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의 세 英雄


우리나라 貿易黑字가 日本을 훌쩍 뛰어 넘었습니다.

우리의 記憶 속에서 日本은 감히 넘보지 못할 貿易黑字大國이었습니다.

金融危機 후의 특수한 상황 탓이겠지만, 植民地였던 우리가 이 일본이라는 黑字大國을 한 번이라도 앞서는 일은 우리 生涯에서는 보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런던에서 팔리는 電子製品의 30%가 "三星製品" 이고 지금 美國에서 가장 크게 成長하고 있는 自動車會社는 "現代自動車" 입니다. 모두 日本會社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입니다.

大英帝國의 저 콧대 높은 수도와 世界自動車産業의 메카에서 우리가 日本을 威脅하게 된 일들을 奇績이라는 말 외에 무엇으로 表現할 수 있겠습니까?

韓國이 日本보다 앞서 G20 頂上會議의 議長國이 된 정도의 寄績은 이제 寄蹟 축에 끼기도 어려울 정도입니다.

個人的으로 너무 궁금한 것은 우리의 무엇이 이런 寄蹟을 일으켰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임진왜란 이후 300년간 頹落을 거듭했었습니다. 300년간 "支離滅裂" 하다 亡했다면 집안이든, 社會든, 나라든... 回生의 불씨가 完全히 꺼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만 쓰레기 통에서 장미꽃이 피듯 오뚜기처럼 일어섰습니다. 우리의 어딘가에 所重한 불씨가 꺼지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땅에서 1910년 2윌 12일, 李秉喆 회장이 태어난 것입니다. 이 아이가 世界的인 "電子王國"을 만들어 "國富"를 創出하게 될 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나라가 亡한 때, 나라를 먹여살릴 人物이 태어났다는 것은 우리 民族의 미래에 대한 "豫言"과 같았습니다.

그로부터 5年뒤 1915년 11월 25일에 "鄭周永"이 태어났습니다. 머슴같은 아이가 장차 "造船大國, 자동차 대국의 꿈"을 이루고 우리 後孫들이 영원히 얘기할 成功神話를 만들어낼 줄을 미리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長成하기까지 이름도 얼굴도 몰랐지만 꿈과 意志만은 똑 같았습니다. 筆者는 이 두 사람의 業績은 "廣開土大王"에 匹敵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 歷史에서 위대한 將軍들은 거의 外敵의 侵入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사람들입니다. 나라 밖을 功擊해 영토를 넓힌 사람은 "광개토대왕"외에 몇 분만 있을 뿐입니다.

지금의 경제世界에서 領土는 市場입니다. 李秉喆과 鄭周永은 地球 땅 끝까지 찾아가 정복했습니다. 피를 흘리며 교두보를 確保하고 敵을 공격하면서 전진해 우리의 領土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얻은 영토가 5大洋 6大주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대영제국이 해가 지지 않았던 것과 같이 현재 대한민국 領土에는 해가 지지 않습니다.

얼마전 大企業 회장을 만나 대화할 때, 그는 자신을 李秉喆, 鄭周永의 발톱 사이 때만도 못한 水準이라고 말했습니다.

廣開土大王과 같은"英雄"은 수백년에 한 명 태어나는 위대한 인물입니다. 鄭周永과 李秉喆은 5년 차이로 태어났습니다. 鄭周永이 태어난 지 2년만인 1917년 11월 14일에 朴正熙가 태어났습니다.

작고 못생겼던 이 아이가 敗北의식에 찌든 나라를 "富國强兵"의 길로 몰아갈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朴正熙의 輸出主導成長 戰略, 중화학공업육성 戰略, 外資도입 戰略은 모두 보란듯이 成功했고, 우리 歷史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습니다. 朴正熙가 과감한 국가정책을 펼칠 시기에 李秉喆, 鄭周永이 있었기에 朴正熙가 偉大할 수 있었습니다.

몇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英雄들이 한꺼번에 태어나, 동시대를 살면서 絶望的인 "無에서 찬란한 有"를 創造했습니다. 韓半島 天地開闢의 瞬間을 살면서 우리 民族의 세 영웅을 한꺼번에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感謝할 따름입니다.

植民地時節 朴正熙가 日本軍에 들어갔다고 非難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朴正熙가 쌓은 토대 위에 우리나라는 지금 곳곳에서 日本을 제치고 있습니다. 이 보다 통쾌하고 이 이상의 "克日"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

이제 이 세 분의 巨人과 함께 했던 衛大한 歷史에 本格的인 評價가 내려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鄭周永, 李秉喆 두 분도 당당하게 國立墓地에 묻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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