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샹송 / 이수익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 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풀잎되어 젖어 있는
비애를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으로
돌아올까
우체국에 오는 사람은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
그 꽃들은 바람에
얼굴이 터져 웃고 있는데
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얼굴을 다치면서라도 소리내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사람들은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 위에
애정의 핀을 꽂고 돌아들 간다
그 때 그들 머리 위에서는
꽃불처럼 밝은 빛이 잠시 어리는데
그것은 저려오는 내 발등 위에
행복에 찬 글씨를 써서 보이는데
나는 자꾸만 어두워져서
읽질 못하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 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기진한 발걸음이 다시
도어를 노크하면
그 때 나는 어떤 미소를 띠어
돌아온 사랑을 맞이할까
그리운 악마 / 이수익
숨겨둔 정부(情婦) 하나
있으면 좋겠다
몰래 나 홀로 찾아드는
외진 골목길 끝, 그 집
불 밝은 창문
그리운 우리 둘 사이
숨막히는 암호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아무도 눈치 못 채는
비밀 사랑,
둘만이 나눠 마시는 죄의 달디단
축배(祝杯) 끝에
싱그러운 젊은 심장의 피가 뛴다면!
찾아가는 발길의 고통스런 기쁨이
만나면 곧 헤어져야 할 아픔으로
끝내 우리
침묵해야 할지라도,
숨겨 둔 정부(情婦) 하나
있으면 좋겠다.
머언 기다림이 하루 종일 전류처럼 흘러
끝없이 나를 충전시키는 여자,
그
악마 같은 여자
승천昇天 / 이수익
내 목소리가
저 물소리의 벽을 깨고 나아가
하늘로 힘껏 솟구쳐 올라야만 한다
소리로써 마침내 소리를 이기려고
가인歌人은
심산유곡 폭포수 아래에서 날마다
목청에 핏물 어리도록 발성을 연습하지만
열 길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쉽게 그의 목소리를 덮쳐
계곡을 가득 물소리 하나로만 채워버린다
그래도 그는 날이면 날마다
산에 올라
제 목소리가 물소리를 뛰어넘기를 수없이 기도企圖하지만
한 번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는
폭포는
준엄한 스승처럼 곧추 앉아
수직의 말씀만 내리실 뿐이다
끝내
절망의 유복자를 안고 하산下山한 그가
발길 닿는 대로 정처없이 마을과 마을을 흘러 다니면서
소리의 승천昇天을 이루지 못한 제 한恨을 토해냈을 때
그 핏빛 소리에 취한 사람들이
그를 일러
참으로 하늘이 내리신 소리꾼이라 하더라
견인되다 / 이수익
공중을
높이 날기 위해서는
바람 속에 부대끼며 뿌려야 할
수많은 열량들이 그 가슴에
늘 충전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보라,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들은
노래로서 그들의 평화를 구가하지만
그 조그만 몸의 내부의 장기들은
모터처럼 계속 움직이면서
순간의 비상이륙을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오, 하얀 달걀처럼 따스한 네 몸이 품어야 하는
깃털 속의 슬픈 두근거림이여.
(이수익·시인, 1942-)
견인차가
불법주차 승용차 한 대를 끌고 불이 난 듯
급하게 달려간다.
앞 범퍼가 견인차 후미에 덜컹, 얹힌
승용차는
제 주인에게 피랍 사실을 알리지도 못한 채
어디론가 행방이 감춰지고 있다.
죄를 지었으므로
체신은 볼품없이 구겨졌으면서도
두 손이 단단하게 결박당한 채
견인차가 가자는대로
가고 있다.
내 죽은 다음
저승사자가 내 생애의 죄를 물어 저렇게
유계(幽界)의 사방천지를 끌고 다닌다면,
어쩌지?
꼼짝없이 사지를 포박당한 채.
하긴 살아서도 지금까지 영문도 모른 채
어디론가, 어디론가
끌려오긴 했지만.
시집 <꽃나무 아래의 키스> 천년의시작. 2007
열애 / 이수익
때로 사랑은 흘낏/
곁눈질도 하고 싶지/
남몰래 외도도 즐기고 싶지/
어찌 그리 평생 붙박이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나// 마주 서 있음만으로도/
그윽이 바라보는 눈길만으로도/
저리 마음 들뜨고 온몸 달아올라/
절로 열매 맺는/
나무여, 나무여, 은행나무여//
가을부터 내년 봄 올 때까지/
추운 겨울 내내/
서로 눈 감고 돌아서 있을 동안/
보고픈 마음일랑 어찌 하느냐고/
네 노란 연애편지 같은 잎사귀들만/
마구 뿌려대는/
아, 지금은 가을이다.
그래, 네 눈물이다.
- 시집 『꽃나무 아래의 키스』(천년의 시작,2007)
낙과(落果)의 이유 / 이수익
사과 한 알의 무게 중심이
오래 준비하고 있었던 듯, 그때야 떨어져
내린다
땅의 거친 표면이 그 순간 순해져서
붉고 푸른 사과 한 알과의 만남을 너무나도 기쁘게 생각하며
이를
받아들인다.
땅은 이미 오래전부터
낙과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사과가 자라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그 빛깔과 향기를
몰래 지켜보면서, 꽃과 벌의 나타남과 사라지는 때를 기억하면서,
해와 달과 별빛, 구름의 운행을 떠올리면서
언젠가는 사과가 제 몫을 다해 지상으로 떨어져 갈 날을 곰곰
가슴에 새기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과가
고요히 떨어진다.
온몸 가득히 펼쳐지던 지상의 복된 시간과
눈물 나게도 그리운 정든 분위기와 마지막 이별의 공감이
차마 아쉬운 듯
한 알의 그리움이 떨어진다.
이 땅에,
한 알의 축복이 떨어진다.
유리의 기억 / 이수익
뜨겁고도 차디찬 불길이
솟아올랐다.
나는 저 지옥 같은 화염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한다.
나는 오로지 새롭게 태어나야 함으로서
정결하게 옷가지들을 벗은 채
최후의
불의 심장을 향하여
황홀하게도 떨어져 죽을 각오가 되어 있으므로
나는
초주검의 변경을 거슬러서 떠나온 사내답게
늠름히 어둠과
맞서리라.
차디찬 기억의 저편에서
투명하게 얼음처럼 빛나고 있는
오!
유리 한 장
다락방 / 이수익
혼자만의 공기를 쉼 없이 들이킬 수
있는, 마디마디 뼛속을 깨끗하게 비울 수
있는, 타인들을 멀리하고 오로지 자신만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바로 그런 곳
그런 자리
그런 분위기
속으로
나를 눕히고 싶어.
아무도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
텅 빈 고요만이 물결치는 숨겨진 조그만 방,
그 다락방의 은밀한 초대에
가득히 누워
온전하게 나는
새로워지고 싶어.
떠오르는 비행기처럼 나는 훨훨 날아갈 거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행복한 사탕을 오래오래 빨면서,
머나먼 우주의 끝을 따라 날거야.
다락방, 언제라도 나를 눕히고 싶은
환상의
그곳.
성게 /이수익
뾰족뾰족 성게는 살아 있어
나는
숨죽인다,닿으면 화를 입을 까봐
첨예하게
움츠린다
적을 향해
야행성처럼 어둠 속으로 길게 뻗어 나간
끝없는 너의
살의가
반쯤 쪼개진 두개골을 어루 만지면서
파먹을 때의 여리디 여린
샛노란 알들의
그 맛은
최상과 최하를 하나로 묶어주는
지극한 묘미
성게,
달콤한 각성이 불타오르고 있는
내 혀의
끄트머리
<문학선>2016년 가을호
엄마가 들어 있다 / 이수익
보자기 속엔
엄마가 들어 있다
가만히 들어앉아 엄마는
네가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지, 라고
말씀하신다
바로 그때 보자기 속에 숨겨진 엄마의 귀는
빠르고 정확하게 나의 방문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보자기 속에 숨겨진 엄마의
손은 두껍고 큼지막해서 무엇이든
잘 뒤지신다, 내가 벗어놓은 옷가지와 몇 가지의
폐물, 가슴 설레는 어릴 적 예쁜 사진들이
엄마에겐 꼭꼭 감춰둔 비밀이 되어 있다
가끔씩 엄마를 만나러 간다
내가 보자기를 풀면
거기,
젊은 날 엄마가 나오신다
문태준 엮음 <가만히 사랑을 보다> 중
이수익의 시 '엄마가 들어 있다' 전문
이륙 / 이수익
캄캄히 멀어져 갈 때가 있었지
본인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지, 어느 순간
기폭제처럼 떠올라 그 이름 환히 빛날 때가 있었지
또 다른 대륙을 향해 가득히 무릎 꿇고 빌어보던
그 최초, 이륙의 시간
죽음처럼 피어오르던 유황불 타는 냄새 속으로
당신은 초고속 발진의 페달을 밟았던 거야
극소수의 사람만이 선택받은 레이스 위에 당신은
은빛 타오르는 융단의 구름을 밟고 서서, 끝없이
펼쳐진 녹색 산야와 푸른 바다, 강들을 음미하고 있었어
그것이 처음이었고
이젠 마지막이야, 마지막은
다소 우울하지만 그렇지만 지켜볼 만해
당신에게는 이륙이란 늘 처음 있는 일이니까
한 잔의 기쁨 위에 / 이수익
초봄에는
가만히 앉았어도 왠지 눈물겹다
봄풀이 돋아나도 그렇고
강물이 풀려도 그렇다
말없이 서러운 것들
제가끔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는 이 길목의 하루는
반가움에 온몸이 젖어
덩실덩실 일어나 춤이라도 추고 싶다
바람같은 언덕을 달리고 싶다
오오, 환생하는 것들
어리면 어릴수록
약하면 약할수록나를 더욱 설레이게 하는
만남의 희열이여, 무한 축복이여
초봄에는
가만히 앉았어도 왠지 눈물겹다
한 잔의 기쁨 위에또 한 잔의 슬픔처럼
나보다 더 시인 같은 /이수익
2016년 3월16일
집사람과 아들 며느리가 함께
가평으로 가고 있는데
자가용 윈도부러쉬에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세살 먹은 손녀가 하는 말이
기막힙니다
“온세상이 구름에 가려져서
큰 빗자루로 쓸어 버려야 겠어”
정말 나보다 더 시인 같은
우리집
손녀
-시집<침묵의 여울>(황금알)중
달빛체질 / 이수익
내 조상은 뜨겁고 부신
태양체질이 아니었다. 내 조상은
뒤안처럼 아늑하고
조용한
달의 숭배자이다
그는 달빛그림자를 밟고 뛰어 놀았으며
밝은 달빛 머리에 받아 글을 읽고
자라서는, 먼 장터에서
달빛과 더불어 집으로 돌아왔다.
낮은
이 포근한 그리움
이 크나큰 기쁨과 만나는
힘겨운 과정일 뿐이다
일생이 달의 자양속에
갇히기를 원했던 내 조상의 ?빛 체질은
지금
내 몸 안에 피가 되어 돌고 있다
밤하늘에 떠오르는 달만 보면
왠지 가슴이 멍해져서
끝없이 야행의 길을 더듬고 싶은 나는
아, 그것은 모태의 태반처럼 멀리서도
나를 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보이지 않는 인력이 바닷물을 끌듯이
- 이수익 시집 『 꽃나무 아래의 키스 』 2007
또 다른 생각 / 이수익
뭉개지는 것도 방법이다.
세상을 사는 데에는
내가 각을 지움으로써 너를 편안하게
해줄 수도 있다. 선창에서
기름때 묻은 배끼리 서로 부딪치듯이
부딪쳐서 조금 상하고 조금 얼룩도 생기듯이
그렇게, 내 침이 묻은 술잔을 네가 받아 마시듯이
자, 자, 잔소리 그만하고 어서 술이나 마셔!
취한 기분에 붙들려 소리를 버럭 내지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시간도 참으로 소중하고
그래서는 안 되는 관계도 소중하다.
시퍼렇게 가슴에 날을 세우고
찌를 듯이 정신에 각을 일으켜
스스로 타인 절대출입금지 구역을 만들어 내는 일
그리하여 이 세상을 배신하고 모반하는 일은
네게는 매우 소중한 덕목이다.
안락한 일상의 유혹을 경계하고 저주하라, 그대
불행한 시인이여.
5월나무처럼 /이수익
사춘기 소년소녀들처럼 그렇게
뿜는 힘 도도하고
하늘로 솟을 듯 즐겁고 당당해,
세상이 마치 저희들 것처럼
그 나무들 바라보며
차츰 엽맥들 무성하게 피어나면
내 눈엔 띄지 않을 그들만의 비밀세계
나는 생각하네,
내게도 아름다웠던
지나온 길들을....
=이수익, 5월나무처럼 중에서-
봄에 앓는 병 / 이수익
모진 마음으로 참고 너를 기다릴 때는
괜찮았느니라.
눈물이 뜨겁듯이
내 마음도 뜨거워서
엄동설한 찬바람에도 나는
추위를 모르고 지냈느니라.
오로지
우리들의 해후만을 기다리면서......
늦게서야 病이 도지는구나
그토록 기다리던 너는 눈부신 꽃으로 現身하여
지금
나의 사방에 가득했는데
아아 이 즐거운 시절
나는 누워서
지난 겨울의 아픔을 병으로 앓고 있노라
별이 뜨는 이유 / 이수익
오늘 하루 투망도
헛일이다
바다 물고기 들은 죄다
그물을 뜯어 놓고 달아나고
허무의 어구를 싣고 돌아오는 슬픈 귀향길엔
눈물 같은 황혼만
가득 내렸다
어제도 그러했지
내일 또한 그러하리라…
하늘엔 오늘 밤에도
검은 관 하나를 짜려는 듯
반짝 반짝 쇠못 같은 별 들이 뜬다
비밀 / 이수익
내가 눈 감고
죽을 때까지
그대에게 말하지 않고 지켜갈
비밀이 있다면
아마
그럴지 몰라, 그대 또한 내게
말할 수 없는 비밀 하나쯤
꼭꼭 숨겨 두었는지
가끔씩 모올래 꺼내
살며시 만져보고 들여다보는
密封의 과거
오랜 세월 가도 변함없이
생생히 살아 있는
그 피빛 젊은 날의 흔적
불면 꺼질 듯
꺼지면 다시 피어날 듯
안개처럼 자욱이 서려 있는
꽃.
하나로는 제 모습을 떠올릴 수 없는
무엇이라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그런 막연한 안타까움으로 빛깔진
初戀의
꽃.
무데기로
무데기로 어우러져야만 비로소 形象이 되어
설레는 느낌이 되어 다가오는 그것은
아,
우리 처음 만나던 날 가슴에 피어오르던
바로 그
꽃.
―‘안개꽃’ 전문
-시집 <꽃나무 아래의 키스> 천년의 시작 ,2007
편 지 /이수익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것은
밤새 꽃망울을 벙글인
새벽
백목련처럼
눈부신 몸짓으로 내게로 와 있는
아,
말없는 무수한 발언이여
백색 찬란한 빛깔이여
존재여!
오늘은 내 오랜 눈물겨운 기다림 끝에
너의 편지를 받는다.
(이수익·시인, 1942-)
안개꽃 / 이수익
불면 꺼질듯
꺼져서는 다시 피어날듯
안개처럼 자욱이 서려있는 꽃
하나로는 제 모습을
떠올릴 수 없는
무어라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그런 막연한 안타까움으로
빛깔진 초련(初戀)의 꽃
무데기로
무데기로 어우러져야만
비로소 형상이 되어
설레는 느낌이 되어
다가오는 그것은
아,
우리 처음 만나던 날
가슴에 피어오르던
바로 그 꽃
- 시집 『슬픔의 핵』(고려원,1983)
밀려와서, 흠흠 / 이수익
저기 흐르는 물살은
오늘 처음인 듯 내게는 눈부신
광채를 주룩주룩 흘리며
어두운 곳에서 방금 핀
무수한 아름다운 소란을 던지고 있으니
오, 언제
하얀 찬물의 설레임을 너는 맡은 것이냐
어제까지만해도 울퉁불퉁한
폐허를 드러내던 황막한 땅은
지금 금싸라기 같은 물보라만이
밀려와서, 흠흠
거듭 밀려와서
밥보다 더 큰 슬픔 / 이수익
크낙하게 슬픈 일을 당하고서도
굶지 못하고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는 일이,
슬픔일랑 잠시 밀쳐두고 밥을 삼켜야 하는 일이,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밥을 씹어야 하는
저 생의 본능이,
상주에게도, 중환자에게도, 또는 그 가족에게도
밥덩이보다 더 큰 슬픔이 우리에게 어디 있느냐고
구절초 / 이수익
저 꽃잎이며 잎새들
퇴색으로 무너지는 가을 들판
저만 홀로 하얀 소복으로 서 있는
구절초
죽은 내 친구 마누라쯤 되나 ?
마주대하기 난감한 그 꽃들
새하얀 슬픔으로 정장한 채
눈물나는 이 계절의 문간 앞에 서서
고개 수그리며 날 마중하는,
아,
꼭 그런 문상길 같은
어느 늦가을 아침.
연꽃 / 이수익 -
아수라의 늪에서
오만 번뇌의 진탕에서
무슨
저런 꽃이 피지요?
칠흑 어둠을 먹고
스스로 불사른 듯 화안히
피어오른 꽃.
열 번 백번 어리석다,
내 생의 부끄러움을 한탄케하는
죽어서 비로소 꽃이 된 꽃.
유리의 기억 / 이수익
뜨겁고도 차디찬 불길이
솟아올랐다
나는 저 지옥 같은 화염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한다
나는 오로지 새롭게 태어나야 함으로써
정결하게 옷가지들을 벗은 채
최후의
불의 심장을 향하여
황홀하게도 떨어져 죽을 각오가 되어 있음으로
나는 초죽음의 변경을 거슬러서 떠나온 사내답게
늠름히 어둠과
맞서리라
차디찬 기억의 저 편에서
투명하게 얼음처럼 빛나고 있는
오!
유리 한 장
- <현대시학> 2016년 3월호 –
붉은 고지 / 이수익
우뚝 선
그의 성기(性器)는
죽음을 향하여 전진한다
피투성이가 되도록 쏟아 붓는
적의
붉은 고지를 향하여
드디어 험악한 생애를 마감코자 한다
마지막 한 순간 떠오르는 비명(悲鳴)이
입안 가득
메울 무렵,
그는 운다, 또 웃는다, 아니면 완전
실성이다.
이제 그에겐
죽음만이 가장
가까운 거리
- <현대시학> 2016년 3월호 –
어느 날의 샹송 / 이수익
작은 드럼 위로
두 손은 가볍게 춤 춘다.
서른한 살 여가수女歌手 비아는
비련을 노래하고.
가을은 간다, 푸른 입술의 애무도 끝나고
건조한 죽음의
눈동자, 깊이 고정되어 있는
저 11월 유리창가에
하얗게 사라지는 손, 자꾸만 솟아오르는 눈물
슬픔으로 부푸는 너의 두 가슴.
차라리 눈부신 슬픔 / 이수익
신은
이 아름다운 며칠을
우리에게 주셨다
생애의 절정을
온몸으로 태우며
떨기떨기 피어오른
하얀 목련
꽃잎들, 차라리 눈부신 슬픔으로 밀려드는
봄날!
나머지 길고 지루한
날들 열려 있어
이 황홀한 재앙의
시간도
차츰 잊으리
어느 밤의 누이 / 이수익
한 고단한 삶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혼곤한 잠의 여울을 건너고 있다
밤도 무척 깊은 귀갓길
전철은 어둠 속을 흔들리고…
건조한 머리칼, 해쓱하게 야윈
핏기없는 얼굴이
어쩌면 중년의 내 이종사촌 누이만 같은데
여인은 오늘 밤 우리의 동행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어깨에 슬픈 제 체중을 맡긴 채
송두리째 넋을 잃고 잠들어 있다
어쩌면 이런 시간쯤의 동행이란
천 년만큼 아득한 별빛 인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나는 잠시 내 어깨를 빌려주며
이 낯선 여인의 오빠가 되어 있기로 한다
전철은 몇 번이고 다음 역을 예고하며
심야의 지하 공간을 달리는데...
아직 우리는 말하지 않았다 / 이수익
나는 강물에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강물도 내게 한 마디 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본 것은
순간의 시간, 시간이 뿌리고 가는 떨리는 흔적,
흔적이 소멸하는 풍경……일 뿐이었다.
마침내 내가 죽고, 강물이 저 바닥까지 마르고,
그리고 또 한참 세월이 흐르고 흐른 다음에야
혹시, 우리가 서로에게 하려고 했던 말이 어렴풋이
하나, 둘 떠오를지 모른다. 그때까지는
우리는 서로 잘 모르면서, 그러면서도 서로
잘 아는 척, 헛된 눈빛과 수인사를 주고받으며
그림자처럼 쉽게 스쳐 지나갈 것이다. 우리는
아직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길일(吉日) / 이수익
보도블럭 위에
지렁이 한 마리 꼼짝없이
죽어 있다.
그곳이 닿아야 할 제 생의 마지막 지점이라는 듯.
물기 빠진, 수축된 환절(環節)이 햇빛 속에 드러나
누워 있음이 문득 지워진 어제처럼
편안하다.
부드럽고 향기로운 흙의 집 떨치고 나와
온 몸을 밀어 여기까지 온 장엄한 고행이
이 길에서 비로소 해탈을 이루었는가,
금빛 왕궁을 버리고 출가했던 그
고타마 싯다르타같이.
몸 주위로 밀려드는 개미떼 조문 행렬 까마득히
하루가 간다
빈집 / 이수익
뒷마당의 몇 그루 대추나무엔
빠알간 대추열매 가지 무겁게 열렸건만
따는 사람 없어 사람의 것이 아닌
하늘의 열매 같고
사립문 늘 열린 채 경계를 지운 빈집에는
이 방 저 방 기웃거려보는 아이들 앞에
머리 가득 푼 처녀귀신 나타날지 몰라
삐걱거리는 방문 소리에 쭈룩쭈룩 하얗게 소름끼치는
이 집에, 그러나 벌레들 편안한 거처 마련되고
손닿지 않는 뜨락엔 잡풀들 소리치며 돋아나
폐허의 아름다운 향연 한창 벌어지고 있으니
빈집, 그 쓸쓸함, 기막히게 좋은 맛이다.
빈집, 그 황폐함, 눈부시게 좋은 눈요기다.
빈집, 그 적막함, 가슴 저리게 좋은 위안이다.
지금, 빈집 한 채 화사하게 버려져 있다.
늙은 여자 / 이수익
건질 것 없는 땅에서 광부들 모두 떠나고
그 입구로 가는 탄차(炭車) 선로는 붉게 녹슬었다.
아무도 기웃거리지 않는 폐허의 터널,
거친 잡풀만이 한창 웃자란.
풍경을 읽다 / / 이수익
골목시장 노점상 할머니 앞
우묵한 다라이 안은
꾸불텅꾸불텅 미꾸라지들 온몸으로 쓰는 육필(肉筆)이
선연하다.
물 맑은 어느 수로(水路)에서 미끄러지듯 길을 만들며
물 향기를 들이키던 족속이
지금은 그늘진 고무 다라이 안 얕은 수심에 갇혀
아수라로 한판 뒤엉켜
서로 먼저 대가리를 밀어넣으려고 죽기 아니면 살기!
한사코 안으로 안으로 파고든다, 부글거리는 거품을 말아올리며.
이미 할머니는 남아 있는 미꾸라지를 떨이로 팔아
오늘 하루치 장사를 막 접으려는 참인데
죽음의 예약이 임박한 줄을 모르는 저 경골어류(硬骨魚類)들은
해 그림자 떨어지는 시간의 경계 밖으로
펄떡펄떡 달아나려 한다.
할머니,
당신도 누군가의 손에서 지금
일몰의 떨이로 나와 있지 않은가요?
또 다른 생각 … / 이수익
뭉개지는것도 방법이다
세상을 사는 데에는
내가 각(角)을 지움으로써 너를 편안하게
해줄수도 있다.
선창에서 기름때 젖은 배들끼리 서로 부딪치듯이
부딪쳐서 조금 상하고 더러 얼룩도 생기듯이
그렇게, 내 침이 묻은 술잔을 네가 받아 마시듯이
네 숟가락 휘젓던 된장국물을 내가 마시듯이
그렇게, 서로 친밀해지는 것이다.
자,자, 잔소리 그만하고 어서 술이나 마셔!
취한 기분에 붙들려 버럭 소리도 내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서는 안되는 시간도 참으로 필요하고
그래서는 안 되는 관계도 소중하다.
시퍼렇게 가슴에 날을 세우고
찌를듯이 정신에 각을 일으켜
스스로 타인 절대출입금지구역을 만들어내는 일,
그리하여 이 세상을 배신하고 모반하는 일은
네게는 매우 소중한 덕목이다.
안락한 일상의 유혹을 침 뱉고 저주하라, 그대
불행의 작두 위를 걸어야 할 시인이여
산수화(山水畵) / 이수익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산 하나
제 갈 길에 취한 계곡물 하나가
서로 잘 만나
단란한 일가一家를 이루며 사는 곳.
남루도 이쯤이면 괜찮다,
수척한 배낭 메고 입산하는 중늙은이
하나
가물가물 흔들리며 가는 한중閑中.
어떤 기도 / 이수익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를
본 적 있네.
어느 조그만 시골 마을을
기차가 지날 부렵
얼핏 차창 밖으로 보이던
야트막한 교회당 낡은 지붕 위로
아이들 장난감처럼 생긴
나무로 만든 십자가 하나.
지상에서 가장 낮게 엎드린 채
다시는 고개 들 줄 모르고 올리고 있던
그 가난한 손의
기도를.
봄날에 / 이수익
봄에는
혼자서는 외롭다, 둘이라야한다, 혹은 둘 이상이라야 한다.
물은 물끼리 만나고
꽃은 꽃끼리 피어나고
하늘에 구름은 구름끼리 흐르는데
자꾸만 부푸는 피를 안고
혼자서 어떻게 사나,
이 찬란한 봄날
가슴이 터져서 어떻게 사나.
그대는 물 건너 아득한 섬으로만 떠 있는데
내 사랑 / -이수익
집 나간 지
몇 년째 돌아오지 않는
자식을 기다리며 밤낮 문 열어놓고 사는
그
어머니처럼
하루 스물네 시간 불 밝힌 채
당신이 어서 들어서기 만을 기다리며 조바심치는
골목 안 편의점 같은 나의
사랑.
그대는 아직도
어느 먼 별을 기웃거리시나요
안개꽃 /
이수익
불면 꺼질 듯
꺼져서는 다시 피어날 듯
안개처럼 자욱이 서려 있는 꽃.
하나로는 제 모습을 떠 올릴수 없는
무엇이라 이름을 붙일 수고 없는
그런 막연한 안타까움으로 빛깔진
초변의 꽃.
무데기로 무데기로 어우러져야만
비로소 형상이 되어 설레는 느낌이 되어
다가오는 그것은 아! 우리 처음 만나던 날
가슴에 피어오르던 바로 그 꽃!
결빙의 아버지 / 이수익 (1942∼
)
어머님,
제 예닐곱 살 적 겨울은
목조 적산가옥 이층 다다미방의
벌거숭이 유리창 깨질 듯 울어대던 외풍
탓으로
한없이 추웠지요, 밤마다 나는 벌벌 떨면서
아버지 가랑이 사이로 발을 밀어 넣고
그 가슴팍에 벌레처럼 파고들어 얼굴을 묻은 채
겨우 잠이 들곤 했지요.
요즈음도 추운 밤이면
곁에서 잠든 아이들 이불깃을 덮어 주며
늘 그런 추억으로 마음이 아프고,
나를 품어 주던 그 가슴이 이제는 한 줌 뼛가루로 삭아
붉은 흙에 자취 없이 뒤섞여 있음을 생각하면
옛날처럼 나는 다시 아버지 곁에 눕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머님,
오늘은 영하의 한강교를 지나면서 문득
나를 품에 안고 추위를 막아 주던
예닐곱 살 적 그 겨울밤의 아버지가
이승의 물로 화신(化身)해 있음을 보았습니다.
품안에 부드럽고 여린 물살을 무사히 흘러
바다로 가라고
꽝 꽝 얼어붙은 잔등으로 혹한을 막으며
하얗게 얼음으로 엎드려 있던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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