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도 뉴스를 장식하는 권력자들의 변명을 듣다 보면 심리학 책의 첫 페이지가 떠오른다. '더닝-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 능력이 없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실력을 과대평가하고, 근거 없는 맹신에 빠져 타인의 경고를 무시하는 환장할 인지 편향 현상.
이 병증이 동네 술자리에서 발병하면 그저 귀여운 '허세'로 끝나지만, 국가의 운전대를 잡은 권력자나 엘리트 집단이 이 병에 단체로 감염되면 작게는 수백만 명, 많게는 수천만의 인생이 잿더미로 변한다.
자신의 얄팍한 직관을 맹신하다가, 인류 전쟁사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기괴한 방식으로 섬하나를 통째로 헌납한 84년 전의 블랙코미디 한 편을 들여다보자.
1942년, 영국군 사령관 아서 퍼시벌이 감독하고 주연한 '싱가포르 대참사'다.
당시 싱가포르는 대영제국의 자존심이자 '동양의 지브롤터'라 불리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영국군 사령관 아서 퍼시벌 중장에게는 최신 무기로 무장한 무려 8만 5천 명의 대군이 있었다. 반면 싱가포르를 노리던 일본군(야마시타 도모유키)은 식량도, 트럭도 바닥난 채 정글을 헤매는 3만 명의 거지 떼에 불과했다. 엑셀 표의 데이터만 보면 영국군이 눈을 감고 싸워도 이기는 게임이었다.
문제는 영국군 사령관의 머릿속에 들어찬 오만함과 '뇌피셜'이었다.
정보 장교들과 공병대 전문가들이 경고했다. "장군님, 일본군이 바다가 아니라 북쪽 정글을 뚫고 내려오고 있습니다. 당장 북쪽 해안에 콘크리트 방어벽과 참호를 파야 합니다!"
여기서 퍼시벌은 역사에 길이 남을 기적의 멘트를 뱉어낸다.
"방어벽 뒤에 숨는 것은 병사들의 사기(Morale)에 아주 좋지 않다. 영국군은 당당하게 맞서 싸운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군인들의 목숨을 지킬 최소한의 방파제를 짓자는데, "가오가 떨어져서 안 된다"며 공사를 중단시킨 것이다. 거기에 한술 더 떠, 그는 확증편향의 끝을 보여준다. "동양인들은 유전적으로 시력이 나빠서 밤에 정글을 통과하지 못한다. 놈들은 절대 육로로 오지 못해!"
이 위대한 엘리트의 뇌피셜은 불과 며칠 뒤, 아주 촌스럽고도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박살이 난다.
일본군은 트럭이 모자라자, 말레이시아 원주민들에게서 훔친 수천 대의 낡은 '자전거'를 타고 정글을 뚫고 내려왔다. 펑크 난 고무타이어를 뜯어내고 맨 철제 휠로 비포장도로를 달리니, 수천 대의 자전거 휠이 바닥에 부딪히며 엄청난 쇳소리를 냈다. "찌르르릉, 덜컹덜컹!"
정글 속에서 그 기괴한 쇳소리가 울려 퍼지자, 방어벽 하나 없이 맨몸으로 서 있던 영국군 지휘부는 완벽한 패닉에 빠졌다.
"맙소사! 놈들이 수백 대의 장갑차와 탱크 부대를 몰고 온다!"
데이터를 무시하고 환상에 빠져 있던 자들은, 낡은 자전거 체인 소리를 탱크의 굉음으로 착각할 만큼 나약했다. 퍼시벌 사령관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멘탈이 붕괴되었다.
결국 그는 물이 끊기고 보급이 막히자, 8만 5천 명의 멀쩡한 대군을 이끌고 고작 3만 명의 자전거 부대 앞에서 백기를 들었다. 영국 역사상 가장 많은 인원이, 가장 굴욕적으로 항복한 최악의 수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윈스턴 처칠은 "영국 역사상 최악의 재앙이자 최대의 항복"이라며 절망했다.
지도자가 전문가의 경고를 묵살하고 "내가 다 안다"며 똥고집을 부릴 때, 조직은 내부에서부터 부패하고 무너진다. 퍼시벌 사령관이 패배한 이유는 영국군에 총알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진실을 말하는 부하들의 입을 막아버린 지휘관의 오만한 '탁상행정', 그리고 그 얄팍한 '체면'을 지키기 위해 시스템의 기초 공사를 포기해 버린 그 징그러운 나르시시즘이 싱가포르의 성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뉴스를 통해 퍼시벌 사령관의 훌륭한 환생들을 목격하고 있다. 시중에 현금을 마구잡이로 풀어대면서 동시에 환율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우기는 기적의 경제학. 그것은 마치 중력을 거스르고 물건을 위로 떨어뜨리겠다는 수준의 오만함이다.
어디 그뿐인가. 단기 보충역출신 국방장관이, 최전선에서 평생 흙먼지를 마시며 뼈가 굵은 실전 부대 대대장들을 앉혀놓고 '군인 정신'을 훈계하는 이 기괴하고 낯뜨거운 코미디.
경제를 모르는 자가 금고 열쇠를 쥐고, 안보를 모르는 자가 지휘봉을 휘두를 때 국가는 어떻게 되는가. 명백한 통계와 물리 법칙 앞에서도 "내 기조가 옳다"며 체면을 차리는 2026년의 수많은 퍼시벌 사령관들.
그들의 알량한 자존심 지키기와 뇌피셜이 계속되는 한, 이 나라의 시스템은 결국 저 멀리서 들려오는 낡은 자전거 쇳소리 하나에도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모래성이 될 수밖에 없음을, 84년 전 싱가포르의 굴욕적인 백기가 서늘하게 증명하고 있다.
[기록]
"Defenses are bad for morale." (방어벽은 사기에 좋지 않다.)
-1941년 말, 일본군의 공격을 앞두고 조호르주 북부 방어 진지 구축을 거부하며 영국군 사령관 아서 퍼시벌 중장이 참모장에게 남긴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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