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갚은 은주머니 도둑

 

 

 

조범은 뼈대있는 집의 자손이지만 윗대에서

가세가 기울어져 어깨너머 독학으로 근근이

글을 깨우쳐 원주 관아 사령자리를 얻었다.

쥐꼬리만한 녹을 받아서 노모를 모시고 착한

아내와 아들 셋, 딸 하나 일곱 식구가 어렵게

살고 있지만 조범은 천성이 정직하고 성실해

남의 것을 탐하는 법이 없었다.

어느 날 밤새도록 관아에서 일을 하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는데, 발에 차이는 것이 있어서

주워보니 묵직한 비단주머니였다.

비단주머니를 열어본 조사령은 깜짝 놀랐으며

새벽 그믐 달빛에도 눈이 부시도록 번쩍거리는

은덩어리들이 가득했다.

‘이걸 떨어트린 사람은 지금쯤 얼마나 속탈까.’

그는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길가에서 은주머니

주인을 기다렸으며 얼마 후에 기골이 장대하고

수염이 텁수룩한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왔다.

“형씨, 주머니 하나 못 봤소?”

“무슨 색깔이오?”

“노란색 비단 주머니요.”

“기다리고 있었소.”

등뒤에 쥐고 있던 주머니를 돌려주자 잽싸게

낚아챈 남자는 황급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조사령이 집으로 들어가 잠들었는데 누군가

삽짝문을 흔들어 나가보니 주머니를 찾아간

그 사람이었다.

조사령은 주머니 속, 은이 모자란다고 생떼를

쓰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으나, 그는 다짜고짜 조사령의

팔을 잡아끌었다.

“나하고 술 한잔하자”

조사령과 그 남자는 밤길을 한참 걸어서 새벽

장꾼들을 받기 위하여 방금 문을 연 주막으로

들어가 구석방에 마주 앉았다.

뜨끈뜨끈한 막걸리 한 사발을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킨 주머니 주인이 고개를 떨구고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소반에 떨어트렸다.

“나는 도둑이오.”

주머니 주인 말을 듣고 조사령은 깜짝 놀랐으며

또다시 긴장된 침묵이 방을 가득 채웠다.

“보아하니 형씨의 집안도 가난에 찌든것 같은데

어찌하여 은주머니를 갖지 않고, 주인에게 돌려

주려고 한 것이오?”

한동안 말이 없었던 도둑은 목이 메어서 자기는

소 돼지보다 못한 놈이라며 황첨지 집에서 훔친

은주머니를 되돌려 주려고 하는데, 함께 가자고

조사령에게 동행을 부탁했다.

아침에 못보던 남정네 둘을 맞아 헛기침만 하는

천석꾼 부자 황첨지에게, 도둑이 눈물을 흘리며

자초지종을 모두 털어놓았다.

도둑이 울면서 황첨지 앞에 은주머니를 내밀자

황첨지가 큰 기침을 하더니 도둑에게 말했다.

“나는 도둑맞은 적이 없소. 그 은주머니는 나의

것이 아니오.”

홍첨지의 말에 도둑도 놀라고 조사령도 놀랐다.

“분명히 지난밤 삼경 녘에 제가 어르신 댁으로

들어와 다락 속에서 훔쳤습니다.”

“어허 참, 나는 은주머니를 거기 둔 적이 없소.”

한참을 서로 옥신각신 하다가 도둑과 조사령은

쫓겨나다시피 황첨지의 집에서 나왔다.

이번엔 다시 길에서 두사람이 서로 은주머니를

떠넘기며 목소리를 높였고, 결국엔 은주머니를

도둑이 가져갔다.

어느듯 십년의 세월이 흘러갔으며, 다리를 다쳐

관아에서 나온 조범은 화전 밭뙈기 농사로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있었다.

황첨지는 늦게 본 외동 아들이 투전판에 빠져서

집까지 모두 날리자 문중 제실 방한칸에 처박혀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새해 첫날 설날에 허우대가 멀쩡한

장부가 비단 두루마기를 입고, 고리짝을 짊어진

하인 일곱을 거느리고, 황첨지께 세배를 왔으며

은주머니 도둑이 거상이 되어 찾아온 것이다.

그는 보름 동안 원주에 머물면서 황첨지가 살던

집과 남의 손으로 넘어간 문전옥답을 모두 찾아

주었고 그 때의 조사령, 조범에게는 쉰마지기의

옥답과 번듯한 기와집을 마련해 주었다.

마지막 날 세사람이 술자리를 함께한 자리에서

흐느끼며 쉼없이 눈물을 떨구는 것은 황첨지와

조범이었다.

- 옮겨온글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