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달 기나긴 밤에

황진이가 남긴 시조 작품은 6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녀의 문학이 조선조 여류·기녀 문학의 정수로 기려지는 것은, 그녀만의 기발한 이미지와 세련된 언어 구사가 두드러진 것에 힘입은 것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그녀의 작품 중에 가장 절창으로 평가받는 ‘동짓달 기나긴 밤’은 추상적 시간을 구체적 사물로 형상화하여 애틋한 그리움과 사랑을 표현하는 작품이다.

임을 기다리는 여인의 그리움과 기다림이 비유와 심상을 통해 정성스런 시적 호소력으로 다가온다.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이별의 회한을 노래한 이시조는 황진이가 시조의 형식을 완전하게 소화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시로 읽혀진다.

중종때의 문인 양곡 소세양이 그녀의 소문을 듣고 자신은 30일만 같이 살면, 능히 헤어질 수 있으며 추호도 미련을 갖지 않겠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황진이와 한 달 살고 헤어지는 날 황진이가 작별의 한시 ‘봉별소판서세양'을 지어 주자 감동해 애초의 장담을 꺾고 다시 머물렀다고 한다.

봉별소판서세양

달빛 아래 오동잎 모두 지고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구나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흐르는 물은 거문고와 같이 차고

매화는 피리에 서리어 향기로워라.

내일 아침 님 보내고 나면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황진이가 세상을 떠난 때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체로 1567년 무렵을 전후한 것으로 추정하는 모양이다.

 

그녀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유언을 했다는 야담도 전해진다.

“곡을 하지 말고 북과 꽹가리만으로 전송해 달라. 산에 묻지 말고 큰 길에 묻어 달라.

관도 쓰지 말고 동문 밖에 시체를 버려 뭇 버러지 밥이 되게 하여 천하 여자들의 경계를 삼게 하라."

기녀인지라, 그녀의 작품은 주로 연석이나 풍류장에서 지어졌으며 이는 그녀의 작품이 후세에 많이 전해지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녀는 사후에 음란하다는 이유로, 사대부들에게 많은 지탄을 받았고 사대부들에 대한 조롱과 풍자 유혹 등의 행실 등으로 언급이 금기시되었다.

그러나 뛰어난 아름다움과 시재를 갖췄던 그녀의 이야기는 구전으로 연면히 이어졌다.

비록 최하층의 천민 계급인 기녀였지만 황진이가 지녔던 도도한 자부심과 긍지는 기층 민중들에게 전승되면서 공감과 보상을 얻었을 것이다.

황진이가 주류 계급인 사대부들에게 배척을 받은 것은 황진이의 이단성, 진보성, 근대성의 표지로 이해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계급을 뛰어넘어 완고한 조선시대 사회의 도덕률을 조롱하면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가꾸어 갔던 여인이었던 것이다.

2011년, 북한 개성시에서 복원했다는 황진이의 무덤은 개성시 선정리에 있다고 한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홍안은 어디 가고

백골만 묻혔느냐.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서러워하노라.

선조 때의 대 문장가 백호 임제가 서도병마사로 임명이 되어 임지로 가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읊은 노래이다.

그는 이 시조 한 수를 짓고, 무덤에 제사 지냈다가 임지에 부임도 하기 전에 파직당했으며 이 호협한 선비는 황진이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39 살에 죽은 임제는 자식들에게 “제왕을 일컫지 못한 못난 나라에서 태어나 죽는데 슬퍼할 까닭이 없다.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으니 이 당찬 선비의 애도로 그녀는 얼마 만한 위로를 받았을까

- 옮겨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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