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종류의 범죄자와 사고뭉치들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주변 사람들의 복장을 가장 심하게 터지게 만드는 부류는, 자신이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를 끝까지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 내지는 '고도의 전략'이었다며 우겨대는 나르시시스트들이다.
대형 보안 사고를 쳐놓고도 "어차피 다 아는 내용이었다"고 뻗대거나, 명백한 실언을 해놓고 "진의가 왜곡됐다"며 메신저를 탓하는 그 징그러운 자기 합리화. 자기가 대형 사고를 쳐놓고도 "내 잘못은 1도 없고, 내가 한 말은 다 옳다"며 뻗대다가, 기어이 거대한 제국을 통째로 멸망시킨 역사상 가장 멍청했던 자백극 하나를 살펴보자. 1917년 1차 세계대전의 판도를 바꾼 독일의 '치머만 전보 사건(Zimmermann Telegram)'이다.
당시 1차 대전의 늪에 빠져있던 독일 제국. 외무장관 아르투르 치머만은 참전을 망설이는 거인 '미국'의 발목을 미 대륙에 묶어둘 기막힌 꼼수를 생각해 낸다. 그는 멕시코 주재 독일 대사에게 1급 비밀 암호 전보를 보냈다.
"멕시코가 미국을 공격해 주면, 우리가 돈도 대주고 나중에 텍사스와 뉴멕시코 땅을 너희에게 주겠다."
이 미친 전보는 중간에 영국 정보부인 Room 40의 도청망에 딱 걸려 해독되었고, 영국은 이를 미국 언론에 시원하게 뿌려버렸다. 미국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
그런데 여기서 독일에게 아주 유리한 변수가 등장한다. 당시 미국 내에는 반전 여론이 강했고, 친독일계 미국인들이 쉴드를 치기 시작한 거다. "이거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영국 놈들의 가짜 뉴스다! 독일이 저런 멍청한 짓을 했을 리 없다!"
실제로 미국 정부조차 이 전보가 진짜인지 완벽하게 증명하기 난감한 상황이었다.
자, 이때 외무장관 치머만이 취해야 할 행동은 딱 하나다. 시치미를 뚝 떼고 "영국의 악의적인 조작이다!"라고 오리발을 내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 알량한 자존심의 화신은 기상천외한 헛발질을 시전한다. 치머만은 굳이 기자회견을 자청하더니, 전 세계 언론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털어놓았다.
"네! 그 전보 제가 보낸 거 맞습니다!"
기자들의 턱이 바닥에 떨어졌다. 치머만은 의기양양하게 궤변을 이어갔다.
"아니, 내가 지금 당장 미국을 치라고 했습니까? 만약 미국이 우리랑 전쟁을 하게 된다면, '조건부'로 멕시코랑 손을 잡겠다는 정당하고 기본적인 외교 플랜 이였을 뿐입니다. 내 정책의 기조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자기가 보낸 극비 전보가 털린 것도 모자라, 변명한답시고 "누구나 알만한 외교 계획"이라며 스스로 스모킹 건에 확인 도장까지 찍어버린 것이다.
그가 던진 이 '적반하장'의 자백은 가짜 뉴스라고 쉴드를 쳐주던 미국 내 우호 세력의 뒤통수마저 시원하게 후려쳤다.
"아니, 진짜로 텍사스를 팔아먹으려 했다고?"
분노한 미국 여론은 완벽하게 하나로 뭉쳤고, 불과 한 달 뒤 미국 의회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날린다. 그리고 다들 아시다싶히 미국의 참전으로 독일 제국은 처참하게 패망하고 만다.
비밀을 유출당한 것보다 더 끔찍한 외교 참사는, 그 잘못을 덮기 위해 뱉어내는 권력자의 '오만한 세 치 혀'다.
보안 의식의 부재를 사과하기는커녕 "어차피 다 아는 내용이었다"며 성질을 내는 누군가를 보고있자니, 1917년 기자회견장에서 "내가 보낸 거 맞는데 그게 뭐 어쩌라고?"라며 뻗대던 치머만 장관이 떠올랐다.
안보는 엑셀 표로 계산하는 것도, 가벼운 스마트폰 자판으로 퉁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입이 무거운 자들만이 유지할 수 있는 차갑고 무거운 '신뢰'의 영역이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궤변으로 포장하며 정신 승리를 시전하는 리더들. 그들의 알량한 자존심과 기조를 지켜주기 위해 이 나라가 치러야 할 외교적 청구서가 얼마나 끔찍할지, 100년 전 독일 제국의 잿더미가 서늘하게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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