잔만이랴. 즐거운 화제를 담고, 서로의 시름을 줄이는 이야기가 오가야 술자리는 기쁨으로 빛난다. 하지만 불판에 올린 고기 타도록 설교 늘어놓는 못된 사장에 빙의한다면, 그리고 충고랍시고 남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것을 능사로 삼는다면,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나는 이 말을 해야겠고, 감히 내 말을 끊으면 화를 내겠다는 각오에 충만하다면 그의 수작은 잘해봐야 헛수작, 나쁘면 개수작에 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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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고 우리 사회는 너무나 ‘참작’에 불공평하다는 생각이다. 내 편에게는 ‘정상 참작’의 여지가 바다와 같으나 남의 편에게는 참작해야 할 정상의 끝이 바늘보다 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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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젊은 시절의 운동권 경력에 시비를 걸어 헌법재판관 자격이 있니 없니 하는 사람들이 총칼든 군인들을 국회에 보낸 이에게는 ‘오죽했으면’ 하는 오징어 먹물로 설경을 그릴 ‘참작’을 보인다.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에게 거슬리는 말 한 마디를 하면 그가 왜 그랬을까 참작은 커녕, 천하의 패륜아에 몹쓸인간으로 몰아야 직성이 풀리는 참작(斬酌)을 한다. 그런 분위기에서 어떤 화합이 이뤄지며, 타협이 존재하며, 참작할 정상이 정상적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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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술자리에 간다. 분위기를 잘 읽고, 어느 정도의 분위기를 내야 할지 짐작해 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게으르지도 게걸스럽지도 않게, 충분히 듣고 권하며 따르고 마시는 멋진 수작을 기대해 본다. 아울러 행여 아쉽거나 모자란 점이 있어도 쾌히 참작하고 이해하여 다음을 기약해 볼 것이다. 우리 사는 이치도 이와 같기를….. 능히 짐작하고 쾌히 수작하며, 넉넉히 참작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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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고구마 / 목성균님>
내가 강릉 영림서 진부 관리소 말단 직원일 때 월급이 칠천몇 백 원이었다. 그 돈으로 어린애 둘과 아내와 내가 한 달을 빠듯하게 살았다. 어떤 때는 아내가 담배를 외상으로 사다 줄 정도였다. 새댁이 담뱃갑을 건네주면서 조심스럽게 신랑한테 하던 말을 잊을 수 없다.
“담배는 외상 주는 게 아니래, 자기 담배 못 끊지?”

늘 퇴근이 늦었다. 잔무가 있어서 늦을 때도 있었지만 잔무가 없어서 늦는 때도 많았다. 잔무가 없으면 미뤄두었던 고스톱 화투를 쳐야 하기 때문이다. 직원들 간에 숙직실에서 화투를 치는 것은 동료애를 돈독히 하는 것이지 절대로 노름은 아니다.
특히 산읍이 눈 속에 깊이 묻히는 겨울에 그랬다. 어두워져서 전등에 스위치를 넣으면 늙은 소장님은 큰 곰처럼 어정어정 소장실을 나갔다. 보나 마나 면장님 사택이거나 지서장님의 하숙집으로 마작하러 가는 것이다. 우리는 눈을 맞추고 사무실 뒤 숙직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면 사환은 알아서 관리소 앞에 있는 ‘삼척 집’에 직원들이 숙직실에서 고스톱 화투를 친다고 이르고 퇴근을 했다.

밤이 이슥해서 뽀드득뽀드득 눈을 밟고 오는 소리가 숙직실 앞에 와서 멎으면 문이 벌컥 열렸다. ‘삼척 집’ 늙은 아주머니였다. 머리에 이고 온 도토리묵과 찌개와 막걸리 주전자가 담긴 함지박을 숙직실 안에 들여놓으며 볼멘소리를 질렀다.
“색시들 기다려, 먹고 그만 집에 가-.”
마치 자기가 직원들의 장모님이라도 되는 양 성미를 부렸다. 그러면 고스톱 판은 끝났다. 직원들은 밤참과 막걸리로 배를 채우고 만족해서 “크-윽-.” 트림을 하면서 숙직실을 나섰다. 지금도 가끔 행복한 포만감을 느낄 때면 그때처럼 생리적인 소리를 일부러 내본다. 그러면 한결 행복하다.

숙직실을 나서면 흰 눈이 소복한 부피를 지으며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나의 집은 읍내 밖 진부 농고 뒤에 있는 농가의 바깥채였다. 버스정거장 앞을 지나서 논둑길을 건너가야 했다. 아내가 어두워지면 윗방에 있는 전등을 내다가 추녀 밑에 걸어 놓고 불을 밝혀놓았다. 나는 그 전등 불빛을 등댓불처럼 의지하고 어두운 논배미를 건너서 집에 가곤 했다. 그러나 그 전등은 따뜻하게 내 삶을 고무해 주는 정도지 삶의 길잡이 역할까지는 못했다. 적설에 묻힌 논배미에는 도대체 어디가 논바닥인지, 논둑인지 구분이 안 되었다. 그 불빛은 논배미의 적설 상태까지 밝혀 주진 못했다. 다만 ‘빨리 오세요.’ 하는 아내의 눈짓에 불과했다. 논둑을 더듬어 가다가 실족하면 논둑 아래 적설 속에 빠지고 말았다.

버스정거장 모퉁이에는 소아마비를 앓아서 수족을 잘 못 쓰는 아주머니가 군고구마 장사를 하고 있었다. 눈 속에 깊이 잠들어 있는 작은 산읍 모퉁이, 내가 집에 돌아오는 그 늦은 시간에는 군고구마가 팔릴 것 같지 않아 보이는데 아주머니는 시린 발을 동동거리며 서 있었다. 나는 그 아주머니 앞을 그냥 지나갈 수가 없어서 늘 몇 알의 고구마를 샀다. 그해 겨울 나의 하루 일과의 마지막은 그 아주머니에게 군고구마 몇 알을 사는 일로 끝나는 셈이었다. 늦은 밤 그 군고구마를 가지고 가서 깜박깜박 졸면서 신랑을 기다리던 새댁에게 불쑥 내밀면 참 좋아했다. 그 재미에 몇 알의 군고구마를 사들고 갔다.

군고구마를 사서 잠바 앞섶에 넣으면 온몸이 따뜻했다. 논둑에서 떨어져 눈 속에 빠져도 춥지 않았다. 따뜻한 고구마를 품어서 그런지 눈 속이 아늑했다. 넘어진 자리에서 쉬어간다는 말처럼 나는 눈 속에 빠져서 잠시 동안 그대로 있었다. 고구마의 온기도 따뜻하고, 논배미 건너 내 셋집 추녀 밑에 걸린 분홍색 백열등 불빛도 따뜻하고, 내 마음도 따뜻했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밤이 늦었다. 차라리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은 푹한데 눈이 오고 난 뒤 갠 날 밤은 숨을 못 쉴 지경으로 냉기가 혹독했다. 산맥들도 칼날처럼 등성이를 세우고, 별들도 쳐다보기 민망할 정도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날은 고스톱 화투를 해서 돈도 좀 땄다. 숙직실을 나서자 볼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따가웠다. 잠바 속에다 자라목처럼 얼굴을 묻고 종종걸음을 쳤다. 고구마도 몇 알 더 사고 아주머니에게 개평을 몇 푼 줄 생각에 즐거운 마음으로 버스정거장 모퉁이까지 왔다. 그런데 아주머니 대신 웬 어린 소년이 서 있는 것이었다.

“너 누구냐?”
“영림서 아저씨이에요?”
“그래-.”
“일찍 좀 다니세요.”
처음 보는 녀석이 볼이 부어 가지고 감정적으로 그러는 것이었다.
“임마. 내가 일찍 다니든 늦게 다니든 네가 무슨 참견이야-.”
“아저씨 때문에 우리 어머니가 감기 걸렸으니까 그렇죠.”
그 녀석이 군고구마 장수 아주머니 아들인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늘 그래요. 영림서 아저씨 퇴근이 늦어서 늦었다고요.”

그때 내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내가 그 수족이 불편한 아주머니에게 고구마 몇 알을 사는 것은 내 행복을 위한 것이지 그 아주머니 장사시켜 주기 위한 것은 아니다. 고구마 봉지를 가슴에 품고 발간 전등 불빛을 지향해서 눈 쌓인 논배미를 건너가면서 나는 늘 행복했다. 먼바다에 나갔다가 포구의 등댓불을 지향하고 돌아오는 작은 만선 어부의 마음이 그럴까. 그 행복감은 따뜻한 고구마 봉지를 가슴에 안음으로써 비롯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 아니었다.

그 수족이 불편한 아주머니는 나의 이 행복감에 차질을 주지 않으려고 고구마가 안 팔리는 그 추운 겨울밤에도 몇 시간씩 내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준 것이다.
소년은 물어보지도 않고 내가 늘 사 가지고 가는 그 몇 알의 고구마를 가슴에 안겨주고, 군고구마 화로가 실린 리어카를 끌고 휭하니 거리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졌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군 고구마값 받는 것도 잊어버리고 갔다.
그 소년은 어머니가 일러준 대로 내가 사 가지고 갈 그 몇 알의 고구마 온기를 혹한 속에 몇 시간 동안 떨고 서서 지켰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 대한 저의 어머니의 친절이 얼마나 가당찮은 것인가를 발견하고 화가 났을 것이다.

다행히 그 아주머니는 바로 감기를 털고 고구마 장사를 했다. 나는 고스톱 화투를 치면서 아주머니를 거리 모퉁이에 세워 놓지는 않았다. 일찍 그 아주머니 앞을 지나갔다. 일찍 집에 들어가는 것이 늦은 밤에 군고구마를 안고 들어가서 조는 아내를 기쁘게 해주는 것만치 재미는 없었지만 아주머니가 고생할 생각을 하면 도리가 없었다.
장중한 태백산맥에 둘러싸인 작은 산읍의 겨울밤, 칠천몇백 원짜리 말단 공무원을 행복하게 해준 아주머니의 행복한 고구마가 먹고 싶다.

<약팔이꾼이 너무 많다>
1.
의대생 시절 의학에 흥미가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 의사면허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여전히 작가가 되고 싶었고 졸업 후에 인류학으로 영역을 바꾸고 싶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공부에 소흘했다. 대신 과외선생으로 일하는 것에 열정을 불태웠다. 다만 여느 의대생과 달리 사회탐구와 논술을 가르쳤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대학생 과외는 2시간씩 주당 2회를 가르치고 매월 40-50만원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비슷했다. 다만 입소문을 타고 꽤 인기를 얻어 학기 중에는 3명, 방학 때는 5-6명을 가르쳤다. 그래서 늘 시간이 빡빡했다. 의과대학 수업이 늦게 끝나는 것을 감안하면 학기 중에는 거의 매일 저녁마다 과외를 했고 방학 때도 오후 내내 과외를 하러 대구를 누볐다. 어차피 의학에 흥미가 없던 터라 과외를 통해 얻는 쏠쏠한 수입에 매우 만족했다. 행운이 조금 부족했다면, 그러니까 2-3번 유급했다면, 의과대학을 그만두고 아예 전업강사로 진로를 바꾸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회탐구 과외선생'으로 인기를 끌었을까? 당시 사회탐구는 국사, 세계사, 정치경제, 한국지리, 세계지리, 국민윤리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역사부터 매우 기초적인 정치학과 경제학에 더불어 기본적인 철학사를 가르쳐야 했다. '별의별 책을 읽었다'란 표현이 어울릴 만큼 독서량이 풍부했으나 스무살 남짓한 대학생이 그런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졌을 리 없다. 하지만 '해박한 지식을 지닌 것'과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 오히려 전문적인 지식을 지니는 것이 가르치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을 때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전문가에게 '조선은 좋은 국가인가?'는 간략하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효율적인 행정제도를 지녔고 방대한 문서를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한 부분에서 긍정적이나 경직되고 폐쇄적인 사회를 고집한 측면에서는 부정적이다. 또, 임진왜란를 기준으로 전반과 후반이 사뭇 다르다. 인물에 대한 평가는 더욱 어렵다. 오늘날 개혁군주란 이미지를 지닌 정조만 해도 '권모술수에 능하고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는 교활한 독재자'란 다른 얼굴이 존재한다. 그래서 전문가는 우물쭈물하는 것처럼 보인다. 속이 후련해지는 선명한 대답을 내뱉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그러니 학자 혹은 대학교수라면 몰라도 과외선생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과외선생은 복잡하고 애매한 사실을 단순하고 명확하게 가공하여 전달해야 한다. '비공식적 기록'도 슬쩍 끼워넣고 그럴듯한 유머코드도 심어야 한다. 교과서의 딱딱한 문장에 갇힌 사건을 흥미진진한 연극으로 부활시켜야 한다. 객관적 사실을 전하고 균형잡힌 인식을 지니게 하는 것 따위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학생이 잘 기억하여 시험에서 정답을 고르는 것에만 집중하면 된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괜찮은 과외선생에 해당했다. 역사, 경제, 정치, 철학 같은 분야에 대한 시시콜콜한 상식, 이야기꾼의 재능, 반골기질에 기반한 삐딱한 유머, 모두 갖추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의과대학을 무사히 졸업하지 못했다면 일타강사를 꿈꾸며 업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과외선생 혹은 일타강사가 사용하는 '가르치는 방식'은 다른 분야에도 매우 유용하다. 복잡하고 애매모호한 사실을 단순하고 선명하게 만들고 거기에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가미하는 방법은 대중강연에 적합하다. TV의 예능교양프로그램, 유튜브의 인문교양채널, 모두 그런 방법을 사용하는 부류로 가득하다. 
나도 거기서 자유롭지 않다. <반항하는 의사들>을 쓸 때, 현대의학의 근거중심주의를 쉽게 설명하고자 중세의학을 '철학적 논리에 갇힌 선문답'으로 지나치게 비난했다. (중세의학에는 확실히 한의학처럼 '세상만물을 죄다 설명하려는 성향'이 있었다. 그러나 중세의학이 거둔 시행착오와 성과가 있어 현대의학이 탄생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런 설명은 대중의 흥미를 잡아끌기 어렵다.) EBS에서 class-e 강연을 진행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임상의사, 특히 응급의학과 의사란 직업적 특징과 삐딱한 리버럴이란 정체성 덕분에 '최소한의 기준'을 지켰다. 그러니까 선을 넘어 속칭 '약팔이'에 나서지는 않았다. 
하지만 세상에는 기꺼이 선을 넘는 사람이 많다. 물론 일타강사와 비슷한 말솜씨를 지닌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저 도구를 장만한 것에 불과하다. 약팔이에 성공하려면 적절한 대상을 찾아야한다. 
2.
우선 약팔이의 범위를 의료계로 한정하자. 그럼 어떤 부류가 작업대상으로 가장 매력적일까? 
일단 젊고 건강한 부류는 아니다. 그런 부류가 괴상한 약팔이에 넘어갈 이유가 없다. 중산층 이상의 배경을 지닌 젊고 건강힌 사람이 건강법이니 건강보조식품이니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가능성은 적다. 그들에게는 성형수술과 미용, 비만치료 같은 상품이 적절하다. 그런데 그런 상품은 소위 필수의료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도 주류의학에 해당한다. 적어도 약팔이는 아니다.
따라서 늙거나 병든 사람와 그 가족, 그러니까 '절박한 사람'을 공략해야 한다. 그래서 대체의학이란 그럴듯한 가면을 쓴 유사의학이 암치료에 집중한다. 대부분의 암은 원인이 복합적이며 발병기전도 사뭇 복잡하다. 그러나 대체의학은 모든 암의 원인과 별병기전을 단순하고 명쾌하게 정의한다. 치료도 마찬가지다. 주류의학은 수술, 화학요법, 방사선 치료 같은 방법을 중심으로 꽤 복잡한 계획을 세우는 반면 대체의학의 치료는 간단하고 명확하다. 그들의 설명을 들으면 어떤 암도 쉽게 치료할 수 있다. 만병통치약이 따로 없다. 
그런데 암환자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벌이는 약팔이에는 심각한 단점이 있다. 암환자의 수명이 길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암이 꽤 진행한 경우와 특정한 몇몇 암은 주류의학에서 치료해도 기대여명이 짧다. 그런 환자에게 대체의학을 적용하면 기대여명이 더욱 짧아진다. 그래서 대체의학이 약팔이로 뽑아낼 수 있는 수익이 제한적이다. 아울러 약팔이의 정체가 탄로날 위험도 존재한다. (스티븐 잡스가 췌장암 중에서 비교적 예후가 좋은 종류에 걸렸음에도 한동안 대체의학에 빠져 치료시기가 늦추어졌고 예상보다 빨리 사망한 것이 좋은 사례다. 또, 국내에서도 유사의학자가 말기암환자에게 고가의 치료를 시행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례가 언론에 오르내린 적이 꽤 있다.)
그래서 1990년대 후반부터 약팔이꾼은 자폐증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자폐증에 걸린 자녀를 둔 부모만큼 죄책감을 깊이 새긴 사람도, 절박한 심정을 지닌 사람도 드물기 때문이다. 또, 자폐증은 말기암과 달리 기대여명이 길다. 아울러 자폐증은 도저히 같은 질환이라 생각하기 힘들 만큼 중증도가 다양하고 같은 환자도 호전과 악화를 반복할 때가 적지 않다.
그리하여 'MMR백신이 자폐증을 일으킨다'란 내용의 논문을 발표하여 '백신반대론의 괴수'가 된 앤드류 웨이크필드부터 '뇌과학'이란 단어를 방패처럼 사용하는 공학자 출신의 유사과학자, '정밀의학'이란 그럴듯한 명칭 아래 '중금속 중독과 장내 미생물 불균형이 자폐증을 악화시킨다'고 주장하며 소아에게 퀴놀론계 항생제와 반코마이신을 처방하는 부류까지 자폐증 환자와 그 가족을 노리는 약팔이꾼은 엄청나게 많다. 페이스북 같은 SNS부터 맘카페와 유튜브까지 그런 약팔이꾼이 활동하지 않는 온라인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3.
절박한 대상을 찾은 후에 사건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명확하게 만든 '일타강사의 화법'으로 속여 이익을 취하는 약팔이꾼은 의료계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환단고기란 위서를 내세워 괴랄한 주장을 펼치는 세칭 '환빠'란 유사역사학자, '내가 재림 예수다'고 선포하는 이단교주부터 '내가 하나님의 대리인이다'고 외치며 복종을 강요하는 '정상적인 대형교회'의 목사, '지구의 나이가 수천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창조과학자, 모두 비슷한 부류다. 부정선거론도 마찬가지다. 나이들며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나 분노한 고령층과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2030의 절박한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사악한 집단이 당신네를 착취하고 국가를 위협한다'고 선동한다. 
흥미롭게도 '일타강사'로 명성이 높은 사람이 그런 '정치적 약팔이'에 나섰다. 씁쓸하게도 무척 잘할 듯하다. 애초에 그게 본업이었으니까

물멍
물멍이란 물을 보면서 멍하니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어항 속 물고기를 바라보거나
폭포를 감상하는 등의 행위가 물멍에 해당합니다
물멍이 좋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스트레스 해소: 물을 바라보는 것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뇌 휴식: 멍 때리기는 뇌에 휴식을 주어 기억력, 학습력,
창의력 향상에 도움을 줍니다.
심장박동 안정: 물멍을 하면 심장박동수가 안정되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정서적 안정: 물멍은 정서적 안정을 취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물멍을 통해 일상 속에서 잠시나마 휴식을 취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이제 새엄마랑 산 시간이 엄마랑 산 시간을 넘었다.
이제 새엄마에게 엄마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하지 않지만 아직 내 휴대폰에 ‘엄마’라고 저장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남은 의리랄까. 뭔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지막 끈이랄까. 새엄마에겐 미안하지만 그것 하나는 남겨두었다.
새엄마를 맞이한지 몇 해 되지 않아, 나는 아기를 낳았다. 늘 일방적이었던 아버지는 “이제 엄마도 있으니 산후조리는 집에 와서 해라“ 했고, 산후조리원 갈 비용이 마땅치 않던 나는 할 수 없이 “네” 했다. 아기를 낳아본 적 없는 새엄마는 최선을 다했고, 나도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지만 매일 울었다. 엄마 생각이 너무 나더라. 아버지는 신혼이었기에 다정한 모습을 자주 보였는데, 우리 엄마한테는 보이지 않던 모습이었다. 내가 우리 엄마, 아빠의 신혼을 보지 못했기에 더욱 비교가 됐겠지. 그저 엄마가 불쌍하고, 새엄마는 엄마를 더 불쌍하게 만든 사람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새엄마의 잘못은 어디에도 없는데 말이다.
만약에 엄마가 아기를 봤으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엄마였으면 내가 얼마나 더 편했을까. 엄마였다면 더 편하게 아기를 돌봤을 텐데… 나는 끊임없이 만약에’를 떠올리며 힘들었고, 내가 힘드니 새엄마의 마음을 마주할 새가 없었다.
”그때, 나, 힘들었어. 아기를 어떻게 씻기는지도 모르고… 다 너무 어렵더라고.“
“그랬을 거 같아요. 저도 그때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죄송했어요.“
새엄마는 우리 엄마보다 나와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나서야 그때의 이야기를 꺼냈고, 나도 이제야 내 힘듦에 가려서 보지 못했던 새엄마의 힘듦을 보았다.
”그땐 엄마도 할머니도 자의가 아니었잖아. 그러니 더 힘들었을 거야.“
딸의 말에 두 여성이 보였다. 자의도 아닌데, 돌봄 노동을 해야했던 그는 얼마나 고단했을까. 낯선 여성을 엄마로 받아들이고 할 수 없이 도움을 받아야 했던 내 마음은 또 오죽했을까. 그 둘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새엄마와 따뜻하고 다정하며 촉촉한 이야기를 나웠다.
그리고 나는 무언가에 홀린듯 휴대폰을 열어 ‘새엄마’를 ‘엄마’로 바꿨다. 그리고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우리 엄마라면, 잘했다고 등을 톡톡 두드려주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년이면 나는 엄마가 하늘로 떠났을 때의 나이가 된다. 나중에는 세 여성이 만나 진한 수다 한 판 벌일 수 있으면 좋겠다. 한 남자에 대한 뒷담화가 대부분이겠지만.
 
 
 
 
 

깊은 산골에서 여자의 몸으로 힘든 농사일을 하며
판사 아들을 키워낸 노모는
밥을 한끼 굶어도
배가 부른 것 같았고,
잠을 청하다가도 아들 생각만 하면 가슴 뿌듯함과 오뉴월 폭염의 힘든 농사일에도 흥겨운
콧노래가 절로나는등 세상을 다 얻은 듯이
남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어느날
노모는 한해 동안 지은 농사 걷이를 이고 지고 세상에서 제일 귀한 아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살고 있는 아들 집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해 도착 했으나 이날 따라 아들 만큼이나 귀하고 귀한
며느리가 집을 비우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판사이기도 하지만
부자집 딸을 며느리로 둔 덕택에 촌노의 눈에 신기하기만 한 살림살이에 눈을 뗄 수 없어 집안을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뜻밖의 물건을 보게 됐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계부였습니다.
부자집 딸이라 가계부를 쓰리라 생각도 못 했는데 며느리가 쓰고 있는 가계부를 보고 감격을하였습니다
그래서 찬찬히 그 안을 들여다 보니 각종 세금이며 부식비, 의류비 등 촘촘히 써내려간 며느리의 살림 살이에 또 한번 감격했습니다.
그런데 조목조목 나열한 지출 내용 가운데 어디에 썼는지 모를 "촌년 10만원" 이란 항목에 눈이 머물렀습니다.
무엇을 샀길래?
이렇게 쓰여 있나 궁금증이 생겼으나 1년 12달 한달도 빼놓지 않고 같은 날짜에 지출한 돈이 바로 물건을 산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용돈을 보내준 날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촌노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아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 아들 가족에게 주려고
무거운 줄도 모르고 이고지고 간 한해 걷이를 주섬주섬 다시 싸서
마치 죄인이 된 기분으로 도망치듯 아들의 집을 나와 시골길에 올랐습니다.
가슴이 미어 터질 듯한 기분과 누군가를 붙잡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분통을 속으로 삭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가운데 금지옥엽키운 아들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어머니 왜 안주무시고
그냥 가셨어요”
라는 아들의 말에는 빨리
귀향길에 오른 어머니에
대한 아쉬움이 한가득 배어 있었습니다.
노모는 가슴에 품었던
폭탄을 터트리듯
“아니 왜! "
"촌년이 거기 어디서 자-아” 하며 소리를 지르자
아들은 어머니 무슨 말씀을....,
하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노모는
"나보고 묻지 말고 너의 방 책꽂이에 있는 공책한테 물어봐라 잘 알게다”
며 수화기를 내팽기치듯 끊어 버렸습니다.
아들은 가계부를 펼쳐 보고
어머니의 역정이 무슨
이유에서인지를 알수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내와 싸우자니
판사 집에서 큰 소리 난다
소문이 날거고 때리자니 폭력이라 판사의 양심에 안되고 그렇다고 이혼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사태 수습을 위한 대책 마련으로
몇날 며칠을 무척이나 힘들게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쁘단 핑계로 아내의 친정 나들이를 뒤로 미루던 남편이 처갓집을 다녀오자는 말에 아내는 신바람이나 선물 보따리며 온갖 채비를 다한 가운데 친정 나들이 길에 올라
내내 입가에 즐거운 비명이 끊이질 않았지만, 남편의 마음은 더욱 복잡하기만 했습니다.
처갓집에 도착해 아내와 아이들이 준비한 선물 보따리를 모두 집안으로
들여보내고 마당에 서 있자
장모가 “아니 우리 판사 사위 왜 안들어오는가”
하며 쫓아 나오자 사위가 한다는 말이
“촌년 아들이 왔습니다”
라고 대꾸하자 그 자리 에서 장모는 돌 하루방 처럼 굳은채 서 있자
“촌년 아들이 감히 이런 부자집에 들어 갈 수 있습니까”
라 말하고 차를 돌려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 시어머니 촌년의 집에는 사돈 두 내외와 며느리가 납작 엎드려 죽을죄를 지었으니 한번만 용서해 달라며 빌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난 다음달부터 촌년 10만원은 온데 간데없고 "시어머니의 용돈 50만원"
이란 항목이 며느리의
가계부에 자리했습니다.
지혜로운 판사 ! 이런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판사 아들의 지혜로운
행동에 가슴이 뭉클 합니다
우리들 주변에 흔히들 봐 온 현실이라기엔 그리 흔한 사연이 아닐까라는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 흙 콘크리트의 효능 >
인도는 보도블럭이나 아스팔트 대신 흙콘크리트를 깔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니는데 공무원들 변화가 참 어렵습니다.
흙콘크리트는 장점이 많습니다.
1.비가 오면 물이 잘 빠져 미끌어지거나 신발이 젖을 가능성이 적습니다.
2.걸을때 충격을 흡수해줘서 걷기에 훨씬 펀안합니다.
3.반영구입니다. 보도블럭처럼 2~3년에 한번씩 교체할 필요가 없습니다.
덧. 1번 장점이 드러난 사진입니다. 잠시 비오고 난 뒤 흙콘크리트 길과 아스콘 길의 모습입니다. 확연히 다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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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관심있을때 하는 8가지 행동~~
진짜 그런가요?
 

[어사화의 명주실]
고려와 조선시대 최고의 국가 고시였던 문과(대과)에서 ‘갑과(甲科) 제1인’(수석)으로 합격한 것을 장원급제라고 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라졌던 청년이 되돌아 올때는 항상 '장원급제'로 금의환향 하기에 많을 것 같지만, 조선 왕조 500년 사에서 장원급제자는 700여 명에 불과했단다.
임금은 문무과에서 급제한 사람에게 종이꽃을 하사했다. 대과에 합격증서를 받는 예식을 창방의(唱榜儀) 또는 방방의(放榜儀)라고 한다. 대과에 급제했을 경우에는 복두(幞頭), 공복(公服), 야자대(也字帶), 흑화(黑靴), 홀(笏), 어사화(御賜花)를 갖춰야 정복이 된다.
급제자들이 하사받은 어사화는 거리를 행진하는 유가(遊街)에서 선보인다. 어사화 길이는 약 90㎝의 가느다란 참대오리 2개를 종이로 감고, 다홍색·보라색·노랑색 등의 꽃송이를 꿰었다. 어사화 한끝을 복두 뒤에 꽂고, 다른 한끝은 명주실로 잡아매어 머리 위로 휘어 넘겨서 실을 입에 물고 유가를 하였다. 지방출신 급제자는 고향에서도 유가를 했단다.
어사화의 명주실을 입으로 문 이유는 무엇일까? 급제자가 입을 벌리는 순간 우아한 곡선을 이룬 어사화는 튕겨져 나가서 헤벌레 하게 된다. 고로, 지위가 올라가면 품위를 갖추고 입조심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근래, 어사화의 명주실이 그리운 시절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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