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야화 황진이(제22화) - 수목원온실에서

풍류야화 황진이(제22화)

 

 

알록달록한 단풍으로 곱게 갈아입은 묘향산은 단아한 한복으로 차려입은 미인도(美人圖)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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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산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향나무와 측백나무가 많아 싱그러운 향기가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향기를 내뿜어 묘향산이라 했다는 산명(山名)의 유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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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가 아침 안개처럼 피어나는 묘향산으로 가는 진이는 마음이 들떠 있고 보현사에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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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등 팔도유람을 떠나기 전에 이곳에 들려 어머니를 모셔놓고 떠났으며 어느새 5년이란 세월이 훌쩍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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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산엔 비운의 황태자 양녕대군의 얘기도 숨겨져 있으며 양녕은 태종의 장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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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성장하여 일찌감치 왕세자로 책봉되었지만 이상하게 이때부터 말썽을 일으켰고 섹스 스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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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에게 무한 신뢰를 받아 다음 보위가 보장되었으나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어 셋째 충녕(후에 세종)에게로 왕위가 넘어가는 비극의 씨앗이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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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하면 훈민정음이 우리에게 상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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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이 임금이 되고 충녕이 대군으로 끝이 났다면 오늘날 우리가 세계적인 한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자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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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양녕은 왕세자 자리에서 내려와 주류 천하 중 묘향산에 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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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은 동생 세종의 윤허를 얻어 송도를 거쳐 묘향산 유람에 나섰고 여기서 기생 정향(丁香)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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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형제간 우의가 돈독한 세종이 주색(酒色)에 익숙한 형을 배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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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으라 했다던가? 양녕이 정향을 떼어놓고 떠날 때 그녀 치마폭에 쓴 칠언율시(七言律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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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의 이별로 음성 용모 듣고 보지 못하리니/

초대(楚臺) 어느 곳에서 좋은 때를 찾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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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단장한 얼굴 누가 보리오/

잠긴 붉은 낯을 거울만이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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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달이 수 놓은 베게 엿보는 것도 미운데/

새벽바람 무슨 뜻으로 비단 휘장을 걷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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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앞에 다행히도 정향(丁香)나무 서 있는데/

어찌 춘정(春情)으로 굳이 꺾지 않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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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하는 길엔 향기로운 구름 흩어지고/

헤어진 정자엔 조각달이 걸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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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련타 잠 못 이뤄 뒤척이는 밤에/

뉘 다시 그대 수심 위로해 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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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서방님께서 지금 소첩이 노래한 이 시를 알고 계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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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가 설마 이 시를 알고 있으랴는 음성으로 물었고 아니나 다를까 한참이나 뜸을 들인 벽계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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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다! 처음 들어보는 시인데...”라고 미안하고 계면쩍어 하는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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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서방님 그러셨군요? 이 곳 송도 기방계에선 널리 알려진 노래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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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께서 정향이란 기생과 사랑을 나누고 헤어지기 아쉬워 쓰신 칠언율시가 아닌지요?” 진이의 음성에 자신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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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사로 가는 길이 평탄치 않았으며 길마다 낙엽이 떨어져 말발에 치이고 밟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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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나무와 측백나무에서 뿜어 나오는 싱그러운 향기는 어젯밤에 벽계수한테 시달린 육신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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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님은 소첩의 어디가 좋으셔서 이곳까지 오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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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계수는 진이의 물음에 아무 대답이 없었고 말위에서도 능숙하게 거문고를 타며 노래까지 하는 모습에 그만 기가 죽은 듯해 보이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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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말이 끝난지 한참 만에 “나는 지금같은 상황이 생길 것을 예상하지 못했소이다.”라고 말 엉덩이에 채찍을 가해 말이 달리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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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떠들고 갈 길이나 빨리 가자는 태도였으며 말이 달리자 자연스럽게 진이는 거문고를 메고 벽계수 등에 매미처럼 착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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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의 저녁은 일찍 왔고 특히 늦가을 끝자락의 해는 오후가 되자 금방 저물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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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가 4~5년 전에 어머니를 모셔 주지스님과는 안면이 있는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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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스님,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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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예 진이 보살님! 진이 보살님도 그 동안 별일 없으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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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그렇게 예사롭지 않게 인사말에 대꾸하면서도 옆에 있는 벽계수에게 시선이 꽂혔고 보기 드문 헌헌장부에 옥골선풍의 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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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스님 오늘도 하룻밤 묵고 가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나무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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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 드려야지요. 진이 보살님은 우리 절에 특별한 분이시니 언제 오셔도 환영이지요! 4~5년에 쓰셨던 방에 유숙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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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담담하게 하면서도 진이와 벽계수를 번갈아 훑어보았고 예사롭지 않은 관계로 보는 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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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진이 보살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사찰에선 잠자리에선 남녀유별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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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스님의 남녀유별이란 말에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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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주지스님 이 보살 진이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 방에 들어가 짐을 풀고 저녁 예불에 참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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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서둘러 주지스님의 걱정스런 시선을 잠재워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걱정이 없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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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들이 자신을 옆에 두고 밤을 그냥 보내는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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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불타는 사내의 욕정을 채워주어야 하는 것이 여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진이가 갑자기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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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스님은 사미승(沙彌僧)편에 저녁을 보냈고 산채나물과 우엉무침에 감자가 들어있는 보리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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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점심도 거른 저녁상은 꿀맛이고 저녁상이 끝나기가 무섭게 벽계수 표정이 예사롭지 않고 주지스님 방으로 가기 전에 번개방사를 치르자는 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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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위해 한양에서 송도까지 온 사대부의 표상인 벽계수가 진이를 찾은 것은 수준 높은 시의 세계가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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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나는 육체에 끌렸으리라는 생각에 이르자 진이는 사내의 뜨거운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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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저녁상을 윗목으로 밀어놓고 뜨거운 살을 떼어 놓았을 때는 보름달이 산사의 밤을 대낮같이 밝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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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주지스님 방으로 가세요!” 진이가 벽계수 옷매무새를 고쳐주며 등을 떠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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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계수는 욕정을 마음껏 못 채운 표정으로 진이를 다시 한 번 포옹하고 긴 혀를 목구멍까지 넣었다 빼고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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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이 쾅하고 닫혔으며 나가고 싶지 않은데 마지못해 나간다는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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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밖엔 저녁상을 들고 왔던 사미승이 합장을 하고 서 있으며 숨차게 뜨거웠던 방안 풍경을 사미승은 가슴을 조이며 상상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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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밤은 깊어져 접동새 울음소리가 진이의 가슴에 와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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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화에서 계속 -

[출처] 풍류야화 황진이(제22화)|작성자 청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