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1761년, 프랑스 위틸호의 선장이었던 파르그는
마다가스카르 본섬에서 흑인 노예 60명을
다른 섬으로 데려가 기존보다 더 비싼 가격에
팔아넘길 계획을 세웠습니다.

당시 해당 지역에서는 노예무역을 금지하고 있어
파르그 선장은 해상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정규 항해 노선이 아닌 북쪽으로 돌아가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선원들은 그 경로는 돌풍 때문에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돈에 눈이 멀었던 선장은
의견을 무시하고 항해를 강행했습니다.

결국, 위틸호는 작은 섬의 암초에 난파되는데
길이 2킬로미터, 너비 800미터의 이 작은 섬은
야자나무 몇 그루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황량한 모래섬은 10월~5월까지 주기적으로
위력적인 사이클론이 불어오는 데다가
땔감으로 쓸만한 큰 나무도 없어 생존이
위태로운 곳이었습니다.

생존자들은 배의 잔해로 작은 배를 만들었습니다.
두 달 뒤, 완성된 배에 빼곡히 올라탄 프랑스 선원들은
흑인 노예들에게 구조선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그곳을 떠나 버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생존자들은 남쪽 해안에 분포된 돌을 가져와
두꺼운 벽을 쌓아 집을 만들어서
강력한 폭풍을 피했습니다.

그들은 난파선의 돛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고
난파선의 목재로는 지붕을 만들고 불을 피웠는데
이 불은 그들이 이 섬을 떠나기 전까지
꺼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식수를 구하기 위해
땅을 파서 우물을 만들었으며 탈출선을 만들기 위한
대장간도 따로 만들었습니다.

식량으로는 주로 거북이와 새, 물고기 등을
잡아먹으며 살았는데 놀랍게도 이들 사이에선
폭력이나 식인으로 인해 사망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거나,
인간답게 살아가는 존엄을 포기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1776년 코르벳함 라도팽호의 선원들에게 발견되어
섬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60명의 흑인 노예 가운데 섬에 남은 사람은
일곱 명의 여자, 아직 젖도 떼지 못한
갓난아이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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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따스해지는 순간,
문선희 성우가 전하는 따뜻한 감성 편지!

고된 일상에 위로와 공감이 되고,
사랑과 응원으로 힘이 되는, 달콤하고 따스한 이야기를
따뜻한 하루 유튜브를 통해서
다시 들어보세요.


= 따스한 이야기를 유튜브에서 만나보세요 =

 

뇌가 힘들 땐 아파트를 한바퀴 산책하는 것도 괜찮은데

뇌가 힘들 땐 미술관에 가는 게 좋다



뉴욕에 사는 한 알츠하이머 환자는
젊은 시절 즐겨 듣던 곡들로 짠 플레이리스트를 듣고서
잊었던 아들을 5년 만에 알아보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걸까요?

뇌과학자들은 빛과 소리가
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알츠하이머를 앓는 뇌에
'빛'과 '소리'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쥐를
하루 한 시간 빛에 노출했더니
알츠하이머를 일으키는 아밀로이드 펩티드가
현저히 감소했습니다.

여기에 청각까지 자극해 7일 연속
하루 한 시간씩 쥐들이 정해진 소리를 듣도록 하자,
뇌에서 소리를 처리하는 영역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는 해마에서도 알츠하이머를 일으키는
베타 아밀로이드의 양이 극적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심지어 이 쥐들은 인지력도 눈에 띄게 높아져
미로에 들어갔을 때 길을 더 잘
찾아내기까지 했습니다.

눈과 귀,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는 예술 활동은
건강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칩니다.
병을 떨쳐내 건강을 되찾게 하고,
스트레스 상태에서 벗어나 차분하게 만들고,
슬픔에 빠졌다가도 기쁘게 하고,
나아가 인생을 활짝 꽃 피우게 하는 것입니다.

그림, 춤, 글쓰기, 건축, 연기, 공예...
예술은 그 무엇과도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다시 말해 삶에 예술을 들인다는 건,
건강하고 풍성한, '잘' 사는 인생을 가꾼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가벼운 낙서나 일기 쓰기로 스트레스 해소하기,
나만의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불안 가라앉히기,
일과를 마무리한 후 연극 공연이나 전시회 관람하기 등,
오늘부터 나만의 예술 루틴을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공감 댓글을 남겨주신 가족님 10명을 선정하여,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블룸버그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도서,
'뇌가 힘들 땐 미술관에 가는 게 좋다'를
선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 오늘의 명언
아름다운 것에 가능한 한 많이 감탄하라.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에 충분히 감탄하지 못하고 있다.
- 반 고흐 -
우산을 쓰다



조선시대 개국공신인 '유관(柳寬)'은
높은 벼슬에 올랐지만, 청렴하기로 유명해서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막강한 권력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누구도 정승이 사는 집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울타리 없는 초가집에서 평생 베옷과 짚신으로
청렴한 삶을 살았습니다.

심지어 수레나 말을 쓰지 않고
호미를 들고 채소밭을 돌아다니며 스스로
밭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배우고자 온 학생에게는 늘 평등하게 대하고
성명과 집안도 묻지 않고 제자로
받아주었다고 합니다.

이런 그에게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한 번은 장맛비가 오래 계속되어 방안까지
빗물이 들어올 정도였습니다.

그러자 책을 읽던 유관이
직접 우산을 받치며 빗물을 피했습니다.
그리곤 옆에서 걱정하는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우산도 없는 집은 이런 날
어떻게 견디겠소?"

고려의 공민왕부터 조선의 세종까지
변치 않고 늘 청렴한 유관의 검소한 모습에
왕은 물론 백성들까지 오랫동안
존경했다고 합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청렴하고 낮아지려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가진 것을 뽐내기 위해 그 자리에
오르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힘 있는 사람들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보다 약하고 어려운 사람에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역시 돌이켜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 오늘의 명언
청렴은 백성을 이끄는 자의 본질적 임무요,
모든 선행의 원천이요, 모든 덕행의 근본이다.
– 다산 정약용 –

추억이 있어서 나는 살아갈 것이다



남편과 나는 성당에서 만났다.
그는 수녀가 되려던 나에게 삭발까지 하고 구애를 했다.
처음부터 쉽지 않은 결혼이었다.
변변한 직장이 없던 그를 우리 부모님은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나 나에게 그는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따뜻하고
행복한 일인지 알려준 사람이었다.

따뜻한 봄날, 우리는 결혼했고 곧 영훈이를 낳았다.
이어 둘째 규빈이도 생겼다.
임신 3개월째, 가장 행복해야 할 때
갑자기 남편이 쓰러졌다.

첫 번째 발병이었다.
친정 식구들은 유산을 권했다.
남편 없이 아이들을 키우며 고생할
막내딸을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고집을 부려 규빈이를 낳았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남편이 완쾌 판정을 받은 것이다.
왼쪽 대장을 상당 부분 잘라내고 그 힘들다는
항암 치료를 견디며 남편은 완치되었다.
남편에게 가족은 힘이었고,
버티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암은 또다시 남편을 찾아왔다.
이미 복부 림프절까지 전이되었지만, 그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암은 급속도로 퍼져가고 있었다.
CT 촬영을 하고 병실로 돌아온 남편에게
"힘내"라고 말했지만 그를 위로할 수 없었다.

"아빠! 왜 목소리가 작아?"
"병실이라 그렇지."
"아빠?"
"응, 왜?"
"아파요?"
"아니."
"거짓말, 아프면서..."

남편이 다시 입원한 후 아이들도 뭔가를 느끼는지
부쩍 아빠에게 자주 전화를 한다.
그리고 병원에 갈 때마다 자꾸 우는 규빈이와
나는 약속을 해야 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기.'





지금까지 나는 남편에게 나아질 것이라고만 말했다.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는 상태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남편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와 시동생은 어렵게 입을 떼었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나는 남편을 휠체어에 태우고 병원 복도를 산책했다.
갑자기 남편이 밖으로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
밖엔 너무 춥다고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날씨는 생각보다 따뜻했다. ​
생각해 보니 입원 후 남편은 외출하지 못했다.
이것은 그가 지상에서 만나는 마지막 바람, 햇살이었다.
남편은 천천히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남편은 더 늦기 전 아이들에게 인사를 남기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그의 마지막 인사를 찍게 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정성껏 남편을 단장해 줬다.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내 남편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건넨다.

"고마워."
"뭐가 고마워.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

남편은 씩 웃으며 내 얼굴을
처음 본 사람처럼 만진다.

"화장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이렇게 봐도 예쁘고, 저렇게 봐도 예쁘고.
.
.
미안하다.
너에게 행복을 못 줘서 미안하고,
너에게 짐만 가득 주고 가서 미안하다.
나중에 아이들하고 너무 힘들면...
.
.
재혼해."





어느 날 남편에게 극심한 호흡 곤란이 왔다.
남편의 숨소리가 계속 거칠다. ​

"조금만 힘내. 지금까지 잘해왔잖아. 응?
애들 데리고 올 거야. 눈 떠봐. 응?"

나는 아직 남편의 손을 놓을 수가 없다.
학교에 있던 아이들을 막내 삼촌이 데려왔다.
아이들이 서럽게 운다. 늦기 전에 말해야 한다.

"아빠, 고맙습니다."
"아빠, 사랑해요."

그는 들었을까? 남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남편은 우리 곁을 떠났다.
그를 만나고 사랑하고 부부가 된 지
9년 8개월 만이었다.

남편이 떠난 후 우리의 생활은 여전하다.
아이들은 점점 슬픔을 벗고 명랑해졌다.
나는 아직 아침저녁으로 그가 보냈던 문자를 본다.
생전 그와 나누었던 평범한 메시지가
이렇게 소중한 선물이 될 줄 그때는 몰랐다.

가끔 남편이 있는 곳에 찾아간다.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앞에 가면 눈물이 쏟아진다.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곳이다.

난 아직 그가 사무치게 그립다.
앞으로도 내내 그리울 것이다.
그러나 또 이 추억이 있어서 나는 살아갈 것이다.
그를 떠올리면 그는 언제나 함께 있다.

바람이 불면 그가 내 머리를 쓸며 내 곁에 와 있는 듯하다.
눈을 감고 그에게 말한다.
안녕, 여보.
안녕, 영훈 아빠.


===================================


과거 'MBC 휴먼다큐' 편에 방송됐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사랑 곁에 주렁주렁 조건을 달아놓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잣대로 사랑의 조건을 평가합니다.
무엇이 남을까요?
남는다 한들 남은 것 중 하나라도
진정한 사랑보다 값진 게 있을까요?

곁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곁에 있고 싶기 때문에..
당신이 선택한 그 사람을 다시 한번
돌아봐 주세요.


# 오늘의 명언
부부란 둘이 서로 반씩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서 전체가 되는 것이다.
– 반 고흐 –

 

슈퍼맨 아빠,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53번의 항암치료를 견디며 마지막 순간까지
딸 지우(가명)와 아들 지훈이(가명)의 곁을 지키던
슈퍼맨 아빠 故 김태진 씨를 기억하시나요?

따뜻한 하루는,
누구보다 강하고 따뜻했던 슈퍼맨 아빠,
故 김태진 씨의 마지막 부탁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약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이들을 꾸준히
후원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
염치없지만, 아이들이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만
부디 돌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어느덧 중학교 3학년이 된 지훈이가
따뜻한 하루를 찾아왔습니다.

사실 김태진 씨가 세상을 떠나기
수년 전까지만 해도,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내 문제로 인해 김태진 씨는 이혼을 선택했고
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그때,
복통으로 인해 별생각 없이 찾았던 병원에서
때아닌 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여러 차례 항암치료를 계속했지만
결국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암세포는 삽시간에
김태진 씨의 몸을 잠식해 수술조차 받을 수 없는
4기 암으로 번지고 말았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모진 고통을 감내하며
어떻게든 살아보려 노력했던 슈퍼맨 아빠, 김태진 씨...
그러던 그에게 시한부 선고는 너무나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습니다.

김태진 씨는 따뜻한 하루를 통해서라도
아이들을 향한 아버지로서의 마지막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립할 때까지만 아이들을 보살펴달라 부탁했고,
그렇게 따뜻한 하루는 아이들의 또 다른 슈퍼맨 아빠가
되기로 약속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지훈이는
이제 어느덧 중학교 3학년이 되어 이전과는 달리
제법 의젓한 모습이었습니다.

변성기가 채 지나지 않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하는 지훈이를 보고 있자니,
바르고 의젓하게 잘 자란 지훈이가 너무나
대견하게 느껴졌습니다.

지훈이는 반에서 2등을 차지할 정도로
공부도 착실히 잘하고 있고
무엇보다 제과제빵에 흥미와 소질을 보여
아직 중학생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제빵기능사 자격증도 취득했답니다.

사실 지훈이의 아빠, 김태진 씨도
살아계실 적에 학교 급식실에서 조리사로 일하셨을 정도로
남다른 요리 솜씨와 손재주를 지니고 계셨는데요.
역시 그 유전자는 어디 안 가나 봅니다. ^^

지훈이에게는 아주 든든한 누나가 있는데
누나는 일찌감치 노래에 재능과 흥미를 보여서
현재는 대학교 실용음악과에 다니면서,
열심히 노래도 배우고 아르바이트도 하며 착실히 살고 있답니다.
이제 자기는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으니
자기보다는 동생을 더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오산학교의 시작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인재 양성을 위해
교육에 힘썼던 대표적인 학교인 오산학교.
오산학교를 설립한 남강 이승훈 선생은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였습니다.

평민 출신으로 가난과 차별 속에서 자랐지만
사업 수완이 좋았던 그는 배운 놋그릇 기술을 통해
유기 상회를 만들어 오늘날의 돈으로
약 700억 원의 자본금을 가진
회사로 키웠습니다.

막대한 부를 모은 이승훈 선생은 양반 신분을
돈 주고 사며 부와 명예 모두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우연히 들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연설은
그의 삶을 180도 바꿨습니다.

"나라가 없는데 내 집이 있으면 뭐 하나.
혼을 빼앗겼는데 이 몸이 호의호식하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말을 들은 순간 이승훈 선생은
큰 감명과 함께 교육을 통해 후대를 양성해야
이 나라에 미래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상투를 잘라내며
독립운동에 도움이 되고자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평안도에 오산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평소에도 학생들 중
조국을 광복시킬 영웅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하며 생활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죽기 직전까지도 자기의 유골을 해부해
생리학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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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따스해지는 순간,
문선희 성우가 전하는 따뜻한 감성 편지!

고된 일상에 위로와 공감이 되고,
사랑과 응원으로 힘이 되는, 따스한 이야기를
따뜻한 하루 유튜브를 통해서
다시 들어보세요.


= 따스한 이야기를 유튜브에서 만나보세요 =
 

 

실수해도 괜찮아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며
수많은 실수를 하게 됩니다.

어떤 실수는 큰 대가를 치르게 만들고,
어떤 실수는 시간이 지나 웃으며 넘길 수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크고 작은 실수들은 결국,
우리를 더 신중하고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부모님 세대도 우리와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지금의 자리에 서 계십니다.
그래서 자녀가 실수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자신과 같은 길을 걷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그러한 걱정과 염려는
때로는 자녀의 삶에 지나친 개입이나 과보호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내 자녀들만큼은 나처럼 힘든 길을
겪지 않게 하고 싶은 마음과
더 나은 길을 열어주고 싶은 바람이 오히려 독이 되어,
아이가 스스로 길을 찾을 기회를
막을 수 있습니다.

실수와 실패는 아이가 성장하는데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물감을 풀어 그림을 그리듯
아이의 하루도 매일 새롭게 그려집니다.
"비가 오면 빗방울 소리, 해가 뜨면 반짝이는 햇살"처럼
실수와 배움도 모두 아이의 소중한 색이 됩니다.

아이가 잠시 길을 잃더라도
스스로 방향을 찾도록 지켜봐 주세요.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의 마음속에는
실패도 껴안을 수 있는 용기와
그 안에서 피어나는 지혜도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우리는 많은 실수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실수들은 결국 새로워지고 창조적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 스티브 잡스 –

사랑으로 온전히 채워주자



가족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되어도 사랑을 나누는 사람과 함께 라면
그것만으로도 힘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선택 앞에 선 가족들에게는
'가족'이라는 단어는 상처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이혼 후, 가족 구성원들은 종종 자신을
결핍된 존재처럼 느끼게 됩니다.
부모 중 한 사람의 부재가
마치 그 사람 자체의 결핍처럼 여겨지는
사회적 인식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선은 이혼을 겪은 자녀들에게,
특히 청소년기에 있는 자녀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자녀는 부모의 갈등과 이별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끼며,
자신을 탓하게 됩니다.

"내가 좀 더 잘했더라면..."
"내가 뭔가 할 수 있었더라면..."

자녀들의 이러한 생각은
마음에 죄책감과 좌절감을 남기게 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물론 이혼 후, 자녀에 대한 부모의 역할이
온전하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한 구성원의 결핍보다
사랑의 결핍이 더 큰 문제입니다.

상실감을 다른 무언가로 채우려 애쓰기보다는
그 자리를 더 큰 사랑으로 채워간다면
지금의 모습도 충분히 온전한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가족의 모습은 예전보다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하지만, 네모난 사랑 세모난 사랑이 있는 것처럼
그 안에 사랑으로 온전히 채워져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내 안에 결핍만 바라보지 말고,
남아 있는 사랑을 지켜보고 키워가는 것이
진짜 '가족'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오늘의 명언
이 세상에 태어나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멋진 일은 가족의 사랑을 배우는 것이다.
- 조지 맥도널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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