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균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진 사람이 아니었다
시대가 한 겹씩 들여다보고, 한 겹씩 소비하다가 끝내 부숴버린 사람이었다
어떤 배우는 얼굴로 뜬다.
어떤 배우는 운으로 뜬다.
그런데 이선균은 좀 다른 쪽이었다.
이 사람은 쉽게 대체되지 않는 분위기로 버틴 배우였다.
시끄럽지도 않았다.
억지로 튀지도 않았다.
감정을 과하게 밀어붙이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런데 카메라가 얼굴 가까이 붙는 순간, 묘하게 장면의 공기가 바뀌었다.
활활 타오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식은 블랙커피에 가까웠다.
처음엔 덤덤한데, 뒤끝이 길다.
한 번 남으면 오래 간다.
해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생충>으로 이선균을 처음 기억한다.
그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선균은 원래 그런 배우가 아니었다.
우리한테는 먼저 <하얀 거탑>이 있었고,
<커피프린스 1호점>이 있었고,
<파스타>가 있었고,
<끝까지 간다>가 있었고,
<나의 아저씨>가 있었다.
그러니까 한국 시청자들에게 이선균은
어느 날 갑자기 뜬 배우가 아니라,
우리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세상이 뒤늦게 알아본 배우에 더 가까웠다.
이선균이 정말 잘했던 건
그냥 좋은 사람을 연기하는 일이 아니었다.
다정한 남자 이미지를 입는 일만도 아니었다.
그가 진짜 잘한 건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데
속에서는 이미 금이 가기 시작한 사람,
남들 보기엔 버티고 있는데
실은 안쪽부터 닳아버린 사람,
그 미세한 균열을 연기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늘 ‘체면’을 잘 연기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건
그 체면 밑에서 조용히 무너지는 기척까지 너무 잘 보여줬다는 점이다.
<파스타>에서는
까칠하고 예민하고 고집 센 셰프였는데
희한하게 밉기만 하진 않았다.
<끝까지 간다>에서는
한 번 어긋난 뒤 끝없이 무너져가는 남자를 끝까지 끌고 갔고,
<나의 아저씨>에서는
울지도 못하고, 화도 제대로 못 내고,
그냥 조용히 닳아가는 중년의 무게를 너무 정확하게 보여줬다.
솔직히
<나의 아저씨>는 이선균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가 없다.
그 작품에서 그는
그저 불쌍한 중년 남자를 연기한 게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어려운 걸 해냈다.
한국 사회 안에서
무너질 틈도 없이 버텨야 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여줬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면서
배우를 본 게 아니라
자기 아버지를 봤고,
자기 상사를 봤고,
어쩌면 몇 년 뒤의 자기 자신을 봤다.
이선균의 저음도 그랬다.
그건 그냥 멋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 목소리 안에는
피곤함이 있었고,
자존심이 있었고,
쉽게 말 못 하는 사람 특유의 눌림이 있었다.
그러니 <기생충>의 박 사장이 세계적으로 통했을 때도
한국 관객 입장에서는
“새로운 발견”이라기보다
“드디어 저 배우가 저 자리까지 갔구나”에 가까웠다.
그는 원래
너무 선하게만 보이는 배우도 아니었고,
대놓고 악하게만 보이는 배우도 아니었다.
그 중간,
그러니까 제일 현실적이고 제일 사람 같은 지점을
기가 막히게 잡아내는 배우였다.
예의는 있는데 차갑고,
성공했는데 공허하고,
체면은 있는데 온기가 없고,
깔끔한데 어딘가 사람을 얼게 만드는 인물.
<기생충>의 박 사장이 딱 그랬다.
그래서 이선균은
한국 콘텐츠가 유난히 잘 그려내는 인간형을
가장 설득력 있게 살려내던 배우 중 한 명이었다.
완벽한 사람도 아니고,
완전히 망가진 사람도 아니고,
그 사이 어디쯤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사람 말이다.
그런 배우였기 때문에
2023년의 사건은 더 불편하게 남았다.
여기서 중요한 건
누군가를 성인처럼 미화하자는 게 아니다.
이선균도 사람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좋은 점도 있고,
불편한 점도 있고,
논란도 있고,
사람마다 해석이 갈리는 지점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복잡한 사람을
너무 빨리, 너무 납작하게
하나의 자극적인 이미지로 눌러버렸다는 데 있었다.
수사는 진행 중이었고,
공개된 사실만 놓고 봐도
함부로 단정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그 느린 확인의 시간보다 더 빨랐던 건
소문이었고,
기사였고,
구경하는 시선이었다.
한국 사회는 이런 일에 너무 익숙하다.
진실은 늦게 오는데
구경은 늘 먼저 시작된다.
사실이 다 정리되기도 전에
사람 하나를 이야기거리로 만들어버리고,
거의 다 망가진 뒤에야
그제서야 “너무했다”는 말을 꺼낸다.
이선균 사건이 유난히 아프게 남은 것도
바로 그 지점 때문이다.
한 배우의 추락만 본 게 아니라,
누군가의 추락을 소비하는
이 사회의 너무 익숙한 방식까지
다시 보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선균을 떠올릴 때 더 슬픈 게
그가 비극적인 역할을 많이 맡아서가 아니다.
정작 본인이
한국 드라마보다 더 한국 드라마 같은 서사 속으로
밀려 들어가버렸다는 점이다.
너무 익숙한 흐름이었다.
의혹이 터지고,
자극이 붙고,
사람들이 몰려들고,
당사자는 점점 납작해지고,
나중에는 작품보다 사건이 먼저 검색된다.
그런데도 끝까지 남는 건 결국 작품이다.
<하얀 거탑>의 의사,
<커피프린스 1호점>의 한성,
<파스타>의 셰프,
<끝까지 간다>의 형사,
<나의 아저씨>의 박동훈,
<기생충>의 박 사장.
이 이름들을 하나씩 떠올려보면 알게 된다.
이선균은 한 작품의 배우가 아니었다.
한 시절 반짝한 스타도 아니었다.
그는 한국 사회가 너무나 익숙하게 알고 있는
피로, 체면, 압박, 침묵, 중년, 균열
그 모든 걸 자기 얼굴과 목소리로 통과시킨 배우였다.
가끔 그런 배우들이 있다.
살아 있을 때는
그저 “좋은 배우지” 하고 지나가게 되는데,
막상 사라지고 나면
그 사람이 채우고 있던 자리가
생각보다 훨씬 컸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는 사람.
이선균이 딱 그런 배우였다.
원래 제일 눈에 띄게 빛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래 남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문득 어떤 장면이 떠오르고,
그 장면 속 표정 하나,
말투 하나,
한숨처럼 떨어지던 목소리 하나가
다시 생각난다.
그리고 그때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
아,
저 많은 장면의 온도는
결국 이 사람이 만들고 있었구나.
이선균이 더 안타깝게 남는 건
그가 완벽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완벽하지 않았는데도
너무 선명한 배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쉽게 소비됐고,
그래서 더 늦게 아까워졌다.
한국 사람들이 아직도
이선균을 완전히 못 보내는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좋아서만은 아니다.
불편해서이기도 하고,
미안해서이기도 하고,
너무 늦게 알아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진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한 겹씩 보고,
한 겹씩 말하고,
한 겹씩 소비하다가
끝내 너무 늦게 아까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이름은
한동안 작품 이야기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 오래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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