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주는 할머니 - 설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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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장위동의 한 해장국집을 촬영할 때의 일입니다. 신정 연휴였는지 설 연휴였는지 명확한 기억이 안납니다만, 연휴의 끝물에 촬영을 했습니다. 작가에게 아이템을 받았을 때 울컥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연휴에 나더러 새벽 4시에 장위동까지 가라고?" 해장국집의 특성상 촬영을 새벽 4시에 시작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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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내린 눈이 꽤 쌓여 있었고, 여기저기 켜진 가로등에도 불구하고 찾아가는 길은 으슥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해장국집 불은 등대처럼 환해서 찾기엔 어렵지 않았습니다. 단정히 쪽진 할머니가 선지며 우거지며 다듬고 끓이면서 해장국을 준비하고 계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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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이렇게 새벽부터 옵니까?" 그러자 할머니가 슬몃 웃으며 답했습니다.
"한국 사람들 바쁘게 살아요. 아저씨도 이렇게 새벽에 왔잖아." 우문현답의 시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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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손님은 5시쯤 들어왔습니다. 하품을 참으면서 손님께 인터뷰를 청했습니다. 무슨 일로... 혹시 밤 새셨나요? 그런데 그 손님은 다른 의미로 부지런했습니다.
“아니오. 잠 자다가 새벽에 눈 뜨면 이거 생각이 나는 거라, 그러면 옆에 마누라 몰래 이불 속에서 기어 나와서 옷 주섬주섬 입고 나와 이리로 오는 거예요.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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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댓바람에 무엇이 그리 좋은지 마냥 싱글벙글이었습니다. 그래 뭐가 그리 좋으냐고 물었죠. “이 집 방송 촬영하는 거 아뇨? 우리 할머니 손님 많이 오면 돈 많이 벌 거 아냐? 껄껄껄. ”
“우리 할머니? 혹시 가족이세요? (혹시 가족 내지 관계자인가?)”
“푸하. 아니에요 내가 할머니 닮았수? 그건 기분 나쁜데. 근데 그렇게 말하면 이 동네 사람들은 다 할머니 가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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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을 가족같이 대하는 걸 신조로 삼는다고 주장하는 식당들은 시골 밤하늘의 별처럼 많습니다만, 손님들 스스로가 ‘한가족’임을 증명하는 식당은 기실 서울 밤하늘의 별처럼 드뭅니다. 이 집은 그 몇 안되는 별 중 하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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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는데 카메라 들이대면 좋아할 사람은 열에 두셋 정도고... 나머지는 좋게 사양하거나 아니면 눈을 부라리기 일쑤입니다. 볼쾌한 얼굴 드러내며 손사래치는 거절에 익숙해져 있기도 했죠. 그런데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식당 문을 밀치고 들어온 많은 손님들 중 단 한 명도 제 카메라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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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제 집에 온 카메라를 반기듯 반색을 했고 서로 말을 해 주려고 덤볐습니다. 할머니 집이 텔레비전에 나온다니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노래를 부르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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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화목한 공간의 중심에는 40년 동안 새벽마다 가마솥 두 개 가득 해장국을 끓여내온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고희를 훨씬 넘긴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새벽 4시만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불을 지폈고, 선지와 우거지를 손질하고 겉저리를 담으셨지요. 할머니는 음식을 내 간 다음,반드시 홀로 나와 손님들을 살폈습니다. 그리고는 입버릇처럼 물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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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드려요?” “밥 안모자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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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이 할머니에게 “할머니 내가 돼지요?”라고 웃을만큼 해장국의 양은 많았습니다. 국물 위의 선지는 ‘담았다’기보다 ‘쌓았다’는 표현이 어울렸구요. 예전 이웃집에 갔을 때 밥 먹고 왔다고 해도 무조건 밥상머리에 앉히고 밥 공기를 내밀던 친구 할머니처럼, 할머니는 식탁 주변을 서성거리며 모자라는 밥그릇을 챙겼습니다. 조금은 오버다 싶은 마음으로 할머니께 왜 그렇게까지 하시냐고 여쭈었습니다. 할머니 저를 힐끗 바라보시더니, 철없는 손주 나무라듯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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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한 그릇에 눈물 나는 수가 있어요. 나도 옛날엔 그랬고, 그러니까 더 드시라는 게지. " 이 말을 하며 해장국을 분주히 그릇에 담아 내가던 할머니가 무심히 벽을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은 밥 한그릇에 눈물 흘릴 사람 없을 것 같아요? 아니에요 있어요....... 없지는 않아요.” 또 하나의 우문현답의 완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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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역시 밥 한 그릇에 눈물을 흘리신 분이셨습니다. 전쟁과 피난(고향이 이북이셨지요), 그리고 일찍 돌아간 남편 대신 감당해야 했던 세상살이의 귀퉁이마다 밥 한 그릇과 바꿨던 눈물들이 맺혀 있었지요. 누군가 그런 귀띔을 해 주더군요. 저 할머니는 평생 퍼머를 해 본 적이 없다고, 뭣하러 머리에 돈 들이냐며 그냥 쪽짓고 비녀 꽂고 살았다고, 자기한테 그렇게 박하면서 남한테 후한 할머니는 없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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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할머니를 만난 건 벌써 4반세기, 25년 전의 일입니다. 그 동안 나라는 더 발전(?)했고 경제는 더 커졌으며 이제는 '선진국'이라는 단어가 그리 생소하지 않을 정도가 됐습니다만, '밥 한그릇에 눈물나는 이'는 여전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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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처럼 밥 한그릇 없어 굶는 사람은 줄어들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뭔가가 부족해서, 안타까워서, 여의치 않아서 피눈물 흘리는 사람은 항상 있을 테니까요. 그를 보며 내 일처럼 아파할 수 있는, 할머니처럼 해장국 선지라도 산처럼 쌓아서 내밀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오히려 줄었을 것 같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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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장국집 방송 1년 뒤, 다시 해장국집에 들렀을때 저는 천만뜻밖에도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평소와 같이 새벽 손님을 접대하시고 잠깐 주방 옆 골방에서 눈을 부치겠다고 들어가셨는데, 그예 잠자듯이,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셨다지요. 수십년 시장 골목에서 맛있는 해장국으로, 또 마르지 않는 마음으로 손님들을 감싸 안았던 할머니였기에, 하늘은 마지막 선물로 그렇게 편안한 이별을 내리셨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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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를 지금 떠올리건대 가마솥 앞 의자에 무표정하게 앉아 해장국을 푸던 그분의 얼굴에는, 그리고 낡은 비녀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빛이 떠올라 있었습니다. 모이고 뭉쳐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커다란 힘을 주고 온기를 불어넣는, 작지만 아름다운 사람의 별빛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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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살아온 세월 가운데 올 새해만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희망이란 것의 꼬리를 잡기 힘든 해도 드물 것 같습니다. 오늘은 설. 4반세기 전 쪽진 할머니의 마음을 떠올려 봅니다. 그분을 따라 배우자 어쩌자는 말은 어차피 공치사일 것 같고, 그저 1년에 몇 번씩만 '밥 한그릇에 눈물 나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의 품을 가져 보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쌓았던 산더미같은 선지들처럼 할 수 있는 일들 하기를 희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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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과세라 좀 그렇지만, 다시 한 번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이번 양력설은 내란이다 사고다 너무 뒤숭숭했으니, 을사년 뱀띠 해를 맞아 이제 나쁜 일은 '용두사미'로 끝나기를 바랍니다. 새해 인사 나눠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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