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가면 육신사라는 곳이 나온다


이곳 육신사는

충절의 일편단심이 느껴지는곳 두 군주를 모시길 거부한 충신의 정절이 느껴지는 곳이다


육신사, 대구광역사 달성군 하빈면 묘리 628
육신사는 조선 세조 때 사육신으로 일컫는 박팽년.성삼문.이개.유성원.하위지.유응부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처음 사당을 지을 때는 충정공 박팽년 선생만을 그 후손들이 모셔 제사지냈으나, 선생의 현손인 박계창이 선생의 제삿날 사육신이 함께 사당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뒤부터 나머지 분들의 음식도 장만하여 함께 제사지냈다고 한다. 그 뒤 하빈사를 지어 이들에게 제사지내다가, 1691년(숙종 17) 낙빈서원을 지어 이들을 봉안하고 제사지냈다. 1866년(고종 3) 서원철폐령으로 낙빈서원이 철폐되자 제사를 지내지 않다가 유림들에 의해 그 자리에 사당을 세워 다시 사육신을 봉안해 왔다. 그 뒤 1974~1975년 사이에 '충효위인 유적화사업'에 의해 지금의 육신사를 건립하였다. <출처:달성군청>














대구광역사 달성군 하빈면 묘리 육신사 주변에는 삼가헌이라는 마을 이 있다 이곳 삼가헌은 낙동강 동안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로 사육신 중 한명인 박팽년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묘골마을이라는 순천박씨 집성촌이다. 박팽년 후손은 단종복위를 꽤하다 죽은 사육신 가운데 유일하게 후손이 살아남은 가문으로 사육신이 복권되면서 조선후기에는 관직에도 많이 진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은 낙동강 동안에 자리잡은 달성군 하빈면에서도 양반들이 모여살았던 마을로 상당한 수준의 경제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달성 삼가헌, 달성군 하빈면 묘리 800
달성 삼가헌은 1769년 충정공 박팽년의 11대손인 삼가헌 박성수가 현재의 정침터에 지은 살림집이다. 이 건물은 처음에는 초가였으나 그의 아들인 박광석이 이를 헐고 1809년에 안채를, 18년 후에 새로 사랑채를 지었다. 1874년에는 박광석의 손자인 박규현이 파산서당으로 사용하던 건물에 누마루를 부설하여 별당채를 짓고 '하엽정'이라는 현판을 달았는데, 하엽정과 어우러져 운치를 더하는 연당 역시 이 때 만들어진 것이다. 사랑채의 당호인 삼가헌의 유래는 건물 내부 벽에 걸린 '상가헌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삼가'란 천하와 국가를 바르게 할 수 있고, 벼슬과 녹봉을 사양할 수 있으며, 날카로운 칼날을 밟을 수 있다'는 뜻이다. <출처:달성군청>

나라에 반역죄를 범하면 일가 친족을 몰사하는 제도가 있어 다른 이의 일가 친족은 모두 죽었지만 유독 박팽년의 후손만 살아 남은듯 하다.

세조 4 2 6 7
박팽년(朴彭年) 이미 공초(供招) 자복하여 옥중에서 죽으니,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박팽년·유성원(柳誠源허조() 등이 지난해 겨울부터 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성승(成勝유응부(兪應孚권자신(權自愼) 함께 당파를 맺어 반역을 도모하였으니, 죄가 능지 처사(凌遲處死) 해당합니다. 청컨대 허조·박팽년·유성원의 시체를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매어 사방으로 잡아당겨 찢어죽이는 형벌인) 거열(車裂 )하고, 목을 베어 효수(梟首)하고, 시체를 팔도에 ()하여 보일 것이며, 재산을 몰수하고, 연좌된 자들도 아울러 율문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세조가) 명하기를,
"
친자식(親子息)들은 모조리 (목을 졸라 죽이는 형벌인) 교형(絞刑) 처하고, 어미와 ·처첩(妻妾조손(祖孫형제(兄弟자매(姉妹) 아들의 처첩 등은 극변(極邊) 잔읍(殘邑) 노비(奴婢) 영구히 소속시키고, ·숙부(伯叔父) 형제의 자식들은 지방의 잔읍(殘邑) 노비로 영원히 소속시키고,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세조 5 2 9 7
세조 박팽년(朴彭年) 아내 옥금(玉今), 김승규(金承珪) 아내 내은비(內隱非 내은금(內隱今첩의 한금(閑今)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에게 주고…… 성삼문(成三問) 아내 차산(次山 효옥(孝玉), 이승로(李承老) 누이 자근아지(者斤阿只) 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주고……


 묘골마을 안쪽에 위치한 육신사는 세조 때 사육신인 여섯분을 모시는 사당으로 원래는 인근에 있던 낙빈서원내 있던 하빈사에서 모셨는데 대원군의 서월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70년대 전국적으로 실시된 '충효위인 유적화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원래 하빈사에는 박팽년만을 모셨으나 다른 사육신들은 후손이 없었기때문에 같이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충무공을 모신 아산 현충사와 비슷한 성격의 사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육신사는 문화재로서는 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으나, 역사적인 인물인 사육신을 모신 사당이라는데 의의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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